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스토리의 '30초 룰
솔직한 고백으로 시작해본다. 내 구독자는 400명을 넘겼지만, 내가 구독한 작가는 70명에 미치지 못한다. 한 때 제법되었던 구독한 작가님들을 정리했다. 그중 일부는 활동을 멈춘 작가님들이었고, 몇 달 전 그분들을 정리하면서 그 외에도 호불호의 기류에 따라 조심스레 손을 뗀 경우들도 있었다. 구독자를 늘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서로를 구독하며 호혜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일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가장 바닥에 깔린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미 등단과 출판을 거쳐 이름을 갖게 된 작가들은 대체로 타인의 글을 거의 구독하지 않는다는 경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저 ‘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라’는 식의 은근한 태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때로는 그런 쿨한 무심함이 묘하게 힙하게도 다가왔다. 무명으로 글을 쓰는 이들은 그 앞에서 종종 갈피를 잃는다. 자기 위치를 정할 기준은 흐릿하고, 작지만 꾸준한 성실은 좀처럼 빛나지 않는다.
그런 맥락 속에서 또 하나의 기준은,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의 총량에 대한 자각이다. 지금 구독 중인 작가님들 중 꾸준히 글을 발행하시는 분들은 서른 명 남짓, 하루에 열 개 안팎의 새 글 알림이 뜬다. 여기에 내가 준비 중인 집필과 읽어야 할 이론서, 논문, 매주 탐독하는 영화와 경제잡지까지 더해지면, 실질적으로 ‘읽기’는 내 삶의 벅찬 중심이다. ‘읽는 만큼 쓴다’는 태도를 고수하는 내게는, 남의 글을 깊이 있게 읽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부족하다. 몇 백 명의 작가를 구독하며 빠짐없이 읽는 분들의 독서력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구독의 폭을 좁히되, 읽기의 밀도를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되도록 글을 스쳐 지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물론, 잘 읽히지 않는 글들도 있지만, 대체로 작가님들은 나보다 글의 분량이 간결하다. 길어야 2,000~3,000자. 마음만 먹으면 하루 20분이면 충분히 진심을 담아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이다. 실제로 200자 원고지 한 장을 정독하는 데 약 30초가 걸린다니, 빠르게 읽으면 두 장쯤은 거뜬하다. 평균 300자에 30초라는 간단한 산술이 성립된다. 그렇다, 30초.
브런치 스토리는 왜 30초를 머물게 하는가
최근 브런치가 조용히 도입한 한 가지 기능이 있다. 바로 공감(라이킷) 버튼을 연속해서 누를 경우 30초 지연 룰이 생긴 것이다. 알게 된 건 내 부끄러운 일탈 때문이다. 요즘 솔직히, 읽고 쓰는 일이 버겁다. 무명으로 글을 쓰며 공모와 투고를 병행하는 이 시간은 마음의 골이 깊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문예비평을 쓰는 것을 인생의 마지막 여정으로 꿈꾸고 있기에, 이 준비의 날들이 제법 쓰리고 날카롭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대각선으로 훑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던 어느 날, 갑자기 경고 팝업이 떴다.
“30초 안에 연속해서 라이킷할 수 없어요.
잠시 후에 다시 시도해 주세요.”
순간 떠오른 기억 하나. 예전에 현업에 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의 웹 사용자 행동 보고서에서 ‘인간의 집중력은 8초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접한 적 있다. 금붕어의 평균 집중 시간이 9초라는 비교도 인상적이었다. 이 수치는 곧장 언론의 흥미를 끌며, “인간은 이제 금붕어보다도 집중하지 못한다”는 헤드라인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실제로 이 비교는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짧은 시각적 주의 지속'을 강조한 은유에 가깝다. 인간의 주의력은 상황과 과업에 따라 수초에서 수십 분까지 다양하게 유지될 수 있으며, ‘집중력’은 단일 수치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 능력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시간의 은유가 우리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디지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이 실제로도 ‘8초 단위’의 산만함 속에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브런치가 설정한 이 30초 지연은 단지 시스템의 안전장치라기보다, 어쩌면 플랫폼이 우리에게 건네는 조용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정말 이 글을,
이 작가의 시간을,
이 문장의 호흡을 들여다보았나요?”
