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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세 개의 방, 하나의 부조리

액자 서사를 통해 보는 카뮈의 부조리 서사

by 박 스테파노
한편으로, 그것은 사실 같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었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 이정서 옮김


알베르 카뮈를 읽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독서로는 결코 끝낼 수 없다는 각오를 함께하는 일이다. 처음에는 사실 같지 않아 외면했지만, 다시 돌아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하게 되는 일들 —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에 서 있는 사건들의 고백. 그 경계에서 탄생하는 것이 카뮈가 말하는 세상의 부조리(absurde)다.


반사된 햇빛이 번쩍이며 두 눈을 눈부시게 했는지, 아니면 오래된 박동성 이명과 현기증이 판단을 흐렸는지 알 수 없지만, 뫼르소의 방아쇠와 살인을 설명하는 데 부조리라는 단어를 빼고는 불가능하다. 『이방인』은 번역과 해석의 난맥 속에서도, 오히려 그 틈을 확장시켜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로 이어지는 부조리의 사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사유의 응축은 소설 속에 끼워 넣어진 짧은 이야기에서 증폭된다. 이는 문학사에서 반복되는 장치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꾼 ‘말의 꿈’에서, 어린 주인공은 한 마리 말이 무참히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범죄와 세계의 폭력성을 예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이야기’에서, 이반은 종교 권력과 자유의 모순을 압축한 우화를 드미트리에게 들려준다. 이처럼 삽입된 이야기들은 단순한 여담이 아니라, 서사의 심장을 꿰뚫는 암호다.


『이방인』의 짧은 삽화 역시 그러하다. 본래 이야기의 직선적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면서, 그 안에 세계를 해석하는 핵심 열쇠를 숨겨둔다. 독자는 이 열쇠를 돌려보는 순간, 카뮈가 그려놓은 부조리의 구조를 한층 입체적으로 감각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반사해내는 세계의 형체를 본다. 그것은 카뮈가 독자에게 부여하는, 아름답고도 차가운 책임이다.


그 유명한 첫 문장. KBS <서가 식당> 삽화 변용. AI Sora


삽입된 이야기, 곧 액자 서사는 문학 속에서 마치 시간의 결을 바꾸는 렌즈처럼 작동한다. 주인공의 목소리나 시점에서 잠시 이탈해, 더 높은 차원에서 세계를 조망하게 하거나, 더 깊은 심연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죄와 벌』의 ‘말의 꿈’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 속 죄책감과 폭력의 기원을 무의식의 심야극장으로 비춘다.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본래 서사와 독립된 듯 보이지만, 실은 인간 자유와 권력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근본 질문을 압축한다.


이처럼 액자 속 이야기는 소설이 미처 말하지 못한 핵심 진술을 기호처럼 봉인하고, 독자는 그 봉인을 해독하는 순간 서사의 전부를 새로 읽게 된다. 『이방인』 속 짧은 삽화 역시 이 원리를 따른다. 그것은 마치 작은 물방울 속에 태양을 가두어놓은 듯, 그 소설 전체의 부조리를 반사시키는 결정체다. 독자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카뮈가 세상이라는 광야 한가운데 놓아둔 물의 온도를 느낀다.



작은 이야기, 거대한 공기


감옥 안에서는 끝내 시간관념을 잃는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삶은 길어졌지만, 그렇게 팽창해서 결국 각각으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이름을 잃는다.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말만이 내게 의미가 지켜지는 유일한 것이었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 이정서 옮김


감옥에 갇힌 뫼르소는 시간의 감각을 잃어 가며, 오로지 그것을 흘려보내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짚으로 된 매트리스와 침상 사이에서 낡은 신문 조각 하나를 발견한다. 천에 거의 붙어버린 듯한 누런 종이, 첫머리는 찢겨 나가고, 남은 부분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기묘한 사건이 실려 있다.


한 남자가 큰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25년 만에 부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 마을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래켜주기 위해 그는 아내와 아이를 다른 여관에 묵게 하고, 자신은 신원을 숨긴 채 어머니의 여관에 방을 잡으며 가진 돈을 보여준다. 한밤중,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의 돈을 훔치기 위해 망치로 때려 죽인 뒤 시체를 강물에 던진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찾아와 그의 신원을 밝히자, 어머니는 목을 매고, 여동생은 우물에 몸을 던진다.


