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실종- 감각만 남은 시대에 소설을 읽는다는 것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제목이다. 그 중의적 울림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역주행’, ‘숨은 명작’이라는 다소 익숙하고 진부한 수사와 함께, 여러 매체를 통해 부쩍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화와는 달리, 소설을 고를 때는 대개 평론이나 리뷰를 먼저 찾아보는 편인데, 이 작품은 좀 달랐다. 오히려 거꾸로, 작품에 대한 진짜 목소리를 찾기 어려웠다. 비평가들의 의견이나 문학 전문지의 비평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대신 적지 않은 수의 ‘페이크 리뷰’ ― 이를테면 ‘수학 이론 철학서’라며 내용과 무관한 정보를 덧붙인 후기들 ― 가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이 책을 펼치게 된 데에는, 전자책 구독 서비스의 접근성만큼이나,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이 품고 있는 어떤 기묘한 질문 때문이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는, 말장난 같으면서도 존재론적인 그 질문.
“바람에서 새 옷 냄새가 났다. 비가 올 것 같아.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야 비가 오면 안 되지.”
— 『구의 증명』, 최진영
소설은 '구'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것도 극단적으로 고립된 죽음이다. 그를 애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연인이자 유일한 유족인 '담'은 길바닥에 쓰러진 구의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에서 새벽을 기다린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는 묻는다.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 비가 오면 안 되지. 갈팡질팡한 이 내면의 진동은, 사실상 그의 슬픔을 완전히 담아낼 말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솟구친다. 오히려 그 불안함 자체가, 이상하리만치 단단한 믿음을 세운다. 말도 안 되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설명될 수 없기에 끝내 마음을 걸게 되는 것. 터무니없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작동하는 자리가 된다는 이 역설. 소설은 그 역설의 감각을 아주 섬세하고도 단단하게 밀어붙인다. 이 지점에서 제목이 품고 있는 뜻, 『구의 증명』이라는 표현이 빛을 발한다.
이 제목은 두 갈래의 언어를 중첩시킨다. 하나는 수학의 언어. ‘구’를 증명한다는 말은, 마치 기하학적 공리 체계 안에서 하나의 명제를 성립시키려는 무모한 시도처럼 들린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언어. 존재하지 않는 이를, 이미 떠나간 사람을 끝내 ‘증명’하려는 무언의 기도. 이 둘은 마침내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구는 담에게, 담은 구에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세계에 끝내 닿지 못하면서도, 어떤 완전성 혹은 존재의 흔적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물론 그 증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향한 몸짓이야말로 존재를 기억하는 유일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말해질 수 없기에 말하려 애쓰는 것. 닿을 수 없기에 닿으려 손을 뻗는 것. 그런 점에서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은, 존재의 부재와 그 부재를 둘러싼 기묘한 애도의 언어가 교차하는 자리다. 그것은 실패를 내포한 증명의 윤리이며, 애도의 다른 이름이다.
‘구의 증명’은 현실 가능한가?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담아 두었던 것은, 그것을 단지 특이한 제목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장이 품은 ‘수학적 언어의 은유’를 직관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이 수학적 비유는 작품의 심층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의미한 통로가 되었다. 『구의 증명』은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을 둘러싼 철학적 윤리이자, 그 언어적 역설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 문학이 작동하는 자리―즉 언어의 알레고리와 개념의 비유가 만나는 지점에서―‘구의 증명’이라는 구조는 심오한 미학적 비유로 거듭난다. 수학의 언어가 서사의 윤리로 번역되고, 논리의 형식이 사랑의 언어로 전치되는 이 메타포는, 문학만이 도달할 수 있는 사유의 미세한 진동을 동반한다.
기하학적으로 ‘구’(sphere)는 가장 완전한 대칭체다. 모든 방향으로 동일한 반지름을 가진 구는, 점과 면, 거리의 관계가 정밀하게 정의되는 이상적 형상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순수한 수학적 공간, 다시 말해 유클리드 공간이나 리만 기하학이라는 이론적 체계 안에서만 성립하는 조건부 완전성이다. 현실의 자연 세계, 물리적 공간에서는 이러한 구의 구현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완벽한 구는 오직 수학적 이상 안에만 존재한다. 모든 물리적 대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구에서 벗어나 있다.”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Geometry.
