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터너 정해연의 『홍학의 자리』vs.페이지키퍼 정유정 『완전한 행복』
경고의 미학, 세계를 구축하는 서사
스릴러의 서사는 언제나 경고의 형식을 취한다. 기묘한 사건과, 사건보다 더 묘연한 인물들의 등장은 세계를 향한 예감이자 경계의 언어로 작동한다. 그것은 사후의 해석이든 사전의 계획이든 상관없이, 인간이 구축한 세계의 틈을 드러내는 예언적 징후다. 작가는 그 경고의 파편을 플롯과 장치 속에 은닉하고, 독자는 그 조각들을 더듬으며 점차 하나의 실체를 머릿속에 세운다. 그 경고가 가리키는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세계’가 있다. 스릴러의 궁극은 단순한 긴장이나 충격이 아니라, 그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에 있다.
이야기는 결코 하나의 장르 안에 머물지 않는다. 미스터리, 스릴러, SF, 판타지, 공포는 서로의 경계를 스며들며 세계의 완성도를 높인다. 장르란 이야기의 장식이 아니라 구조의 보조선이다. 그러나 그 모든 혼합 속에서도 작가는 반드시 중심 세계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 그 중심이 서사의 틀이 되어 이야기를 견인하며, 독자의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세계의 결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스릴러는 긴장과 불안을 통해 그 구조를 드러낸다. 그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서스펜스다. 그러나 스릴러의 심장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에 있다. 사건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 이야기는 보고서의 형식을 닮는다.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내려는 주제가 너무 뻔하다면, 그것은 이미 문학이 아니라 기사에 가깝다. 스릴러는 사건의 이면을 파고드는 해석의 장르이며, 그 중심에는 살아 있는 인물이 존재해야 한다.
장르 문학이 독자에게 약속하는 첫 번째 효능은 ‘재미’다. 흔히 장르 문학은 깊이보다는 흥미로, 의미보다는 긴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의 덕목은 단순히 재미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서사가 흔들리지 않게 짜는 것, 그 정교한 리듬 속에서 세계의 세부가 숨 쉬도록 만드는 일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일종의 신세계다. 그곳이 아름답든, 위험하든, 현실과 닮았든 다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 낯선 세계와 친숙해지기 위해 시간을 투자할 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장르 문학의 독자들은 불확실함을 감내한다. 그 불확실함이 결국 해소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결말의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질 것을 기대하며 독자는 끝까지 기다린다.
이 기다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절제다. 스릴러의 작가는 언제나 숨기기를 배워야 한다. 자신이 쌓아 올린 세계의 디테일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 한다. 지리적 배경, 문화적 구조, 인물의 뒷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싶은 유혹을 견디며, 해설 대신 체험의 여백을 남겨야 한다. 작가의 인내는 세계의 리얼리티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뼈대다.
이야기의 목적과 세계의 목적은 하나로 맞물려야 한다. 작가는 독자가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만들고, 인물의 내면에 감정을 이입하게 하며, 예기치 않은 반전으로 놀라움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서사의 관심은 ‘인물이 무엇을 하는가’에 있고, 세계 창조자의 관심은 ‘그 인물이 어디에서, 어떤 제약 속에서 그것을 하는가’에 있다. 두 축이 정교하게 교차할 때, 독자는 다시 그 세계로 돌아올 이유를 찾는다.
결국 스릴러의 중심은 언제나 인물이다. 그들의 행위와 사유가 서사의 원동력이자 귀결로 남는다. 인물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는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 정밀한 설계 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인물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경고가 될 때, 작품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최근의 두 작품, 정혜연의 『홍학의 자리』와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은 흥미로운 공명을 이룬다. 두 작품 모두 ‘인정 욕구’라는 내적 결핍을 경고의 형태로 드러낸다. 그러나 그 경고가 머무는 정조와 결말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 『홍학의 자리』가 인간 내면의 균열과 사회적 욕망의 결속을 정교하게 직조한다면, 『완전한 행복』은 완벽을 추구하는 자기애의 파국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공통의 주제 아래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고의 세계’를 구축한 셈이다.
스릴러의 본질은 공포나 자극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하게 하는 감응의 구조다. 장르 문학은 문학의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이 세상과 맞닿는 가장 생생한 현장이다. 경고란 결국 세계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스릴러는 그 세계의 가장 어두운 틈에서 문학의 불빛을 다시 켜는 서사다.
