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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의 외투에서 나온 작은 인간의 비극

「코」, 「외투」 ,「넵스키 거리」라는 거울의 도시에서

by 박 스테파노

러시아의 깊은 숨결, 다시 여는 고전의 문


러시아 문학은 먼 지리와 이질적 문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자들에게 유난히 사랑받아 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두 봉우리를 비롯해 투르게네프, 체홉, 고리키,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의 깊이와 폭을 품은 거장들이 촘촘히 줄을 선다. 이발소의 칸칸 사이에 걸린 시화에서도 빠지지 않는, 흔히 ‘이발소 시’라 불리는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는 해외 시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고, 그만큼 러시아 문학은 일상적인 거리감마저 어느 새 넘어서곤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작품들을 차분히, 그리고 꾸준히 읽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 문고판으로 처음 접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리면, 중요한 장면인 ‘라스콜리니코프의 꿈’을 설명해보라 요구받는 순간 기억은 문득 희미해진다. 「전쟁과 평화」는 더한 도전이다. 끝까지 읽어냈다는 패기가 과연 온전히 작동했는지 자문하게 되고, 주인공의 이름을 정확히 댈 수 있느냐 묻는 질문 앞에서는 대개 한 박자 멈칫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유독 특이한 현상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유럽 고전 문화권에서 멀리 떨어진 독자나 세대에게 이러한 작품들은 어쩔 수 없이 높은 진입 장벽을 내세우는 거대한 산맥처럼 보인다.


전공의 빛을 빌려 억지로라도 주요 작품을 독파해야 했던 경험도 적지 않다. 특히 처음 만나는 작가들은 사전 정보가 지극히 희소했던 시절, 텍스트 자체만으로 접근하기엔 부담이 컸고, 이해의 문턱도 두텁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소설론과 작가론 강의실에서 교수님과 강사님들이 건네주던 선행 연구와 해석은 마치 어둠 속에서 켜지는 한 줄기 등불처럼, 작품의 내면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왼쪽부터 니콜라이 고골,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한국일보 제공 콜라쥬


러시아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은 연대기의 흐름에 따라 읽어갈 때 비로소 구조가 서서히 드러나는 장르인데, 그 첫 자리에는 무엇보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쉬킨이 놓인다. 「대위의 딸」,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은 러시아 리얼리즘의 문을 연 작품들로 회자된다. 다만 소설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소설의 형식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의 미숙함과 낭만주의적 잔향이 여전히 남아 있어 대작의 반열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탁월한 시인이자 언어의 개척자였던 그는 러시아어를 완연한 문학의 언어로 일으켜 세우며 이후 세대의 문학을 위한 단단한 지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 근대소설의 계보를 본격적으로 여는 작가로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흔히 ‘고골’로 불리는 이름을 거명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 작가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선언했을 만큼, 그의 영향력은 단지 러시아 문학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 푸쉬킨이 결투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뒤 고골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그의 작품은 러시아 문학 비평의 기준점과 척도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부조리한 세계와 인간의 소외를 독특한 감각으로 형상화하며 근대와 현대 소설에 선구적인 미학을 남긴 작가로 평가받는다. 러시아를 넘어 유럽과 세계 문학까지 이어진 그 파장의 길이를 생각하면, 고골은 단지 한 시대의 작가라기보다 어떤 새로운 감각의 문을 연 이정표처럼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렇듯 러시아 문학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우리 삶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독특한 친밀성을 지닌다. 때로는 기억의 틈에 스러지고 때로는 다시 꺼내 읽어야 할 오래된 약속처럼, 우리에게 남겨진 거대한 사유의 숲을 가만히 흔들어놓는다.



페테르부르크의 그림자에서 배우는 독서의 길


고골을 읽는 일은 러시아 소설의 독서법을 연습하는 일에 가깝다. 그의 단편들은 러시아 문학의 정신을 압축해 놓은 작은 실험실처럼 작동하며, 단지 문학사적 자료가 아니라 독서 감각을 길러주는 안내판이 된다. 19세기 유럽은 귀족 계층이 문화적 향유를 일종의 세련된 취향처럼 소비하던 시기였고, 문학의 영역에서도 특히 단편 소설이 교양의 지표로 취급되었다.