이러한 인식은 이상과 실재, 정의와 구현 사이의 간극을 전제하며, 그것은 곧 문학적 독법으로 전이된다. ‘구의 증명’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완전성을 증명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며, 그 실패를 전제로 한 애도의 서사로도 읽힌다. 실현 불가능한 것을, 증명 불가능한 것을 증명하려는 그 행위는, 존재하지 않음의 증거를 애무하는 듯한 서정으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구’라는 단어는 문학적으로 다의적이고, 층위 깊은 상징으로 작동한다. 첫째, 구는 ‘완전성의 상징’이다. 모든 방향에서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 형태인 구는, 이상적 사랑, 무결한 관계, 조화로운 자아의 은유로 기능한다. 둘째, 구는 ‘고립된 세계’다. 외부와 단절된, 자족적이고 폐쇄된 우주. 소설 속 구와 담은 그렇게 둘만의 우주 속에 갇힌 존재들이다. 이 세계는 누구에게도 열려 있지 않으며, 오직 둘의 증언으로만 구성된다. 셋째, 구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을 의미한다. 수학적으로는 정의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구는, 실현 불가능한 사랑, 혹은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의 자존을 상징하는 형상이다. 이렇듯 구는 완전성과 고립, 이상과 부재를 동시에 품은 이중적 은유다.
‘증명’이라는 단어 역시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증명은 논리의 작업이다. 수학적 명제나 철학적 명제를 타당한 추론을 통해 확정짓는 행위. 그러나 『구의 증명』에서 이 단어는 감정, 사랑, 존재, 정체성과 같은 논리 바깥의 요소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결국 증명이란, 이 소설 안에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절실한 시도이며,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감각적 고백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은 다층적인 해석 구조를 가진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구를 증명한다’는 명제로 읽히지만, 동시에 ‘구가 증명한다’는 문장으로도 읽힌다. 전자는 이상적 존재, 완전한 사랑, 소외된 자존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후자는 구라는 존재 자체가 담과의 사랑, 혹은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주체로 기능하는 해석이다. 더 나아가 ‘구(球)의 증명’은, 완전성에의 열망과 그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까지 포괄한다. 증명이라는 행위는 이 소설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의 발화이며, 기억과 사랑에 관한 윤리적 진술이다.
이러한 해석은 소설의 서사 구조에서도 도드라진다. 『구의 증명』은 담과 구의 시점을 교차시켜, 서로의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이야기하게 만든다. 단선적인 이항 대립을 구성하는 대신, 두 인물의 시점을 얽어내며 또 다른 시공간―서로를 관통하지만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애틋하게 중첩되는―을 구축한다. 구는 죽었고, 담은 살아 있지만, 그들의 대화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여전히 지속된다.
현실에서 ‘구’는 물리적으로 완벽히 구현될 수 없는 형상이다. 그러나 모든 차원에서 그 존재가 예감되는 형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는, 끝내 애도되지 못한 존재들의 기억 속에서 울리는 잔향처럼, 오직 ‘대화’로만 남는다.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서 흔들리고 흩어지는 존재들―그 경계의 울퉁불퉁한 감각.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끝내 품어 안으려는 목소리다. 실패한 증명, 그러나 그 실패가 증언이 되는, 잊히지 않는 대화.
불가능한 증명의 윤리, 그리고 ‘먹음’이라는 애도의 형식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 『구의 증명』, 최진영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상, 안다고 주장하고 싶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말해지는 진실보다, 시간이 스스로 밝혀주는 내면의 깨달음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것들이, 때가 되면 불현듯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종종 죄책감이나 유예된 아픔으로 되돌아온다. 소설 속 담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는 담에게 이러한 ‘알 수 없음’의 시간을 선물하려 애쓴다. 그녀의 언어는 종종 선문답처럼 모호하고 시적인 비유로 엮여 있다. 일터에서 소리를 만들면 스피커, 향기를 만들면 방향제, 예쁨은 거울, 어둠은 전구. 담은 이모의 비유 속에서, 설명이 아니라 체험으로 진실에 닿는 방식―말보다는 기다림과 감각의 방식―을 배운다. 적어도 담에게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곧 비유를 체현하는 일이었다.