페이지터너의 딜레마 ― 설명과 인물의 부재, 『홍학의 자리』
정혜연의 『홍학의 자리』와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은 모두 ‘악의 탄생’과 ‘정상성의 경계’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한국 장편소설의 공통된 감수선 위에 놓인다. 그러나 두 작품의 세계를 지탱하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정혜연이 서사를 사건 중심으로 구축하며 사회적 리얼리티의 재현에 집중했다면, 정유정은 인물의 내면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재구성하며 서사의 감정적 동력을 심층화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서술 스타일의 구분이 아니라, 소설이 인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그리고 문학이 세계를 어떻게 증언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호수가 다현의 몸을 삼켰다.”로 시작하는 『홍학의 자리』는 살인 사건이라는 외적 플롯을 중심축에 둔다. 작가는 초반부터 긴장을 치밀하게 배치하며 페이지터너적 구성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이 속도감은 서사의 효율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인물의 존재론적 깊이를 희생시킨다. 인물들은 사건의 기능적 매개로 배치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 호출되었다가 사라진다. 그 결과 인물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기보다, 설명으로 불려 나오는 도식적 형상에 머문다.
작중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면들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으며, 사건의 윤곽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정혜연의 시선이 ‘사건을 통해 인간을 본다’는 점에서, 그 인간은 사건의 일부로 전시된다. 고통과 윤리적 딜레마는 등장하지만, 그것이 인물의 내면을 통해 서사적으로 체험되기보다는, 외적 현실의 인용처럼 기능한다. 그래서일까, 작품에는 과도한 설명이 독서의 몰입을 자주 끊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완강기는 화재가 났을 때 밖으로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 설치된 피난 기구다.”
“자상은 칼에 의한 상처를 말한다.”
“낙하 혈흔은 가만히 있는 물체에서 수직으로 피가 떨어졌을 때 생긴 흔적을 말한다.”
— 『홍학의 자리』, 정혜연
이러한 문장들은 단어의 뜻을 해설하는 기능 외에 아무런 미학적 효과를 남기지 않는다. ‘완강기’, ‘자상’, ‘낙하 혈흔’이라는 단어만으로 충분한 장면을 굳이 설명으로 지워버리는 셈이다. 작품 전반에 이러한 설명 과잉이 산재하며, 이는 작가의 불안과 강박을 드러낸다.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축하기 위해 세부 정보를 제시해야 한다는 집요한 의지,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이야기의 숨결을 빼앗는다.
문제는 정보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는 데 있다. 독자가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가 인물의 행동과 감정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그것이 이야기의 결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험되거나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유기적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하지만 『홍학의 자리』에서 설명은 이야기의 일부로 흡수되지 못하고, 독립된 문단처럼 튀어나온다. 작가의 말이 인물의 말을 대신하면서, 세계는 낯설게 굳어간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장르적 긴장과 사실적 묘사의 정교함을 확보하는 대신, 인물의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는 문학적 시선을 제약한다. 『홍학의 자리』의 인물들은 사회적 유형 혹은 심리적 프로토타입으로 기능하며, 작가는 그들을 통해 범죄의 원인과 결과, 사회적 병리의 구조를 논증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의 언어는 인물을 살아 있는 타자라기보다 서사의 장치로 환원한다. 인물의 행위는 사건의 필연 속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이 인간적 필연성으로 읽히지 않는다.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공감이 아니라 관찰에 가깝다. 작가는 인물을 따라가지만, 인물의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홍학의 자리』의 세계는 탄탄한 리얼리티 위에 세워졌지만, 그 리얼리티는 설명으로 채워진 정지된 풍경에 가깝다. 정혜연의 문장은 세부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 하지만, 결국 그 세부들이 인물을 대신 발화한다. 그래서 페이지는 잘 넘어가지만, 인물은 끝내 독자의 마음에 남지 않는다. 페이지터너의 긴장 속에서 문학이 잃은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이라는 가장 오래된 진실이다.
페이지 키퍼 ― 인물이 사건을 그린다, 『완전한 행복』
“엄마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이 단호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문을 여는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은, 사건이 ‘발생하는’ 소설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으로부터 ‘자라나는’ 소설이다. 여기서 사건은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 구조가 세계와 마찰하며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결과다. 인물의 심리와 욕망, 결핍이 사건의 원인이자 결과로 엮이고, 모든 장면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세계가 다시 짜여진다. 그러므로 『완전한 행복』은 사건의 서사가 아니라 인물의 서사이며, 사건은 인물이 그리는 하나의 궤적이다.
