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멤버십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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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나는 글 하나를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띄웠다.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던 글이었고, 고민을 멈추고 어딘가로 흘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원고의 마지막 저장을 누르던 순간, 마음 한켠에서는 분명히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플랫폼이라는 구조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고, 글이 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어떤 조건 아래서 순위를 매겨지는지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글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한 달이 지난 이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묻는다. 왜였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나는 작가로서, 글이 멀리 가기를 늘 바랐다. 누군가의 일상에, 아침의 커피 잔 옆에, 퇴근 후 스마트폰을 스치듯 넘기는 그 무심한 시간 속에, 문장 하나라도 닿기를 바랐다. 그게 자본의 틈을 비집고 만든 착각이든, 내 안의 순진한 기대든, 나는 진심이었다. 꽤 많은 신경을 쏟았다.
이 진심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플랫폼의 논리를 꿰뚫어 보면서도,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위선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다. 나도 그 불편함 속에서 스스로를 여러 번 돌아봤다. 체험 없는 비판을 피하고 싶었다는 말로 덮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체험이 필요했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었지만, 나는 그 흔들림을 감추고 싶지 않다.
글을 쓰는 이들은 때때로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첫 번째는 글을 써야 하는 고통이고, 두 번째는 그 글이 어디에도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고통이다. 이 두 번째 고통이야말로 때때로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대답 대신 문장을 다듬고, 쉼표 하나를 고치고, 문단의 숨을 조절했다. 그 모든 행위가 누군가의 눈동자에 머무는 상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이제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나는 글을 플랫폼에 ‘보냈다.’ 올린다는 말보다는, 보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것은 단순히 게시 버튼을 누른 행위가 아니라, 어떤 마음의 결이었다. 도달을 바라는 마음,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그 모든 기대를 딛고서라도 한 번 던져보겠다는 마음. 이 비판의 글은 욕망의 설계대로 많은 반응을 얻었다.
황현산 선생은 "좋은 글은 오래 읽히는 글이 아니라, 읽힌 이후에도 다시 생각나는 글"이라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문장 앞에 조용히 붙는 하나의 조건을 생각하게 된다. ‘일단은 읽혀야 한다.’ 이 말을 너무 도구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현실이다. 현실은 자주 불편하고, 때로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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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머묾의 규칙은 일종의 위로였다. '그래 글은 읽는 것이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지!'라는 동감을 플랫폼 운영자가 인정해 준 듯 했다. 이 주장에 반대 의견도 있었다. 초기 진입하는 비기너들에게 장벽이 된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아직 완전히 그 주장을 이해할 순 없다. 그저 공감수를 부풀리기 위해 가짜 계정이나 품앗이로 어뷰징 하겠다는 말이니까. 그럼에도 그들의 진심 속에는 글이 멀리 퍼져 누군가에게 닿기를 원하는 중심의 마음이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물론 이 플랫폼 구조 속에서 글은 상품이 되고, 조회수는 하나의 통화처럼 작동한다. 글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보다는 얼마나 노출되었는지가 중요해지고, 문장보다 썸네일이 더 강력해진 시대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믿고 싶다. 단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비스듬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릴케는 말했다. “당신은 반드시 쓰고 싶은가, 죽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고전적인 이 문장이 요즘처럼 플랫폼의 논리가 극대화된 시대에 유효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렇다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말이 없을 때 찾아오는 내면의 고요한 사멸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는 하루가 나를 점점 무디게 만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울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실 브런치스토리 플랫폼은 나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했다. 2015년 6월 오픈한 서비스에 내가 올린 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2015년 11월 3일의 <세상 끝에서 커피 한잔>영화리뷰였다. 글의 발행로그를 URL태그로 미루어 볼 때, 삭제나 비공개한 글들을 포함해 1300개(이글이 1301번째)가 되었다. 그중 현재 공개된 글은 860여 개. 약 10년 동안 이곳에서 글을 쓰는 근육을 열심히 키운 셈이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거듭되는 시간에도 제법 꾸준히 글을 쓰고 있었다.
동시에, 아주 많은 제한과 조건도 함께 안겨주었다. 다른 글쓰기 플랫폼에서 글값을 쳐주자 그곳으로 집중하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원고 청탁이 제안하기로 이루어졌다. 익숙한 인터페이스와 글쓰기 도구로 이제 다른 플랫폼에는 적응 어렵게 길들여졌고, 유입되는 구성원들의 나와 같지 않은 의도와 욕망을 보며 고민이 깊어지기도 했다.
이 두 얼굴을 모두 경험한 뒤에야, 나는 이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체험이었고, 나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한 명의 작가가 자기모순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
예전에 어느 평론가는 "작가는 언제나 경계에 선 존재다"라고 썼다. 그 경계는 종종 ‘욕망’과 ‘비판’, ‘진심’과 ‘효율’, ‘사유’와 ‘노출’ 사이에 놓인다. 나는 지금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한 발은 여전히 비판의 언어를 담고 있지만, 다른 한 발은 그 언어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나는 이 이중성, 이 모순을 부끄럽지 않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작가가 감당해야 할 진실한 자세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정과 생각이 분리되지 않는 문장을 쓰고 싶고, 그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방식이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나는 지금의 선택이 옳았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이 실험은 어쩌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실패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체험이었고, 또한 내 글이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로였으니까.
지금까지의 긴 말은 변명을 위한 길고 지루한 빌드업이었다. 브런치 작가멤버십 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프로필이 변화되었고 프로필 사진에 배지가 달렸다. 사실 안드로이드 6.0 버전의 깡통 핸드폰을 글쓰기 도구로 사용하는 덕에 브런치 앱은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멤버십 신청자의 프로필이 바뀌는지도 오늘 오랜만에 PC버전으로 확인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고민의 경계에 섰다. 이 브런치 작가멤버십이라는 시스템을 이용, 경험할 것인가 아닌가의 경계. 열심히 구독자를 늘리고 글이 가닿을 곳을 넓히고 이 시스템을 경험함으로써 고의적 비판을 확고히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리스펙트와 반응 없어도 끝없이 글을 써낼 것인가. 고민이다. 길 진 않을 것 같다. 브런치 작가멤버십 전용 콘텐츠를 발행하는가에 따라 그 결정은 밖으로 드러날 테니.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글을 고치고, 다시 읽고, 한 문장을 지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밤을 견디며 쓰는 이들에게 나는 작게 인사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비슷한 자리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구조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다시 글을 보낸다. 그것은 욕망일 수도 있고, 기도일 수도 있으며, 아주 단순한 작가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이 쉰이 넘어서도 여전히 흔들리는 마음의 어설픈 존재이며, 읽히는 글과 써지는 글 사이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회복하는 아주 작은 인간의 핑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오늘 밤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