이 짧은 삽화는 주서사와 직접적인 인과를 맺지 않지만,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를 압축한 결정체다. 뫼르소는 이 이야기를 특별한 감정 없이, 마치 신문 한 단락을 읽듯 무심히 넘긴다. 그 무심함이 남기는 이질감이 곧 작품의 공기—삶의 비합리와 우연이 불러오는 폭력성—과 겹친다.


『이방인』 속의 체코 살인사건. AI Sora


여기에는 부조리의 세 결이 응축돼 있다. 첫째, 가장 가까운 유대인 가족이, 돈이라는 우연적 욕망 앞에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타자가 된다. 사랑과 혈연은 순간적으로 무효화되고, 진실은 비극이 끝난 뒤에야 밝혀진다. 이는 의미가 단절된 부조리다. 둘째, 결정적 인식은 항상 너무 늦게 도착한다. 죽음 이후에야 도달하는 깨달음, 그것이 삶을 구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찾아오는 허무—카뮈 철학에서 가장 냉혹한 변주다. 셋째, 비극의 기폭제는 의도된 악의가 아니라, 우연한 선택이다. 신원을 숨긴 작은 장난이 치명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세계는 합리적 인과보다 무의미한 우연에 가깝다는 것이 카뮈의 통찰이다.


이 구조는 뫼르소의 사건과도 공명한다. 아랍인을 살해한 그 순간, 뫼르소에게는 ‘거대한 계획’이 없었다. 햇빛과 열기, 땀과 우연이 몰아간 상황—체코 이야기의 죽음과 닮아 있다. 두 사건 모두 사회는 도덕적·법적 의미로 재구성하려 하지만, 그 재구성은 부조리와의 거리를 결코 줄이지 못한다. 체코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소설처럼 읽히지만, 사실상 『이방인』 전체를 예고하는 부조리의 거울이다. 뫼르소가 무심히 넘기는 그 장면에서, 독자는 부조리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항상 그 세계의 공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상태임을 직감하게 된다.


고전 속에서 이런 삽화는 종종 핵심 주제를 가장 압축된 형태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죄와 벌』 속 ‘말의 꿈’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잔혹한 범죄를 예고하는 무의식의 풍경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신앙과 자유, 권력의 문제를 본서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방인』의 체코슬로바키아 살인 사건도 이와 같다. 본 서사에서 잠시 이탈한 채, 작은 이야기 속에 부조리의 전모를 봉인해 두고, 독자로 하여금 그 봉인을 해독하게 만든다.



부조리의 삼각주, 그 상호 텍스트


『이방인』 속 체코 에피소드는 표면적으로는 감옥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메우는 우연한 삽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짧은 이야기는 카뮈의 부조리 사유가 다른 저작들 ― 특히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 ― 로 뻗어나가는 상호텍스트적 결절점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까뮈는 부조리를 “인간의 의미 욕망과 세계의 무의미한 침묵이 맞부딪치는 순간”으로 정의한다. 체코 이야기의 서사는 이 정의를 잔혹할 만큼 간결하게 압축한다. 돌아온 아들은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의미와 안전의 공간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세계, 곧 가족은 그 의미 대신 망치와 강물, 폭력과 약탈로 응답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진실의 도착 시점이다. 그의 아내가 신원을 밝히는 순간은 이미 사후였고, 그 깨달음은 어떤 구원도 가져오지 못한다. 『시지프 신화』가 말하는 ‘부조리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선택’은 그에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부조리 인식 이전에 도래하는, 더 원초적인 파국을 목격한다.


『페스트』에서 부조리는 전염병의 형식으로 구현된다. 그것은 차별 없는 죽음을 예고하며, 인간의 연대 가능성을 시험한다. 타루와 리외는 부조리 속에서도 서로의 고통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체코 이야기 속 어머니와 누이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조차 타인을 알아보지 못하며, 죽음 뒤에서야 ‘자기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페스트』가 부조리 속 불완전하나마 도달 가능한 연대를 보여준다면, 체코 이야기는 연대의 완전한 부재와 그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증언한다.


