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펙트 데이즈>와 『스토너』의 상호텍스트
일상의 잔해 속, 완벽의 다른 이름
살아간다는 일의 궤적은 격렬한 사건과 소동의 연속처럼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틈새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의 더깨가 묵묵히 쌓여가는 과정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매일 적는 일기가 날짜와 날씨만 바뀐 채 어제의 복사본을 되풀이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과도 같다.
일상이라는 지층은 단조롭고 예측 가능해 보인다. 인생이라는 서사의 격정에 비하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수한 반복과 미세한 변주의 총합이 감당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일상이 매 순간 조화와 균형 속에 있다면, 욕망이나 결핍을 더는 갈구할 필요가 없는 충족의 상태가 된다. 우리가 막연히 그리는 이상적인 삶의 얼굴은 어쩌면 바로 그곳에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는 서사적 친절함을 거두어낸 작품이다. 기대하는 소동이나 사건은 거의 없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곧 내일로 이어지는 반복의 일상.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삶은 이야기라기보다 스케치에 가깝다. 영화는 인과의 흐름 대신, 한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와 그 리듬을 따라가며 관객에게 묻는다. 저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것을 과연 ‘완벽한 날들’이라 부를 수 있는가.
히라야마의 하루는 새벽, 옆집 할머니의 골목 쓸기 소리로 열린다. 이부자리를 개어 구석에 밀어 넣고, 양치와 면도를 마친 뒤 청소부 유니폼을 입는다. 차키와 지갑, 동전들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낡은 승합차에 오르고,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의 버튼을 누른다. 루 리드의 노래가 새벽길에 번지며, 이유 없는 기분 좋음을 일으킨다. 그 역시 하나의 완벽한 날이다.
‘완벽’이라는 단어가 통념적으로 지니는 무게는, 도달해야 할 이상적 목표의 상태다. 그러나 히라야마의 일상은 그 관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독신의 남자가 새벽 빗자루질 소리에 눈을 뜨고, 매일 같은 동선으로 씻고 옷을 입으며, 자판기 커피 하나에 의지해 일터로 향한다. 그의 작은 즐거움은 낡은 카세트테이프의 음악, 잠들기 전 책 한 조각, 그리고 매일 아침 하늘을 향한 희미한 미소뿐이다. 사회적 잣대로는 보잘것없고 실패에 가까워 보이는 하루가 어떻게 ‘완벽’일 수 있을까.
영화가 말하는 ‘완벽’은 역설도 반어도 아니다. 은유나 수사의 장식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고 없어야 할 것이 부재하는 상태. 그것이 곧 완벽이다. 히라야마의 세계에서 완벽은 성취의 강박이 아니라 덜어내고 비워냄으로써 도달하는 평형이다. 해는 뜨고 지고, 그는 맡은 소임을 다하며 음악을 듣고 나무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지키며 불필요한 소음과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 리듬. 이때의 완벽은 ‘자연스러움’ 혹은 ‘조화’와 다르지 않다.
후퇴라는 조화로움
히라야마의 삶에 대한 태도는 최근 일부 사상가들이 주목하는 ‘후퇴학(Retreat-ology)’의 사유와 깊이 맞닿아 있다. 후퇴학이 지향하는 핵심은 ‘선택적 후퇴’다. 우치다 타쓰루는 이를 사회적 규범과 기대를 의도적으로 탈피하려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강요된 후퇴가 아니라, 의지에 따라 감행하는 후퇴다. 그는 또 강조한다. 후퇴란 절대적 고립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물러서는 일이며,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드러난다고.
다음의 선언은, 후퇴학이 단순한 패배주의나 도피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충족을 위한 능동적 선택임을 분명히 해준다. 우치다 다쓰루는 말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보나 성취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공간을 찾고, 이미 지나온 길에서 한 발짝 물러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말이다.
후퇴학은 외부의 압박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리듬을 되찾는 여정으로 읽힌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그 전형이다. 그는 사회적 성공을 좇지 않고, 반복의 궤도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과 속도를 조율한다. 그의 하루는 선택적 후퇴의 한 예로, 거대 도시의 소음과 경쟁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고,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보호하려는 실천이다.
이때의 후퇴는 단순히 물러서는 행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탈주선(line of flight)’에 가까운 것이다. 탈주선은 고정된 체계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와 감각을 창안하려는 시도다. 히라야마가 보여주는 미세한 균열과 감정의 동요는 바로 그러한 탈주의 흔적이며, 이는 후퇴학적 실존을 가장 분명히 증언한다.
