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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은 가을, 검은 숨결-만무방, 그들도 우리 처럼

김유정 「만무방」과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by 박 스테파노

미물들의 어제와 우리들의 오늘


김유정의 「만무방」이 보여주는 백미는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로 시작하는 첫 문단에 있다. 김유정의 문장은 의성과 의태를 교차시키며 풍경과 심정을 유려하게 오가며, 한국어의 다채로운 울림을 전시한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도입부에서 그는 강원도 산골의 자연을 하닐 없이 열거하며, 그 시절 미물들의 처지와는 너무나 다른 산골의 풍경을 통해 일종의 푸념을 건넨다. 마치 응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대신 말하는 듯하다.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삑삑히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김유정, 「만무방」


만무방 연재본. 조선일보 DB


응칠은 전과자다. 산에서 송이를 캐며 하루를 이어가고, 닭을 보면 본능처럼 잡아먹는다. 어느 날 숲을 내려오다 성팔이를 만나 동생 응오의 벼가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듣는다. 불길한 예감이 응칠을 휘감고, 그는 소식을 전한 성팔이의 표정에서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느끼며, 동시에 더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과 마주한다.


한때 그는 성실한 농부였다. 다섯 해 전만 해도, 빚더미에 눌려도 밭고랑을 지키던 사내였다. 그러나 빚이 삶을 삼키고, 도박과 도둑질이 남은 길이 되었으며, 결국 아내와 아이들마저 떠나보냈다. 구걸과 절망의 세월 끝에 감옥을 거친 뒤, 한 달 전 더는 버틸 수 없어 동생이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자포자기와 기사회생의 반면을 나눈 동전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응칠이 기댈 곳은 오로지 숲뿐이다. 답답한 속을 부여잡고 숲에 들어서면, 가을로 무르익은 자연이 그의 근심을 흩어 버린다. 울긋불긋 솟은 가을 나무, 졸졸 흐르는 냇물, 흙내와 향긋한 내음 속에서, 그 비참한 시간의 미물조차 숲에서는 만무방 취급을 받지 않는다.



미물들의 윤리, 기댈 곳이 없는


김유정의 「만무방」은 가난과 무력, 인간의 부조리가 산골 풍경 속에 녹아든 비극적 서사다. 중심에는 응칠과 그의 아우 응오가 선다. 응칠은 전과자이자 방랑자로, 농토도 가족도 삶의 목표도 없이 산과 들을 떠돌며 송이를 캐고 닭을 훔쳐 먹는다. 한때 가족이 있었으나 가난에 밀려 아내와 자식을 떠나보낸 그는 ‘먹고자 하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체념의 윤리를 품게 된 인물이다. 반면 응오는 근면한 농부지만, 병든 아내와 빚더미에 눌려 추수조차 하지 못한 채 벼를 썩히며 절망한다.


어느 날 응칠은 응오의 논에서 벼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그에게 향하지만, 그는 범인을 찾겠다며 밤 산속에 잠복한다. 그러나 붙잡힌 도둑은 다름 아닌 응오였다. “내 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유?”라는 절규 속에 김유정 문학의 핵심 정조 ― 기댈 데 없는 미물들의 비극적 자기정당화 ― 가 압축된다. 응칠은 순간 분노하지만 곧 죄책감과 허무에 휩싸인다. ‘내 걸 내가 훔쳐야 하는’ 인간 존재의 모순이 그들의 운명이 된다.


김유정의 세계는 언제나 이런 아이러니 위에 놓인다. 그의 인물들은 윤리적 판단보다 생존의 경계에 놓인 자들이며, 그 속에서 비극은 도덕이 아닌 기근과 구조의 문제로 나타난다. 「만무방」의 응칠과 응오는 선악의 구분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이를 비극적이면서도 풍자적 리얼리즘으로 묘사한다. 도입부 ―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 는 유려한 자연 묘사로 시작하지만, 평화로운 배경은 곧 추수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부조리한 삶으로 뒤집힌다. 자연은 풍요롭지만, 인간은 굶주린 아이러니, 그것이 김유정이 포착한 조선 농촌의 초상이다.


