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가장 조용한 형식 ― 절망사, 이름 없는 비명으로부터
사람이 죽는다. 매일, 어디에선가. 그러나 모든 죽음이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장례식장에서 애도되고, 어떤 죽음은 뉴스에 올라 사회적 환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기사 한 쪽이 겨우 포착한 어느 죽음은 그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비가시의 죽음이다. 말 그대로 존재를 ‘지우며 사라진 죽음’이다. 이 시대는 그 죽음을 ‘절망사’라고 부른다. 말은 조용하지만, 문장마다 구조적 폭력의 파편이 묻어 있다. 우리는 과연 죽음을 통해 사회를 볼 수 있을까. 아니, 죽음이야말로 사회가 감추고 싶은 가장 선명한 얼굴은 아닐까.
우리의 시선은 애초부터 하나의 장면을 붙든다. 망자의 방, 반쯤 닫힌 창,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한 채 해체되어가는 삶의 잔재들. 장면이지만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의 후미진 곳에 반복되는 일상적 사건이다. 반복된다는 말은 곧 체계의 일부라는 뜻이고, 체계란 필연을 전제한다. 이 죽음은 ‘예외’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정규성과 그 균열의 명징한 징후다.
여기서 필연은 무엇에 기반하는가. 철학적 사유는 정치의 실종, 돌봄의 결락, 연결의 파산을 꼽는다. 모든 것이 효율로 계산되고, 관계는 계량화되며, 인간 존재는 점점 사회적 장치에서 ‘쓸모’를 잃어간다. 쓸모 없음은 이 사회가 가장 견딜 수 없어 하는 속성이다. 버려진다는 것은 곧 무가치함으로 낙인찍힌다는 뜻이다. 절망사는 그러한 낙인의 마지막 종착지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긴, 고립의 시간이며, 점차 말라가는 존재의 바깥음이다. 작은 기사 하나는 그 사운드리스한 비명을 담아낸다.
고독사에서 절망사로
고독사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처음 부각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노년의 그림자로 이해했다. 가족 관계의 단절, 건강의 쇠퇴, 빈곤의 골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들의 이야기는 늘 '홀로'라는 말과 함께 묶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독사의 얼굴은 달라졌다. 그 얼굴엔 이제 40대, 30대, 심지어 20대의 청년들이 떠오른다. 혼자가 익숙한 시대, 외로움은 감정이 아니라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이제 고립을 넘어 절망이라는 구조로 진입하고 있다.
'절망사(Despair Death)'라는 개념은 미국의 사회학자 앤 케이스(Anne Case)와 앵거스 디튼(Angus Deaton)이 2015년 내놓은 연구에서 처음 명확히 정립되었다. 이들은 미국의 중년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제조업 일자리의 붕괴, 사회적 역할의 상실, 지역 공동체 해체로 인해 중산층이 추락하면서 생긴 심리적 고통과 사회적 단절이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른바 '절망사'는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해체가 만들어낸 새로운 죽음의 얼굴이었다.
한국 사회 역시 이와 닮아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1인 가구는 전체의 31.7%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사회적 고립도'는 2019년 27.7%에서 2021년 34.1%로 급증했다. 숫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숫자 속엔 침묵의 방 안에서 흘러간 생의 조각들이 있다. 쓰레기더미와 술병, 처방약 봉지로 뒤덮인 방 안에서,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던 누군가가 조용히 사라져갔다. 우리는 그것을 고독사라 부르지만, 실은 '절망이 만든 죽음'이다. 절망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구조이고, 시스템이며, 무엇보다 '감지되지 않는 외침'이다.
절망사는 단순히 외로운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기대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사회적 응답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중장년층이 갑작스런 실직이나 사업 실패로 빈곤에 내몰렸을 때, 과거의 소득 기록 때문에 복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시스템의 그물망 밖으로 떨어진다. 예산에 의해 제한된 행정은 그들을 '비수급자'로 구분하지만, 그 말은 곧 '방치'를 의미한다. 고독사가 아니라 절망사인 이유는, 이 죽음들이 예측 가능했고 예방 가능했기 때문이다. 제도는 있었지만, 닿지 않았다.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여전히 선별적이다. 지원은 조건을 요구하고, 조건은 증명을 요구하며, 증명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절망은 급속도로 번지고,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온다. 응급 상황 앞에서 요구되는 것은 ‘선 지원, 후 보정’의 원칙이다. 가령 10년 전 서울시는 스마트 CCTV를 활용한 노인가구 감지 시스템을 시범 운영하려 했다. 그러나 외국산 기술이라는 이유로 무산됐다. 그 사이, 기술은 진보했지만, 제도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예산이 없다는 말은 종종 의지 없음의 다른 말일 뿐이다.
