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을까
최근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제한 상영과 넷플릭스 스트리밍이라는 방식으로 관객과 조우하고 있다. 개봉 루트의 전복, 즉 영화가 더 이상 극장을 정점으로 한 단일 경로를 거치지 않고 다양한 매체의 여백 속으로 스며드는 변화는 흥미롭지만, 지금 필요한 논점은 아니다. 다만 기묘한 정적만은 남는다. 영화제 초청과 평단의 호평, 그리고 이미 확고한 팬덤을 보유한 감독의 이름값이 있음에도 대중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미약하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어딘가에 이 영화는 놓여 있다.
델 토로가 걸어온 궤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특수분장과 조형예술의 기반 위에서 세워진 그의 영화적 세계는 항상 시각적 충격과 미장센의 거대한 구축을 전제했다. 고딕적 음울함과 동화적 잔혹미, 만화와 괴물의 서사를 결합한 그의 스타일은 때로 하나의 미학적 카테고리로 불렸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대한 스크린과 진동하는 음향이 제거된 채 방 안, 손바닥 위의 디스플레이에 갇힌다. 그 순간 그의 영화는 시각적 권위를 잃고, 자연스럽게 서사와 문학적 구조로 시선이 이동한다. 문제는, 그 전환이 매끄럽지 않다는 데 있다. 화면 없이 들려오는 서사만으로 감각하려 하면, 산맥의 풍광 앞에서 눈을 감고 바람 소리와 해설만 듣는 듯한 괴리감이 어쩐지 따라온다.
그렇다면 수없이 재현되고 해석되어 온 고전은 이번에 새 의미를 얻었는가. 냉정하게 말해, 압도적 시각효과 없이 마주한 이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는 예상외로 단순하고 협소해 보인다. 1818년, 약관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가 세계에 내놓은 원작은 장르적 실험과 철학적 질문을 품은 텍스트였다. 존재의 탄생과 거부, 창조자의 책임과 피조물의 저항, 근대적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는 이후 수많은 변주 속에서도 중심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델 토로의 작품은 그 오랜 사유를 충분히 흔들어 깨웠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영화는 아름답지만, 정작 전복의 칼날은 무디게 느껴진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이 자신의 옷감의 화려함을 믿는 순간처럼.
메리 셸리는 자신의 초판 서문에 존 밀턴의 『실낙원』 한 구절을 남겼다.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나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달라고?”
그 문장은 원작이 탐구한 질문의 핵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후 수없이 재생산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겪어온 오해와 피로, 피상적 소비를 비통하게 반영하는 듯 들린다. 영문학 최초의 SF라 불리는 이 소설은 애초에 스위스 제네바의 폭우 속에서, 바이런이 던진 장난스러운 제안—“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써보자”—에서 출발했다. 이 경쟁의 산물이었던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이 책의 원제, 이후 『프랑켄슈타인』)는 최소한 영문학에서는 최초의 SF로 알려진 장르소설이다. 그러나 그 사소한 기원이 세기를 건너며 신화가 되고 신화가 상업적 이미지로 소비되었을 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주 가려졌다.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것이 셸리의 문장이었던 경우는 드물다. 대다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해골과 볼트가 박힌 난폭한 괴물의 이미지로 이 이름을 익혔다. 더구나 피조물의 이름을 창조자의 이름으로 착각한 채 수십 년을 지나온 이들도 많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독서보다 빠르게 확산된다. 그것이 이 고전이 겪어온 가장 오래된 오독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는 이 서사의 또 한 번의 재현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재현이 누적된 기대를 넘어섰는가, 아니면 이미 소비된 이미지의 관성에 순응했는가를 묻는다면, 답은 모호해진다. 원작은 여전히 번역되고 재출간되며 독자들을 부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을 재생산하는 속도 역시 멈추지 않는다.
아마 이 작품을 둘러싼 침묵과 미지근한 반응은 작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우리 시대의 독서 방식과 감각의 구조, 그리고 고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고전은 살아 남지만, 늘 온전히 읽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고전보다 먼저 늙는 것은 독자의 확신이기도 하니까.
