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이 말하는 문학과 애도의 형식
“그때 너는 죽었어. …
그때 그곳으로 가야 했을까.
그곳으로 힘차게 날아갔다면 너를,
방금 네 몸에서 뛰쳐나온 놀란 너를
만날 수 있을까.”
(2장 「검은 숨」, p.64)
이 문장에서부터 소설은 독자를 기이하게 흔들어 깨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 어떤 배경 설명도 없이 ‘너’라는 2인칭 호칭으로 문을 연다. 낯설다. 그러나 이 낯섦은 단지 기법적 실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 감히 감당하려는 죽음 이후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극한의 윤리적 형식이다. 여기서 ‘너’는 고정된 인물 지시어가 아니다. 한 사람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 성별을 넘어, 상황을 지나며 호명의 지시 대상은 끊임없이 교차하고 흘러간다. '너'는 곧 그가 되고, 그녀가 되었다가, 그놈, 그 녀석을 훑어, 다시 당신이 되고, 결국에는 ‘나’로 회귀한다. 이러한 호명의 유동은 문학적 장치라기보다 정치적이며 실존적인 제의로서의 글쓰기다. 그것은 죽음을 언어로 애도하는 형식이며, 죽은 자를 다시 현재로 불러내는 초혼(招魂)의 방식이다.
이 소설은 ‘그날의 너’를 찾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되지만, 결국은 ‘오늘의 너’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그 호명 끝에 남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통찰이다. ‘너’와 ‘나’의 경계는 무너지고, 독자는 자신이 그 죽임의 현장에 있었음을, 혹은 여전히 그 안에 있다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호명은 곧 책임의 호출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것을 단순한 2인칭 화법의 실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문학적 형식은 여기서 이미 정치적 발언이며 윤리적 요청으로 작동하고 있다.
서사 구성 역시 평면적이지 않다. 이야기의 시간은 선형적 흐름을 따르지 않으며, 시점 또한 고정되지 않는다. 독자는 서술어 하나하나의 어미에 주목하며 서사 시간의 방향을 감지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회상인지, 현재적 시간의 감각인지, 혹은 죽은 자가 응시하는 이승의 시간이 뒤엉킨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소설은 인물, 시점, 시간의 경계를 모두 불확정 상태로 유지한다. 그러나 이 불확정은 결코 해체나 허무가 아니라, 고통의 응고된 진실을 언어로 붙잡아 두기 위한 윤리적 망설임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고통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한강의 글쓰기는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거나 고발하는 정치적 소설과는 다른 궤도에 놓인다. 『소년이 온다』는 어떤 완결된 해석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죽은 자의 육성을 빌려 살아 있는 우리를 불러 세우고, '너'를 찾겠다는 호명의 문장을 되풀이하며 독자를 다시 그날의 광주로 데려간다. 그날이라는 시간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며, 그 장소는 더 이상 공간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이의 정신과 육체 안으로 파고드는, 현재진행형의 윤리적 시간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의 내용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죽음을 감당하고자 하는 감각적이고 윤리적인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어느 순간 ‘너’로 불리고 있다는 진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문학의 윤리로서 우리 앞에 선다. ‘너’를 부르는 문장은 결국 우리 모두를 부르는 문장이 되며, 그 호명의 여운은 책장을 덮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귓가에 머문다. 그것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애도를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방식의 응답이다.
시간의 직물, 시점의 윤리
시점은 단지 서술의 위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시선이 아니라, 공간의 눈높이다. 사건을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는 위치가 아니라, 현장 그 자체의 정념이 응시하는 각도다. 시제 역시 시간의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시간을 분절하고 세우는 거리석(里程石)이다. 다시 말해, 서사의 시간은 이미 윤리의 시간이며, 시점은 기억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이 시점과 시제를 공간성과 시간성의 응축된 얽힘으로 직조해낸다. 그것은 사건을 단선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늘과 실처럼 교차하고 포개어지는 다층적 구조로, 마치 억센 질감의 직물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직물은 단일한 결로 짜인 평면적 구조가 아니라, 여러 겹의 시간과 공간이 겹쳐진 복합의 레이어이며, 말하자면 수의(壽衣)처럼 고요하지만 두터운 감정과 기억의 무게를 감싸 안는다. 안동의 모시 삼베처럼 결이 얇되 단단한, 서늘하되 날카로운 이야기의 물성을 지닌다.
