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이 울다」와 노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사랑의 오래된 파문들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말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이루고 있음에도, 정작 결정적인 선택의 문턱에서 사랑을 앞순위로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보조의 힘이 필요해 보인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미화된 수식이거나, ‘가족’과 ‘연인’이라는 관계의 제도적 성립 같은 것들 말이다. 거대한 개념의 외피만으로는 욕구와 현실의 침묵이 충돌하는 순간에 사랑을 온전히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다시금 정리해 본다면, 그것은 작용과 사용 사이에서 드러나는 한 겹의 쓸모에 가깝다. 사랑은 욕구에서 파생되며, 각자의 빈 곳으로부터 작동하는 방향성을 지닌다. 그 빈 곳이라는 것은 결여이자 부재이고, 결핍이자 단절이다. 사람의 감정은 이 빈 곳을 견디기 어려워하여, 결국 그것을 메우려는 마음이 생기고 우리는 이를 욕구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한 작용에 머물지 않고, 마음의 사용에 이르러 예측할 수 없는 층위를 쌓는다. 나의 결여를 채우려는 욕구가 타인의 틈으로 향하고, 어딘가 닮지 않은 두 빈 곳이 서로를 더듬으며 미묘하게 채워지는 과정. 이해타산과 의지, 오산과 기대가 뒤섞여 사용으로 나아가는 운동. 그곳에서 비로소 사랑이 태어난다.
타인의 눈에는 이러한 사랑이 언제나 무모하고, 비합리적이며, 통제가 어려운 위험으로 측정된다. 길을 잃기 쉽고, 채우려던 나의 결여가 오히려 더 큰 구멍으로 남기도 해서 상식과 논리가 엉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삶의 축을 흔드는 결정적 가치를 지닌다. 사랑의 이런 내밀한 운동은 수많은 서사와 예술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면으로 호소하는 사랑의 언어를 진부하다는 이유로 쉽게 밀쳐내곤 한다. 이때 종종 등장하는 말이 ‘신파’다.
‘신파극’은 일제 개화기 시절 유행하던 멜로드라마 형식의 연극을 가리킨다. 무르녹은 연애와 엽기적 사건,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주요 골격을 이루며, 대개는 주인공이 고난 속에서 관객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마지막에 행복을 찾는 구조다. 통속적 윤리관에 기대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지금의 ‘신파조’라는 표현은 감성을 자극해 눈물을 짜내려는 의도된 장치, 다시 말해 완성도의 부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제도와 관습을 벗어난 사랑에 대한 응징은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금기와 회피, 열망과 부정이 뒤섞인 그 마음을 ‘신파’라는 말이 교묘히 찌른다. 오늘의 세련된 감각과 빠르게 변하는 세계 앞에서 신파는 낡고 뒤처진 감정의 조각처럼 취급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뻔한 사랑 이야기 앞에서 울고 화내고 기뻐한다. 어쩌면 신파는 허술한 감정의 잔재가 아니라, 인간이 사랑 앞에서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원초적 떨림을 되묻는 오래된 장치인지도 모른다. 그 진부함 속에는 세월이 마모시키지 못한 감정의 구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랑은 결코 새롭지 않지만, 반복되는 진부함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진부하다는 말은 때로 도피의 변명이 되지만, 어쩌면 가장 오래된 감정의 형태가 세대와 시대를 달리해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낡은 서사 앞에서 때로 주저하고 때로 눈을 돌리지만, 결국 그 속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우리의 빈 곳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사랑이란, 어쩌면 결여가 서로를 알아보며 남모르게 건네는 오래된 인사에 가깝다.
신파의 기원과 산의 울림
신파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연극이 일본에 유입되던 시기, 새로운 연극 양식을 가리키기 위해 붙여진 ‘신파(新派, 새로운 물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 형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으로 옮겨오며, 일본 신파극을 모방한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2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의 역사와 정서가 스며든 고유한 신파성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이승희 교수는 “국민들은 문화 검열이라는 억압으로 좌절을 겪었지만, 문화 통치로 누린 자유로 인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됐다”며 “이러한 독립에 대한 좌절과 열망의 모순적 태도가 감정의 과잉으로 이어진 것이 우리나라 신파성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독립을 향한 열망과 그것이 번번이 꺾이던 시대적 모순이야말로, 우리 신파가 단순한 모방을 넘어 감정의 격랑을 스스로 만들어 낸 토대였다. 이러한 감정의 과잉은 중국 문학, 특히 ‘향토 소설’에까지 이식되어, 식민의 그늘 이후에도 더욱 견고해진 통제의 시대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한 감정의 밀도를 드러냈다.