응칠의 삶은 김유정 문학에서 반복되는 ‘쫓겨난 인간’의 전형이다. 「봄·봄」의 청년, 「동백꽃」의 화자, 「땡볕」의 농부들처럼, 응칠 또한 가난이 만든 ‘부도덕’ 속에서 존재를 유지한다. 그의 방탕은 단순한 타락이 아니라 제도와 공동체가 붕괴된 농촌 현실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원시적 방어이며, 인간으로 남으려는 몸부림이다. 김유정의 인물들은 도덕보다 생명 쪽으로 기운다. 도둑질, 노름, 폭력조차 ‘살아야 한다’는 본능의 다른 얼굴이다. 작가는 그들을 단죄하지 않고, 무력함을 감싸 안는 시선을 보낸다. 그것이 김유정 문학의 자비다.


교과서에 실린 <봄? 봄>의 삽화. 김유정문학촌 제공


평론가 김윤식은 김유정의 세계를 “웃음 속의 비극, 비극 속의 웃음”이라 했다. 「만무방」의 언어는 냉소와 해학을 동시에 담는다. 응칠의 삶의 절망은 농담처럼 스며 있고, 무기력한 웃음은 울음의 그림자다. 산골 사투리의 생동감 속에 현실이 비치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 존재의 비애가 깃든다. 웃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망 속에서, 김유정은 이중어법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읽는 일은 ‘미물들의 윤리’를 마주하는 일이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탈락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본능과 욕망뿐이지만, 김유정은 그것을 추악으로 보지 않는다. 본능은 생명의 최후의 불빛이며,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응칠의 폭력은 미움이 아닌 사랑의 잔여이며, 응오의 도둑질은 범죄가 아닌 절망의 언어다. ‘내 걸 내가 훔친다’는 역설은 식민지 조선 농민의 현실적 자화상이다. 삶이 이미 도둑맞은 땅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조차 훔쳐야 생존할 수 있었다.


김유정의 서정은 절망의 땅 위에서 피어난다. 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들국화와 송이는 향기롭지만, 그 향기에 스며든 인간의 냄새는 썩은 송이 향과 같다. 그 썩은 냄새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냄새가 깃들어 있다. 김유정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인간의 비루함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생명의 존엄을 포착한다.


「만무방」의 마지막, 응칠의 눈물을 감싸는 어둠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기댈 데 없는 미물’들의 밤, 각자가 자기 죄와 슬픔을 끌어안고 겨우 버티는 밤의 상징이다. 김유정은 그 밤을 비추지 않는다. 다만 어둠 속에서도 살아 있는 미물들의 숨소리를 기록한다. 웃음과 비극이 뒤엉킨 그 숨결이야말로 김유정 문학이 끝내 우리를 울리는 이유다.


이 미물들의 어제는 우리들의 오늘이 된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기를 바랐던 날들의 초상은 1980년대 한국 영화 속에도 남아 있다. 그 속 인물들은 어제의 그들이 오늘의 내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중력 속에서, 세상 중심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뿐이다.



어제의 그들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을까


1990년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적 환호를 기대하는 마중물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199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으며, 2000년대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과도기이자 변혁의 실제였다. 초중반은 ‘기획영화’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실험했고, 후반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정표를 세우며 산업 패러다임을 신속히 전환했다. 장르적·미학적 차원 모두에서 새로운 정체성이 모색되었다. 그 여명의 직전, 1980년대 후반 영화들은 낮게 움츠려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곤 했다.


이 형국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1990년 경계의 시기에 나온 <그들도 우리처럼>(Black Republic, 1990)이다. 1980년대 어느 탄광촌, 서울말을 쓰는 청년 기영(문성근)은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낯선 이방인처럼, 그는 연탄 공장의 숙직실에 눌러앉아 차갑고 눅눅한 공간에 몸을 기댄다. 이름조차 큰 의미 없는 단편일 뿐, 탄광촌에서는 인력이 늘 부족했으며, 누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따위는 무의미했다. 오히려 존재보다 무겁게 드리운 ‘검은 세계’의 질서와 그림자만이 선명하다.