러시아 역시 이 흐름을 공유했고, 단편은 침대 맡에 두고 아침과 저녁으로 읽는 ‘일용할 양식’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의 주요 문인들은 너나없이 단편을 쏟아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단편의 문체적 전통과 주제적 골격은 고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 이견을 찾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러시아 관료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 소외를 집요한 시선으로 포착한 도시 병리학의 기록이다. 이 연작 가운데 「코」와 「외투」는 흔히 ‘작은(보잘 것 없는) 인간(маленький человек)’의 비극을 가장 압축적으로 형상화한 쌍둥이 작품으로 꼽히고, 여기에 나란히 놓을 작품으로 흔히 「넵스키 거리」가 언급된다.


세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스며든 허위와 기만을 기이한 조명 아래 드러내고, 관등 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위계의 그림자 속에서 소시민의 좌절과 파편화된 자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도시의 환상은 여기에서 더 이상 낭만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긴장시키는 미세한 균열의 지형도가 된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이후 러시아 문학을 지탱하는 주요 골격을 이룬다. 고골이 마련한 ‘작은 인간’의 계보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게 이어지고, 소설을 넘어 회화와 음악에도 파문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나 고골의 작품이 지닌 의미는 단지 문학사적 영향력에 머물지 않는다. 러시아 고전 독서를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그의 단편은 일종의 훈련이자 이정표가 된다. 러시아 문학이 특히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과 생활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낯선 공간 묘사와 풍속의 세부를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기 위해서는 시공간을 이해하는 독서적 태도가 필요하다.


니콜라이 고골 「광인 일기」(1835) 주인공 포프리신을 그린 삽화. 한국일보 제공


그 첫 관문이 바로 ‘관등’과 ‘이름’이다. 러시아 관료제의 질서는 사회적 위계를 촘촘히 드러내는 체계였고, 인물에게 부여된 관등은 소설 속 사건의 방향과 긴장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된다. 더불어 이름이라는 요소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부칭+성씨로 구성된 3단 구조는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지문이고, 각 이름에 내재한 의미는 인물의 내면을 미묘하게 드러내는 실마리가 된다. 다만 한국어 화자에게는 입에 쉽게 붙지 않는 음절들이 많아 이름을 매번 새로 읽는 듯한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어야 러시아 소설의 다층적 결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인물 작명 기법인 ‘캐릭토님(charactonym)’은 유용한 참고점이 된다. 이름 자체가 인물의 성격, 운명, 혹은 숨은 상징을 말없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골의 「코」, 「외투」, 「넵스키 거리」라는 페테르부르크 연작은 러시아 소설을 읽는 데 필요한 감각을 길러주는 초입의 문이다. 도시의 공간적 의미를 먼저 이해하고, 그 위에 관료 사회의 구조와 은폐된 폭력을 읽어내며, 더 나아가 캐릭토님이 드러내는 인물의 내적 지층을 따라가다 보면, 러시아 문학과의 거리는 조금씩 좁아진다. 고골이 만든 이 문학적 지형도는 우리에게 단지 텍스트 해석을 넘어, 한 시대의 숨결과 인간의 고독을 읽어내는 법을 조용히 가르쳐준다.



인공의 강 위에 뜬 도시, 그 환상과 균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제국을 유럽으로 열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전초기지였다. 1703년, 핀란드만으로 흘러드는 네바강 하구의 습지대에 그가 세운 도시는 자연스러운 확장이 아니라, 서구로 향한 열망이 강제로 구축한 인공의 지형이었다. 곧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의 창’이라는 상징을 부여받으며 러시아 내부에서 서구 문명을 급속히 수용하려는 근대적 실험장이 되었다.