“먼저 돼지고기를 사야 한다. 머리나 갈비, 뒷다리 같은 덩어리 고기를 뼈째 사는 게 좋다. 엄마는 항상 도매시장에 간다. 마트에서 파는 살코기는 양에 비해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는 ‘비싸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 얘기를 하는 건 상스러운 짓이니까. 대신 이렇게 말한다. 오리도 칼슘이 필요해.”
— 『완전한 행복』, 정유정
이 장면은 단순한 생활 묘사처럼 보이지만, 이미 ‘인물의 세계관’을 정교하게 구축한다. 엄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도덕적 신념과 위선, 통제 욕망이 복잡하게 얽힌 심리의 표면이다. 작가는 인물의 손끝, 말의 호흡, 일상의 리듬을 통해 내면을 그려내며, 독자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감각을 따라가게 된다.
“행복한 오리집엔 청둥오리가 가장 많다. 원앙이라는 오리도 있는데 수컷이 인형처럼 예쁘다. 엄마는 놈을 ‘개자식’이라고 부른다. 바람둥이기 때문이다. 쇠물닭은 오리도 아니면서 오리집에 빌붙어 사는 이상한 새다. 더 이상한 놈은 되강오리인데, 물속이나 수초 틈에 숨어 있기를 좋아한다. 해 질 무렵이면 안개가 부옇게 피어오르는 습지 안에서 비명을 지르듯 운다. 때로는 지유의 꿈속에서도 운다.”
— 『완전한 행복』, 정유정
이 오리들의 풍경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오리집의 세계는 인물의 내면이 투사된 공간이다. ‘바람둥이 수컷 원앙’과 ‘비명을 지르듯 우는 되강오리’는 인물의 잠재적 감정이 상징적으로 발화되는 장치다. 정유정은 구체적이되 과잉되지 않은 묘사, 정확한 비유, 촘촘한 언어 리듬을 통해 인물의 감각과 세계의 질감을 밀착시킨다. 그 결과 독자는 사건의 외형보다 인물이 세계를 ‘느끼는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 감각의 내면화, 즉 ‘감정의 시점화’가 정유정 문체의 핵심이다.
정유정의 소설은 장르의 속도감과 문학의 사유가 교차하는 드문 지점에 선다. 짧은 단문과 절제된 어휘는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문장 사이로 미묘한 심리의 흔들림이 스며든다. 그녀의 인물들은 단순히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이때의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른 우주를 가진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 아내의 우주였다.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타협이 있을 리 없었다. 아내는 그의 거절을 거절했다.”
— 『완전한 행복』, 정유정
이 문장들은 소설의 중심 윤리를 압축한다. 정유정의 세계에서 ‘악’은 외부에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내부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이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을 완전하게 만들려는 순간, 그것은 파멸로 기운다. 정유정은 그 과정을 차갑고도 생생하게 포착한다.
그녀의 서사적 전략은 다층적이다. 여러 인물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각자의 내면과 트라우마를 섬세하게 탐문한다. 이 다성적 구조 속에서 사건의 실체는 퍼즐처럼 드러난다. 그러나 독자는 퍼즐을 맞추며 추리하는 대신, 인물의 내면을 따라 ‘체험’하게 된다. 정유정의 문체는 독자에게 사유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심연을 목격하게 만든다.
그녀의 문장은 단호하고, 그 단호함 속에서 섬세하다. 언어의 단면마다 냉정한 리얼리티가 닿아 있고, 그 리얼리티는 곧 인간의 심리적 압박으로 변주된다. 일상의 언어를 통해 공포를, 평범한 대화 속에서 윤리적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정유정 문학의 고유한 리듬이다. 이 리듬은 독자로 하여금 불안, 죄의식, 구원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가게 만든다.
정유정의 인물들은 사건을 ‘겪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을 ‘그리는’ 존재다. 그들의 욕망이 세계를 설계하고, 그 설계의 틈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바로 그 틈을 정유정은 섬세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소설은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방에 불을 켜는 동시에, 그 빛의 방향을 끝내 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완전한 행복』은 악의 탐구이자, 동시에 인간이라는 미지의 구조에 대한 기록이다.
