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장마'에 대한 단상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청의 발표를 듣고,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다. 여름 장마의 첫 기척은 언제나 공기부터 달랐다. 눅눅한 습기, 느리게 스미는 바람, 축축하게 무너지는 빛의 밀도. 그러나 올해의 첫 장마는 그 모든 감각을 결여한 채 다가왔다. 아니, 다가오지 않았다. 장마라고 불렀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마른장마’라고 불렀다. 모순이 뚜렷한 이 말, ‘마른’과 ‘장마’라는 어긋나는 언어의 결합.
장마는 본래 습기로 채워진 단어였다. 하늘이 눅눅하게 내려앉고, 대지 전체가 물을 빨아들이며 불어난 초록을 흔들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장마’라고 불렀다. 한자로 ‘긴 장(長)’에 ‘비 우(雨)’, 즉 오랫동안 지속되는 비를 뜻한다. 장마란 이름은 그 자체로 젖음의 시간, 기다림의 감각, 축적된 정서의 계절을 호출한다. 그런데 ‘마른장마’라니. 젖지 않는 비, 오지 않는 계절,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 이 단어는 존재를 부정하는 형용사와 존재를 전제하는 명사의 충돌이며,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계절 감각의 균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긴 비’를 뜻하는 다른 해석도 있다. 한자 長(길 장)과 梅(매실 매), 즉 매실이 익는 계절의 장기적인 비다. 일본어 '츠유(梅雨)'에서 유래해 한자문화권 전체에 확산된 이 표현은, 한반도 고유어로는 ‘오느름’ 혹은 ‘오눅’이라 불리던 시절의 비감각을 대체하며 자리를 잡았다. 땅을 적시는 일상의 리듬이 언어로 침투해 오래된 감각을 남긴 이 단어는, 그러나 이제 제 본뜻을 부정당한 채 빈 껍질처럼 부유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는 장마, 즉 ‘마른장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마른장마, 낯 선 날들의 낯 선 방문
올여름, 서울 하늘은 맑았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발표된 날, 나는 우산을 들지 않았다. 기상청은 “장마전선이 형성되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라 했고, 실제로 며칠이 지나도록 하늘은 구름조차 제대로 퍼붓지 못했다. 방송에서는 “마른장마에 주의하라”는 말이 반복되었고, 사람들은 웃음 반 당혹 반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되새길수록 불길했다.
마른장마란 무엇인가. 장마라면 비가 와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장마란, 바람이 없는 태풍처럼, 잎이 없는 나무처럼 말장난 같기도 하고, 거짓말처럼 허망하다. 한 단어가 스스로를 부정하는 그 자리에서 나는 철학의 문턱에 도달한다. 이름과 현상, 언어와 감각이 더 이상 겹치지 않는 시절.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접착이 느슨해지는 지점이다.
언어는 언제나 현실의 틈에서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낸다. ‘마른장마’는 예측된 자연의 질서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시대에 인간이 붙잡은 가느다란 명명행위다. 계절은 오고 있으나 감각은 도착하지 않고, 시간은 흐르되 정서는 머물지 못하며, 존재는 있으되 의미는 증발해버린 채로 남는다.
기후학자들은 말한다. 이 마른장마는 우연이 아니라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이 커지며, 장마전선이 예전처럼 정체하지 않고 흐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남쪽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와 북쪽의 차가운 공기가 부딪치며 며칠에서 몇 주에 걸쳐 지속되는 비구름대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장마였다. 그러나 이제는 해수면 온도 상승과 함께 한반도 자체가 아열대화되어가며, 전선은 찢기고 고기압은 비구름을 막는다. 결과적으로 장마철임에도 비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이틀 혹은 삼일, 그것도 한꺼번에 쏟아진 뒤에는 말라버린 하늘만이 남는다. 장마는 더 이상 ‘지속적인 계절 감각’이 아니라, 파편화된 날씨의 예고편이 되어버렸다. 기다림은 사라지고, 비는 감각의 이름이 아니라 재난의 신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계절의 이상은 단지 비의 유무로 환원되지 않는다. 마른장마는 기후의 사건이자 감각의 문제이며, 철학의 문제다. 젖을 준비를 마친 몸, 비를 기다리던 감정, 천천히 무너지는 습도의 침묵 속에 놓여 있던 시간의 층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날씨가 감정을 만든다. 감각의 부재, 마른장마
장마는 원래 감정의 질서였다. 무더위 앞의 숨 고르기이자, 이별이나 애도의 전조로 기능했으며, 천천히 젖어들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감각의 윤리를 품은 계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장마는 감각 이전에 경보로 다가오고, 감정 이전에 정보로 주어지며, 젖는 시간이 사라진 자리엔 증발과 탈감각만이 남는다. 더 이상 사람들은 장마를 맞이하지 않는다. 장마는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예고되었다가 연기되고, 연기되었다가 사라지는 것, 그러면서도 어디엔가 왔다고 여겨지는, 존재하되 부재하는 정서의 메아리로 바뀌었다.