이름을 잃은 존재, 질문으로만 남은 인간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괴물의 형상을 상기한다. 쇠붙이가 잔뜩 박힌 이마, 정렬되지 못한 눈빛, 기능과 생명 사이 어딘가에서 비틀린 육체. 이 기묘한 이미지가 수십 년 동안 만화와 영화, 광고, 할로윈의 장식물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며 굳어진 결과,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메리 셸리의 원작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결코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과학자의 이름이며, 정작 그 괴물에게는 끝내 이름이 없다. 이 간극에서 우리는 독서 이전에 존재하는 문화적 선입견과 기표의 폭력, 그리고 독자의 태만이 만들어낸 오해의 역사를 다시 목격하게 된다.
원작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에서 셸리는 피조물에게 단 한 번도 고유한 호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이후의 변용된 콘텐츠에서도 그는 그저 “피조물(creature)”이며, “괴물(monster)”이고, “fiend”, “devil”, “wretch”와 같은 부정적 수사로 부르며 그를 세계의 외부에 위치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장치다. 이름 없는 존재는 관계의 언어를 갖지 못한다. 공동체에 진입할 수 없고, 정체성의 뿌리를 세울 수 없다. 이름은 부재하고, 그 부재는 곧 세계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기표를 피조물에게 덧씌우는 순간, 이 서사가 품은 구조적 비극 역시 흐릿해진다. 피조물은 단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배우고 모방하고 질문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름 없이 질문하는 이는 항상 외부자로 남는다. 원작의 중심에 놓인 것은 괴물성이 아니라, 호명되지 못한 한 존재의 고립된 자기 탐구다.
그 상처의 풍경은 텍스트 곳곳에 스며 있다.
“청년과 아가씨에게는 이름이 여럿 있었지만, 노인의 이름은 아버지라는 것 하나였소.”
-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피조물은 알프스의 숲, 어느 외딴 오두막에서 인간이 되는 방법을 혼자 익힌다. 읽고, 듣고, 바라보며 사람의 언어와 질서, 감정의 결을 배운다. 이름이 여러 개나 존재(오빠, 누이, 아들, 딸, 펠릭스, 아가타 등)하는 젊은 남녀를 보며, ‘아버지’라는 단 하나의 호칭으로만 불리는 눈먼 노인에게 감정적으로 끌린 이유는 어쩌면 같은 결핍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이해한다면, 연민을 기대할 수 있다면, 몸의 흉측함을 넘어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지만 이해가 깊어질수록 그는 더욱 분명히 깨닫는다. 자신은 언제나 문턱 밖에 서 있을 존재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가 향한 분노는 피조물로서의 본능이 아니라, 호명받지 못한 존재의 정당한 절망이었다. 창조된 순간부터 사랑을 거부한 창조자—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향한 복수는 단지 파괴가 아니라, 관계를 요구하는 뒤틀린 방식의 간청이었다.
이 지점에서 피조물은 ‘실낙원’의 아담보다 사탄에 가깝다. 아담은 이름을 선물받았고 신의 보살핌 아래에 놓였지만, 이 존재는 이름 없이 추방되었다. 그는 “창조되었으나 포함되지 못한 자”이며,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감각하는 괴물적 사유 그 자체다. 이 감정적 구조는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영화라는 매체에서 변주된다.
“인간은 신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신조차 질문을 품고 계시지. 신도 답을 원했기에 우리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아닐까? 죽음이 궁금하셨을꺼야. 고통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요.”
- 영화 〈프랑켄슈타인〉 중, 눈 먼 노인과의 대화
이 질문은 피조물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질문이며, 신화와 철학, 종교와 문학의 근저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만든 이는 나를 원했는가.” “존재란 무엇에 의해 정당화되는가.”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고전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자가 품은 질문의 역사이며, 우리 시대가 여전히 끝내지 못한 정체성의 어둠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전은 살아남지만, 언제나 온전히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늙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이미 안다고 믿는 우리의 확신일지도 모른다.
