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흔드는 저작의 경계에서
존재를 묻는 기술 ― 온톨로지와 AI의 만남
한 문장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다르게 존재시키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문장을 쓰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이 세계에 이름 붙이고, 구조를 바꾸며, 아직 오지 않은 감정에 실핏줄을 놓는다. 그래서 글쓰기는 단지 단어를 배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빚는 행위이고, 의미를 창조하는 의례이며, 때로는 세계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은밀한 노동이다. 그렇기에 글쓰는 사람은 언제나 묻는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존재는 어떻게 관계 맺는가?”
철학자들은 이 질문을 오래도록 붙잡아왔고, 이 질문을 ‘존재론(ontology)’이라 불러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물음이 지금은 인공지능의 세계에서 기술적 용어로 변형되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AI에서 말하는 ‘온톨로지’는 이제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세상을 데이터로 조작하고 분류하고 응용하는 구조적 기반이 되었다. 예를 들어, AI가 “헤르만 헤세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할 때, 그 답을 단지 위키 문서에서 긁어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라는 개념 아래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의 작품과 연결된 지식망 안에서 ‘헤세’라는 존재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작가’라는 클래스, ‘데미안’이라는 인스턴스, ‘쓴다’는 관계 속에서 ‘존재’가 재구성된다. 이처럼 AI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존재론적 문법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현은 인간의 사유와는 다른 궤적을 따른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오래 응시할 줄 알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을 말없이 품어 안는다. 반면 AI는 명확히 정의된 범주와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온톨로지는 그런 AI의 뼈대이며 동시에 한계다. 우리가 AI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미묘한 위화감―정확하지만 낯선 문장들, 유려하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서사들―은 어쩌면 이 존재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AI는 존재를 분류하려 하고, 인간은 존재를 이해하려 한다. AI는 관계를 구조화하려 하고, 인간은 관계를 경험하려 한다.
이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런 AI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음악을 만들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 기술은 말한다. “학습된 데이터로부터 생성된 결과일 뿐이니, 새로 만든 건 우리 것이다.” 법은 머뭇거린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니, 저작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들어왔는가?”
AI와 인간, ‘존재 증명’의 방식이 다르다
저작권이란, 단지 경제적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다. 저작권은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서명을 품고 있는 어떤 존재의 자기 선언이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표지다. 그런데 AI가 만들어낸 텍스트에는 그 선언의 주체가 없다. 혹은, 주체를 가장한 구조적 패턴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AI가 ‘이상’을 학습하여 쓴 시가 있다고 해보자. 형태는 이상하지만 '이상'스럽고, 단어는 생경하지만 시어 같고, 감정은 모방되었지만 새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시는 결코 폐결핵으로 밤을 앓으며 사보이를 걸었던 한 인간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문장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되, 체험되지 않은 말들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저작권을 말할 때, 단지 데이터의 소유나 창작자의 권리를 넘어, ‘존재 방식의 차이’를 윤리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AI는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지만, 작가는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써 내려간다. AI는 의미를 연산하지만, 작가는 의미의 경계를 불태운다. AI는 예측된 세계를 반복하고, 작가는 예측 불가능한 침묵을 기입한다. 그러므로 AI가 만든 글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이며, 우리는 그 다름을 섣불리 인간의 창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는 공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AI는 더 이상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함께 쓰는 존재’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작권의 존재론적 지위를 삭제할 수는 없다. 오히려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누가, 어떻게, 어떤 존재로 이 글을 썼는가. 이 질문은 법 이전에 철학의 몫이고, 정의 이전에 윤리의 자리이다.
존재는 단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 다름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AI 시대의 진정한 저작권 사유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유는 기술보다 먼저 인간을 묻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AI의 언어, 인간의 말 ― 생성형 AI와 창작의 윤리
기계가 문학을 흉내 낼 때, 우리는 문학을 다시 묻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2022년, 일본의 한 문학상이 익명의 단편소설을 수상작 후보로 올렸다. 그 정제된 문장과 실존적 주제의식, 구성미까지 나무랄 데 없는 소설이었기에 다들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지만, 끝내 밝혀진 저자는 놀랍게도 인간이 아닌 GPT-3 기반의 AI 모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당황했고, 몇몇은 분노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문학이라 부르는가?”
문학은 존재의 응시에서 비롯된 언어의 탈맥락적 실험이다. 그것은 기능이 아니라 감각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체험된 말들’이 남긴 흔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체험이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인간에게 남긴 침묵의 울림이다. 예컨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 프라하의 정치 현실을 그리지만, 결국 그 무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게’가 교차하는 철학적 텍스트로 바뀐다. 쿤데라는 그 소설 안에서 단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조형하고 있다. 반면 AI는 그 서사를 흉내낼 수는 있어도, 체험하지 않은 감각의 여백까지 구현할 수는 없다. 존재의 서명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저작권청은 2023년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놓았다. “AI가 단독으로 생성한 창작물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다.” 저작권은 ‘인간 저자(human authorship)’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제도적 경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의 선언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경험하고, 고통받고,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 그로 인해 인간만이 새로운 것을 ‘창작할 수 있다’는 존재 감각이 법의 전제 조건으로 깔려 있다.