이 결핍의 리듬은 단지 자연현상의 변형으로 보아 넘기기에 무겁고 조용한 슬픔을 남긴다. 그것은 기다림이 무의미해진 사회의 은유이기도 하다. 기다림이란 본래 감각의 신뢰 위에 서 있다. 비가 오리라는 믿음, 계절은 순환한다는 전제, 감정은 흐른다는 기대. 그러나 이 일상의 윤리는 점점 붕괴되고 있다. 사물은 도착하지 않고, 감정은 고장났으며, 계절은 파편화되었다. 장마라는 말은 남았지만, 그 감각적 경험은 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이 우리 시대의 실존이 되었다. 장마는 상실되었고,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말라가는 감정을 견디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마른장마는 단지 이상 기후의 표식에 그치지 않고, 감각의 구조가 해체되고 있는 실존적 조짐이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계절은 단지 날씨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정을 퇴적시키는 단위이자, 기억을 저장하는 감각적 구조이며,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체온의 언어였다. 장마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계절이었다. 멈춤과 젖음, 기다림과 침묵, 느림과 손상됨이 허락되는 드문 시기.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시간 구조를 잃었다. 대신 쏟아지는 것은 짧고 강한 국지성 폭우, 예고 없이 무너지는 단발성 재난, 비가 아닌 물폭탄이라는 이름의 사건들이다. 장마는 느리게 왔지만 오래 머물렀던 계절이었으나, 지금은 느리게 오지도 않고,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계절이 사건화되고, 감정이 표백되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마른장마라는 단어가 품은 기억의 균열과 감각의 윤리의 붕괴를 주의 깊게 응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혹여 이 감각의 상실이 우리에게 완전한 무감각만을 남기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사르트르는 ‘부재를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증거’라고 했다. 비가 오지 않기에, 우리는 젖음을 그리워한다. 계절이 오지 않기에,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감정을 상기한다. 젖지 않는 장마 속에서, 우리는 다시 젖는 감각을 되묻는다. 이것은 부재를 통해 존재를 감각하는, 결핍의 역설적 윤리이며, 우리는 이 역설 속에서만 다시금 감정의 장소를 회복할 수 있다.
이 감각의 붕괴는 문학과 예술에도 스며든다. 장마는 한국 문학에서 우울과 회귀, 침잠과 정화의 계절로 자주 등장해왔다. 윤흥길의 단편 〈장마〉는 전쟁 중 분열된 가족의 갈등을 장맛비 속에서 그려냈고, 박완서의 에세이들은 장마철을 사색과 고독의 시간으로 표현하곤 했다. 영화 <장마>나 <봄날은 간다>에서 장마는 멈춤과 이별, 감정의 정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장치였다. 무대 위의 연극들도 때때로 장마를 배경으로 삼아 인물 간의 감정적 응축을 드러냈다.
이처럼 장마는 일정한 정서적 형식을 부여해주는 계절적 리듬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예측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기다림 없는 장마, 촉촉함 없는 침잠, 그 속에서 우리는 계절의 서사 자체를 잃어가고 있다.
예측은 있으나 예감은 없는 부재의 계절을 살아내기
마른장마는 결국 존재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기능하지 않는 계절. 그것은 이름은 있지만 실체가 없는 비, 정체성을 상실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른장마는 단순한 기후현상을 넘어 우리 시대의 감각 자체를 상징한다. ‘있는 듯하지만 없는 것’, ‘기다릴 수 없고 지속되지 않는 것’, ‘기억에 남지 않는 사건들’로 구성된 시간.
일상이 기후가 되고, 기후가 기억을 지배하는 시절, 마른장마는 우리 감정의 미세한 균열을 포착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틈에서 나는 인간 존재의 윤리적 감각에 대해 다시 묻고 싶어진다. 불확실한 계절 속에서, 여전히 기다릴 수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 정해진 리듬 없이도 애도를 지속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말이 실체를 잃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언어를 믿을 수 있는가.
‘장마’라는 단어는 여전히 사용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감각은 변했다. 언어는 기억의 저장소인 동시에 감각의 구조물이다. 우리가 장마라고 부를 수 없는 장마를 맞이하는 순간, 감각은 언어의 틀에서 미끄러지고, 우리는 기억이 비워진 계절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 속에서 내가 붙드는 것은 단 하나의 정직한 사실, 이 계절은 이전과 다르며, 이 다름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장마는 말라가고 있다. 비는 더 이상 천천히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오늘도 비가 오지 않는 장마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조용한 재난일지도 모른다.
장마는 왔다고 하지만,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젖는다. 감정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기다림은 아직 유예되고 있으며,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젖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마른장마는 결국 우리 시대의 감정이 빗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는 신호이자, 감각이 다시 말라가는 세계에서 무엇을 다시 젖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장마란 무엇이었는지, 비가 내린다는 것이 어떤 감정의 문을 열어주었는지, 기다림이 왜 정서의 윤리였는지를 묻는 오늘. 마른장마는 계절의 이름이 아니라, 시대의 증상이다.
비가 오지 않음에도 장마라 불리는 이 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기다릴 수 없게 되었고, 기다림 없는 존재는 결국 윤리를 상실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다. 장마가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기를. 비가 내리는 계절의 정직한 감각이 다시 한 번, 언어와 삶을 이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