작품은 여섯 장으로 나뉘며,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고 시점의 각도와 거리도 변한다. 이러한 다층적 시점과 시제의 배치는 단지 서사 기법의 문제를 넘어서, 바흐찐이 말한 다성악적 서사(polyphonic narrative)가 한 작품 내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첫 장에서 ‘너’를 부르는 목소리는, 다음 장에서 ‘나’로 응답하고, 그 응답은 다시 ‘그녀’와 ‘그’, 그리고 ‘당신’으로 흘러간다. 마침내 다시 ‘너’의 혼(魂)을 부르는 초혼의 장으로 회귀하면서, 이 호명의 순환은 시간의 선형성을 거부하며 죽은 자의 목소리가 산 자의 현재를 덮치는 윤회의 형식으로 확장된다.
시점과 시간의 복잡성과 모호함을 통과한 독자는 결국 한 지점에서 마주서게 된다. 그날의 광주, 1980년 5월의 검붉은 밤. 폭죽이 터지듯 죽음이 비처럼 쏟아지는 도청의 밤에서, 그 모든 다성적 시점은 하나의 공동된 진실을 향해 모인다. 여기서 기억은 단일하지 않으나, 진실은 분열되지 않는다. 화자의 얼굴은 바뀌지만, 진실의 형상은 오직 하나다.
각 장의 화자들은 단지 인칭의 변형이 아니라, 기억의 층위와 증언의 밀도를 가늠하는 장치다. 열여섯 살 동호를 곁에서 관찰하는 익명의 시선은, 살아 있는 ‘너’를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사적인 거리다. 그 다음 장에서 정대는 혼이 되어 ‘나’라는 자아의 독백으로 ‘너’를 찾는다. 학살의 현장을 떠났으나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 은숙은 ‘그녀’로 호명되며, 살아남은 자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한 진수는 단지 ‘김진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실명으로 증언의 무게를 감당한다. 선주는 감각과 언어가 붕괴된 상태로 ‘당신’이라 불리며 소외된 고통의 타자가 되고, 마지막 장에서는 동호의 어머니가 쉰 목소리로 아들을 부르며 ‘너’를 다시 끌어안는다. 이처럼 얼굴을 바꾸는 화자들은, 그 고통을 직접 겪거나 목격한 다른 버전의 ‘우리’다.
중요한 것은, 시점이 바뀔 때마다 생기는 주관성의 다원화가 진실을 흩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각자의 위치와 방식으로 증언되는 고통은 다르되, 그 고통이 가리키는 진실은 하나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파편 속에서 반짝이는 진실의 순간들과도 닿아 있다. 한강은 그 파편들을 조율하고 연결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죽은 자를 증언하도록 한다. 이렇게 구성된 시점의 전환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애도의 서사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다.
죽은 자와 산 자, 교차하는 시제의 장례식
단지 인칭과 서술 시점이 변화무쌍하게 변주될 뿐만 아니라, 이 변화는 시간의 결 자체를 가르고 다시 꿰매는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과 산 자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흐른다. 죽은 자의 오늘이 산 자의 어제가 되고, 산 자의 내일이 죽은 자의 과거가 된다. 이 불안한 시간의 교차 속에서 『소년이 온다』의 서술은 시제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시제뿐 아니라, 각 장마다 변화하는 화자의 시점과 입김은 글의 문체와 색채까지 탈바꿈시킨다. 문장의 소리는 때로 희곡과도 같고, 때로는 무성의 신음 같은 침묵을 뚫고 흐른다.
