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버티고 있는 그대에게, 슬럼프라는 말로

잠시 멈춤의 시간, 닫힘이 아닌 - 슬럼프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최근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집단 슬럼프에 빠졌다. 올 시즌 유난히 촘촘한 순위 싸움 중이라 하나, 3위에서 8위까지 한순간 내려앉으며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연패 자체도 문제지만, 최근의 패배가 하나같이 역전패라는 점에서 더 깊이 기운이 빠진다. 시즌 44패 가운데 절반인 22패가 역전으로 당한 것이었다. 역전패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며, 그저 방구석에서 응원만 하던 마음조차 지쳐갔다.


결국 아내와 ‘야구를 멀리하자’는 약속을 했다. 약속까지 할 일인가 싶다가도, 주 6일, 6개월 동안 팀당 144경기를 치르는 야구는 일상 감정에 제법 깊숙이 스며드는 스포츠 경기다. 그래서 중계를 보지 않고, 관련 뉴스를 들추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일종의 ‘멈춤’이 우리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연패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단순히 말하면 팀 전체가 승리의 여력을 잃어가는 ‘슬럼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슬럼프는 흔히 선수 개인이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 때를 말한다. 과정이 무너지고, 결과가 흐려지는 시기. 하지만 실상 우리가 슬럼프를 인식하게 되는 지점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일 때가 많다. 운동 수행의 균형이 깨지고, 버티는 마음이 늘어지고, 어이없는 실책이 연거푸 반복될 때. 그리고 그 원인이나 문제에 대한 진단이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그럴 때 우리는 그저 “슬럼프에 빠졌다”고 말한다.


슬럼프에 빠지면 좀처럼 헤아니기가 참 어렵다. Sora



슬럼프는 ‘중단된 주체’의 고요한 외침


‘슬럼프(slump)’는 17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등장한 단어로, 젖은 흙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꺼질 때의 소리 없는 추락을 묘사할 때 쓰였다. 어원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slump’라는 형태 자체가 의태어적 뿌리를 지닌다고 한다. 예컨대 slump down into a chair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다’는 표현이 그 전형이다. 즉, 슬럼프란 단순한 ‘느려짐’이나 ‘멈춤’이 아니라, 기세 좋게 달리던 것이 힘없이 무너져 바닥에 닿는 급락의 상태였다.


19세기 후반, 이 단어는 경제 분야에서 전이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산업 생산량이 갑작스레 떨어지고, 주가가 곤두박질치며, 소비 심리가 얼어붙는 상태—그 전반적 침체를 ‘슬럼프’라 불렀다. 이후 20세기 초, 특히 미국에서 이 단어는 야구 선수의 경기력 부진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통용되며, 점차 심리적 자신감 상실, 기술적 오류의 반복, 경기력 하락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슬럼프’는 예술, 학문, 창작, 인간관계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시적인 무기력과 정체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글을 쓰는 일 역시 종종 슬럼프를 마주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너무 자주 발화되다 보니, 그 의미가 지나치게 확대된 감이 있다. 본래 슬럼프는 자주 걷던 길 위에 불쑥 생긴 싱크홀에 빠지는 듯한 상태인데, 요즘은 지침, 무기력, 흥미 상실까지 모두 이 단어 아래 포섭된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때때로 ‘부지런한 나태’의 핑계가 아닐까 싶다. 무언가 열심히 쓰고는 있지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 그것이 정말 벽에 부딪힌 탓인지, 아니면 도약이 두려워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아주 부지런히 글을 쓰되, 변화를 회피하는 나태의 은밀한 위장이 바로 슬럼프의 다른 말이다.


