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라인, 지연된 진심과 분기된 시간

― SNS 타임라인의 감정 정치학

by 박 스테파노

페이스북을 보다 보면, 며칠 전 친구가 쓴 글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그 시점에는 보이지 않던 글이, 지금에야 피드 위로 떠오른다. 피드 찾기로 친구의 글만 일일이 찾아보지 않는 한, 이 글들은 발화의 순간으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도달하는 셈이다. 이름뿐인 ‘타임라인’ 위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자본이 시간마저 포획해버린 세계에서, 진리는커녕 안부조차 제때 도달하려면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알고리즘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타임라인’이라는 이름은 착각의 산물이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따라 누군가의 삶과 감정, 진심과 고백이 차곡차곡 정렬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 그 위에 기록된 것은 단지 하루하루의 흔적이 아니라, 고요한 신뢰와 도달의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은 시간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어긋남이며, 감정의 지연이고, 기억의 자의적 재배열이다.


지금의 타임라인은 역설적으로 시간의 질서를 끊임없이 조작하고 탈구시키며, 감정의 도달과 회신을 유예하는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고백은 며칠 늦은 오후에 도착하고, 어떤 진심은 발화된 그 순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내 눈앞에 놓인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기억은 배열되지 않으며, 진심은 순연히 닿지 않는다.


지연된 소식은 어떤 삶을 이해하는가? Sora


우리가 마주하는 타임라인은 더 이상 시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관심의 우선순위로 재편된 큐레이션의 구조물이다. 누군가의 아침 인사는 사흘 뒤 저녁에 불쑥 도착하고, 어떤 이의 절절한 애도는 내 일상의 무관심 속을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감정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진심은 제때 닿지 못한다. ‘타임라인’이라는 이름은 이제, 차라리 아이러니다.


이제 세상의 시간은 더 이상 시계 바늘 위에 배열되지 않는다. 시간은 클릭의 가능성으로 배열되고, 도달이 아니라 체류를 기준으로 분류된다. SNS의 ‘타임라인’은 시간의 윤리적 호흡이 아니라, 광고주가 요구하는 체류 시간과 주목의 순서를 따라 재구성된다. 플랫폼은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무엇에 오래 머물렀는가’를 기준으로 세계를 다시 짠다. 진실보다 반응, 감정보다 속도, 고백보다 도달률이 우선된다. 우리가 받아보는 피드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상품화된 관심의 궤적이다.


알고리즘은 관계의 온도를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상업적 반응도에 따라 재조정하고, 인스타그램의 피드는 감정의 배열을 클릭 가능성과 체류 시간에 따라 재편성한다. 시간은 더 이상 사건들의 내적 질서가 아니라, 광고 가능한 순간들의 외부적 배열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은 나의 것도, 타인의 것도 아니다. 시간은 플랫폼의 것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도달하지 않는 감정의 편린들에 반응하는 수신자일 뿐이다. 타인의 삶은 ‘지금’ 도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알고리즘이 최적화한 순간’에야 비로소 내 앞에 도착한다.


이로써 SNS는 감정의 시차, 혹은 기억의 지연을 제도화한 하나의 체계가 된다. 지연된 진심, 비선형적 감정의 도달 구조를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지속지(遲續知, retentional knowledge)’라 명명했다. 그는 기술이 인간의 기억을 외부화하면서, 시간 감각 또한 기술의 구조에 의해 매개되고 조작된다고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기억은 더 이상 뇌 속에 보관되지 않는다. 기억은 기술 장치에 저장되며, 알고리즘에 의해 호출되고 재구성된다.


감정은 더 이상 경험의 순서를 따라 흐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그것을 적절한 타이밍에 소환한다. 그러나 이 ‘타이밍’은 인간의 내적 시간이나 관계의 흐름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직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는가’라는 관심의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 이 구조 속에서 감정은 뒤엉킨 채 재배열되고, 타인의 고통은 그 도달 자체가 유예된 채 ― 때로는 너무 늦은 순간 ―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이것은 단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지연은 감정의 정치학이다. SNS는 누가 언제 말할 수 있는지, 어떤 고백이 도달할 수 있는지를 선별하고 필터링한다. 그리고 그 필터링은 한 사람의 삶과 고통, 관계의 무게를 광고 수익이라는 기준 아래 저울질한다.