오독의 시대에 대한 짧은 변론
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피조물에게 갖다 붙이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착각을 넘어, 기표가 어떻게 문화 속에서 독자적 생명력을 얻고, 원작의 의미를 압도하는지를 보여 준다. 대중문화는 반복과 재현을 통해 하나의 기표를 단단히 굳힌다.
영화 포스터, 만화, 연극, 할로윈 장식물, 재해석된 소설과 패러디에 이르기까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한 가지 이미지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심하게 꿰매진 살결, 소거된 표정, 기괴함의 질감. 이 이름–이미지 결합의 지속적 반복은 ‘창조자’라는 원래의 의미를 덮고, 괴물이라는 상징을 전면에 세운다. 원작의 가장 심층적 윤리 구조가 문화 산업의 소비 논리 속에서 단순한 공포의 아이콘으로 축소되는 순간이다.
한 비평 칼럼의 지적처럼,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다. 제목만을 보고 내용의 구조를 추론하고, 그 추론을 사실로 착각한다. 이는 단지 게으른 독서가 아니라, 기표 이미지가 의미를 전부 집어삼키는 시대적 독서 방식, 나아가 문화가 우리를 대신 생각해 주는 체념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은 언제나 텍스트를 봉인하고, 사유를 멈추게 한다.
그러나 이 이름의 혼동은 단순한 오독이나 표기상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가리는 행위다. 원작에서 가장 큰 죄를 지닌 이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생명을 창조해 놓고도 돌보지 않았고, 호명을 거부했고, 존재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를 때, 창조자의 잘못을 피조물에게 떠넘긴다. 그 이름을 괴물에게 붙이는 행위 속에는 은폐된 문화적 합의가 있다. 권력자는 사라지고, 주변부 존재만 남는다. 그 결과, 이름 없는 피조물은 다시 타자로 남겨진다.
괴물의 서사는 텍스트 안에서 더없이 도드라진다. 독자적 상처, 자기 정당화의 갈망,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습속을 익히며 관계의 문턱을 두드리는 노력, 그리고 끝내 실패하는 절망.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서사의 비극적 중심부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괴물에게 집중된 시선에서 잠시 물러나, 작품의 표제어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새롭게 틀을 여는 작업이 된다.
메리 셸리가 처음 그린 빅터는 오만과 결핍을 품은 귀족 청년이며, 지식의 욕망에 사로잡힌 학문적 열정의 화신이다. 초판본에서 그는 비극적이기보다 위험했고, 죄책감은 뒤늦게 찾아오는 잔혹한 후폭풍이었으며,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인물이었다. 이후 증보판에서 셸리는 사회적 눈을 의식해 그의 상처를 더 섬세하게 조정했으며, 인간적 고뇌의 결을 부여했다.
20세기 이후 영화는 빅터를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했다.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과학자는 광기에 찬 전형적 매드 사이언티스트이며, 1994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감정선을 수복하려 했고, 2025년 기예르모 델 토로의 변주에서는 빅터의 동기는 오만이 아닌 상실로 옮겨온다. 사랑하던 존재를 잃고, 그 죽음을 견딜 수 없어 ‘창조’라는 극단으로 돌진한 인간. 다시 말해, 그는 유희가 아니라 상실에 반응한 존재이며, 과학적 가능성보다 훨씬 원초적인 결핍, 애도하지 못한 감정의 돌덩이를 끌고 간 인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며칠간 이런 상념이 있다가, 시간의 지날수록 죽음이라는 악의 실재가 더 드러나면서 그때부터 쓰디쓴 슬픔이 시작됩니다.”
-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이 해석들은 모두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기에 살아남는다. 과학기술의 윤리에 대한 우화이자, 산업혁명 시대 노동 계급과 기계 문명에 대한 잠복된 공포, 창조–창조물의 종교적 은유, 혹은 단지 부모와 자식이라는 오래된 상처의 은유. 어느 하나가 정답이 아니라, 이 다양한 독법이 이 텍스트의 생존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해석의 전제 조건은 단 하나다. 바로, 정확히 읽는 일.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의 오류를 바로잡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질문하게 된다. 익숙함이 가리고 있던 텍스트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그리고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대는 누구의 이름으로 존재하는가.