슬럼프는 싱크홀에 빠지는 그런 추락의 순간. Sora


슬럼프는 단지 창작의 흐름이 막히거나 동기가 사라지는 심리적 상태만은 아니다.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스며든 일종의 ‘틈’이며, 자기 동일성의 균열 속에서 자기를 다시 묻는 통로다. 지속성의 흐름에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불연속의 순간,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전이 상태. 마르틴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Dasein)’라 불렀을 때, 그는 존재란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해 묻는 존재’라 보았다. 슬럼프는 바로 그 질문이 깨어나는 지점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문득 묻게 된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선다. 철학적으로 변명하자면, 슬럼프는 다시 ‘묻는 존재’로 깨어나는 잠복의 시간이다. 그것은 생산성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의 침전이며, 칼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Grenzsituation)’처럼, 인간이 진정한 실존에 도달하는 임계점이기도 하다. 끝내 우리가 기계처럼 기능만 수행하는 존재가 아님을, 단순한 구성 요소의 합이 아님을 일깨우는 실존적 증거. 침묵과 고독, 무의미와 좌절 속에서도 여전히 질문을 멈추지 않는 존재. 슬럼프는 그런 인간다움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시간, 곧 '크로노스'가 계속 흐르는 동안, 슬럼프는 그 시간을 잠시 중단시킨다. 이 고통스러운 정지는, 때로는 질적인 변화의 시간을 예비하는 ‘카이로스’가 되기도 한다. 예술가가 침묵 속에서 숙성되듯, 슬럼프는 새로운 표현이 태어나기 전의 진공 상태이며, 주체가 자기를 비워내는 과정이다. 미셸 푸코의 말대로, 이 시기 주체는 기존의 규범적 자기를 탈주체화하고, 낯선 가능성과 접속하게 된다.


노자의 ‘무위(無爲)’ 개념 또한 슬럼프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개입 없이 흐름을 따르는 것이다. 슬럼프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어쩌면 지나친 주도성의 해체, 혹은 의지의 피로를 통한 탈의지의 가능성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슬럼프는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라, 억지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은유적 해석 ― 내면의 중력에 굴복하는 순간


어원적으로 보자면 슬럼프란 단순한 감정의 흔들림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내재된 중력, 곧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래로 꺼지는 내면적 붕괴다. 슬럼프는 외부의 충격에 밀려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고유의 무게에 굴복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슬럼프는 언제나 자기 내면과의 무거운 대면을 전제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의 일관성이 무너지는 순간, 곧 자기 동일성이 흔들리는 틈이다. 슬럼프는 바로 그 틈에 가까운 상태, 다시 말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슬럼프는 나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중단시키며, 겸허함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서야 우리는 타자와 세계를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슬럼프는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왜라는 질문을 떠올리고, 무심히 지나쳐온 것들을 되돌아보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고요한 철학의 시간이며, 말 없는 자기 탐구의 틈, 존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휴지부다. 그렇기에 우리는 슬럼프를 두려워하기보다, 그것을 정직하게 통과하며 ‘다음 나’의 조용한 윤곽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슬럼프들을 떠올려 본다. 살아온 시간 속에 ‘슬럼프’라 선언했던 시기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슬럼프라는 말로 실패를 은폐한 위장이었다. 부딪혀 쓰러진 패배는 의미를 남기지만, 정작 싸우기도 전에 도망친 순간, 회피해버린 마음에 슬럼프라는 말을 태그처럼 덧붙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은 결국 모두가 그럴듯한 내가 되기를 바랐던 부질없는 욕망의 그늘이었다.


나의 슬럼프의 시간들. Sora


그러던 중, 진짜 슬럼프를 만났다. 그것은 전조도 복선도 암시도 없이 찾아온다. 2023년 어느 겨울, 피를 토하고, 피를 싸며, 빙글빙글 도는 중환자실의 천장을 바라보던 그날. 목은 바짝 타들어가고, 말라붙은 혀 위에 젖은 거즈를 대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액으로 방광은 금세 차오르고, 혈변은 괄약근의 의지를 무력화시켜 기저귀 갈이를 간호사에게 맡겨야 했던, 침대에 묶인 듯한 날들. 차라리 의식 없는 건너편 노인이 부럽게 느껴졌던 그날 밤이, 나의 진짜 슬럼프였다.


항암제를 두 차례나 바꾸고도 혈액은 줄고, 수치는 제자리를 맴돌았으며, 팔과 손등에 찌를 자리가 없어 결국 발등에 수혈을 받던 날들. 슬럼프는 그렇게 툭, 혹은 텁—예고도 없이 무너진다. 그것은 내 남은 생을 위한 깊고 어두운 틈이었다. 슬럼프는 외부의 압력에 지는 일이 아니라, 내면의 중력에 모든 수를 잊고 무너지는 일이다. 글쓰기 또한 그러하다.


글쓰기에서 ‘슬럼프’라는 말은 자주, 그러나 종종 피상적으로 쓰인다. 흔히 글이 써지지 않는 침묵의 시간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 이면엔 더 복잡하고 내밀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침묵을 ‘슬럼프’라는 말로 간단히 포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내면의 균열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은근한 방패가 되는 경우도 많다. 질문을 멈춘 글쓰기, 두려움을 외면한 문장은 그 자체로 슬럼프의 그림자다.