이렇게 보면 체코 에피소드, 『시지프 신화』, 『페스트』는 부조리의 세 변주를 이룬다. 체코 이야기는 부조리의 가장 비극적인 형식, 즉 인식 이전의 파국을 보여주고,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 인식 이후의 수용과 반항을, 『페스트』는 부조리 속에서의 공동체적 실천과 연대를 말한다. 세 작품은 서로 다른 길로 부조리에 도달하면서, 인간이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거나 포기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 위에서 서로를 비춘다.


카뮈의 서서는 소설일까? 철학적 서사일까? AI Sora


세 꼭짓점이 공유하는 질문은 단 하나다. 인간은 부조리 앞에서 어떻게 의미를 재구성하거나, 그 의미를 과감히 포기할 것인가. 『이방인』의 체코 이야기는, 부조리를 단번에 인식하기도 전에 종결되는 삶의 예시로서, 까뮈의 사유가 품은 가장 극단의 어둠을 응결시킨다. 『시지프 신화』는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그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라고 말한다. 『페스트』는 그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미약하나마 함께 견디는 길을 모색한다.


부조리는 이렇게 세 가지 형태로 우리 앞에 선다. 파국처럼 닥치고, 철학처럼 사유되며, 윤리처럼 실천을 요구하는 것. 체코의 강물과 알제의 햇빛, 오랑의 역병은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 같은 침묵의 무게를 건네준다.



닫힌, 끝없는, 열린 - 부조리의 세 가지 문


부조리의 세 장면은 단순히 서로 다른 줄거리의 병치가 아니라, 하나의 서사적 아크 위에서 전개되는 세 개의 의식 장치다. 그것은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의미의 질서를 따라 배열된 장면들이다. 체코의 돌아온 아들, 시지프, 오랑의 사람들은 모두 부조리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지만, 그 무대의 조명과 소품, 그리고 배우의 동선은 전혀 다르다.


첫 장면은 어둠 속에서 열린다. 기차역의 스팀 냄새, 새벽 안개의 결이 여관 창문에 눌어붙어 있다. 남성은 이 세계에 귀환하지만, 그 귀환은 이미 변질된 귀향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보류하고, 가족은 그의 얼굴을 삭제한다. 부조리는 이렇게 언어 이전에, 이름의 부재로, 곧 정체성의 결핍으로 먼저 도착한다. 그들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은 이미 사후의 시간이며, 따라서 이 장면은 '인식의 가능성'이 도래하기 전에 봉인된 기호의 운명을 보여준다. 포스트구조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건은 기표가 기의에 닿기 전에 절단된 상태, 의미작용의 연쇄가 파국으로 봉쇄된 예다.


두 번째 장면은 빛과 바람, 그리고 무한 반복의 리듬 속에 있다. 시지프는 바위를 밀어 올리고, 바위는 떨어지고, 다시 올린다. 여기서 부조리는 세계의 침묵과 인간의 의미 욕망의 부딪힘이 아니라, 기표와 기표의 영원한 미끄러짐과도 같다. 그는 바위의 무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부조리는 절망이 아니라 서명 불가능한 계약처럼 남는다. 체코의 돌아 온 아들이 결코 획득하지 못한 응시의 순간, 즉 부조리를 바라보는 주체의 자리를, 시지프는 오롯이 점유한다. 그것은 초월적 해답이 아니라, 결코 종결되지 않는 차연(différance)의 윤리적 수락이다.


세 번째 장면은 질병의 도시, 쥐와 인간이 구분 없이 쓰러지는 오랑에서 펼쳐진다. 『페스트』의 인물들은 부조리를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의미 속에서 서로의 고통을 번역하고, 끝내 이름을 불러준다. 여기서 부조리는 '차이의 정치학'으로 변환된다. 무차별적 죽음이 펼쳐진 자리에, 오랑의 사람들은 관계의 망을 재구성하며, 타자를 향한 불완전한 실천을 지속한다. 체코의 어머니와 누이가 실패한 것은 바로 이 번역, 곧 타인을 '자기 사람'으로 다시 읽어내는 해석학적 행위였다.