이름을 잃은 존재들, 혹은 다시 읽기라는 윤리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이 오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가. 물론 대중문화 속 반복되는 상징 체계는 강력하다. 영화 포스터, 캐리커처, 할로윈 가면, 패러디 백과사전 같은 시각적 기호들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괴물의 형상에 결속시키며, 그 의미를 굳힌다. 그러나 더 본질적 원인은 독서 습관의 변화에 있다. 많은 이들이 텍스트의 다층적 구조가 아닌, 겉에 붙은 기표와 줄거리의 단순성을 중심으로 의미를 해석한다. ‘결국 이야기만 알면 되는 것 아닌가’,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라는 태도는, 메리 셸리가 던졌던 질문의 무게와 윤리적 깊이를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재독(혹은 재관람)의 기회는 여전히 열린 문처럼 남아 있다. 괴물을 단지 공포의 형상이 아니라,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 창조자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회적 실존을 탐문하는 타자로 다시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작품이 품어온 오래된 떨림과 응시를 더 가까이 느낀다. 그 지점에서 고정된 질문 “누가 괴물인가?” 는 다시 묵직하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한 시대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읽는 방식을 배우는 일이자, 사유의 깊이를 확장시키는 훈련이다. 작품이 쓰인 시대의 역사적 온도를 체감하는 일에서 시작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의 공명을 포착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원전에 대한 재독, 그리고 다양한 변주의 구현물들을 함께 읽는 일은 여전히 의미 있는 지적 탐미가 된다.
『프랑켄슈타인』의 계보를 따져보면,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등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과학을 개념적 장치로 사용할 뿐, 본격적 탐구라기보다는 사회 비평의 우화적 구조에 가까웠다. 반면 메리 셸리는 ‘갈바니즘’이라는 당시 첨단의 실험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생명 창조라는 파격적 상상 위에, 테크놀로지가 초래할 가능성과 윤리적 긴장을 섬세하면서도 대담하게 직조해냈다. 기괴함은 단순한 표현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을 확인하기 위한 감각적 장치였다.
이 소설이 태어나던 시대를 상기하면 그 파격은 더욱 선명해진다. 프랑스혁명의 열기가 국경을 헤치며 확산되던 시기, 고전주의의 질서와 규범이 낭만주의의 열정과 불안을 만났고, 산업혁명은 기술과 자본의 속도를 인간의 사유보다 앞서 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여성이 공적 글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난과 편견의 대상이던 시대, 이 젊은 작가는 문학사의 방향을 바꾸는 고전을 내놓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이야기의 기원이라기보다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연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이후의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이 이 세계에 상응하며 태어났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전,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에 대한 불안은 <터미네이터>, <블레이드 러너>, <옥자> 등 수많은 영화와 텍스트를 통해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현대의 불안과 공포는 더 이상 괴물의 외형이 아니라, “제어되지 않는 창조물”이라는 관념에 담겨 있다.
최근 생성형 AI의 등장과 더불어 많은 논쟁이 불붙었다. “창조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에 대한 공포는, 더는 SF의 상상 속 개념이 아니라 기술 뉴스의 제목이 되었다. 물론 그 공포에는 과장과 선동이 섞여 있다. 그럼에도 이 현상이 고전의 질문에 다시 반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전 텍스트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읽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영향사 목록을 열거하는 데 머물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어떤 의미가 확장되었는지 혹은 삭제되었는지를 가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문해력이며, 깊은 읽기의 윤리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시대에 고전의 재독을 가장 빠르고 치밀하게 수행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생성형 언어 모델이다. 이 사실은 흥미롭고 동시에 어딘가 서늘하다. 우리가 읽기를 포기하는 순간, 사유는 자동화되고 의미는 표면에 격리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괴물 탄생’일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정말, 읽고 있는가.