지역 형사의 시선은 의심과 경계로 빛난다. 기영이 낯선 외지인인 만큼, 사회의 벽은 견고하다. 이 땅은 무성한 파업과 인구 이탈로 몸살을 앓는, 사람조차 지쳐가는 공간이었다. 공허한 갱도 속에서 노동의 외침만 메아리치지만, 아무도 그 외침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탄광촌은 기영을 품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구속이자, 동시에 생존을 위한 새로운 뿌리였다.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동아수출공사 제공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일 수밖에 없는 이곳. 새까만 탄가루 먼지처럼 온 세상을 뒤덮은 검은 시간의 무게는 사람들의 숨결마저 잠식했다.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갱도 광부들의 파업뿐이었다. 그들의 몸부림은 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그물에 갇힌 채 허공에 흩날리는 절규였다. 사업주의 부동산 투기로 폐광 위기에 몰린 탄광촌은, 생존권을 내건 노동자들의 마지막 분투가 가로놓인 전쟁터였다.


누구 하나 편들지 못하고,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탄광촌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검은 먼지 속에서 동질의 삶을 공유했다. 그들이 ‘우리’였고, ‘우리’가 그들이었다. 새까만 세상은 그들을 한데 묶어, 이름도 삶도 얼룩지고 묻혀버린 하나의 존재로 만들었다.



잊혀진 이들의 무언의 저항, 사북항쟁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은 1980년 ‘사북항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강원도 사북 동원탄광의 뜨겁고 고된 투쟁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 시간 속 인간의 삶과 고통을 기록한 현장이다. 영화는 특정 시기를 지목하지 않고 시대의 표식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90년 제작에도, 사북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가난과 절망이 그곳에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동결이라는 철학적 언어를 보여준다. 시간은 진보나 변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과 무감각 속에 스며드는 ‘영원한 현재’로 자리하며, 탄광촌의 검은 먼지는 단순한 흙과 돌이 아니라 인간 삶의 퇴적물이자 저항과 굴복, 기억과 망각이 얽힌 혼종적 존재가 된다. 영화는 흙먼지와 연탄재 사이로 삶의 무게를 환기시키며,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한 편의 ‘회색조 서사시’를 펼친다. <그들도 우리처럼>은 잊힌 이들의 무언의 저항이며, 이름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검은 먼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여기서 ‘우리’는 곧 ‘그들’이며, ‘그들’은 ‘우리’임을 조용히 고백한다. 그 검은 심연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인간 존재가 기억해야 할 ‘무게’다.


석탄은 한때 대한민국의 효자였다. 수출품으로 외화벌이를 담당하고, 겨울밤을 달래는 따스한 심장이었다. 몸속 깊이 불을 품고 온전히 소진된 석탄은, 허옇게 남은 잿더미조차 미끄러운 골목길을 지켜주는 묵묵한 파수꾼이 되었다. 광부들의 숨 가쁜 노동 생산성은 국경을 넘어 독일 땅에도 알려졌지만, 석탄은 결국 기름이라는 새 연료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탄광과 그 땅에 땀 흘린 광부들의 시대는 역사의 흐름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영화 속 사건은 대서사적 조명 대신, 파업과 도망자 기영의 단편적 교차 편집으로 흩뿌려진다. 그럼에도 사북이라는 공간이 지닌 무거운 공기는 관객에게 1980년대 서민들의 가슴처럼 다가온다.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오늘’이라는 시간은 흑백사진 속 생생한 기록처럼 생생하며, 그 절망과 희망은 서로에게서 교차한다. 시간은 끝없이 돌고, 그 돌림 속에서 인간은 생존과 기억의 무게를 견뎌낸다.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동아수출공사 제공


영화의 제목 <Black Republic>은 뒤늦게 붙었을지 모르나, 작품의 메시지를 응축한다. 온통 검은 먼지와 연탄재로 뒤덮인 탄광촌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축소한 미시적 공간이다. 박광수 감독은 연극 <칠수와 만수> 이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날카롭고 현실적인 시대 풍경을 그렸다. 그의 화면은 불경한 도전이자 먹먹한 위로였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라는 시간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숨결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중첩을 탐구한다. ‘오늘’은 단순히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로, 변화를 약속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침잠해 희망과 절망을 얼어붙게 만든다. 미학적으로, 흑백의 대비 속에서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진실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영화는 한 지역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와 사회가 품은 근원적 상처와 굴곡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


<그들도 우리처럼>은 결국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부조리와 절망 속에서도 서로의 삶과 고통을 나누며 희망의 작은 불씨를 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까만 먼지 속에서, 그들은 각자의 의미를 찾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시간의 기록으로 남는다.