그의 삶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 속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와도 겹쳐진다. 히라야마가 도쿄의 한구석에서 화분을 돌보고, 나뭇잎 그림자(코모레비, 木漏れ日)의 변화를 사진에 담으며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은, 스토너가 세속적 성공과 무관하게 문학 연구와 강의에 묵묵히 헌신하던 태도와 닮아 있다. 화장실 청소라는 노동에 장인과 같은 존엄을 부여하는 히라야마, 강의실의 고독한 헌신 속에서 내면의 품위를 잃지 않는 스토너. 두 인물은 외부의 시선으로는 실패와 정체의 이미지로 남을지라도, 그 내면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충만함이 깃들어 있다.
후퇴학이 제안하는 ‘멈춤의 철학’은 단순한 속도의 감속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가 간과한 삶의 깊이를 복원하는 태도이며, 주류 담론이 외치는 성공의 반대편에 위치한 조용한 승리에 대한 찬가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말하는 ‘비움의 미학’이나 서구 철학의 ‘네가티브 카파빌리티(negative capability)’ 개념과도 상응한다. 즉, 비워내고 뒤로 물러남으로써 오히려 세계와의 감각적 접속이 선명해지는 경험이다.
이러한 미학은 최근 대중문화 속에서도 은근히 부상하고 있다.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 (2023, Perfect Days)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서로 다른 언어와 형식을 지니지만, 공통적으로 후퇴학적 정서를 품는다. 이 작품들 속에는 거대한 서사도, 화려한 반전도 없다. 대신 반복과 침묵, 일상의 소박함이 자리하며, 그 안에서 삶의 본질을 묻는다. 바로 그 물음이 후퇴학의 철학과 강하게 공명한다. 그것은 단지 물러남이 아니라, 물러섬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조화의 미학이다.
살아가는 동안 무얼 기대하고 실망했을까
시간은 흔히 우주의 절대적 순리라 불리지만, 실은 누구에게나 다른 얼굴을 가진다. 객관적 척도로 존재하는 동시에, 각자의 내면에서 달아보는 심리적 저울이 된다. 시간은 어제로부터 흘러와 오늘을 순식간에 관통하고 저만치의 미래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 시간의 정량은 우주의 법칙으로 한치의 어김이 없을 텐데도 어제의 시간, 오늘의 시간, 그리고 내일의 시간의 속도는 다 다르게 느껴지기만 한다. 아련하게 흘러온 시간은 뚜벅이 걸음 같고, 오늘은 전력질주의 뜀박질 같으며, 내일은 미지의 가속도처럼 측정 불가능한 차원을 품는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바로 그 ‘시간 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1891년 미주리 농촌에서 태어나, 농과대학에 입학했다가 문학을 만나 영문학 박사로 대학 강단에 서고, 1956년 암으로 생을 마감한 윌리엄 스토너의 일대기. 소설은 그의 업적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현재의 평판으로 시작한다. 비범과 거리가 먼, 평범한 인물이라는 설명. 역설적으로 이 평범함이야말로 작품의 힘이다.
스토너의 삶은 큰 사건도 업적도 없이 흘러간다. 소소한 갈등, 일탈의 흔적, 작은 기쁨과 좌절이 전부다. 그러나 독자는 그 평범 속에서 먹먹한 무게를 느낀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인간사의 리듬, 그 위로 드리운 어마어마한 시간의 중력. 한 생의 우주와 그 우연의 인연들이 엮여 빚는 무게다.
스토너의 시간은 소설 1장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당연히 농사의 길을 걸으려 했으나, 대학 진학이라는 기회가 주어지고, 우연히 문학과 마주하며 새로운 생의 축을 발견한다. 이 짧은 1장은 단편소설처럼 완결성을 갖추지만, 동시에 앞으로 이어질 고독하고 지난한 평생의 서곡이다. 그 순간 이후, 그의 시간은 발작처럼 뚝뚝 끊겨 흘러간다. 서로 연결된 듯 어긋나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이질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틈에서 문학을 만난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눈앞을 거닐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환영처럼 다가온다. 스토너는 도망치지 않는다. 경솔해 보일지라도, 그는 점점 멀어지는 과거의 시간을 수용한다. 때로는 그리움과 부족함 속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새로운 시간의 탑을 쌓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그것은 투쟁 끝의 변모이자, 자기 삶에 대한 작은 선언이다.