이 도시는 바둑판을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구조 위에 설계된 공간이기에 흔히 자연을 굴복시키려 한 ‘인간의 바벨탑’으로 비유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전 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계획적인 도시”라 일컬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건설 과정에서 희생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음울한 별명도 따랐다. 1824년 대홍수는 이 인공 도시의 기반을 무너뜨리며 자연의 힘이 어떤 폭력과 복수를 감행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고, 그 이후 페테르부르크는 문명적 광휘와 동시에 불길한 기운을 품은 장소로 기억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아래 이 도시는 러시아 속의 유럽이 되었지만, 서구를 향한 모방과 열망은 곧 이질적 정체성의 그림자를 남겼다. 고골은 이 빛과 어둠의 경계를 누구보다 먼저 감각한 작가였다. 그의 산문에서 페테르부르크는 현실과 환상이 엇갈린 거대한 무대로 변모하며, 사람들에게 전체성의 환상을 강요하는 일종의 감옥처럼 작동한다. 고골이 조형한 세계는 늘 두 영역의 문턱에 걸려 있고, 「코」·「외투」·「넵스키 거리」로 이어지는 단편들은 이 도시의 인공적 성격과 인간 소외를 하나의 싸이클로 담아낸 기록이 된다.


“이 넵스키 거리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 「넵스키 거리」, 니콜라이 고골


「넵스키 거리」는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알레고리다. 그는 도시의 기후를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사실적 코드로 사용한다. 페테르부르크의 추위, 안개, 눈보라, 바람, 그리고 주기적으로 반복된 홍수는 인간을 잠식하는 초자연적 힘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혹한은 정태적이며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서사적 장치이자, 도시의 내면을 드러내는 불길한 기호처럼 기능한다.


넵스키 대로. 핀터레스트 제공


페테르부르크 문화는 근본적으로 인공적이고 비현실적이다. 허허벌판 위에 무리하게 세워진 도시라는 기원 자체가 이미 초자연성과 연극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고골의 소설 속 페테르부르크는 ‘영혼이 부재한 곳’, 곧 ‘악의 공간’으로 변주된다. 이곳은 전통적 러시아 문화에서 벗어나 서구주의자들의 손으로 급히 만들어진 도시이자, 새로운 관료 사회를 탄생시킨 실험장이었다. 그만큼 이 도시는 현실과 비현실이 겹겹이 충돌하는 장소이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손쉽게 무시되는 구조적 폭력을 내장한 공간이었다.


페테르부르크를 바라보는 고골의 시선은 단순한 도시 비평이 아니다. 그는 인공의 빛 아래 놓인 인간의 내면을 더듬고, 문명이 만든 균열을 초현실적 서사로 드러낸다. 그의 단편들을 읽는다는 것은 이 낯선 도시의 구조와 정서를 따라가며, 러시아 문학이 품고 있는 깊은 균열과 불안을 감각하는 일의 시작이 된다.



환상의 도시와 작은 인간의 그림자


고골은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 넵스키 거리를 악마적 기운이 스며든 공간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 도시는 빛의 문명과 어둠의 욕망이 서로 얽히는 장소였고, 순수한 의지는 현실에서 도무지 발붙이지 못한 채 꿈과 환상의 틈새에서만 잠시 작동할 수 있었다. 고골이 부조리한 세계와 인간 소외를 독창적으로 조형한 선구적 작가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환상소설 「코」다. 인간 몸의 사소한 일부에 불과한 ‘코’를 떼어내어 자율적 존재로 변모시키는 이 기이한 변신 서사는 인간 세계의 불완전성과 비논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고전 소설이 인과성을 이야기의 기본 규율로 삼아 온 데 비해, 「코」의 서사는 인과 관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전개된다. 이러한 서사적 전복은 소설의 현대성이 움트는 지점으로 평가된다.


고골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현실 세계와 코가 살아 움직이는 초현실적 세계를 병치하여 보여 주며,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자체가 얼마나 환상적이고 불안정한지 탐색한다. 1836년에 발표된 「코」는 카프카의 「변신」(1915)보다 거의 한 세기 앞서 이러한 실험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현대성을 품고 있다. 작품 말미에서 고골은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일 수 있다”는 반전의 문장을 직접 적어 넣는다. 이때 ‘코’라는 모티프는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꿈’과 등가의 의미를 지닌 기호가 된다. 주체가 경험하는 꿈의 파열, 더 정확히는 꿈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균열은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말의 꿈’과 같은 장면으로 변주되어 문학적 계보를 이룬다.