인칭과 서술 시점은 단순한 서사 기법의 변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비선형적 시간성은 폴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에서 설명한 ‘내러티브 시간’의 다층적 구조를 연상시킨다. 시제는 단순한 문법적 수단을 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가 불명확해진 상태에서 기억과 망각, 증언과 침묵 사이를 가로지르는 통로가 된다. 서술은 시제를 넘나들고, 인칭과 화자의 다변성은 바흐찐의 ‘대화성’ 혹은 ‘다성성(polyphony)’의 문학적 구현으로 다가온다. 한 작품 내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독립적이며 동시에 공존하며 충돌하고 조응하는 그 복합적 화음 속에서, 『소년이 온다』는 단순한 사건 보고를 넘어 역사의 비극에 대한 윤리적 증언을 쌓는다. 이때 증언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증언의 정치학’으로, 즉 권력에 의해 침묵되거나 왜곡된 진실을 되살리고자 하는 문학적 행동이다.
이러한 서사의 다층적 변주는, 우리 문학 속에서 묻어두었던 고전적 언어와 감성의 흔적들을 불러낸다. 깊이 숨겨두었던 이청준과 김승옥의 목소리가 문장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그늘진 삶의 굴곡을 품은 박경리와 조정래의 거대한 산맥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운율과 건조함이 교차하는 산문과 운문의 대화에서는 윤동주와 기형도의 시정(詩情)이 잠시 머무르며, 이창동과 황석영의 젊은 날 서사가 시선을 교차한다. 아련한 우리말의 향기는 김유정의 만무방과 정지용의 시어들을 통해 자연스레 살아나, 절절한 공명을 이룬다.
각 장마다 변화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서사적 변검(變面)처럼 등장하며,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기억의 파편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적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열여섯 동호의 이름 없는 소년, 혼이 된 정대, 살아남아 무거운 고통을 지닌 은숙, 스스로 증언자로 선 진수, 고통 속에서 침묵하는 당신 선주, 그리고 마지막 어무이의 찰진 사투리까지, 이들 각각은 사건의 다층적 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음성’이다. 시점은 변하지만, 역사의 무거운 진실과 고통의 증거는 한결같다. 문학이 가진 힘은, 냉엄한 고발과 끈질긴 증언의 말들을 압도하는 어떤 숨결이다. 이 숨결은 문장 틈마다 스며들어, 낯설면서도 깊은 문학적 미학으로 승화된다.
문체와 글빛 또한 변화한다. 이는 단지 표현 방식의 차원이 아니라, 서사와 기억, 그리고 존재론적 시간성이 글 속에서 각기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다. 관심 가득한 관찰자의 소년 말투, 혼란스러운 중학생의 독백, 살아남은 자의 검은 가슴을 대변하는 희곡적 대사, 그리고 녹취와 증언의 객관적 서술, 나아가 무겁게 가라앉은 선주의 방백, 마지막으로 어무이의 토속적 언어가 이루는 다성성은, 각각 문학적 음향의 파장을 달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다층적 내면 풍경과 역사적 진실의 망망대해를 체감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리쾨르가 말한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을 글자와 언어의 미학 속에 안착시킨다. 기억은 시간에 갇혀 증언의 사슬을 이으며, 망각은 그를 둘러싼 현실의 폭력과 제도의 침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 둘 사이에서 진실의 진폭을 극대화하며, 독자가 진실의 목격자가 되도록 문학적 공간을 연다. 이처럼 서사의 변주는, 각기 나름의 고통을 껴안는 너와 나, 그와 당신, 아들과 어무이가 쌓아 올린, 광장을 향한 화성의 노래탑이다. 그 노래탑은 1980년 5월의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처럼, 단단히 우리 모두의 심장에 닿는다.
특히 『소년이 온다』의 시간성은 전통적 장례의례인 초혼(고복)에서 발원한 듯하다. 초혼은 사라진 혼을 불러내어, 애도와 기억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례다. 장례의 여러 단계—염습, 입관, 발인, 장묘—중에서도 작가는 특히 초혼의 애달픈 정서에 머문다. 아직도 ‘너’를 찾지 못해, 끝내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계속해서 혼을 부르며 시간을 견뎌내는 이 긴 애도의 나날은 마치 저녁의 깊어가는 어둠처럼 서서히 우리를 감싼다.