사건과 인물의 비중이 갈라놓은 문학의 두 결
문체의 품질에서도 두 작가의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혜연의 문장은 간결하고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도식적 해설로 기울며 감정의 온도를 잃는다. 사건의 맥락을 빠르게 제시하기 위해 서술자는 종종 인물의 내면을 ‘요약’하거나 ‘해석’한다. 그 결과 독자는 인물과 감정적으로 동조하기보다, 사건의 구조를 외부에서 ‘이해’하는 독법으로 이동하게 된다.
반면 정유정은 인물의 감정을 직접 해석하지 않는다. 인물의 시선이 포착한 사물의 질감, 묘사의 리듬, 언어의 호흡을 통해 내면을 암시한다. 인물의 심리적 진동이 언어의 표면에서 살아 움직이며, 독자는 ‘사건을 따라가는’ 대신 ‘인물의 내면을 체험하는’ 감각으로 진입한다.
결국 두 작가의 차이는 인물과 사건의 관계 설정에서 비롯된다. 정혜연은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인물을 그 안으로 불러들인다. 인물은 사건의 해석자로 머물고, 서사의 구심력은 외부에 있다. 반면 정유정은 인물의 내면에서 사건을 발생시키며, 서사의 동력은 내부로부터 생겨난다. 이는 단순한 구성의 차이가 아니라, 문학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관점의 차이다. 정혜연에게 인간은 세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할 존재’이며, 정유정에게 인간은 세계를 ‘의미화하는 존재’다.
이 차이는 독서의 감정적 경험에서도 선명하다. 『홍학의 자리』를 읽는 독자는 사건의 긴장감에 몰입하지만, 그 몰입은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이다. 서사가 닫히면 감정도 소멸한다. 반면 『완전한 행복』의 인물은 읽고 난 뒤에도 남는다. 인물의 욕망과 결핍이 독자의 내면에 오래 반향하며, 그 잔향 속에서 문학의 여운이 깊어진다. 문학적 완성도란 바로 이 여운의 지속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정유정의 소설이 장르적 흡입력과 문학적 품격을 동시에 획득한다는 평가는, 언어의 정밀함과 인물의 서사적 구축이 결합된 결과다. 그녀는 스릴러의 외피를 입되, 그 내면에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문하는 정통 문학의 심층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정유정을 단순히 장르문학 작가로 규정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그녀의 작품은 범죄와 심리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윤리와 감정 구조를 탐사하는 문학적 실험의 장이다.
반면 정혜연의 『홍학의 자리』는 사회적 문제의식과 장르적 완성도를 갖춘 성취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문학적 층위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은 작가의 한계라기보다, 서사 전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다.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는 독자의 몰입을 얻는 대신, 인물의 여백을 잃는다. 그러나 문학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예술이라면, 인물의 생동이 배제된 서사는 세계의 심도를 좁힌다.
요컨대 『홍학의 자리』와 『완전한 행복』은 오늘의 한국 장편소설이 서사와 인물, 장르와 문학성 사이에서 어떤 길을 모색하는지를 보여주는 두 갈래의 형식이다. 하나는 사건의 현실성과 긴장을 통해 사회적 공명을 끌어내려는 시도이며, 다른 하나는 인물의 내면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전자가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서사적 기술이라면, 후자는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문학적 깊이다.
문학의 완성은 속도보다 밀도에서, 설명보다 체험에서 발생한다. 그 차이를 인물의 호흡 속에서 느끼게 하는 작가가 정유정이다. 『완전한 행복』의 문장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언어로 재현하며, 그 안에서 세계는 인물의 시선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지점에서 정유정의 문학은 ‘인물을 사건으로 만드는 문학’이라는 현대적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장르 문학의 저평가와 그 안의 문학적 윤리
장르 문학의 저평가에 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문학 제도 내부의 위계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장르 문학은 오랫동안 ‘본격문학’과 대비되며, 상업성과 통속성, 특정 독자층 중심이라는 이유로 주변부로 밀려났다. 문학이 고유의 예술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장르 문학은 가벼움의 이름으로 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 분류는 문학의 본질을 규정하기보다, 제도와 평단이 만들어낸 위계의 결과에 가깝다. 순수문학이 예술의 형식을 대표해온 동안, 장르 문학은 대중의 감정과 욕망, 윤리적 불안을 담아내는 또 다른 언어로 존재해왔다.