슬럼프는 ‘무너짐’에서 오는 진실의 시간


우리는 슬럼프를 말할 때 흔히 글이 안 써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진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 글이 써지지 않는 이유는 외부의 반응 때문이다. 슬럼프를 독자의 무관심, 평론가의 냉소, 세상의 평가와 같은 외부 탓으로 돌릴 때, 우리는 자칫 자기 글쓰기의 주체성을 외면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 이유를 두는 순간, 그것은 슬럼프가 아니라 자기 확인 욕망의 좌절이며, 공감받지 못한 상처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읽히기 위해 글을 쓰는 존재라는 사실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슬럼프는 훨씬 더 조용하고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쓰는 이 언어는 진실한가?”, “이 문장이 나를 통과해 나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슬럼프는 글의 문제가 아니라, 곧 ‘나’의 문제다.


프란츠 카프카. 외부의 존중 없이 쓰는 일, 타인의 반응과 무관하게 자기 내면의 진동에 응답하기 위해 쓰는 글쓰기. ‘리스펙트 없이’ 쓰는 것.


프란츠 카프카는 일기 곳곳에서 글쓰기의 고통을 토로했다. 밤마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움켜쥐며 자책했고, 어떤 날은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 그럼에도 그는 썼다. 글을 쓸 수 있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 글은 누구도 읽지 않을 것이다”라는 전제를 안고서도 써나갔다. 외부의 존중 없이 쓰는 일, 타인의 반응과 무관하게 자기 내면의 진동에 응답하기 위해 쓰는 글쓰기. ‘리스펙트 없이’ 쓰는 것, 외부의 확인 없이도, 자기 내면의 진동에 응답하기 위해 쓰는 것이 바로 카프카가 슬럼프를 통과하는 방식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글쓰기를 “고통스럽고 자기분열적인 일”이라 불렀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여성 작가들이 글을 쓰지 못하게 만든 사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침묵과 불화, 형언하기 어려운 모순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녀의 슬럼프는 “무엇을 써야 하는가”보다,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내 문장은 아직 내 삶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문장과 삶 사이의 불일치를 견디며 언어를 밀어낸다. 슬럼프는 그녀에게 중단이 아니라, 형식을 정련해가는 고요한 실험실이었다.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슬럼프는 환상”이라 말한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글을 쓴다”고 한다. 그렇게 루틴을 통해 창작의 흐름을 유지하고, 그 흐름 속에서 슬럼프가 들어설 틈을 차단한다는 것. 이 방식은 얼핏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심리적 균형을 지키고 창작의 생리적 조건을 보호하려는 태도다. 무라카미에게 슬럼프는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다. 그는 의욕보다 루틴을 신뢰한다. 물론 이 방식이 모든 작가에게 통용되진 않지만, 글쓰기의 물리성과 신체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접근이다.


글을 쓴다는 것. 문장을 기다리는 것. 반대로 문장이 부를 때까지 잠시 맘추어도 괜찮아. Sora


슬럼프란 결국 자신이 믿고 쓰던 문장, 의지하던 형식, 익숙했던 사유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갱신을 요구하는 조용한 신호다. 이때 중요한 질문은 ‘왜 안 써지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문장을 견딜 수 있는가, 이 침묵 속에서 무엇을 기다릴 수 있는가다. 슬럼프를 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한 사람들만이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주체의 전환이며, 언어의 방식이 새롭게 배열되는 순간이며, 때로는 침묵 그 자체가 가장 문학적인 고백이 되는 시간이다.


슬럼프는 내가 글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글이 나를 기다리는 시간일 수 있다. 문장은 우리 안에서 먼저 살아 있어야,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느리거나 막혀 보일지라도, 사실은 가장 깊은 자리에서, 언어 이전의 언어가 잉태되고 있는 중이다. 그 고요를 견디는 일, 그것이 작가가 슬럼프를 통과하는 방식이다.


‘슬럼프’는 ‘툭’, ‘텁’ 하고 무너지는 감각에서 비롯된 단어다. 갑작스런 주저앉음, 한순간의 낙하. 그러나 그 무너짐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진짜 중요한가,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마주하게 된다. 어원적 기원을 되새겨보면, 슬럼프는 단순한 나태나 기분의 저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비우고, 다시 세우기 위해 겪는 중대한 내적 사건이다.


그리하여 슬럼프는 본디 ‘추락’의 언어였지만, 그 떨어짐은 언제나 ‘일어섬’을 전제한다. 이 어두운 시간은, 존재의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는 ‘침묵의 연금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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