반면 구는 그런 언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에게 삶은 항상 갑작스럽고 날것이었다. 무너지는 사고의 근육, 부모가 남긴 거대한 돈무덤,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의 공허한 물음. 그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나이 많은 공장 누나였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질문들은 구에게 상처처럼 다가왔다. 희망을 묻는 말들은 고문이 되었고, 계획을 세우라는 충고는 차라리 침묵이 더 나은 폭력이었다. 그래서 구는 삶의 유일한 출구를 죽음에서 찾는다. 말보다 앞서 닫혀버린 입과 마음. 결국 사랑은 있었지만 희망은 없었던 그의 마음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유약한 형태로, 끝내 부서지고 만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 『구의 증명』, 최진영
그러나 이 소설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은, 사랑과 절망이라는 뻔한 주제를 그 어떤 감상도 없이 기괴하고 처절한 방식으로 서술해 낸다는 점에 있다. 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일한 방식은 담의 ‘먹음’이다. 그녀는 죽은 구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손톱과 발톱부터 잘라내어, 조금씩, 천천히, 구의 몸을 먹는다. 마치 스코틀랜드의 식인 가족 ‘소니 빈’ 이야기를 실현이라도 하듯, 담은 구의 시신을 섭취함으로써 그 존재를 지키려 한다. 그것은 단지 미망의 광기가 아니라, 구의 육체를 통과해 그와의 관계를 자신의 몸 안에 새기고자 하는 깊은 욕망이다. 기억을 붙드는 행위이자,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살아 있는 언어로 되살리는 행위. 그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장 윤리적인 증명의 방식이다.
이때 이 소설은 단지 파격을 위한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담이 구를 먹는 행위는 문학적 차원에서 캐니벌리즘의 상징적 전통―이를테면 애도와 기억, 존재의 연속성을 위한 의례로서의 식인―을 비튼다. 기독교 전례의 성체성사처럼, 사랑하는 이를 먹음으로써 그를 내면화하고, 관계를 자기 안에 새겨 넣는 것. 이것은 존재를 증명하려는 마지막 시도이며, 잊힘과 소멸에 맞서는 감각적 윤리다.
여기서 아감벤의 ‘잠재성(potenza)’ 개념은 이 행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아감벤은 잠재성을 “실현되지 않음을 내포하면서도 여전히 실현 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라 보았다. 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담의 몸 안에 내면화된 구의 조각들은 ‘지금 여기서 실현되지 않은 존재’로, 그러나 언제나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상태로 지속된다. 이 먹음은 구를 박제하거나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가 ‘증명될 수 있음’을 잠재성의 형태로 간직하는 몸의 언어다. 그러므로 『구의 증명』에서 증명은 논리의 명제나 언어적 증거가 아니라, 사랑을 내면화하는 비이성적 감각이며, 소멸을 거부하는 몸의 수행이다.
터무니없기에 믿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기에 믿음이 작동하는 자리. 『구의 증명』이 던지는 윤리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가능한 증명을 향한 감각의 윤리,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목소리다.
지독한 사랑이야기는 무엇을 증명하려는가?
다시 제목 『구의 증명』으로 돌아가 본다. 만일 ‘구’가 ‘증명’의 주체라면, 그것은 ‘구’라는 존재가 자신의 의미와 정체성, 혹은 세계관을 스스로 드러내고 확증하려는 실존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때 ‘증명’은 논리의 체계 안에서 명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를 증언하고 고백하려는 내밀한 시도에 가깝다. 구는 자신의 진실, 상처,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아이며, ‘증명’이라는 행위를 통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로 재현된다.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지금-여기의 삶이 아니라, 담과 함께 나눈 세계, 그 사랑의 진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남겨질 감정의 잔향과 정체성의 유산이었다. 이 증명은 말의 형태로, 혹은 살 속에 새겨진 기억의 방식으로 남아 담에게 전달된다. 구는 죽음을 앞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헛되지 않았음을 끝내 증명하려는 자로 등장한다.