고골의 「코」를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le nez>(1963). iMDb 제공


고골의 환상은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균열을 정면으로 비추어 독자들을 낯선 각성으로 이끄는 힘을 지닌다. 그는 비현실적 상황을 통해 공포나 신비감을 부각하기보다, 그 속에서 기묘할 만큼 생생한 현실감을 끌어낸다. 독자들은 환상을 환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것을 현실의 또 다른 얼굴처럼 받아들인다. 이러한 반응은 고골 특유의 환상 문학이 지닌 본질을 드러낸다. 고골의 인물들은 황당할 만큼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인간적 고단함을 안고 있어 독자를 웃기다가도 뜻밖의 연민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완벽한 실화가 환상적인 이야기로 발전해 나가는 데 사실상의 원인이 된 그 고위층 인사를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하게 방치했다."

— 「외투」, 니콜라이 고골


고골의 단편 「외투」에 이르면 환상은 공포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더욱 짙어진다. 이 작품은 1839년 마리엔바트에서 구상되어 1841년 로마에서 완성되었다. 고골은 친지에게서 들은 하급 관리의 일화에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덧붙여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겨울 외투를 살 돈이 없어 여름 외투를 80루블에 구입해 추운 계절을 버텨야 했고, 그러한 현실적 결핍이 작품의 정서를 이루는 촉발점이 되었다.


모음집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가운데 가장 늦게 쓰였지만, 「외투」는 러시아 문학사 전체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남았다. 비평가들은 오래전부터 이 작품을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감수성’이 태동하는 출발점으로 읽어 왔다. 조롱과 냉대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울어진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문학적 힘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자폐적이며 극도로 내향적인 하급 관리 아카키는 ‘작은 인간(보잘 것 없는 인간)’의 전형을 이루는 인물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작은 인간’은 소시민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 유형으로, 사회의 위계 속에서 낮은 자리에 머무르고, 그 조건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어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단절된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은 대체로 말단의 공무원 또는 하위 계급의 장교로 등장하며, 가혹한 조롱과 압박을 견디는 속에서 점점 더 특정 사물 또는 관념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그 집착은 그들을 사회적 관계 밖으로 밀어내며 철저한 고립을 낳는다. 고골 이후 수많은 작가가 이 유형을 이어받았고, 「외투」가 보여 준 휴머니즘은 문학사적 모범으로 자리했다.


고골의 「외투」를 모티프로 한 삽화. By Vasilisa Aristova


19세기 러시아에서 관등은 빠질 수 없는 핵심 담론이었다. 구체적 숫자로 표기되는 관등은 단순한 직급 체계를 넘어 인간을 압도하는 하나의 실체처럼 군림했다. 관등이 주체의 생명력을 소거하고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묘사되는 고골의 세계에서는, 도시는 이미 관등이라는 숫자의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얽힌 거대한 감옥이 된다. 인간은 그 구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관등으로 가늠하고, 마침내 자신도 관등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관등 사회는 이미 ‘죽음에 가까운 삶’의 구조를 내포한 공간이며, 고골은 그 위계의 그림자를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작가였다.


그의 단편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소비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넘어, 인간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깎이고 지워지는지를 드러내는 비평적 기록처럼 읽힌다. 고골의 세계가 오늘까지도 현대 문학의 지형 위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균열과 소외의 감각이 여전히 우리의 현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의 그림자와 의미의 연금술


러시아 작가들이 즐겨 다루어 온 고전적 기법 가운데 하나인 ‘캐릭토님(charactonym)’은, 인물이 걸어 들어오기 전부터 그의 형상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는 단순한 별칭이나 유머가 아니라, 인물의 존재론적 성향이나 운명의 방향을 미리 암호처럼 각인해 두는 장치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부여한 이름이 인물의 외모나 직업, 성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의도적인 이름’ 또는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고골은 이 기법을 누구보다 노련하게 사용했다. 그의 인물들은 이름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심지어 이야기의 균형을 바꾸는 힘을 지닌다.