킨뮈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 AI Sora


이 세 장면은 닫힌 문, 끝없는 문, 서로 통하는 문으로 상징될 수 있다. 첫 문은 인식 이전의 봉인, 둘째 문은 인식 이후의 무한 반복, 셋째 문은 무의미 속에서 타인을 향해 열리는 경로다. 카뮈의 부조리 세계는 이 세 개의 문을 오가며, 인간이 지금 어떤 문 앞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문학적 장면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기호와 타자, 의미와 세계를 어떻게 배치하고 다시 쓰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부조리란, 어쩌면 이 세 개의 방 사이를 헤매는 인간의 영속적인 배회 그 자체일지 모른다.



닫힌 문과 열린 선택 - 카뮈의 부조리 아크


뫼르소의 담담함은 무지일까, 포기일까. 『이방인』의 재판 장면에서 우리는 그 질문을 끌어안는다. 뫼르소는 특별한 기대 없이 법정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빛은 느릿하게 사람들의 옷자락과 얼굴을 태우고, 기온은 정지한 공기처럼 무겁게 감돌았다. 변호사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공간을 채웠다.


“그렇습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은 뫼르소의 귀에 기묘하게 울렸다. 전부 사실이라면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전부 사실이 아니라면 단지 햇빛에 의해 방아쇠를 당긴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그 자신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머니 장례에서 그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과, 해변의 한낮에 아랍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나란히 놓고 인과와 동기를 만들어냈지만, 그 안에 뫼르소의 삶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재판 속에서 한 장의 빈 사진처럼 앉아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감방 매트리스 밑에서 발견한 그 체코 살인 이야기. 가족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돈을 빼앗고 살해했으며, 시체가 된 뒤에야 그가 자기 아들이자 동생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그 우스꽝스럽고 불쾌한 이야기. 거기서도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청년은 돌아왔고, 가족은 돈을 원했고, 죽음은 일어났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들이 모여도 ‘진실’은 되지 않았다. 진실은 항상 너무 늦게, 이미 쓸모없어진 순간에 도착한다.


그의 재판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뫼르소에게 묻는 것은 그가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고 싶은 그의 모습이었다. 그의 살인은 태양 탓이거나, 어머니 장례에서의 무표정 탓이거나, 혹은 그가 근본적으로 ‘도덕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서라는 식으로 분류된다. 전부 사실 같지만, 그 사실들은 뫼르소 삶의 온도를 담고 있지 않았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변호사의 말은 부조리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사건은 기록되고,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사건은 이미 다른 것이 된다. 체코 아들의 죽음과 뫼르소의 재판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 속에서 뫼르소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이 만들어낸 그인지 끝내 확신할 수 없었다. 담담함은 무지일까, 포기일까. 그가 맞닥뜨린 것은 사건 속의 부조리가 아니라, 사건을 ‘설명하려는 말들’ 속에 숨어 있는 부조리였고, 뫼르소는 그 부조리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무게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체코 에피소드에서 부조리는 이름조차 알리기 전에 찾아오는 폭력과 우연의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다. 시지프는 이를 인식하고, 그 무의미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붙잡는다. 페스트 속 인물들은 부조리를 마주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책임과 연대를 실천한다. 마지막으로 뫼르소의 재판 장면은, 체코 이야기와 시지프의 사유를 거울처럼 비추며, 담담함과 무심함 속에 숨은 부조리의 심연을 보여준다. 사건은 기록되고 의미화되지만, 진실은 늦게 도착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 아크 속에서 독자는 세 장면을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의식적 순서로 체험한다. 체코 이야기의 사람들은 부조리와 조우하기 전의 파국을, 시지프는 부조리를 인식한 후의 철학적 선택을, 페스트 속 인간들은 부조리 속 윤리적 실천을, 뫼르소는 부조리를 담담히 경험하면서도 자신과 세계 사이의 불협화음을 확인한다. 이 흐름은 부조리의 다층적 결을 하나의 유기적 서사로 통합하며, 독자가 사건 속에 숨은 비가시적 긴장과 인간 존재의 조건을 문학적으로 사유하도록 안내한다.