이 맥락에서 중국 여류작가 거쉬핑(葛水平)의 중편소설 「산이 울다」(원제: 함산 喊山)는 신파성이 어떻게 다른 문화권에서 변주되는가를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이 작품은 2005년 루쉰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2015년 래리 양 감독이 영화 <산이 울다>로 재해석해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서사의 근간에 ‘신파적 정서’가 고요하게 깔려 있다.
1984년, 외부와 단절된 산속 부족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서사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처연한 두 남녀의 사랑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녹두를 갈아 생계를 잇는 시골 청년 한총은 아버지와 단출하게 살며, 산 건너 과부 친화에게 은근한 마음을 품고 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그는 친화를 위한 오소리를 잡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의 삶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로 비틀린다. 외지인이자 그의 외양간에 머물던 라홍이 한총이 놓은 덫의 폭발로 다리를 잃고 결국 숨을 거두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과실치사의 죄를 두고 마을에는 긴 회의가 이어진다. 공안에 신고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촌장의 부임을 앞두고 마을의 명성을 위해 이를 덮고 넘어갈 것인지. 결국 결론은 타협에 가까웠다. 라홍의 벙어리 아내 홍시아와 어린 두 아이에게 한총이 배상의 책임을 지고, 보상 방안이 마련되기 전까지 그녀의 가족을 돌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친화와의 결혼을 꿈꾸어 온 한총에게 이 결정은 멍에에 가까운 형벌이었지만, 감옥살이를 피하기 위해 그는 마지못해 이 삶을 받아들인다.
「산이 울다」는 이 강제된 돌봄의 시간 속에서 난생처음 움트는 감정을 정교하게 그린다. 홍시아는 말보다 더 깊은 침묵으로 세상을 견디는 인물이지만, 그녀가 돌아와 문을 잠그고 나서 비로소 안정을 찾는 장면은 이 소설의 정서적 결을 단번에 보여준다.
"벙어리는 몸을 돌려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행복이었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샘솟는 행복감이 가슴을 채웠다."
- 「산이 울다」 중에서
한총과 홍시아 사이에는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서로의 빈 곳을 알아보는 마음이 자란다. 억지로 묶여 시작된 관계였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그들은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처럼 변한다. 그러나 조용한 산골에서도 흐르는 소문은 막기 어렵다. 라홍과 그의 가족이 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이유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삶은 다시 갈라질 위기를 맞는다. 한총은 과거의 그림자를 알고도 그녀 곁을 지킬 것인가. 홍시아는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감추지 못한 채, 그럼에도 한총과의 소박한 행복을 이어 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틀을 넘어서, 신파가 원래 지니고 있던 감정의 과잉, 억압과 열망의 모순, 그리고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비정형의 힘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낡았다는 이유로 배제된 신파적 감정은, 이 소설과 영화에서 오히려 시대의 균열을 통과해 더 선명한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산이 울리는 것은 인물들의 비극적 운명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끝내 살아남으려는 사랑의 작은 진동이 산의 정적을 깨뜨리기 때문일지 모른다.
살인이 없어야 되는 세상의 이야기
영화에서는 위태롭게 겹겹이 포개진 바위산의 능선을 멀리서 비추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마을은 절벽 끝에 걸터앉은 듯 불안정해 보이지만, 그 안의 일상은 묘하게 고요하다. 외지인이 이곳을 찾아오는 일은 절체절명의 사연이 있거나, 세상을 피해 숨어들 각오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큰 파도 없이 흘러가는 산골의 하루에도 말하지 못한 비밀과 오래 눌러 앉은 사연들은 층층이 잠들어 있고, 그 고요를 깨뜨리듯 한총의 폭약 덫으로 라홍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진다.
