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균열- 쉰, <데미안>을 덮어야 할 순간

읽은 척의 문장들 속에서

by 박 스테파노

책 한 권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오래된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춘다며 알 듯 모를 듯 흔들리는 바람을 붙드는 것과 같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젊고 어린 날의 나는 <데미안>을 펼치며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라는 문장을 읽었다고, 마치 날개를 펼친 새처럼 자랑했다. 그러나 그 문장의 진짜 무게는 사라진 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단순한 의미만 내 손끝에 남았다. 나는 정말 그 문장을 읽었을까, 아니면 그저 읽은 척했을까. 새벽 창가에 핀 여명에 취해, 커피 찌꺼기를 들여다보며 책장을 넘길 때, 내 작은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어떤 젊은 날, 추운 겨울 어느 날, 나지막이 흐르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낡은 머리맡 백열 등 아래서 그 페이지를 넘겼다. 손끝에 남은 종이 섬유의 거칠거칠함은 잠시 생기를 주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데미안을 읽었음’을 증명하려는 한 줄짜리 문장만이 맴돌았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감상의 느낌표만 그럴싸하게 늘어놓았고, 그 방식은 마치 낙엽 위를 마른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피상적이었다.


나는 정말 <데미안>을 읽었을까? Sora


책장을 덮을 때마다 나는 오래된 책들의 숨결을 떠올린다. 헌책방 벽에 박혀 있던 낡은 장정, 서가 위 먼지 냄새, 손끝을 스치는 삭은 종이의 떨림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진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작은 낙서들은 남몰래 나를 위로했지만, 동시에 나의 허영을 비추는 창문으로도 작용했다. 이렇듯 내가 남긴 밑줄은, 어쩌면 공허에 찍힌 흔적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집어 든 책갈피 사이사이에 걸린 낙서들은, 다만 젊은 날 내 허세와 혼잣말을 기록한 낱말들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쉰, 다시 <데미안>을 마주하다


쉰이라는 나이 앞에서 나는 비로소 손에 쥔 것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전영애 번역의 직역 구절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젊은 날 내 영혼을 붙잡았던 아득한 고통처럼 날카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 내 안에서 ‘투쟁’은 언제나 허공을 향해 날아가던 허상이었음을 고백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허리가 시리고, 발끝이 시려도 잠들 수 없던 그때들을 회상한다. 나는 아직도 가끔 꿈속에서 크로머의 가혹한 시험을 받는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어린 나의 자아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20대에는 크로머를 단순한 폭군으로 여기며 손쉽게 넘겼지만, 50대가 된 지금은 그가 내가 만들어낸 두려움과 압박의 화신이라는 사실이 아프게 와닿는다.


그때 나는 고단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여러 책장들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문장과 단어에 현혹되곤 했다. 수많은 문자들과 사유들이 내 시선을 갈라놓았고, 그 속에서 나는 진짜 나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화면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지긋지긋한 목덜미의 뻐근함, 자주 잊어버리는 작은 약봉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승모근을 보며, 나는 비로소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는다.


아직도 시험에 든다. Sora


크로머가 시클레르에게 가차 없이 다가와 상처를 남기던 그 순간, 나는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한 무수한 채찍과 모멸감을 떠올린다. <데미안>은 그 침묵을 껴안으라 속삭였지만, 나는 한동안 그 침묵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창가에 기대어 찬 바람에 곱게 깎인 마음의 빗금을 되새긴다.



가짜 성장과 진짜 침묵


오늘날 세상은 ‘성장 비법’으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하루 10분만 투자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자기계발서를 남몰래 읽으라며 내 곁을 스친다.


웹서핑을 하다 보면 “상위 1%의 아침 루틴”, “부자가 되는 비법 5가지” 같은 문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다. 바로 그 순간, 내 안에서는 니체의 경고가 울린다. “모든 비법은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수십 개의 제안과 제의들을 좌고우면하면서, 나는 정작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진 질문을 돌볼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 밤늦도록 핸드폰 화면 밝기를 높여 가며 영상을 보는 동안, 커튼 뒤로 보이는 달빛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불안한 흔들림은 나의 진짜 고민을 어두운 벽 뒤에 숨겨 버렸다.


