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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늙지 않는다 -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와 「시간에 기대어」를 들으

by 박 스테파노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 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 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 줘

널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힘겨운 어제들
나를 지켜주던 너의 가슴

이렇게 내 맘이 서글퍼질 때면
또 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 줘

-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 조동희 작사, 조동익 작곡


https://youtu.be/zUcOAeYjsEs?si=IHyHe-zHbmtq1ZTC



고독의 반대편에 시간이 서 있다


어느 날 문득, 노래 한 가락이 귀에 오래 머물다 입술 끝에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기쁨이 벅차오를 때나, 극심히 지쳐 있을 때는 오히려 멀리 물러나 있다가도, 멍하니 시간을 헤아리는 순간이면 불쑥 다가오는 이명처럼 들려오는 노래. 나에게는 그 침잠의 시간마다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가 그러했다.


이 노래는 어떤날의 멤버이자 조동진의 동생, 장필순의 남편이기도 한 프로듀서 조동익의 곡에, 그의 또 다른 동생 조동희가 노랫말을 붙인 작품이다. 원곡은 장필순이 1997년 발표한 5집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 자체는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은 이 노래뿐이었다. 장필순은 햇빛촌, 소리두울 등을 거쳐 동아기획에 합류해 수많은 곡의 코러스로 참여하며 ‘코러스의 여왕’으로 불렸다. 이후 조동진, 조동익 형제가 하나음악을 만들어 독립하자 그와 함께하며 이 음반을 포함한 여러 노래를 남겼다.


이 곡이 유난히 가을밤에 떠오르는 이유는 가사 속 전조처럼 남는 여운 때문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또다시 살아나”라는 구절이 끝을 맺으며, 베이스 하울링으로 공간음을 남기고 꽤 긴 틈을 만든다. 서늘한 바람 속에 살아나는 ‘널 위한 나의 마음’과 ‘나를 감싸 안던 너의 손’의 기억이, 다음 소절을 바로 이어 부르지 못하는 틈이다. 윤도현이 <스케치북> 공개방송에서 이 곡을 불렀을 때도 그 틈은 더욱 선명했다.


그리움에 잠기기보다, 노래는 오히려 현실을 더듬어 자각하게 만든다. “그늘진 너의 얼굴”만으로도 말보다 깊은 진심을 헤아리며, 옥타브를 높여 힘주어 노래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다만 내 마음 한켠에 남아, 외로움이 깊어지는 어느 날, 너의 따뜻한 손과 널 위한 나의 마음을 기억하게 해 달라는 청자 없는 독백이자 다짐처럼 들린다.


이별을 예감하는 마음이 크게 요동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함께한 겨울들과 힘겹던 날을 지켜주던 시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이 불고 마음이 서글퍼질 때면, 그 이별을 직시한 날의 외로움이 다시 살아난다. 그 외로움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결국 너를 호출하고 만다. 그러나 이제는, 크게 요동치지 않는 슬픔을 그저 마주할 뿐이고, 그 마주봄은 고독을 견디게 하는 시간의 힘이 된다.


조동익 장필순 부부. 제공=한겨레신문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사랑의 반댓말이 미움이라면, 고독의 반대편은 무엇이라 규정하기 참 어렵다. 산울림의 노래처럼,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처럼 피어난다. 노랫말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지만, 노래를 품은 인생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것이 시간의 무게고, 그 무게는 누구에게나 버겁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깨닫게 된다. 그 무거운 시간을 굳이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가 비로소 어른이 되는 순간일지 모른다. 무게를 이고 가는 대신, 어른의 말은 이렇게 일러준다. 시간에 기대라고.



시간과 사랑의 변주 ―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


시간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나는 종종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Film Star Don't Die in Liverppol)을 떠올린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들의, 그러나 그보다 더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스카 수상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아네트 베닝), 그리고 그녀보다 스물아홉 살 어린 연인이었던 피터 터너(제이미 벨). 그들의 만남과 이별, 재회와 작별은 피터의 회고록에 남겨졌고, 영화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어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소란스러운 강조 대신, 마치 누군가 오래된 서랍 속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듯, 영화는 속삭인다. 지금 여기 부재하는 사랑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고.