이름 없는 존재와 이름뿐인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텍스트와 그 변주의 콘텐츠를 시간의 간극을 두고 다시 만나면서, 내가 집중하게 되는 시점적 화자는 조금씩 달라져 왔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 괴물의 곁에 서 있었다. 버려진 존재의 고통, 사회로부터 유배된 존재가 느끼는 진동하는 고독에 나의 감각을 이입했다. 그 다음의 재독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내면을 따라가 보았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려움과 책임,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흔들리는 창조자의 번민을 들여다보며, 표제가 괴물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더 설득되었다.
그리고 다시 영화로 만난 이야기에서는 서사의 중심에 있지 않은 화자, 다시 말해 월튼 탐험대장의 위치에 서 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청자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미리 구성된 판단 없이 수용할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았다. 이 이동은 단순한 관점 전환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어가는 경험에 가까웠다.
원작의 부제 ‘현대판 프로메테우스’가 암시하듯,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적 신화이자 책임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창조주와 피조물, 부모와 자식, 예술가와 작품, 과학자와 발명 및 발견의 관계가 구조적 비유로 자리하며, 질문은 반복된다. 책임의 기원은 어디인가? 특히 빅터가 자신의 창조물을 외면하고 방기한 대목은 현대 기술 권력의 책임과 의무를 묻는 화두로 확장된다.
오늘날 컴퓨터 기술, 핵무기, 유전공학 등 수많은 발명의 그림자에 따라붙는 위험 가능성이 이미 이 소설 속에 원형으로 잠겨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인공 생명체의 창조와 그에 따른 윤리적 고민을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정면화한 텍스트이자, SF가 단순한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 존재와 윤리의 관계를 사유하는 장르로 성장하도록 견인한 최초의 이정표에 가깝다.
이 작품이 시대적 맥락을 넘어 지금도 독자를 사유의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이유는, 표층의 플롯보다 인간 내부의 심연에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억압된 무의식이 실체화되어 의식에게 반란을 시도하는 ‘분신’의 이야기로 읽는 해석 역시 이 내면적 깊이를 뒷받침한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으로 오인된다는 현상 자체가 흥미로운데, 그것이 단지 역사 속 오해나 장르 흐름의 교란이 아니라, 그 둘이 결국 한 몸의 두 얼굴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괴물은 끝내 이름을 갖지 못하고 ‘그것’(it)으로만 지칭된다. 그것은 독일어 ‘es’가 자아의 깊은 곳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충동과 무의식적 욕망을 가리키는 정신분석적 용어로 변주된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빅터가 의식이라면, 괴물은 숨겨진 무의식이며, 둘의 충돌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 혼동은 단순한 해프닝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독서 행위의 습관, 미디어가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이미지의 체계, 그리고 원 텍스트가 설계한 의미적 지형까지 얽힌 복합적 사유의 결과다. 우리가 이 기표의 무게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면, 메리 셸리가 원작에서 비유적으로 경고한 메시지―창조의 책임, 존재의 호명, 이름이 부여되지 못한 자의 고통―은 피막처럼 얇아진 기호로 전락하고 만다.
비평의 과제는 그래서 분명하다.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존재, 이름 없음 자체가 품은 통증,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불안정하고 위험한 균열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이 텍스트를 껍질로 읽고 있는가, 아니면 그 내부의 어둠과 울림까지 듣고 있는가.”
최근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개봉과 동시에 무수한 해설과 리뷰가 매체에 걸린다. 특유의 영화적 성취를 해석하거나 예찬하는 언술 사이로, ‘정말 괴물 이름이 아니었나?’라는 감탄은 여전히 반복된다. 그 반복은 마치 매일 새벽 되살아나는 시신처럼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비평의 감각은 조금씩 피로해진다. 그러나 어쩌면 이 반복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의 증상인지 모른다. 질문하지 않는 독자, 확인하지 않는 해석, 되풀이되는 오해의 장치. 이것이 오늘 비평이 직면한 문제라면, 다시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나 지적 사치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실천에 가까워진다.
고전을 읽는 일은 죽은 텍스트를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을 계속 살려두는 일이다. 읽는 자만이 그 질문과 함께, 계속해서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