오늘날 비평가들은 장르 문학을 하나의 ‘전문화된 문화 텍스트’로 본다. 그것은 단순히 오락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이 작동하는 서사적 실험의 장이다. 특정 서사 코드와 독자층을 확보한 장르 문학은 디지털 환경과 콘텐츠 시장 속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특히 한국에서의 장르 문학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이브리드적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도적 비평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이 ‘게토화’는 장르 문학의 상업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문학성의 기준이 여전히 ‘진지함’과 ‘난해함’에 의해 평가되는 구태의 산물이다.
한국의 문단 구조는 이러한 위계를 더욱 공고히 해왔다. 주류 평단은 장르 문학을 검토와 진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반대로 장르 팬덤은 국내 문학보다 고도화된 해외 콘텐츠를 선호하며 고립된 생태를 형성했다. 문학의 제도와 시장 모두가 장르 문학을 비평적 공백 속에 방치한 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장르 문학 독자들은 그 어느 독자층보다 높은 충성도와 해석 능력을 지닌다. 그들은 장르의 문법을 이해하며, 서사적 실험의 일관성을 예리하게 감식한다. 장르 문학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무겁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독자의 수준’이 만들어낸 윤리적 요구에 가깝다.
문학의 세계에서 ‘기대’는 하나의 계약이다. 독자는 장르를 통해 자신이 경험하고자 하는 감정의 궤적을 선택하고, 작품은 그 기대에 응답함으로써 문학적 신뢰를 얻는다. 따라서 장르 문학에서 실망의 감정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된 감정의 불이행으로 인한 배반의 체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르 문학은 대중의 윤리를 가장 첨예하게 시험받는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영화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최근 극장가의 침체 속에서도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과 <체인소 맨: 레제편> 같은 작품들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취를 거둔 것은, 장르의 몰입력과 미학이 더 이상 ‘가벼움’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탄탄한 세계관과 서사적 독창성, 미학적 정합성은 오늘날의 관객이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성의 형식으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이를 단순한 ‘매니아 취향의 콘텐츠’로 간주한 일부 평론의 태도는, 변화하는 감수성과 시대의 문법을 읽지 못한 채 스스로를 낡은 진지함 속에 가두는 일이다.
한국의 장르 문학이 맞닥뜨린 진짜 위기는 시장의 부진이 아니라, 인식의 정체다. 문학의 언어는 이미 경계를 넘어섰고, 독자 또한 장르와 순수의 구분을 넘어 감정의 밀도와 사유의 깊이로 작품을 평가한다. 비평이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문학은 더 이상 현실의 감각을 포착하지 못하는 예술이 될 것이다. 결국 장르 문학의 재평가란, 새로운 독서의 윤리를 회복하는 일이며, 문학이 시대의 감각을 다시 끌어안기 위한 자기 반성의 과정이다.
스릴러의 윤리, 혹은 응시의 문학
장르 문학의 저평가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문단 내부의 위계 문제를 넘어, 한국 문학 제도 전반이 품고 있는 ‘문학성’의 협의적 정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순수문학이 인간 존재의 심층을 탐구하고 언어의 미학을 구현하는 문학이라면, 장르 문학은 흔히 상업성과 통속성, 특정 독자층의 취향에 맞춘 서사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 구분은 문학의 본질을 오히려 협소하게 만든다. 문학성이란 언어의 수사적 정교함만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깊이를 통해 세계의 불투명함을 견디게 하는 사유의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장르 문학은 단지 오락적 서사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사하는 새로운 문학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정유정과 정혜연의 스릴러 혹은 추리 소설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의 작품을 장르문학으로만 한정짓기에는 그 내적 구조가 보여주는 사유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다. 그들의 서사는 단순한 범죄극이나 심리 미스터리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죄, 사회적 구조 속의 비극을 탐문하는 윤리적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장르의 외피 아래 감춰진 인간학적 사유의 층위가 문학으로의 재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다.