솜털이 막 걷힌 배우 지망생과, 전성기를 지난 여배우의 사랑은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들뻘 남자와의 연애, 어머니 뻘 여인과의 관계라는 프레임 안에서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선입견을 조용히 걷어낸다. 욕망으로 포장된 호기심도, 외로움에 매달린 감정도 아닌, 그저 진실한 만남과 사랑.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는, 존재와 존재가 맞닿은 뜨거움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나이 차이를 넘어선 사랑’이라는 진부한 구호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받아들여지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랑이 한 시절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삶을 이루는 방식이었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사랑했지만 함께 살아갈 수 없었고, 현실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사랑의 크기를 줄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별은 서로를 더 절실하게 붙들었고, 병든 몸으로 리버풀에 돌아온 글로리아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었던 사람도 피터였다. 사랑은 한때의 불꽃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돌봄의 형식으로 변주되었을 뿐이다.


'왕년의 이야기'.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왕년’의 이야기, 그 기억의 이야기


사랑을 돌아보는 장면들 속에는 페인 주름만큼 깊고 단단하게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다. 네 명의 남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품어야 했던 엄마로서의 애틋함, 화려함 뒤편에 드리운 무대의 고독도 거기에 겹친다. 이제 삶의 끝에 선 여배우가 한때의 연인에게 기대어 통증을 달래는 순간은 단지 간병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기억이 서로의 체온을 건네며, 시간을 통해 마침내 사랑이 증명되는 장면이다.


글로리아의 삶은 무대 위에서만 극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다. 배우로서의 불꽃과 더불어,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견뎌야 했던 곤궁과 편견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여배우로 늙어간다는 것, 섹시 아이콘에서 어느새 ‘왕년’이라는 수식어로만 불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적 냉대이자 연대기적 외로움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피터와의 사랑은 유일하게 온전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한 사람을 만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피터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릴 때, 그 손길은 연민도 미안함도 아닌 오직 사랑만으로 움직인다. 젊은 연인은 노년의 여배우를 돌본다. 그것은 일방적 보호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알아본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유대였다. 사랑의 정점이 키스가 아니라 침묵일 수 있음을, 그 침묵 속에 함께 건너온 시간이 살아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피터 곁에는 따뜻한 가족의 울타리도 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차 한 잔, 기꺼이 내어주는 침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멈추어주는 시간이 있다. 영화는 그 순간들 속에서 사랑의 마지막이 눈물이나 환희가 아니라 ‘돌봄’임을 증언한다. 지켜보고, 견디고, 안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는다.


지켜주는 사랑, 그 시간의 이야기.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결국 리버풀에서 조용히 작별을 맞는다. 그러나 그 죽음은 결코 쓸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가 아니라, 한 생애를 함께 살아낸 시간에 대한 고요한 감사다. 살아 있음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다시 살아 있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왕년’이라 불린 시대는 그렇게 저물지만, 어떤 기억은 여전히 현재를 울린다. 그 기억이 진심이었다면, 그 사랑이 진짜였더라면, 영화는 삶을 닮는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바로 그런 영화다. 한 여배우의 퇴장은, 한 남자의 기억 속에서 지금도 무대 위를 걷고 있다.



기억의 극장, 시간의 틈에 놓인 유리의 동물들


이야기는 무대 뒤, 한때의 무대였던 분장실에서 시작된다. 거울 앞의 여배우, 손에는 깨진 화장품 케이스, 주름진 눈가, 엘튼 존의 낡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입술. 카메라는 그 얼굴에 머무르며 천천히 시간을 밀어올린다. 그러곤 우리에게 묻는다. ‘왕년’이라는 말이 당신에게 무엇이냐고.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분장실에서 문을 연다. 단순한 무대 뒤편의 시작이 아니라, 기억이 연극이 되고 연극이 삶을 반추하는 상징적 개막이다. <유리 동물원>은 ‘기억극’이라 불린다. 현실의 인과가 아니라 감정의 잔향으로 엮인 세계, 타인의 기록이 아니라 화자 자신의 기억으로 구축된 무대. 그것은 팩트의 연극이 아니라 진심의 극장이다.


그 기억극의 무대는 남부의 낡은 아파트. 깨지기 쉬운 유리 동물들로 채워진 장식장, 대공황의 바람이 스며드는 창문 틈새. 영화는 이 극의 정서와 공간성을 그대로 받아 적는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한 여배우의 마지막을 다루는 이야기를 넘어,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고, 회상 속에서 되살아나는 사랑을 붙잡고, 사랑이 흘렀던 풍경을 다시 비추는 일이다. 결국 이 영화는 <유리 동물원>처럼 ‘기억을 어떻게 견디는가’에 대한 서사다.