내가 이 소설을 들고 먹먹해진 이유는 이 지점이었다. 비루한 땅에 한 뼘 농사를 짓던 스토너의 청춘이, 내 지난 청춘의 기억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내 선택이 그저 요행을 바라는 밥벌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금 더 그럴싸한 간판을 원했기 때문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윤동주 시비 앞에서 어느 교수의 집요한 권유를 뿌리치고 취업을 택했던 수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뇌와 회심의 뜰을 거닐던 시간, 톨스토이의 나타샤가 순수와 낭만의 들판을 달리던 기억이 그 벤치에 겹쳐 앉아 있었다. 그 옛날이 오늘을 살려내고, 지나간 시간이 지금의 시간을 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던 순간이었다.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불가능한 가정을 떠올리게 한 것은 스토너의 결심이었다.
‘만약에 그랬다면’이라는 가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택의 기억은 언제든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을 날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스토너의 인생은 방향 전환 후에도 이렇다 할 성공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도 없다. 삶은 부침의 연속이고, 그 총합은 묘하게도 0에 수렴한다. 기대가 찾아왔다가 실망으로 꺾이는 반복, 그 연속의 점들을 이어붙인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스토너는 죽음을 앞둔 시간에 홀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살아가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기대했고, 무엇에 실망했는지를.
너는, 혹은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의 삶은 성공한 인생일까? 만약 성공을 ‘원한 바를 이루었는가’로 가늠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우정을 원했고, 친구를 얻었다. 그는 사랑을 원했고, 실제로 사랑했다. 그는 가르치는 삶을 바랐고, 평생 그 길을 걸었다. 진정한 친구가 남았는지,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켰는지, 가르침에 찬사가 뒤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원한 바를 살아 내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가늠하며, 원한 바를 이루었는지를 따져 보게 된다. 스토너에게 공부란 특별함 그 자체였다.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인생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깃드는 순간, 그것은 시간의 저울에 잠시 머물며 평행을 이루는 완벽함이 된다. 이리저리 기우는 삶의 저울 위에서, 스토너는 평범 속의 완벽을 체험했다. 부풀릴 필요 없는, 위대한 평범의 순간이다.
그가 전하는 위대한 평범은 화려한 사건이나 아포리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주리대학 교내에서 그가 보낸 절대적인 평범한 날들의 서사에 있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겨울, 볕이 들고 꽃과 풀내음 가득한 봄, 폭우가 쏟아지지만 생명을 키우는 여름, 화재 후 덩그러니 남은 석조기둥 위로 길게 드리운 가을의 그림자. 하루하루를 쌓아 일생을 이루는, 서늘하고 선한 공기를 폐 깊이 들이마시며 보내는 날들. 바로 완벽한 평범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문학은 단순해 보이는 진실의 복잡성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를 ‘문학은 단순함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함을 끈질긴 인내로 탐구하는 행위’라 정의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설은 콘텐츠화되며, 참신한 소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 현란한 구성과 대중의 반응이라는 자극에 쫓기고 있다. 글은 짧아지고, 읽고 생각하는 일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글이 말처럼 뒤섞인 지금,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종종 불가능한 망상으로 치부된다.
평론가의 말처럼, 이제 세상은 문학에 적대적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듯하다. 하지만 출간 50년, 작가 사후 20년 만에 비로소 세상의 반응을 얻는 한 인간의 인생 소설, 『스토너』를 감히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의 끝에서, 당신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조금 더 깊이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문학이 삶의 한 편에 자리 잡을 가치가 충분하다. 인생이란 본디 무엇이랴. 그러나 그 시절의 시간은 기억으로 남고, 기억은 기록이 되어 역사를 이루며, 그 역사는 반복되는 되먹임 속에서 인간이 살아내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
균열 속의 조율, 일상의 숭고
영화 <퍼펙트 데이즈>로 돌아가면, 주인공 히라야마의 대사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유일한 사건인 조카 니코의 가출조차, 오랜만에 만난 누이에게는 지난날을 말없이 남겨둔다. 가출로 찾아온 니코에게 그는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는 되도록 겹쳐지지 말아야 한다는 긴 설명으로 자신의 침묵을 이해하게 한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상이 완벽한 날로 기억되는 법이다.