끊이없이 재구성되는 '오늘'


강원도 사북은 지금의 태백시, 그중에서도 황지를 중심으로 한 탄광촌이었다. 예전에는 황지로 가기 위해 기차가 산비탈을 앞뒤로 지그재그로 견인하며 올라가는 진풍경을 겪어야 했다. 영동선과 태백선, 철암선은 한때 사람보다도 석탄을 더 많이 실어나르던 철도였다. 험준한 산자락에서부터 펼쳐진 탄 적하장과 배추밭, 검은 흙과 푸른 잎의 조화는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방학 때만 되면, 입학이나 손을 줄이기 위해 간이역마다 멈춰 서는 기차에 갓 일곱 살이 된 아이를 처가가 있는 강원도 산골로 보내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8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황지역에는 군청에 다니던 외삼촌이 부업으로 몰던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황지나 지금의 태백은 겉모습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무심한 관찰인지, 시간의 흐름 속에 오래도록 고착된 풍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일 년 내내 서늘한 공기는 오히려 그리움으로 남아 가끔씩 가슴을 파고든다.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다. 32년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도 그 시절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가장 가난한 마을, 탄광촌의 그림자가 여전히 익숙했다. 오래된 기억의 틈새에서 나는 나이가 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나 청년일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이 깨졌다. 창백한 퇴폐미를 띠었던 청년 문성근은 이제 굵직한 중년 연기의 대가가 되었고, 그 새까만 동네에서 한때 찬란히 빛났던 심혜진은 일일 드라마의 사모님이 되어 있었다.


영화 제목 <그들도 우리처럼>이 지칭하는 ‘그들’과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이 질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만 바뀔 뿐, 매년 다르게 답하게 되는 수수께끼 같다. 어제는 그들이 불쌍했고, 오늘은 내가 더 처연하다. 스스로 무엇이라 규정하든 간에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 흐름의 중력은 우리 모두를 조금씩 바꾸어 간다. 찬란한 시간은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꿈꾸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묵념을 거두고,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딛고 싶다. 쉰둘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동아수출공사 제공


우리가 오늘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오늘의 어둠 속에서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이 작품은 단순한 지역사회의 기록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응축해 보여 준다. 1980년대 격동의 사회 속에서 탄광촌 노동자들의 삶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잊힌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한국 노동영화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박광수 감독은 연극 무대에서 길러진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과 그 안에 갇힌 인간군상을 예리하게 그려 냈다. <그들도 우리처럼>은 1980년대 이후 한국 노동계와 사회운동 영화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 투쟁과 절망, 희망이 교차하는 서민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영화는 ‘흑백’과 ‘흑암’의 미묘한 조합으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소망과 상실이 뒤얽힌 세상을 시각화한다. 탄광촌의 어두운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고통과 근본적 부조리를 상징한다. 그 ‘검은 풍경’ 속 살아가는 얼굴들은 빛이 닿지 않는 진실의 한 단면이며,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오늘의 어둠을 품고 내일의 빛을 꿈꾸는, 끝나지 않는 인간의 삶과 투쟁을 증언한다.


시간과 공간, 개인과 사회가 맞물려 ‘오늘’을 만든다. 그 ‘오늘’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재구성되는 역사다. 영화는 그 변화의 무게를 오롯이 담아내며, 관객에게 묵직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자 ‘우리’라는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바뀌어도, 그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진정한 희망임을.