나 자신을 바꾸라니. Sora


나는 가끔 한숨을 쉬며 스마트폰을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 곧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크로머의 흔적처럼, 내 작은 자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데미안> 속 데미안이 시클레르에게 건넨 묵직한 주문, “너 자신이 되어라”는 어떤 가르침보다도 단호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많은 자기계발서는 “너를 바꿔라”, “지금 당장 인생의 비밀을 손에 넣어라”고 외치며, 정작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시클레르가 데미안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듯, 나는 이제야 그렇게 스스로를 비추어볼 용기를 얻어야 한다는 역설을 이해한다.



고전과 자기계발의 경계


고전을 읽는다는 행위는 종종 문화자본의 허영으로 둔갑한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고전 완독을 과시하며 타인을 심판할 권력을 획득하려는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는 <파우스트>를 읽었다”는 말로 고개를 끄덕이던 스스로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말은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를 포기한 채, 단지 사회적 이미지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파우스트>는 읽는 것이 아니라 거너가는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이 쉰에.


피스토리우스가 시클레르에게 전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각’처럼, 고전은 수면 아래 감춰진 울림을 인식하는 것이지, 단순히 목록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어느 날 나는 작은 카페에 혼자 앉아, 낡은 헌책방에서 줍다시피 얻어 온 허름한 판본을 펼치고 눈을 감았다. 오래된 종잇결 사이사이에 묻어 있던 미세한 얼룩들이 나를 20대의 어느 뜨거운 저녁으로 데려갔다.


에바 부인이 나의 상처를 응시하듯. Sora


방 한구석에서 거칠게 흔들리던 전등 아래, 나는 득달같이 밑줄을 긋고 무심히 덮었던 구절들을 떠올렸다. “운명의 아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튕기듯 흔들었고, 나는 그때 내면 깊은 곳이 말라 비틀어진 것을 느꼈다.


페이지마다 삭아버린 종이 냄새가 깊은 침묵을 불러오고, 나는 거기서야 내가 읽지 않고도 슬쩍 넘어갔던 문장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에바 부인이 시클레르의 상처를 응시하듯, 나는 텍스트 속 작은 균열을 마주하고, 비로소 내면의 음영과 마주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고전은 단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히면서 자신을 부수는 과정이라는 것을.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속삭임


막스 데미안은 시클레르의 불안을 꿰뚫는 존재였다. 그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금지해야 할 바깥이 아닌, 금지된 것을 넘어설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나타난다고 전했다.


나는 한때 금기를 어기고 싶다는 욕망을 문장 속에 담고자 애썼지만, 그 역시 허울뿐인 반항이었음을 고백한다.


젊고 어린 날의 나는 금지된 것 너머의 ‘진짜 나’를 갈망했으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허망 속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데미안의 목소리는 조용히 귓속을 파고들었다. “너 자신을 용서하라”고. 그 순간 나는 시클레르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였고, 비로소 크로머가 남긴 상처 위에서 떨어진 피가 내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에바 부인의 작은 미소와 따스함은, 어둠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연민 속에서 내 오랜 외로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브락사스'의 다층적 진리는,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경계 위에 머물지 말라고 속삭였다. 나는 이 상징 속에서 쉰이라는 나이 뒤에 숨겨진 모순과 마주한다.


나이 들수록 우리는 흔히 선과 악을 단순히 구분하려 하지만, 아브락사스는 그 경계를 허문다. 진짜 성장이라면, 단순히 기계적으로 책을 읽은 척하는 순간을 넘어, 스스로에게 조용한 침묵을 허용하는 일이다.


나는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차가운 빗소리 속에서도 창문을 열고, 알 수 없는 내면의 음악에 귀 기울인다.


새는 알 밖의 세상을 위한 투쟁. 책을 덮고 사유하는 시간. Sora



자기계발과 고전 사이에서 책을 덮는 용기


시대는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를 부르짖는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내가 궁금해하지도 않은 자극적인 콘텐츠를 자동 재생하며,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이럴 때 나는 하이데거를 떠올린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본래적 존재를 찾으려면, 일상을 잠시 멈추고 ‘존재를 묻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의 소리 알림에,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정작 내 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벤야민이 경고한 ‘아우라의 소멸’도 결국 내 안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제 <데미안>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책장을 꼭 닫고 나 자신에게 묻기로 했다.


“책을 덮고,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온갖 유혹이 홍수를 이루는 이 시대에도,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모래알처럼 흔들리며 길을 찾으려 한다.


나는 가끔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려 손끝을 떨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지금, 너는 누구인가?”


읽는 사람이 아닌, 살아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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