부조리의 세 방.Google Gemini



부조리가 들어 있는 세 개의 방 — 카뮈 문학의 미학


뮈의 문학 세계를 열어보면, 그 안에는 세 개의 방이 존재한다. 첫째 방은 『이방인』 속 뫼르소가 전해 듣는 체코 가족의 비극이고, 둘째 방은 『시지프 신화』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한 남자의 끝없는 노동이며, 셋째 방은 『페스트』 속 죽음의 도시를 지키는 사람들의 고독한 연대다. 세 방은 서로 다른 형태와 온도를 지니지만, 바닥에는 같은 물이 스며 있다. 그것은 부조리(absurde)의 물, 냉랭하고도 끈적한 세계의 호흡이다.


체코 가족 이야기는 부조리의 원형이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전해 듣는 체코의 부조리한 가족 이야기는 한 편의 우화처럼 단순하면서도 불길하게 빛난다. 남성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지만, 이름을 숨기고 여관에 머문다. 그러나 그 여관 주인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였다.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탐욕의 손으로 살해한다. 죽음 이후에야 그가 가족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하나하나는 명확하다 — 아들은 돌아왔고, 가족은 그를 몰랐으며, 살인은 일어났고, 정체는 늦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어도,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변호사가 뫼르소 재판에서 말했듯,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부조리는 사건과 설명 사이, 그 틈에서 얼어붙은 얼굴처럼 나타난다. 체코 돌아온 아들의 죽음은 부조리와의 조우가 아니라, 부조리 속에서의 몰락이며, 그의 삶은 끝내 그 틈에 삼켜진다.


시지프의 방은 부조리의 수용이자 응시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바위를 밀어 올린다.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는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반복한다. 그 끝없는 노동 속에서 목표는 무너지고, 의미는 부서지며, 세계는 침묵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무릎 꿇지 않는다. 그는 절망을 자신의 것으로 안고, 바위의 무게를 삶의 무게로 바꾼다. 체코 아들이 죽음 앞에서 빼앗긴 응시의 순간, 시지프는 살아 있는 동안 붙잡는다. 부조리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하고 숨으로 견디는 법의 이름이다. 그 안에서 삶의 리듬이 다시 태어난다.


『페스트』의 방은 부조리 속 연대의 공간이다. 오랑시는 병으로 봉쇄되고, 사람들은 무차별적 죽음 속에 놓인다. 의도도 이유도 공정함도 없는 죽음 앞에서, 리외와 타루, 랑베르는 서로의 곁을 지킨다. 그들의 선택은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태도의 결정이며,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다. 체코 아들이 타인에 의해 파괴된 삶을 살았다면, 오랑의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부조리 속의 생을 선택한다. 그 안에서 부조리는 공동체적 숨결로 변형된다.


세 방을 가로지르는 핵심은 사건과 설명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간극이다. 사건은 단순하고, 설명은 그 단순함을 왜곡한다. 뫼르소의 재판이 이를 보여준다. 그는 아랍인을 죽였고, 장례에서 울지 않았다 — 사건은 여기 있다. 그러나 법정은 이 두 사실을 엮어 하나의 도덕적 서사를 만든다. 그 서사는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닌’ 서사다. 체코 가족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살해와 가족이라는 두 사실이 모여 비극을 만들지만, 그 핵심은 설명될 수 없는 우연의 심연에 있다.


까뮈는 부조리의 간극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Google Gemini


뮈는 이 간극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틈을 응시하게 만든다. 『시지프 신화』에서 바위의 무게는 곧 그 간극의 무게다. 『페스트』에서의 연대는 설명할 수 없는 죽음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선택이다.


체코 아들의 방에서 부조리의 차가운 원형을 본다. 시지프의 방에서 그 돌을 들어 올리며 부조리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페스트의 방에서 그 돌을 나누어 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카뮈의 문학 미학은 세 방을 통과하는 여정이다. 부조리는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서사와 인물과 사건을 관통하는 구조적 원리다. 독자는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닌’ 세계를 견디며,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패배가 아니라, 알 수 없음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가는 태도를 체험한다.


독자는 체코 가족의 방, 시지프의 방, 오랑의 방 앞에 선다. 첫 방은 닫혀 손을 뻗을 수 없고, 둘째 방은 끝없이 열려 있으나 한 사람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으며, 셋째 방은 문이 열려 있어 이름 모를 사람들이 서로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카뮈의 부조리는 이 세 개의 방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고, 우리는 어느 방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방은 한 건물 안에서, 같은 물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물의 차가움, 그 침묵의 호흡, 그것이 부조리의 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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