우리 모두 각자의 기억극 속을 걷는다. 배우이자 관객이고, 연출자이자 조명 기사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감는 일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존재의 틈을 들여다보고, 그 사이에 스며든 감정과 상처의 조각을 꺼내어 붙잡는 일이다. 영화는 말없이 그런 작업을 시작한다. 오래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리본을 풀어내듯,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플레이한다.


기억을 걷는 일은 시간에 기대는 일. 제공=그린나래미디어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간단한 숫자 안에 퇴색한 희망과 아늑한 눈빛이 함께 머문다. 복고풍의 골목과 똑같은 구조의 노동자 주택, 뉴욕과 L.A의 그림자는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존으로 불린다.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그것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부서지지 않은 유리 조각 같은 기억이다.


엘튼 존의 「Song for Guy」가 흐르면, 영화는 과거를 유행이 아닌 아픔의 미학으로 호출한다. 주름진 여배우는 그 곡에 자신의 과거를 싣는다. 젊은 육체, 화려한 무대, 시선의 중심에 서 있던 ‘왕년’의 시간이 찰나처럼 스쳐간다. 그러나 회상은 단지 그리움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의 경계, 존재가 나이 듦을 자각하는 인식의 벽 앞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반란이다. 그녀는 “내 인생 언제나 스물여덟”이라 말하지만, 시간은 웃으며 그 말을 배반한다. 삶은 늘 ‘지금’이 되지 못한 과거의 덩어리들을 짊어지고 흐른다.


세월은 우리가 허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간다. 어느 순간도 ‘지나가리라’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모두가 지나 있다. 스물여덟의 청춘은 사라지고, 반쯤 닫힌 문틈 너머로 자라버린 아이들의 그림자가 걸려 있다. 그것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있었음’의 증거다. 존재는 흔적에 남고, 사랑은 그 흔적을 만질 수 있을 때 다시 현재가 된다.


<유리 동물원>이 절름발이 가족의 추억을 담았다면, <필름스타 인 리버풀>의 기억은 다르다. 그곳에는 사랑의 이름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묻는다. 그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한때의 육체적 열정이 아니라, 그 이후 기억 속에 남아 더욱 선명해지는 감정이다. 왕년의 필름스타가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여전히 사랑의 숨결이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원제는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역설의 문장이자 소망의 문장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죽지 않는다. 그곳은 그녀가 사랑을 가졌던 공간이며, 그 사랑이 시간을 넘어 호흡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을 되살린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 그녀는 죽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언젠가 ‘왕년’이 된다. 누군가의 기억 속, 혹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중요한 것은 그 왕년이 자랑의 장식으로만 남느냐,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기느냐에 있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은 그 점에서 존재의 미학을 말하는 영화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일. 그리고 그 기억은 때로 죽음보다 강하다.


정열은 돌봄으로 변화한다.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첫사랑, 그리고 끝사랑; 꿈을 꾸었다 말해요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I’ve been for a walk on a winter’s day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
California dreamin’ on such a winter’s day

— 「California Dreamin’」 중에서


영화의 회상 장면마다 오래된 노래가 스며든다. 그것은 단지 과거를 환기하는 장치가 아니다. 음악은 기억의 심연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시간의 무늬다. 글로리아 그레이엄 곁에 머물던 엘튼 존의 「Song for Guy」는 사라져가는 그녀의 삶을 은근히 비추며, 무거운 공기 속에 잔잔한 슬픔과 애틋함을 스며들게 한다. 피터 터너의 회상 속에서는 호세 펠리시아노의 「California Dreamin’」이 흐른다. 가늘고 구슬픈 기타 선율은 두 사람이 공유했던 젊음과 자유, 미완의 꿈을 담는다.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해변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희망과 좌절, 고독을 노래한다.


할리우드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허구의 제국이다.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그곳에서 인생은 거대한 무대극처럼 펼쳐지고, 배우들은 가면을 쓴 채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간다. ‘꿈의 공장’이 내보내는 빛나는 환영은 종종 끝내 손에 닿지 않는 유령이 된다. 그러므로 캘리포니아는 약속의 땅이자 불확실성의 땅, 미래에 대한 열망과 그 그림자가 공존하는 모순의 공간이다.