요즘처럼 연일 대형 참사와 사건·사고가 쏟아지는 시대의 눈으로 보면, 이 작은 산골의 비극은 어쩌면 과장된 파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40여 년 전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던 중국에서 ‘살인사건’은 그 자체로 사회의 내장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연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차일드 44>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완벽에 가까운 체제를 자처한 국가에서 강력범죄, 특히 생명을 앗는 ‘살인’은 존재해서도 안되었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당시 경찰 조직에는 ‘강력범죄 전담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범죄를 부정하는 체제에서는 범죄를 다루는 기구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사의 배경이 된 산골 마을은 그러한 사회주의 중국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외부와 단절된 폐쇄된 세계 안에서 스스로 완결된 국가의 축을 흉내 내려 했고, 체제의 흠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박이 공동체의 규범을 뒤틀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흠없는 완전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마을 단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만약 ‘살인자 마을’이라는 꼬리표라도 붙는다면, 그것은 국가 전체의 균열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을의 회의는 법의 절차를 따르지 않고, 사건의 진실보다 공동체의 체면을 우선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한총의 과실은 분명했으나, 그를 공안에 넘기는 대신 내부 처벌로 사건을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살인은 존재하지만 살인범은 없는, 존재의 구멍만 남고 책임의 그림자는 사라진 기묘한 마을이 탄생한다.
소설과 영화는 이 모순을 서서히 드러내며, 시대가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대 중국의 단면을 은근하게 비추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의 중심을 흔들림 없이 지키면서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외양은 경이로울 만큼 견고해 보인다. 그러나 그 웅장한 구조의 이면에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14억 민중의 현실이 결코 국가가 내세우는 완전성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빈곤과 폭력의 그늘 아래에서 생을 겨우 이어가는 이들이 있고, 부와 권력을 쥔 당 간부와 졸부들이 흘린 빵부스러기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국가의 이미지를 위해 감춰진 균열, 체제의 존립을 위해 덮인 개인의 운명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침묵으로만 전할 수 있는 수많은 삶들이 있다. 영화 <산이 울다>가 응시하는 것은 바로 그 침묵의 구조일지 모른다. 완전성을 강요하는 체제는 늘 작은 마을에서부터 균열을 드러내고, 그 틈에서 비로소 한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 울리는 소리는 그 균열이 내는 비명이자, 동시에 그 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에 가까운 울림처럼 들린다.
사랑, 그놈… 돌멩이의 파문처럼
서사의 구조만 놓고 보면 이것은 ‘아주 뻔한 사랑 이야기’, 곧 ‘신파극’의 고전적 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뻔함은 때때로 가장 깊은 감정의 진실을 품는 법이다. 주인공 한총은 사랑 앞에서 망설임을 모르는 사내였다. 녹두를 갈아 생계를 이어 가고, 틈틈이 산짐승을 잡아 자신이 흠모하는 과부의 집에 가져다주는 일이 그의 하루를 이루었다. 홍시아의 가족을 억지로 떠안게 된 이후에도 그는 그녀가 머무는 외양간을 고치고 아이들의 식탁과 요람을 직접 만들며, 말 없는 여인을 품어낼 작은 세계를 손수 지어 갔다. 그런 수고가 연민이든 욕망이든, 결국 누군가를 살려내고자 하는 헌신의 움직임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홍시아 역시 오래된 침묵의 틈에서 리듬을 되찾아 가는 여인이다. 시장 축제에서 납치되어 살인자의 씨받이로 살아야 했던 지난 삶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각을 지워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자신을 돌보아주는 사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기 시작한다. 바느질하며 그의 옷깃을 이어주고, 작은 음식을 차리며 그의 하루를 건네는 일이 기쁨이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겁박 속에서 그가 공안에 연행되어 가자, 그녀는 주저 없이 그를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자신이 사실혼 관계였던 라홍을 죽였다고 자백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 혹은 허구를 감당한다. 그 고백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뭔가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 세월 잔잔하기만 하던 연못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것 같았다. 돌멩이가 떨어진 곳 주변으로 물결이 일었다. 작은 물결이지만 긴 적막을 깨뜨린 것이 분명했다."
-「산이 울다」 중에서
‘희생’과 ‘헌신’은 종종 뒤섞여 사용되지만, 그 어원적 뿌리를 더듬어 보면 두 행위는 분명 다른 결을 갖고 있다. 희생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타인을 완전히 위해 주는 행위’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주체의 존재는 어느 지점에서 소멸하고, 관계는 종종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 반면 헌신은 ‘온 마음과 온 힘을 들여 두 손을 충만히 채워주는 행위’에 가깝다. 주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건사한 채 누군가에게 더 많은 생의 온기를 나누는 생성의 행위에 가깝다.
또 희생은 목적 없는 소멸의 성격이 짙지만, 헌신은 보상과 성취를 향한 목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이해타산과는 거리가 멀다. 사랑이라는 관계의 완성을 향한 자연스러운 열망, 즉 ‘둘이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총과 홍시아의 선택을 두고 이해타산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주변의 눈초리를 견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헌신에 가깝다. 서로의 삶을 파괴하거나 소멸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돌멩이가 잔잔한 연못의 적막을 깨뜨리듯 고요한 일상에 새로운 파문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 파문은 작지만 깊은 변화의 시작이며, 그 변화는 두 사람이 함께 다시 살아갈 미래를 예감하게 만든다.