물론 이 기준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프롬프트를 제시하고, AI가 초고를 작성하고, 다시 인간이 그것을 수정하는 협업적 창작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누가 저자인가”라는 질문은 더욱 복잡해진다. 단지 기술적 기여나 법적 책임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입의 깊이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의 구조가 아닌,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감각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
기술적 저작권을 넘어 존재의 책임으로
이런 논의에서 ‘공저(共著)’라는 개념은 AI 시대의 윤리적 가능성이자 함정이다. 공저는 대등한 창작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그러나 AI는 존재적 자기 인식이 없는 구조적 반복일 뿐, 진정한 창작의 주체는 될 수 없다. AI는 인간의 언어에서만 존재하며, 인간의 의미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저란 이름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더 적확한 표현은 ‘보조자(assistant)’ 혹은 ‘매개체(mediator)’일 것이다. 기술은 언어의 형식을 제공하지만, 존재의 무게는 인간에게서만 온다.
이 점에서 우리는 기술을 넘어, 글을 쓰는 인간의 윤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AI를 활용해 ‘더 빠르게, 더 쉽게’ 글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속도의 경제는 언제나 존재의 윤리를 침식시킨다. 글은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위한 것이다. 글은 쓰는 자의 손끝에서 세계를 다시 빚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 속도는 존재의 리듬과 호흡을 따라야 한다.
AI 시대의 저작권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누구의 말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그 책임의 가능성 안에서, 저작권은 단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다시 태어난다. 존재는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책임을 남긴다. 그렇기에 인간의 글은 흔적이고, AI의 글은 재현이다. 그 차이를 무화하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감각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보자. 한 문장을 쓰는 일. 그것은 세상의 경계를 다시 긋는 일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의미를 초대하는 일이다. 기술은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지만, 문 너머를 지나가는 존재는 인간만이 될 수 있다. AI가 아무리 유려한 문장을 쓰더라도, 그 문장 속에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뿐이다.
글쓰기의 유행과 AI 조력의 그늘
요즘, 책 읽기보다 글쓰기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읽는 시대’가 지나고 ‘쓰는 시대’가 도래했다. 특히 2030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는 이른바 ‘라이팅 힙(writing hip)’의 조짐은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여행기를 쓰고, 연애담을 풀고, 퇴사일기를 공유하며, 퇴근 후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에세이 출판 프로젝트에 몰두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그 자체로 문학에겐 반가운 바람이다. 문학은 언제나 사적인 언어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행적 글쓰기의 뒷면에는 AI라는 고요한 동반자가 앉아 있다.
요즘의 많은 글들은 인간이 시작하지만, AI가 완성한다. 사람들은 초고를 작성할 때 ‘영감’을 얻는다며 생성형 AI에 의존한다. 주제를 던지고, 구조를 받아 적고, 흐름을 보정받으며, 문장을 다듬는다. 감정을 정리하지 않아도, AI는 이미 경험해본 적 없는 이별이나 고통조차 정제된 언어로 요약해준다. 인간은 다시 그 언어를 고치거나 보강하고, 자신만의 경험이라며 서사를 구성한다. 이 협업은 효율적이고, 창작의 문턱을 낮추었으며, 문장의 미학은 기계적 정교함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결락이 있다. 이 글은 진정한 ‘말’인가? 혹은 ‘말의 기척을 흉내 낸 구조물’인가?
사진에는 워터마크가 있고, 음원에는 메타 정보가 삽입된다. 이미지 생성물에는 원 저작자의 기여를 식별하거나, 변형 여부를 추적할 수 있는 기술적 조치가 속속 마련되고 있다. 생성형 AI가 만든 시각 예술의 경우, 창작물 속 픽셀 단위로 정보 흔적을 식별하려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그러나 글은 다르다. 문장은 픽셀이 아니라 파장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수치가 아니라 의미의 간극을 타고 흐른다. 그렇기에 누가 썼는지,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는지를 판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AI가 만든 글이라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고, 인간이 쓴 것이라 해도 기계보다 덜 섬세할 수 있다.
이 모호한 경계는 법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채 문학의 심장을 두드린다. 저작권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단지 표절 여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의 ‘기원’을 물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더는 글이 ‘누구의 고통에서 시작되었는가’를 묻지 않는다. 오직 결과의 완성도만을 따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학은 위태로운 자리에 놓인다. 문학은 언제나 기원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누가, 왜, 어떤 침묵에서 그 문장을 꺼냈는지가 중요하다. 문학은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침묵의 기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기술적 대안은 가능하다. 글에도 디지털 워터마크처럼 생성 이력을 식별하는 메타 정보 삽입 시스템이 논의되고 있다. AI가 생성한 초안과 인간의 개입 지점을 명시할 수 있는 도구들, 혹은 저작물 내부에 AI 참여 여부를 ‘기재’하게 하는 윤리적 규범의 도입 같은 조치들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해결은 잠정적이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기만을 한 발 늦게 따라가기 때문이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궁극의 방어선은 외부에 있지 않다. 존재의 윤리는 기술이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다. 자신의 경험을 자신만의 언어로 쓰겠다는 태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말’을 갈망하는 인간 존재의 끈질긴 욕망. 그것이 문학의 마지막 성채다. AI 시대의 글쓰기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침묵에서 오는 말이다. 고통, 기억, 기쁨, 죄책감, 불안, 애도 같은 것들. 그것들은 단지 언어의 구조가 아니라, 존재의 시간에서 길어 올린 감각의 층위다.
우리는 저작권을 이야기할 때, 이제 기술을 넘어서 존재의 권리를 함께 논해야 한다. 존재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이 저작이 되며, 저작은 곧 책임을 내포한다면, 인간의 글은 더 이상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발화이자 서명이다. AI의 글에는 서명이 없다. 그것은 기술적으로 완성될 수는 있어도, 존재의 책임으로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쓰는 자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자는 책임진다. 이 간단한 등식이 흔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저작권은 법적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남고자 하는 자존의 문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문학은 선언해야 한다.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