고독사 현장에서 특수 청소업체가 발견하는 것은 시신만이 아니다. 거기엔 흔적이 있다. 끝내 말하지 못한 누군가의 마지막 몸짓. 집안 가득한 쓰레기와 음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마지막까지 '버텼다'는 것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망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그것은 수년간의 침묵, 단절, 그리고 무관심이 빚은 결과다. '쓰레기집'은 그래서 하나의 징후다. 우울과 강박, 사회적 해체가 만들어내는 고립의 구조물이다.
절망사는 돌봄의 실패이자, 연결의 실패다. 이 죽음을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디지털 기술이나 AI 시스템이 위험을 감지할 수는 있지만, 결국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돌봄은 감정이며, 관계이며, 물리적 접촉이다. 행정기관은 이 손길을 예산으로 환산하고 인력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복지 인력을 늘리고, 기초 자치센터를 복지 허브로 재편하며, 민간과 공공이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단절된 사람은 스스로를 구조할 수 없다. 구조는 외부에서 오는 손길이다.
선택없는 죽음이 있다
죽음이 선택일 수는 없다. 선택하려면 최소한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절망사에는 여지가 없다. 그것은 유예 없는 끝이며, 호출 없는 침묵이다. 우리는 종종 '익숙한 집에서의 평온한 죽음'이라는 표현으로 이 현실을 미화하지만, 실은 그 익숙한 집조차 없는 이들이 태반이다. 사회와의 유일한 접점이 공과금 고지서이거나, 월세 송금이거나, 소진되어 가는 적금 통장이었던 이들에게 '고결한 죽음'은 허상이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절망사다.
단지 통곡하거나, 연민에만 기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러티브 뒤편엔 ‘절망사’라는 이론적 맥락이 공명처럼 울린다.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이 지적한 ‘절망으로 인한 죽음(deaths of despair)’ 개념은 이런 생각에 구조를 부여한다. 오피오이드 중독, 알코올성 간질환, 자살로 이어지는 경로는 단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무너진 가족, 상실된 일자리, 단절된 지역공동체. 이런 해체의 와중에 인간은 더 이상 사회적 존재로 호명되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 그러한 ‘반(半)존재’의 상태를 살아야 했던 이름 없는 자들에 대한 헌화의 환기가 필요하다.
작은 기사가 말하는 ‘애도되지 않는 죽음’이야말로 철학적 질문의 여지를 남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애도되고, 어떤 죽음은 지워진다. 인간이 타자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비로소 윤리를 가진다.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 즉 법의 보호에서 제외된 벌거벗은 생명이야말로 이 잠깐의 사유가 다룬 존재들이다. 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떤 의미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사람들. 죽음조차 불법체류자처럼 사회적 기록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 그 비감정적 실종의 풍경을 글은 다정하지만 매몰찬 문장으로 그려낸다.
이런 감정의 기조는 일종의 애도를 향한다. 그러나 그 애도는 완결된 것이 아니다. 종결되지 않은 애도, 다시 말해, 여전히 우리가 그들 앞에 고개를 숙이지 못했다는 윤리적 자각의 말이다. 감정이 내뿜는 정조는 ‘연결될 수 있음’이라는 한 가닥 희망이 아니라, ‘왜 연결되지 못했는가’라는, 불발된 가능성의 상흔이다. 그것은 감정 너머에서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게 내버려두었는가. 그리고 다음은 누구인가.
이 사유는 죽음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한 고발이다. 연결의 윤리, 돌봄의 감각, 그리고 사회라는 말이 품어야 할 최소한의 온도에 대한 비판이다. 절망사의 시간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구조적 무관심의 시간, 공적 장치가 조용히 철수한 공간, 말해도 들리지 않는 절망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살아야 했던 자들에게 작게 말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야 조금씩. 너무 늦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윤리로서.
우리는 지금 절망의 시대에 서 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 고요한 애도가 아닌 통계수치가 되어가는 시대, 고독은 이름 없는 상태가 되고, 절망은 구조화된 현실이 된다. 이 죽음들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을 막을 수는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숫자 너머의 사람을 봐야 한다. 시스템이 아니라 생명, 절차가 아니라 응답. 절망사를 막기 위한 첫걸음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질문하고, 기다리고, 응답하는 일. 사람의 일이다.
죽음은 조용했지만, 그 침묵은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