저녁에 머문 시간은, 거짓 조명에 잠시 환한 듯 착시를 일으키지만, 이내 다시금 너를 찾지 못했음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한다. 그날, 그 밤에 너무도 많이 죽었고, 너무도 많이 사라졌기에, 어찌 우리 모두가 그 슬픔을 잊을 수 있으랴. 어찌 끝내 이 장례식을 마치지 못한 ‘상중(喪中)’의 시간을 살아가지 않으랴.
장례되지 못한 문장들
우리는 아직 상중(喪中)이다. 『소년이 온다』는 단순한 죽음의 서술을 넘어서, 장례되지 못한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이 소설의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죽은 자들의 시간이 따로 흐르고 산 자들의 시간은 정지하며, 이 둘의 불협화 속에서 발생하는 서사적 간극이 작품 전체의 정조를 이룬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라는 문장들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이 문장들에 포착된 시간은, 바슐라르의 심리적 시간 이론처럼, 상실의 체험이 ‘저녁’이라는 물리적 순간에 고정되고 고착되는 서사적 시간의 정동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비유적 황혼이 아니라, 애도와 초혼의 경계에 선 상징적 시간이다.
『소년이 온다』의 제3장 「일곱 개의 뺨」에서 작가는 하나의 연극 장면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이 여전히 ‘초혼의 장례’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다. 군부독재의 폭력이 통째로 지운 대사 위에서, 배우들은 말 없는 입술을 오므리며 신음에 가까운 소리 없는 몸짓을 보인다. 이는 파울 첼란이 말한 “말 없는 말의 발화”에 가까우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야말로 말해야 하는 고통이 되는 역설적 발화의 현장이다. 이 삭제된 언어, 침묵의 대사는 살아남은 자 은숙에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일으킨다. 그녀는 더 이상 언어도, 표정도, 인간 자체도 신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인간의 본성과 역사를 거스르는 질문,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급진적 윤리의 질문만이 남는다.
작가는 ‘죽음은 모든 것을 한 번에 지우는 붓질’이라 말하며, 김진수라는 인물을 통해 죽음의 시각적 상징성을 강조한다. 그 붓질은 일상의 비루함과 고통을, 침묵을, 공포를 단번에 덮어버리는 힘을 가진다. 치욕적인 고문, 서로를 증오하는 수감자들의 살기, 쩍쩍 갈라진 허기 속 쉰 콩나물 한 줌이 삶의 전부가 되는 순간, 죽음은 그것을 지우는 유일한 출구가 된다. 그러나 이 출구조차도 삶을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죽음을 지켜본 자, 증언하는 자, 살아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고통의 문을 열어준다. 살아남은 자 김진수는 끝내 삶을 잇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는 타자의 죽음을 장례 지어주지 못한 자의 책임이, 남은 자의 존재 자체를 죄로 만드는 방식이며, 블랑쇼의 개념대로 하자면 이는 죽음-너머의 죽음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죽음은 죽은 자에게서 끝나지 않고, 산 자의 삶으로 편입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장례가 되어 버린다.