‘좋아요’를 누르기 전의 그 짧은 정적. 비로소 무의식적으로 손이 가던 속도를 멈추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정말로 읽고 있었는가?
멈춤의 문턱에서 다시 사유하기
그 짧은 30초의 정적 속에서 나는 문득 발터 벤야민을 떠올린다. 벤야민은 기술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우리의 감각이 무뎌지고, 인식의 깊이가 사라지는 과정을 예민하게 포착했던 사유자였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경험(Ereignis)은 늘 어떤 충격과 정지의 틈새에서 발생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이미지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멈춤의 순간,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표면 너머를 응시하게 된다.
브런치의 30초 지연 룰은 마치 그 멈춤의 장치를 우리 손 안의 세계 속에 몰래 삽입한 듯 보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려는 손끝에 걸리는 그 짧은 공백은, 벤야민이 말한 ‘지각의 충돌’이다. 그 충돌은 우리를 다시금 읽기의 자리, 느림의 감각, 문장의 숨결로 되돌려 놓는다. 속도는 멈춤 없이 도달하지 못하고, 감응은 정지 없이 생성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는 빌렘 플루서의 비판과도 은밀히 닿는다. 플루서는 현대인이 버튼을 누르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이해하고’ 누르지 않는다. 우리는 ‘익숙함’에 반응할 뿐이다. ‘좋아요’ 버튼조차, 어느새 의미 없이 자동화된 제스처, 일종의 의례로 소비된다. 하지만 브런치가 마련한 30초의 지연은 그러한 기계적 즉시성의 윤리를 잠시 유예시킨다. 그 잠깐의 지체는, 사용자의 손끝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 당신의 감각은 지금, 어디를 향해 깨어 있는가?
플루서가 바라던 인간의 가능성은, 기술을 거슬러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문턱에서 다시금 자율적 감각과 윤리적 응답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브런치의 30초는 바로 그런 문턱이다. 클릭의 속도에서 사유의 여백으로, 흐름의 기계성에서 감응의 관계성으로 넘어가는 작지만 근원적인 전환의 계기.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사람의 문장과 고요히 마주앉는다.
디지털 플랫폼 위 30초의 윤리
나 스스로도 여러 글에 한 분이 1분 안에 좋아요를 연속 누른 것을 목격하고 씁쓸해 하던 기억이 있다. 그 거울을 내게 비추었더니 다름없이 꼭 닮은 상이 있었다. 30초면 300자. 300자는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기 위한 최소 글자수가 아니던가. 그 최소한에도 머무르지 못했던 나의 성급한 나태는 비판받아 마땅한 모습이었다. 깊게 반성하게 되었다.
최근 출판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어느 유명 출판기획자가 '팔리는 글'을 책으로 내야 한다고 했다. 세태에 대한 한탄조였지만 여간 거슬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30초의 머뭄에 대한 생각 끝에 그 말이 감각에 중독된 지금 시대에 사유를 넣을 궁여지책의 발버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아서라도 읽게 해야 하는 세상이다.
최근 '브런치 작가 멤버십'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고수했다. 아직 그 근원의 생각은 변함없다. 그러나 이 '30초의 멈춤'을 보면서 드는 다른 한 편의 이해도 있다. 댓가를 지불하고 구독하는 글들을 훑어 보기 식으로 넘기기 힘든 일이니 말이다. 구독 가격에 대한 가치를 찾는 일은 우선 그 콘텐츠에 '머무는 일'이다.
이 30초의 잠시 멈춤은 그렇게, 일종의 디지털 인지 윤리를 묻는 장치가 된다. 공감은 기계적 클릭이 아니라, 감각적 응답이어야 한다는 조용한 요청.
그 순간, 나는 다시 읽기의 자리로 돌아간다. 누군가의 언어가 허공에 흩어지지 않도록, 그 짧은 집중이 다시 진심을 담는 시간이 되도록.
30초. 금붕어보다 길고, 사람다운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