반면 ‘구’가 ‘증명’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면, 이 ‘구’는 실체가 불확실하거나 왜곡된 존재로서, 외부의 시선 혹은 타인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진실성을 확보받아야 하는 인물로 읽힌다. 이 경우 ‘증명’은 구라는 존재에 대한 외부적 확인이자 검증의 과정이며, 그는 증명의 필요성 앞에 놓인 수동적인 타자가 된다.
실제로 소설의 말미까지 구의 존재는 오직 담이라는 타인을 통해서만 세계에 알려진다. 담은 구를 증명하는 자로 등장한다. 그 증언은 단지 말의 형태가 아니라, 구의 시신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자르고, 끝내 그의 육신을 뜯어 먹는 행위로 실현된다. 담은 구의 존재를 사랑과 기억의 방식으로 복원하고, 자신의 몸속에 내면화함으로써 그를 증명한다. 담이 해석의 주체로서 구의 의미를 떠맡고, 증명의 수행자로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구의 증명』은 이 두 해석을 명확히 구분 짓지 않고, 오히려 뒤섞인 역설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구는 증명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증명되어야 할 존재이며, 주체이자 대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는 소설의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담과 구가 번갈아 서술자가 되는 이 교차 서술은, 고정된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해체하며, 두 인물 사이의 존재론적 긴장과 윤리적 거울 관계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구는 어느 순간 증명하는 자로 등장하다가, 다시 증명되어야 할 존재로 회귀하고, 담 또한 그 궤적을 따라 흔들린다. 존재의 증명은 타자의 응시에 의해 완성되면서도, 자기에 대한 자기 증명의 여정이기도 하다는 진자 운동이, 바로 이 교차 구조 속에서 은밀히 울린다.
이러한 점에서 『구의 증명』은 단순한 행위나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유하는 존재의 자기 확인 과정이며, 동시에 세계와 타자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숙명을 내포한다. 구는 ‘증명’의 주체이자 대상이며, 행위자이자 타자 속에 매인 증명의 대상물이다. 이 다층적 의미망은 제목 하나에 응축된 사유의 농밀함을 보여준다.
소설은 독자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 증명은 언제나 상호적인 것이며, 그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고, 교차하고 반전되며 겹쳐진다. ‘구의 증명’은 구의 존재에 대한 담의 서술인 동시에, 구가 수행한 자기 증명의 서사이며, 그 둘 사이의 관계―사랑과 기억, 고통과 책임―이 세계에 남긴 윤리적 흔적이다. 이 증명은 사실(fact)의 증명이 아니라, 윤리적 행위로서의 증언이자 감각적 유산이다.
“우리 둘뿐”이라는 설정은 이 증명의 윤리를 극도로 집중시킨다. 세상이 외면하고 지워버린 존재를, 오직 당신만이 기억하고, 말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서늘한 연민과 고독한 책임. 그 감정이야말로 이 작품을 지탱하는 정서적 구조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말로도, 죽음이라는 말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그러나 끝내 증명되어야 할―존재의 불가해한 형상을 비춘다.
한국 문학, '재미'와 '의미'사이의 부침
제법 많은 책을 읽어 왔지만, 여전히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내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독서가 자기계발서라면, 그 다음은 동시대 작가들의 소설이다. '동시대'라는 말은 조금 조심스레 확장한 표현이다. 보다 정확히는, 나보다 한 세대 아래, 그러니까 1980년대 부터 그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쓴 소설 앞에서 자주 주저하게 된다. 문학을 전공한 이유가 되었던 소설이라는 장르는 자연스럽게 고전이나 나의 선배 세대의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변명도 있고 핑계도 있지만, 결국은 ‘재미’와 ‘의미’라는 기준이 작동한 결과였다.