이 땅을 세운 이민자들의 서사는 미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경제적 부흥과 다문화주의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본토 백인 사회로부터 배제와 차별을 겪었다. 피부색과 출신의 차이는 단순한 다양성이 아니라, 사회적 경계와 배제의 벽으로 작동했다. 캘리포니아는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충돌하는 경계의 공간이 되었다.


1990년대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은 우연이 아니다. 기술 낙관주의와 문화적 자유주의가 겹친 이곳은 정보통신 혁명의 최전선이자, 동시에 그 이면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무대였다. 포용과 배제, 해방과 통제, 낙관과 불안이 얽힌 땅. 이곳의 ‘캘리포니아 드림’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능성과 한계가 교차하는 현장이다.


음악은 단순한 회상을 불러내는 장치가 아니다. 글로리아와 피터가 흘려보낸 노래는 연인의 추억을 봉인하는 멜로디가 아니라, 한 시대의 정서와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역사적 감각을 함께 불러낸다. 「California Dreamin’」이 울릴 때, 두 사람의 사랑은 1960년대 이후 캘리포니아가 상징해온 꿈과 좌절, 자유와 소외의 파동과 겹친다. 한 연인의 기억은 곧 한 사회의 기억, 노래는 그 기억을 집단적 풍경으로 번역한다.


할리우드는 캘리포니아 드림의 전형이다. 제공=그린나래미디어


그래서 캘리포니아는 단지 배경이 아니다. 피터가 회상하는 젊음의 음악이 캘리포니아의 노래와 맞닿을 때, 사적 체험은 공적 시간과 겹친다. 꿈꾸는 연인의 노래가 곧 ‘꿈의 공장’이자 ‘경계의 공간’인 캘리포니아의 역사와 울림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의 기억과 사회의 기억은 한 곡 안에서 서로를 비추며, 영화는 그 교차의 순간을 붙잡는다.


꿈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자, 때로는 발목을 붙드는 족쇄다. 첫사랑처럼 순수하게 흔들고, 끝사랑처럼 깊이 각인된다. 캘리포니아가 던지는 이중성은 우리 모두가 품은 불확실한 미래의 은유다. 결국 꿈은 빛나는 불완전함 그 자체, 우리는 그 불완전함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꿈을 꾸었다 말해요.” 이 말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지의 미래로 향하는 여정의 선언이다. 글로리아와 피터의 사랑처럼, 우리의 삶도 꿈 속에서 부서지고 이어지며 무수한 가능성과 마주한다. 그 모든 순간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며, 존재의 찬란한 불완전성이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시간의 온도


쌀쌀하고 우중충한 리버풀의 날씨와 화창한 L.A, 뉴욕 센트럴파크의 온도 차만큼이나, 두 사람의 사랑은 냉온탕을 오갔다. 리버풀의 회색 하늘 아래, 차갑고 무거운 공기는 때로 거리를 만들었고, 캘리포니아의 햇살처럼 빛나는 순간은 사랑을 녹였다. 그 온도 차는 현실과 이상, 꿈과 좌절 사이를 오가는 관계를 상징했다. 여인은 천상 여배우처럼 비음 섞인 하이톤으로 애교를 흘리며, 나이를 잊을 만큼 빛났다. 그러나 그 빛은 한때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무대 뒤 어둠 속 흔들림을 감추는 얕은 장막이었다. 남자는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는 무명 배우였지만, 그녀의 연약하고 마지막 볼품없는 모습까지 온전히 품었다.


할리우드에서 꿈을 좇아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달려왔던 그녀는 이제 늙고 낡아 가는 중이었다. 은막에 그려진 화려한 성공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연기하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은, 이루지 못한 이상에 대한 은밀한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체와 허상, 빛과 그림자 사이를 헤매는 그녀의 인생은 ‘실패’라는 낙인이 찍힌 음지의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음지는 또 다른 ‘진실’과 ‘존재’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캘리포니아는 아마 피터의 따뜻한 품, 그리고 리버풀의 작은 집에 있는 그의 자상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햇살과 바람보다 더 깊고 고요한 안식처, 바로 ‘사랑’이라는 현실. 흔히들 ‘남자는 첫사랑, 여자는 끝사랑’이라고 한다. 피터의 첫사랑은 알 수 없어도, 글로리아의 끝사랑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진실이다. 어설프고 미완의 첫사랑보다 훨씬 성숙하고 근사한 끝사랑으로 그녀는 일생을 마감했다. 그 사랑이,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가장 아름다운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잡지 [스크린]을 늘 곁에 두고 다녔다. 수많은 영화 속 영웅과 히로인 가운데, 마음을 가장 깊게 울린 쌍두마차는 ‘아네트 베닝’과 ‘다이안 레인’이었다. 한때 워렌 비티를 시샘할 만큼 아네트 베닝은 할리우드 키드의 뮤즈였다.