잔존의 미학, 미물들의 처절한 희망


세월이 쌓인 어둠 속에서도, 응칠과 응오, 그리고 탄광촌 사람들의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생존과 몸부림은 흔적도 없이 역사에 묻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적은 오늘의 우리에게 부서진 문을 통해 스며들어, 숨 쉬고 있는 현실의 뿌리를 드러낸다. 미물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에서 인간은 언제나 제한된 선택과 생존의 필연 속에 갇히며, 도덕과 불가피한 생존 사이를 떠돈다. 김유정이 보여 준 ‘기댈 곳 없는 인간’의 풍경과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이 담은 ‘검은 현실 속 인간 군상’은 겹쳐진다. 둘 모두, 웃음과 비극이 뒤엉킨 삶의 불가해한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우리는 여기서 ‘윤리’와 ‘존재’의 경계를 다시 묻는다.


응칠의 폭력과 응오의 도둑질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몸부림이며, 가난과 억압 속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윤리적 신호다. 그 속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를 마주한다. 오늘의 우리 역시, 눈에 띄지 않는 구조와 권력의 그물 속에서 최소한의 존엄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가. 응칠과 응오, 기영과 탄광촌 사람들은 어제의 미물일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시간은 흘러도 인간은 언제나 그 경계 위를 걷는다.


응칠과 응오의 어제는 우리의 오늘일지도. AI Sora


영화 속 탄광촌의 검은 먼지와 연탄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역사의 무게, 그리고 소외된 인간 존재의 흔적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름과 신분보다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삶의 필연,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연대. 탄광촌 사람들의 무언의 저항과 소소한 연대는 언뜻 보기에 미약하지만, 역사와 사회가 기록해야 할 ‘존재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는다. 우리는 그 무게 위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어제가 오늘을 만들고, 오늘은 내일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오늘’이 반드시 희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희망과 절망은 공존하며 서로를 뒤엉킨다. <그들도 우리처럼>이 보여 준 풍경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다. 관객이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도록 만든다. 검은 먼지와 어두운 갱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근본적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이름 없는 존재들의 삶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사라지지 않음을 배우고, 그 기록 위에 우리의 존재를 겹쳐 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하며, 선택은 제한적이다. 응칠과 응오가 처한 산골, 기영과 탄광촌 사람들이 견뎌낸 검은 시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의 선택과 몸부림 역시 어제의 흔적 위에서 이루어지고, 미래는 그 위에 쌓인다. 삶의 조건이 불리하고 구조가 불공정할수록 인간은 더 원초적이고 절박한 선택을 한다. 이 선택들은 도덕과 불법, 윤리와 비윤리의 단순 구분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가 살아 있기 위해 해야 하는 최소한의 몸부림이며, 미물들의 윤리이자 삶의 논리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기댈 수 있으며, 어디까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어제의 인간, 산골의 미물과 탄광촌 사람들은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와 흔적, 삶의 몸부림은 묵직한 성찰을 남긴다. 삶은 가혹하며, 인간은 제한된 선택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순간마다, 우리는 역사와 현실의 무게를 견디며 내일을 준비한다.


검은 먼지 속에서도, 산골의 가을 속에서도, 미물들은 생을 이어 간다. 웃고, 울고, 때로는 서로를 구원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 미물들의 삶에서 인간 조건과 사회 구조, 존재의 본질을 읽는다. 김유정의 산골과 박광수의 탄광촌은 서로 다르지만,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과 희망, 절망과 생존의 겹침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제한된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제한 속에서도 존재는 끝내 빛난다.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동아수출공사 제공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어둠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다. 과거의 흔적이자 현재의 무게이며, 내일을 향한 토대다. 인간은 그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이해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구원한다. 어제의 미물은 오늘의 우리이며, 오늘의 우리는 내일의 미물일 수 있다. 그 순환 속에서 인간 존재의 연속성과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윤리와 생존이 뒤엉킨 복합적 현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견디며 내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도 우리처럼>과 「만무방」이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다. 인간은 언제나 제한된 선택 속에서 존재를 이어가고, 구조와 현실의 폭력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웃음과 비극은 동시에 존재하며, 절망과 희망은 서로를 스치며 공존한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어제의 흔적을 마주하고,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검은 먼지와 흐린 가을 하늘 아래, 미물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역사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인간 존재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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