『소년이 온다』가 말하는 ‘장례’는 현실에서 한 번으로 끝나는 의례가 아니다. 초혼, 염습, 입관, 발인, 장묘로 이어지는 전통적 장례 절차 중 소설은 유독 초혼의 시간에 오래 머문다. 이 지연된 초혼은 살아남은 자들이 여전히 ‘너’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너’를 찾지 못했기에, 온전한 장례를 치르지 못한 것이다. 이 지연은 애도의 불가능성, 더 정확히 말하면, 완결된 애도가 아니라 지속되는 상중의 상태를 의미한다. 프루스트식 시간 감각이 여기서 반사된다. 되찾을 수 없는 상실 앞에서 기억은 현재를 저당잡고,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침투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광주에 있으며, 저녁이 깊어 가는 이유는, 결코 ‘너’를 장례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년이 온다』는 애도의 문학이 아니다. 이 작품은 초혼의 문학이며, 살아남은 자의 의례에 관한 비평적 성찰이다. 말해지지 못한 말과 잊혀지지 않는 시간, 장례되지 못한 죽음과 죄의식이, 각기 다른 화자의 육성을 통해, 그러나 하나의 윤리적 진실로 수렴된다. 이 진실은 오직 문학만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의 자리에서, 누구도 대변할 수 없는 고통을, 끝내 서술하려는 자의 ‘말 없는 윤리’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너를 찾는다. 여전히 상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상중이다
광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고서였다. 아니, 정확히는 부친의 보증 실패로 가세가 기울고, 밥값조차 아껴야 했던 고단한 고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광주’라는 단어가 삶의 언저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죽음을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어야 예비학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안내문은 그 시절 나에겐 일종의 숙제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무심히 책장을 넘기던 어느 날, 내 무심함 뒤에 선연히 핏물이 배어 있었다. 민주화가 되었다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만장을 들고 삼일고가도로를 건넜고, 최루탄의 잔향 속에서 죽은 동지를 위무하며 거리의 행렬에 섰다. 그때에서야 광주를 어렴풋이 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이해와 공감이 과연 그날의 아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처한 궁핍한 삶의 심리적 조건 때문이었는지조차 불분명한 채, 나는 헷갈림 가득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후, 그날의 광주는 내 기억의 저편으로 서서히 밀려났다. 나는 제법 오래, 그렇게 살았다.
광주는 단지 1980년 5월의 한 도시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고립되고 짓밟히고 훼손된 것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매번 다른 형상으로 재현되었다. 2009년 1월의 용산, 세월호의 침몰, 이태원의 비극… 그리고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골목의 이면, 빚에 짓눌려 스러진 어느 가족의 침묵, 그 모두가 광주였다. 되태어난 광주는 다시금 살해되었고, 피로 쓰인 상처는 더는 봉합되지 않은 채 도시의 골목마다 비가 내렸다. 그렇게 모른 척하며, 아니 모른 체 하며 살아남았다. 우리 모두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상중이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되태어난 광주의 기억을 가만히, 그러나 분명하게 불러낸다. 이 소설의 문장은 따뜻한 온기보다 차가운 통증을 담고 있다. 문장들 사이에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슬픔의 진공 상태가 있으며, 독자는 그 진공 속에서 망설임과 주저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한 문장 한 문장이 초혼의 굿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 말 없이 죽어간 그들을 위해, 또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살아남은 자들이 엮어낸 이 문학의 무대는, 오히려 침묵이 가장 정확한 발화라는 역설을 증명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소설이 “너무 차갑다”고 말한다. “마지막엔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억지 해피엔딩으로 글을 마무리하지 않은 작가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나는 그런 ‘서평’을 읽으며 곧장 떠올렸다. 아마 그들은 매일 되태어났다가 다시 죽어가는 광주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 고통을 등진 채 살아가기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매해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제 아들을 장례 치르지 못한 어무이의 가슴은 여전히 시렸다. 심장이 아니라, 뼛속까지 얼어붙는 계절. 그런 계절이 그들에게는 아마,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강은 문학의 상주였다. 그녀는 서랍에 저녁을 고이 접어 넣을 줄 아는 작가였다. 상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이자 최대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말해지지 못한 이들을 위해, 고통을 환기하는 정성스런 문장, 그리고 문학이 허락하는 상상의 윤리로 상을 치르는 일. 그렇게 글을 썼고, 그렇게 광주를 다시 불러왔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노벨상이라는 세계적 이벤트가 없었다면 나는 한강을 다시 읽었을까? 다시 이 땅의 문학을 손에 쥐었을까? 그 질문은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나를 따라오며, 결국 또다시 광주를, 그날의 죽음을, 그 죽음이 남긴 이별의 말들을 생각나게 했다.
문학이 시대와 정신을 공유할 때, 그 파동은 독자의 내면에도 잔잔히 일렁인다. 소설을 덮은 어느 여름밤, 나는 이 작은 소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힘이고, 그 힘이 결국 작가를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강을 만나고 싶다. 다시 그 찬 서사의 곁으로 돌아가, 꽃이 피는 쪽으로 발을 옮기고 싶다. 조금은 더 조용히, 그러나 절대로 잊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