첫 테이크에서 <유리 동물원> 무대에 서기 위해 준비하는 그녀의 얼굴과 손이 클로즈업될 때,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어린 시절 나의 뮤즈도 결국 세월 앞에서 할머니가 되어 간다는, 불가항력적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나도 그렇게 ‘늙어감’을 절감했다. 그러나 그녀가 숨기지 않은 주름과 깊은 표정, 가슴 아픈 진실성은 오히려 그녀를 더 아름답게 했다. 젊은 시절 발레 신동 제이미 벨과 춤추던 디스코의 몸짓부터, 유방암 검진을 위해 노출한 등에 박힌 잔근육까지, 그녀가 여전히 몸과 삶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철없이 보이면서도 농익은 천상 여배우의 연기는, 나이와 시간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뮤즈는 영원히 남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요즘 ‘낡음’과 ‘오래됨’을 자주 생각한다. 스스로를 ‘낡은 사람’으로 고백하는 치졸한 자기 인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늙고 낡으며, 모든 것은 오래되고 사라진다. 이 세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시간의 흐름과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며 남는 것이 있다면, 아마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시간을 거슬러 피어나는 불멸의 꽃. 그래서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유효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이 사랑 영화는 낡음과 쇠락 속에서도 빛나는 사랑의 본질을 일깨운다.


나는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풍화 앞에서도 변치 않는 무엇인가, 아니면 시간과 함께 변모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생명체인가. 사랑은 존재가 겪는 상처와 실패를 껴안고 다시 살아 숨 쉬는 역설적 힘,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사건이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서사 안에 내재한 ‘철학적 물음’이자 ‘미학적 경험’이다.


그리하여 ‘첫사랑과 끝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와 그들의 삶은, 우리 모두가 겪는 존재의 냉온탕, 불완전하지만 멈추지 않는 여정의 축소판이 된다.



시간에 기대어, 우리


시간은 늘 덤이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세월이란 흔한 말조차 연습 없이 흘려보내는 것이 시간이라면, 그 또한 덤이다. 돌이켜 보면, 이불을 하늘 높이 차 올리던 날들의 집합이 시간의 결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박혀 빛나는 순간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그 별들의 이름은 고독과 외로움. 후회투성의 시간은 무겁게 내려와도, 우리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 시간에 기대는 법을 터득한다.


기억하고, 추억하고, 사랑하면서 말이다. 나이 쉰이 되어 되뇌는 노래 「시간에 기대어」는, 중학교 시절 신문반 후배였던 녀석이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해 2016년에 세상에 내놓은 곡이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하고, 조용히 감수성을 키우던 그 모습 그대로 시간을 보낸 후배 덕분에, 우리는 시간에 기대는 힘을 배운다.


시간에 기대어. Gemini


시간에 기대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경계 위에 선다. 별처럼 박힌 순간들은 반짝이면서도 사라지고, 고독과 외로움은 그 속에서 숨죽이며 스며든다. 삶이란 결국 그런 경계 위에서 부서지고 이어지며, 우리를 천천히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음악 한 곡, 기억 한 줄기, 후배의 성취와 추억이 합쳐져, 우리는 시간 위에 고요히 기대어 서 있을 힘을 얻는다.


시간은 무심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서정적 존재로 숨 쉰다. 기대어 앉아 지나온 날들을 바라보고, 흩어진 별들을 헤아리며,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마련한다. 우리가 얻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길어 올린 존재의 온기이며, 삶의 깊이다.


https://youtu.be/XGapfkyfz94?si=gUPyYHNmf3t2RCgW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바람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남아있을까
연습이 없는 세월의
무게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설움이 닿는 여기 어딘가
우리는 살아있을까
후회투성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사랑하오 세상이
하얗게 져도
덤으로 사는
반복된 하루가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그 시간에 기댄 우리

- 「시간에 기대어」, 최진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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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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