편식에 가까운 독서 습관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미’가 가볍고 피상적인 무언가이고 ‘의미’가 고결한 가치라는 이분법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치우친 독서 와중에도 소위 장르소설은 꾸준히 읽어 왔다. 정유정이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스터리는 늘 흥미로웠고, SF나 디스토피아 서사도 이따금 펼쳐 보곤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감각적으로 정제된 문장 속에 개인의 내면과 일상의 진동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감도의 강도가 높은 감성소설들 앞에서는 번번이 손이 묶였다.
요즘 넘쳐나는 서평이나 리뷰에선 ‘재미있다’는 말이 거의 자동 응답처럼 반복된다. 추천이 과열되다 못해 일종의 면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그게 정말 재미라는 이름을 견딜 수 있을까?’ 묻게 된다. 요즘 리뷰 풍토는 어느 유명 서평가의 소신처럼 칭찬과 찬사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비판이나 지적이 더해지면 문학과 출판 산업이 타격을 입는다는 연산이 작동하는 듯 말이다. 문학과 예술을 문화산업이라는 계산기로 계측하려 드는 요즘 정치인들의 말과 닮았다. 그래서인지 괜스레 트집을 잡고 싶은 유혹이 인다. 비평은 쓸모없는 군소리로 여겨지고, 비평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진다. 이 사라짐의 틈에 끼어드는 시도가, 지금 내게는 ‘의미’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금,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젊은 작가상 수상자인 성해나와 강보라의 작품, 장르적 실험이 짙은 정보라, 그리고 이미 찬사로 둘러싸인 김애란의 몇몇 단편들까지. 다양한 결을 가진 작품들을 들여다보며, 내가 품고 있던 편견의 몇 가지를 비로소 지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문학, 한국 소설에게 마냥 낙관적인 전망을 건네기란 쉽지 않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은 소문대로 감각적 문장과 번뜩이는 표현들로 읽는 재미를 주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넘나드는 시점의 교차와 중의적인 비유로 인해 독자층을 구분없이 확장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지금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부러 사전 정보를 최소한 덕에 작가의 성별과 구와 담의 성별을 무한히 상상 번복한 작은 질문 외에는 말이다. 이 먹먹한 사랑의 이야기는 '9와 숫자들'이라는 인디밴드의 <창세기>라는 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후술되었는데, 딱 거기까지의 감각이었다. 인디밴드들이 읊조리는 자기 내면으로 파고드는 개인단위의 감각의 밀도를 구축하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낡은 정의라 치부될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이 ‘재현의 정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치성은 곧 사회성과 시의성의 다른 이름이지만, 단순한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문학이 예술과 인문학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 모호한 재현성에 기인한다. 예술은 정치적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게 혼란을 유발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믿는 표상의 세계에 의심을 던지며, 사람들 내면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열망을 흔들어 깨운다. 이것이 대중문화와 문학이 갈라지는 자리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소설은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질문을 회피하는 듯 보인다. 장르소설들은 이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며 실험을 지속한다.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SF, 판타지… 이들은 중심에서 멀어져 질주하다 원주의 끝을 무너뜨리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감각과 감정에 의존하는 서사들은 개인의 경험과 시각을 미세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다가, 어느 순간 그 힘을 소진하고 위축된다. 원심력을 잃은 이야기들은 스스로 유의미함과 유미성에 함몰되어 사그라진다. 이 양극의 움직임 모두가, ‘한국 소설’이라는 하나의 구(球)가 완전한 형태로 유지되지 못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한국 소설은 통쾌한 재미와 안전한 성장 서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본디,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자리까지 나아가 무모한 증명을 시도하는 일이다. 증명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존재를 사유하고 세계를 비트는 유일한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철학자 리카르가 말한 ‘상징의 과잉과 해석의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계가 아니라, 의미의 심연을 비추는 파동이며, 그것은 한 시대의 상징 체계를 흔들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소설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질문의 기세가 위축되고, 해석의 여백이 줄어드는 시대일수록 문학은 더 멀리, 더 깊이 가야 한다. 그것이 증명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유일한 응답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