정유정의 『7년의 밤』과 『종의 기원』은 살인의 동기나 범죄의 추적이라는 외형적 틀 속에서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본다. 『종의 기원』에서 범죄자는 사건의 대상이 아니라 서사의 주체로 서며, 독자의 도덕적 위치를 뒤흔든다. 그는 악을 저지르지만, 그 악은 초자연적이거나 반도덕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적 관계 속에서 번진 감정의 변이다. 정혜연의 『고백하는 밤』과 『단 한 사람』에서도 피해와 가해의 경계는 흐려지고, 여성의 시선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재정의하려 하지만, 그 시선은 곧 자기 소멸의 서막이 된다. 정혜연의 서사에서 ‘고백’은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심연으로의 하강이다. 이처럼 장르적 장치는 긴장과 몰입의 기술이면서, 동시에 인간 내면의 윤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철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스릴러는 결국 인간의 어둠을 직시하게 하는 인문학적 도구다.
장르문학의 재평가를 가능하게 한 사유의 기원은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은 범죄와 추리의 틀 안에서 ‘사유된 악’의 허망함을 드러내며,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탐문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은 사회적 불의에 대한 반항이자 자기 존재의 증명이었지만, 그 이성적 계획은 결국 무너진다.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분열은, 정유정이 다루는 인물들의 붕괴와도 닮았다. 범죄는 사건의 표면일 뿐, 진정한 무대는 인간의 내면이다.
또한 아가사 크리스티,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혹은 질렌 마클렌 같은 작가들이 구축한 추리 서사 속에서도 사건의 해결보다 인간의 동기에 천착하는 윤리적 미학이 드러난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에서 살인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심리적 정당화로 나타난다. 이들이 세운 ‘추리의 미학’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의 모호한 동기를 탐문하는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정유정과 정혜연은 바로 이 계보의 현대적 계승자다. 그들의 서사는 ‘사건 이후의 인간’을 묻는 윤리적 문학이다.
한국의 문단 구조는 오랫동안 순수문학 중심의 가치체계에 기반해왔다.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가 출판계에 본격적으로 스며들면서, 문단은 역설적으로 더욱 폐쇄적 위계를 형성했다. 장르 문학은 대중문화의 하위항으로 배치되었고, 비평은 이를 ‘문학 외부’로 간주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 독서의 행위 자체가 상호텍스트적 경험으로 변모하면서 이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장르문학 독자들은 높은 충성도와 장르적 해석 능력을 갖춘 해석자들이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해석의 층위는 문단 비평이 잃어버린 ‘독자의 사유’를 되살린다. 다시 말해, 장르문학은 더 이상 ‘2군의 문학’이 아니라, 오늘날 독서 행위의 중심에서 문학적 의미를 재구성하는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정유정의 『28』은 전염병의 혼란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의 탐욕과 공포를 통해, 근대적 이성과 인간주의의 붕괴를 목격하게 한다. 『종의 기원』의 주인공이 선악의 경계를 가르는 내면의 균열을 경험한다면, 정혜연의 『단 한 사람』은 타자의 욕망을 해석하려는 언어의 미로를 그린다.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의 개념을 통해 보면, 그들의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존재시키려 하지만, 그 시선은 곧 그들을 파괴한다. 범죄는 결국 존재의 거울이다. 그들이 추리하는 것은 타인의 비밀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이다.
스릴러는 본질적으로 ‘반복의 서사’다. 유사한 플롯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지만, 작가적 성취는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새롭게 해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정유정의 서사가 기술적 서스펜스를 넘어 존재의 무게를 견디는 윤리적 탐구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릴러는 악을 폭로하는 장르가 아니라, 악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문학적 거울이다.
따라서 정유정과 정혜연의 스릴러는 문학과 장르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경계의 문학이다. 그들의 작품은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실험적 언어로 기능한다. 범죄와 추리라는 외피는 인간의 욕망과 공포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며, 그 경계를 넘나드는 내면의 진동이야말로 문학의 근원적 주제다.
보들레르가 『악의 꽃』에서 “추악한 것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인의 의무”를 말했듯, 스릴러는 인간 내면의 악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적 예술이다. 정유정과 정혜연의 작품은 그 악의 미학을 윤리로 승화시킨다. 그들의 서사는 독자에게 단순한 소비의 쾌락이 아니라, 타인의 어둠을 응시해야 하는 윤리적 독서의 감수성을 요구한다.
결국 스릴러의 문학적 가치란, 공포나 긴장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투명성을 끝까지 응시하는 데 있다. 정유정과 정혜연이 세운 서사의 윤리학은 그 응시의 문학이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어둠을 통과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기에, 그들의 작품은 ‘장르의 한계’가 아니라, 오늘의 문학이 새롭게 도달한 하나의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