영화의 말미, 니코가 바다에 가자고 재촉할 때, 히라야마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한다. 막연한 미래의 기대나 과거의 후회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현재에 충실하려는 그의 삶의 태도가 압축된 순간이다. 행복이 때로 ‘불운한 일의 부재’로 정의될 수 있다면, 히라야마의 ‘퍼펙트 데이즈’는 외부 소란과 내면의 동요로부터 거리를 두고 일상의 리듬을 지켜내는 수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삶이 완벽히 고립되거나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카의 예기치 않은 방문이라는 유일한 ‘사건’은 그의 고요한 세계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동료의 갑작스러운 퇴사, 술집 여주인과의 미묘한 교감, 낯선 이와의 스쳐 지나가는 만남 속에서 그는 감정의 미세한 파동을 겪는다. 이는 완전한 평온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최소한의 연결 속에서 균형과 조율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또한 나이 듦에 대한 관조를 담아낸다. 나이 듦은 시간의 진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일종의 거스를 수 없는 후퇴다. 히라야마가 텅 빈 철거터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그림자밟기 놀이에서 숨 가빠하는 동료와 자신을 비교할 때, 그는 시간의 흐름과 육체의 쇠락을 담담히 맞이한다.
그에게 ‘완벽한 날’은 젊음의 활력이나 미래의 기대에 있지 않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큰 사고나 소동 없이 무사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수행하는 것, 반복되는 일상 속 사소한 가치들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열쇠 꾸러미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서도 각각의 쓰임새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처럼, 일상의 미세한 수행 속에서 완벽은 찾아온다.
영화의 탄생 배경 역시 흥미롭다. 도쿄시 공중화장실 홍보 영상이라는 실용적 의뢰에서 출발했으나, 빔 벤더스는 이를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에 대한 오마주이자 ‘일상성의 시학’을 구현하는 기회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단순 홍보 영상을 넘어, 삶의 본질과 의미를 성찰하는 문학적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히라야마의 제한된 대사 대신,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나 시몬의 음악, 각기 다른 디자인의 화장실 풍경이 또 다른 언어가 된다. 가장 사적이고 불결하게 여겨지는 화장실을 매일 정성껏 닦고 관리하는 행위는, 삶의 낮은 곳과 어두운 부분까지 끌어안고 정화하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이 후퇴의 관성은 히라야마 개인만의 깨달음이 아니다. 주변 인물, 동료, 연인, 지하철 역의 작은 이자카야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비난하는 식객들까지, 조금씩 물러서며 고귀한 뒷걸음을 감당하는 소시민의 모습 속에도 동일한 아름다움이 깃든다.
결국 <퍼펙트 데이즈>는 완벽에 대한 강박과 성취 압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과 방식을 제안한다. 화려한 사건이 아닌, 이름 없는 존재의 고요한 일상 속 잔잔한 아름다움과 존엄함.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흐르는 마지막 장면, 히라야마 얼굴에 스치는 눈물과 미소의 교차는, 완벽 속에도 삶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그는 성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의 무게를 견디며 빛과 그림자를 끌어안는 법을 터득한 한 인간일 뿐이다. 영화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조용한 응시를 통해 각자의 삶 속 ‘퍼펙트 데이즈’를 되묻게 한다.
멈춤의 철학, 느림의 미학
“인생이란 묘하다. 한때 찬란하고 절대적이라 여겼던 것,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 믿었던 것조차, 시간이 지나거나 각도를 조금 바꿔 바라보면 놀랍도록 빛이 바래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후퇴학은 단순한 퇴보가 아니다. 현대 문명이 강요하는 과도한 진보와 성장 신화에 맞서는 철학적 성찰이자, 인간이 잃어버린 본질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선택적 후퇴다. 기술 발전과 소비주의, 효율성 중심 사회 속에서 희석된 감성과 공동체적 유대, 잊혀진 내면의 소리를 되찾기 위해 잠시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태도를 의미한다.
진보의 불꽃이 아무리 찬란해도, 그림자 속 인간의 외로움과 상실을 직시해야 한다. 후퇴는 물러섬이 아니라, 잊혀진 내면의 소리를 되찾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용기 있는 행위다. 후퇴학은 단순한 반발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철학적 준비이며, 문명의 속도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깊은 성찰이다. 급격한 발전의 그림자 속 위태로운 균형을 직시하고, 인간 본연의 정서를 회복하려는 ‘멈춤의 철학, 느림의 미학’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코모레비는 이러한 후퇴학의 메타포다. 문명은 빠르게 나아가려 하지만, 햇살은 나무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 뿐이다. 히라야마는 그 틈에서 시간을 붙잡는다. 말이 없고 욕망도 없지만, 손에 쥔 일상과 풍경을 깊이 받아들인다. 영화 말미, 그는 차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과 ‘자신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조용한 자각이다.
소설 『스토너』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존 윌리엄스가 그린 스토너의 삶은 외견상 실패와 평탄하지 않은 연속이다.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명성도 경력도 가족 관계도 평탄치 않다. 그러나 그는 문학을 사랑했고, 교단에서 조용한 열정을 쏟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 삶의 리듬을 고수하며 한 인간으로 살아냈다. 마지막 구절은 말한다.