「코」의 주인공 코발료프는 ‘대장장이’를 뜻하는 ‘코발’에서 유래하는데, 그 음가가 ‘수캐’를 뜻하는 ‘코벨’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한 어원적 장난이 아니라, 인물의 거친 성향과 자기 과시적 면모를 은근히 비틀어 보여 주는 장치다. 「외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역시 ‘아카키의 아들 아카키’라는 반복적 구조로, 존재의 미세함과 기계적 일상성, 그리고 사회적 순응의 체현 같은 느낌을 전한다. 발음상 ‘카카’를 연상시키는 점은 그의 비참한 생의 바탕에 깔린 우스꽝스러운 운명을 비극과 희극이 뒤엉킨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리고리 페트로비치는 ‘표트르의 아들 그리고리’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제국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와, 교회 분열의 책임을 지닌 인물로 간주된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동시에 불러낸다.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균열이 한 인간 안에서 뒤엉키는 상징적 여운이 스며 있다. 「넵스키 거리」의 피로고프는 러시아식 파이나 만두 ‘피로그’의 변형이며, 피스카료프는 ‘놀란 쥐의 비명’을 뜻하는 ‘피스크’에서 파생된다. 인물의 존재적 가벼움, 위협 앞에서의 취약성, 혹은 성격적 예민함 등이 이름만으로도 그림처럼 부유한다.


고골을 지나 도스토옙스키로 오면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있다. 그의 이름이 ‘파괴’, ‘분열’, ‘분파’를 뜻하는 ‘라스콜’에서 비롯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름만으로도 이미 그의 사상적 균열과 내부적 파열, 사회와의 단절이 예고되며, 독자는 아직 범죄가 일어나기도 전에 주인공의 영혼에 드리워진 금을 느끼게 된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바자로프도 비슷하다. ‘시장’을 뜻하는 ‘바자르’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가지는데, 이는 그의 급진적 니힐리즘이 일종의 사상적 시장처럼 도시와 사회에 무차별적으로 펼쳐지는 양상을 암시한다.


소설 『죄와 벌』에서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현장에서 노파의 여동생과 마주치는 장면. 19세기 화가 카라진이 1893년 그린 일러스트다. 출처:중앙일보


이렇듯 캐릭토님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미학적 장치다. 첫째로, 풍자와 아이러니가 이 이름들을 통과하며 증폭된다. 이름이 인물의 성격적 결함이나 사회적 지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때, 독자는 인물의 어두운 면을 재빨리 파악하게 된다. 반대로 이름이 실제 행동과 충돌할 경우, 그 교차점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가 작품의 정조를 흔든다.


둘째로, 캐릭토님은 인물의 운명과 주제를 예고하는 서사의 은밀한 복선으로 작동한다. 라스콜니코프가 그러하고, 아카키가 그러하며, 코발료프가 그러하다. 독자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서사의 균열선을 몇 개쯤 확인하며 긴장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셋째로, 이름은 인물의 개인성을 넘어 유형성을 강화한다. 그들은 단지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라, 특정 사회 계층과 시대의 공기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가 된다. 고골의 ‘작은 인간’ 군상이나 투르게네프의 젊은 니힐리스트들이 이름을 통해 사회적 자화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캐릭토님은 설명을 절약하면서도 서사적 밀도를 높인다. 이름 내부에 의미가 이미 응축되어 있기에, 작가는 장황한 묘사를 줄이고도 인물의 전체적 윤곽을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다. 단편이나 희곡처럼 압축된 서사에서 유용한 방식이며, 고골이 이를 탁월하게 구사했다는 사실은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결국 캐릭토님은 러시아 문학의 독특한 미학적 전통이자, 작가와 독자가 은밀하게 소통하는 언어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름이 단순한 꼬리표가 아니라, 운명과 성격, 시대의 기운을 압축한 하나의 상징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고골은 이 기법을 본격적으로 정제해 낸 탁월한 장인에 가깝다. 그의 인물들은 이름 자체가 이미 이야기의 첫 문장처럼 울림을 품고 있으며, 독자의 상상 속에서 한층 더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차가운 외투의 도시에서


