귀인 오류에 빠지는 시간
세평은 종종 진실의 기록이라기보다, 말하는 이의 소속감과 감정을 증명하는 장치가 된다. 경력직, 특히 C레벨급 인사에서 헤드헌터가 잡 오퍼에 앞서 수행하는 레퍼런스 체크—이른바 '세평 수집'—은 단순한 정보 취합을 넘어선다. 자리가 클수록,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 평판의 그물은 더 촘촘하고 깊어진다. 전 직장의 동료와 상관뿐 아니라, 협력업체나 경쟁사의 인상까지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나 역시 이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누군가의 레퍼런스를 요청받기도 했다.
하지만 동료나 부하 직원을 평가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의 층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의 앞길을 내가 가로막는 건 아닐까, 내가 한 말 한 줄이 누군가의 이직과 생계를 좌우하지는 않을까. 결국 대부분은 긍정적인 언사를 건넨다. 그것은 진실의 평가라기보다, 함께한 시간에 대한 예의이고, 소속에 대한 정서적 연대다. 요즘 세대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자라온 세계에서 평판은 능력과 성과의 반영이기보다 ‘어디에 서 있었는가’의 표현이었다. 인연이 스치기만 해도, 그것은 이미 판단의 기준이 된다.
최근 고위 공무원과 특임직 인사를 둘러싼 세평이 넘쳐난다. 시끄러운 공론장이 민주주의의 생리라면, 우리는 어쩌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비토와 반대는 피상적이며 감정적이다. 해당 업무의 전문성과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질을 말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광장에서 한두 번 마주친 인연, 페이스북에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명제가 도장처럼 찍혀나간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는 또 다른 ‘라떼 회고’다. 거기에 “혹시 난가?”라는 유행병 같은 자기 동일화가 덧씌워지면, 자격 없는 세평이 쏟아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귀인 오류를 떠올린다.
인간은 누구나 설명하고 싶어 한다.
보이는 것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덧붙이며, 자신이 이해했다는 착각 속에 안도한다. 그러나 판단은 대개 관계의 외곽에서 이뤄지고, 그 판단은 ‘성격’이라는 고정된 프레임 안에 대상자를 가둔다. 타인의 행동을 보고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간편한가. 그 사람이 놓인 시간, 감정, 맥락은 대부분 지워진다. 이것이 귀인 오류다.
사회심리학은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자주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는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성격에 원인을 돌리는 경향이다. 남의 실수엔 “역시 성격 문제지”라 말하면서, 자신의 실수엔 “오늘따라 운이 나빴어”라며 상황 탓을 한다.
이 오류는 두 층위에서 작동한다. 하나는 ‘기본적 귀인 오류’, 타인의 행동을 상황 맥락 없이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것. 다른 하나는 ‘행위자-관찰자 편향’, 자기 행동은 맥락 속에서 해석하면서 타인의 행동은 성향으로 환원하는 태도다. 이 오류는 ‘평가’라는 이름 아래 은밀히 작동하며, 한 사람의 삶을 ‘성격’이라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시키려 한다.
하지만 정말 사람이란 그렇게 단선적인 존재일까. 일터에서의 한 실수, 관계 속의 어긋난 말, 눌리지 않은 메신저의 회신 하나조차 시간적, 구조적, 정서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그 말은 상대의 행동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반복해서 입증하는 방식이다. 진실보다 일관성이 편한 사람들, 그래서 세계를 오독하는 쪽으로 미끄러진다.
귀인 오류는 결국, ‘내가 정한 세계’에 어긋난 타인을 끌어당겨 그 안에 가두려는 인지의 폭력이다. 말과 행동, 침묵과 선택, 머뭇거림과 저항은 모두 특정한 맥락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성격’으로 정리해버린다. 그 단순화된 정의 속에서 인간은 서사의 복잡성을 잃는다. 귀인 오류는 그래서 한 존재를 축소시키는 언어의 형벌이다.
이 오류는 권력의 작동 방식과도 닿아 있다. 특히 인사 평가, 세평, 언론 보도에서 귀인 오류는 감정화된 해석을 통해 구조를 개인화한다. ‘조직의 문제’를 ‘인물의 야망’으로, ‘제도의 결함’을 ‘누군가의 무능’으로 환원하는 방식. 판단은 종종 판단자의 위치를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며, 해석은 권력이다. 귀인 오류는 심리학적 오류이자 윤리적 결핍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귀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어떤 정의보다 ‘유예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않기.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를 묻기 전에, ‘내가 왜 그렇게 보았는가’를 자문해보기. 판단보다 청취가 먼저일 수 있고, 정의보다 유보가 더 깊은 이해일 수 있다는 것. 잠시 멈추는 일,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람은 단지 ‘이러이러한 존재’가 아니라, ‘계속 그렇게 해석되는 중’인 존재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서사를 중간에 끊고, 해석된 조각만을 기억한다. 성격으로 규정하고, 상황을 지우고, 평가를 단정하는 행위는 결국 관계의 폭력이다.
귀인 오류를 안다는 건 단지 개념을 습득하는 일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려는 순간마다 나 자신의 인식 구조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느리게, 조심스럽게, 사람을 바라보는 인간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사람은 다시 사람으로 읽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서두르면, 상실은 오히려 반복된다. 잠시 멈추고 보류하는 태도, 그 견딤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결핍된 자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