“책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스토너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평화로웠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그 평화는 무위의 순간에서 도달한 내면의 고요다. 후퇴학이 말하는 느림과 사유,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중심을 세우는 삶이다. 스토너는 실패했을지라도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고, 일상을 감내하며 그것을 존엄으로 만들었다.
이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소외된 일상과 작고 조용한 삶,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서사’에서 비껴난 이들 속에서,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얼굴이 드러난다. 진보라는 폭주 열차에서 잠시 내린 이들은, 그 멈춤을 통해 삶의 감각과 깊이를 되찾는다.
후퇴학은 바로 이 ‘선택적 후퇴’와 겹친다. 달리지 않고, 느리게 흐르며, 그들은 더 깊은 곳에 닿는다. 문명을 비판하는 철학이자, 조용한 서사 속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실천적 윤리다. 그 윤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코모레비처럼, 조명을 받지 않으면서도 삶의 중심을 이루며 은은하게 빛난다.
느림의 반격 — 인간다움을 위한 퇴각
말이나 글의 한 단어, 한 글자에 무게를 두며 사는 세상이다. 완벽에 대한 강박이 스며들 때가 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느끼는 날일수록, 그 부담은 깊어진다. 그 완벽은 늘 남들이 그어 놓은 기준선에 따라 울고 웃게 만든다. 하루하루는 조마조마한 지옥길과도 같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등을 맞댄 것들이 가득하다. 비통과 기쁨, 평온과 요란, 냉정과 열정, 좌절과 성취가 모두 담겨 있다. 자신의 일상을 판단할 때도 양가적 감정이 스며든다. 완전히 망했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지만, 하찮은 성취에 잠시 우쭐하기도 한다. 평범해 보이는 하루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변화가 스며 있다.
행복은 불운의 부재다. 불행한 소란도, 예기치 않은 소동도 없는 날들이 역설적으로 행복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평온은 쉽게 지속되지 않는다. 외부 사건이 없어도 마음속은 시끌시끌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나의 세계와 어쩔 수 없는 세계를 분리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훈련, 곧 흐트러짐 없는 일상의 수행이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독서에 빠지고, 영화를 보는 하찮지만 충실한 일상. 그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쌓는 일이다.
AI가 빠른 속도로 사회 전반에 진입하면서, 생산성과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계 논리가 일상을 재편한다. 알고리즘과 자동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기계의 산출물처럼 취급되고, 깊은 감성이나 공동체적 교감은 그늘로 밀려난다. 이때 후퇴학은 인간 중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함을 역설하며, 급변하는 기술 발전에 대한 조용한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빠른 전진의 물결 속에서도 일부는 발걸음을 늦추고 스스로를 재정비한다. 마치 거친 강물을 건너기 전, 잠시 멈추어 물살을 살피는 선장처럼, 후퇴학은 ‘멈춤’을 통해 내면의 감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오히려 새로운 전진을 준비하게 한다. 우치다 다쓰루는 진정한 전진은 기술의 속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AI가 만들어낸 숫자와 효율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은 느림과 성찰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발견한다. 문화와 예술 역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지만, 일부 예술가들은 전통적 창작과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며, 후퇴학적 태도를 실천으로 승화시킨다. 낡은 서책의 향기, 손글씨, 자연의 소리 담긴 작품들은 잃어버린 따스함과 인간미를 되살린다.
최근 chatGPT를 그대로 받아쓴 넘실대는 온라인 담벼락을 마주하며, 기술 진보의 놀라움과 더불어 불안과 불쾌가 함께 다가왔다. ‘진보’의 이름 아래 삶은 알고리즘 속 프롬프트로 구겨지고, 다양성은 지워졌다. 낡은 세대로 치부된 입장에서 변화 속도를 따라잡는 일은 점점 버거워졌다. 최소한의 인간 존중마저 축소되고 삭제되는 느낌은 지우기 어렵다.
후퇴학은 단순한 기술 거부를 넘어,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미래를 모색하는 철학이자 문화적 운동이다. 과도한 진보와 인간 소외 속에서, 멈춤과 성찰, 내면의 재발견은 지속 가능한 삶과 사회를 위한 필수적 요소다. 눈부신 진보의 불꽃 속에서도, 잊혀진 인간의 고요한 목소리와 감성을 일깨우는 후퇴학은, 시대의 한가운데서 담담히 울리는 서글픈 희망의 선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