1990년대 중반, 아홉 시간의 야간 침대열차 끝에서 맞이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 인상은 지금도 선연하다. 광활한 역사를 벗어나 넵스키 대로 쪽으로 시선을 들었을 때, 도시는 한결같이 침묵하며 발트해를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웅장함과 무심함이 한데 얽힌 그 거리의 질서는, 어딘가 내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길을 잃은 이방인이 되는 동시에 수많은 익명 중 하나로 스러지는 기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고골이 「코」와 「외투」에서 그려낸, 현실과 환영이 맞닿아 흔들리는 페테르부르크의 정조가 바로 그 순간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코」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물의 황망한 소동을 보며 웃음을 잃고, 「넵스키 거리」의 화려한 표면 뒤에 아득한 공허가 서려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가 남긴 가장 깊은 자취는, 무심한 체계와 냉혹한 관등 사회 속에서 끝내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인간’의 초상에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이름의 어감 하나, 외투 한 벌, 신분증 한 장처럼 미세한 사물에 의해 좌우되었고, 그 사소한 결핍은 곧 삶 전체의 균열이 되었다.


「외투」의 한 장면, 넵스키 거리의 아카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출처: 중앙일보


도스토옙스키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한 작가가 다른 작가에게 건네는 경의 이상의 의미를 품는다. 이는 문학의 주변부에 있던 미미한 존재들을 중심부로 불러낸 고골의 윤리적 감각에 대한 찬사이며, 러시아 리얼리즘의 모든 서사가 이 ‘작은 인간’의 외투에서 출발했다는 선언에 가깝다. 러시아 비평가 로자노프가 급진적 사실주의자들의 해석을 거부하며, 고골은 사실을 묘사하는 대신 ‘무한히 확대하거나 제거한다’고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사회적 진실을 그 자체로 재현하는 대신, 특정 요소를 과잉 조명하거나 과감히 비워내며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접근했다.


이러한 감각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기업의 조직, 관료화된 행정, 익명의 디지털 플랫폼 등 거대한 시스템은 형식이 달라졌을 뿐, 인간을 끊임없이 비가시화하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14등급의 관등 체계는 사라졌지만, 익명성과 소외, 자신을 증명하려는 덧없는 열망은 계속해서 우리 시대의 바슈마치킨들을 낳는다. 사회에서는 작은 지위에 매달리고, 온라인에서는 ‘좋아요’와 ‘팔로우’라는 가상의 외투를 걸치려 애쓴다. 고골이 폭로했던 비인간적 관료주의와 체면의 허상은 더욱 교묘한 형태로 확장되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을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오래된 고전이 아니라, 정체성의 불안과 자기 존재의 무게를 묻는 현대인의 거울이 된다. 그의 유산은 평범한 존중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작은 인간’을 향한 연민을 기억하라는 요청이자, 우리를 압박하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투쟁의 출발점이다. 고골의 외투는 냉혹한 현실을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지만, 대신 인간을 향한 공감의 인문학이라는 가장 따뜻한 유산을 남겼다. 우리는 그의 외투를 입은 채 세상에 나왔고, 이제는 그 옷깃을 여미며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사유해야 할 때다.


1996년 모스크바 트레치야콥스키 미술관 앞에서. 내 사진

※다음 연재 부터는 이 세 작품- 「코」, 「외투」 ,「넵스키 거리」-을 하나 씩 자세히 들여다 보려 한다.
※고민 끝에 인명과 지명 등 러시아어 표기를 국립국어원의 현행 외국어 표기 기준에 따라 격음으로 통일한다. 실제 발음은 격음보다 경음에 가깝지만, 도서 제목과 인용 표기에서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타협이다.
※번역과 해석에 대한 강의 노트 참조는 은사님이신 조주관 교수님의 강해와 번역본에서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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