알고리즘이 우리 시간을 지배한다. Sora


어느 순간 우리는 진심을 놓친다. 놓친 줄도 모른 채, 놓친다. 감정은 반응을 기다리다 무뎌지고, 고백은 도달하기도 전에 피로해진다. 우리는 서로를 실시간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실은 알고리즘이 조정한 타이밍 속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SNS 타임라인이 ‘시간’의 이름으로 행사하는 왜곡이며, 감정의 잔혹한 연출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공시성의 폭력’이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이 동시에 발화되고,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소비되는 시대에 감정은 깊이를 잃고, 표면적 반응만이 남는다. 그러나 SNS는 단지 공시적 구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된 공시성’—플랫폼이 선택한 감정들만이 공유되는 세계—을 만들어낸다.


이곳은 민주적 발언의 장이 아니다. 주목 가능한 감정만이 살아남는, 감정의 계급 구조다. 플랫폼은 우리의 관계를 관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타이밍을 설계하고, 고백의 질서를 재편한다. 타인의 진심은 내가 준비된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배달’된다.


이런 조건에서 타임라인은 더 이상 시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반응 가능성의 지형이며, 감정적 소비의 지도다. 시간은 감정의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주목도에 따라 호출되는 불연속적 표면으로 변모했다. 이제 SNS는 ‘기억’을 저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을 편집하고 지연시키며 분절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는 단지 불편한 디자인이나 기술적 기능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 자체의 해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가?

우리의 고백은 누구의 허락 아래 도달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감정의 제시간성보다 도달률과 도파민 분비에 더 민감한 존재가 되어버렸는가?


그럼에도 누군가의 도착을 믿는다. Sora


이 지연된 시간 속에서, 공감은 기묘한 균열을 겪는다. 이제 공감은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이밍에 맞춰 반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적절하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고통이 제때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SNS는 그 도착을 유예한다. 감정은 서로를 어긋난 채 스쳐 지나가고, 생일은 이틀 늦게 축하되며, 애도의 말은 이미 다른 피드에 밀려 보이지 않는다. 실시간 연결의 허상 속에서 관계는 조용히 해체되고, 인간적인 온도는 타이밍을 상실한 채 반응 불가능한 시스템 아래 묻혀버린다.


이제 타임라인은 시간의 구조가 아니라, 관심의 전시장이 되었다. 시간은 클릭의 지도 위에서 재정렬되고, 감정은 도달보다 순위가 앞서는 피드 속에 파묻힌다. 더 이상 진심은 흐르지 않고, 감정은 응답받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진심은 광고보다 뒤에 놓이고, 고백은 상품보다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구조를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놓치는’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드물게, 지연된 진심이 도착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고백이 어긋난 채 도달했을 때, 그 늦은 진심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인간적인 용기. 그것이야말로 이 시간, 타임라인이라는 이름의 허구 속에서도 여전히 가능한 어떤 작고 고요한 저항일지 모른다. 시간이 뒤틀리고, 진실이 어긋나는 세계 속에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도달하지 않는 감정을 끝끝내 품으려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이 왜곡된 시간 구조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작고 조용한 윤리일지 모른다.


시간은 비틀리고, 감정은 미끄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도착을 믿는다.


※ 주석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지속지’ 개념은 「Technics and Time 2」(1998)과 「Acting Out」(2003) 등에서 보다 자세히 논의된다. 이 개념은 1차 기억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2차 기억 (회상) 외에 3차 기억으로서의 기술적 저장 장치 — 즉 외부기억의 장치화된 형태 — 를 다루는 맥락에서 나온다. 그가 말한 'retentional'은 감각의 지연뿐 아니라, 주체의 시간성 자체가 외부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조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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