산에 걸린 사랑의 음영
서사는 의도적으로 비틀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예감했을 ‘사랑 이야기’로 흐른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구조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미세하게 기울어가는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마음의 체온을 함께 품게 되기 때문이다. 한총과 홍시아가 바라는 것은 화려한 약속이나 운명적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마을회의에서 내린 보상 판결문 한 귀퉁이에 적힌 ‘밥 세끼’의 소박한 일상, 그저 그 하루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삶. 한가위 저녁, 모두가 오늘만 같기를 빌던 그 오래된 소망이 평범한 일상의 영원성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염원과 겹쳐 보인다.
이들의 사랑은 세상의 규범 틀 안에서는 종종 배제되는 부류다. 가족의 체면과 친구의 시선 때문에 마음을 숨겨야 하는 사랑, 더 반듯해 보이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접어 넣어야 하는 사랑, 그리고 통제의 그물이 촘촘한 마을 공동체와 공안 체제 속에서 제대로 이름 붙여지지 못한 채 흔들리는 사랑. 한총과 홍시아가 택한 ‘자백’과 ‘자수’가 어쩌면 그 억눌린 감성의 울부짖음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야 겨우 드러나는 진심처럼, 그들의 선택은 사랑을 향한 마지막 통로였을지 모른다.
뻔하다는 말은 사랑 앞에서 언제나 힘을 잃는다. 신파적 설정이 반복되고, 오래된 이별의 노래가 수없이 변주되어도 우리는 그 노래를 지루하다 말하지 못한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서 계속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喊山>이며, 한국어 제목 <산이 울다>는 한문을 옮기면 ‘산이 소리치다’ 혹은 ‘소리치는 산’에 가깝다. 벙어리로 나오는 홍시아가 몰래 바위산에 올라 대야를 두드리며 외치는 장면에서 그 제목의 울림이 선연해진다. 그 소리가 실제 울음인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의 절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도 듣지 않는 산자락에서 그녀가 쥐어짜듯 내는 소리는 결국 사랑에 대한 숨김없는 고백에 닿아 있다.
그러나 사랑의 소리가 언제나 상대에게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 울림은 당사자의 메아리로만 머물고, 제자리를 돌다 사라진다. 세상에 닿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은 곳에 박혀버린 작은 돌멩이처럼 오래 남는 사랑도 있다. 사랑을 언어로 끌어올리기 전, 말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가슴 안쪽을 긁으며 오래 눌러앉은 감정의 덩어리. 어쩌면 이런 무거운 침묵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얼마 전 경쟁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55호 참가자가 부른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를 들으며 그 감정이 문득 겹쳐 보였다. 김동률이 작사·작곡하고 이소라가 부른 이 노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참가자의 특유의 낮고 묵직한 읊조림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마치 홍시아가 말하지 못하는 혀 대신 산을 향해 두드리던 대야의 울림처럼, 가슴이 막혀 나오지 않는 말들이 노래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 미세한 경계의 떨림이 깊게 번져 왔다.
「산이 울다」 속에서 두 사람의 서사는 결국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 혹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마음의 그림자를 비추는 산울음 같다. 소리칠 수 없어 더욱 선명해지는 감정, 침묵에서 퍼져 나오는 작은 물결. 그 잔잔한 떨림 속에서 사랑은 언제나 다시 태어난다.
사라지는 음, 사라지지 않는 사랑
이소라의 노래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깃들어 있다. 그녀가 직접 만든 곡이든, 다른 작가의 곡을 받아 불렀든, 노래들은 언제나 그녀만의 무늬를 입은 채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그 침잠의 결은 담담함을 넘어 어느 순간 듣는 이를 무력감의 중심으로 이끈다. 절규에 가까운 고음도 결국은 바깥을 향해 터지는 폭발이 아닌, 점점 꺼져 들어가는 내부의 인력에 가까워진다. 무대에 선 그녀는 대부분 의자에 기대 앉아, 마치 몸의 무게를 버티는 일조차 큰 부담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무력과 무기력의 형상이 오히려 묘한 감정의 결을 만든다. 이상하게도 그 감정은 위로에 가깝고, 때로는 조용한 응원의 빛을 띤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하진 말아요
내 마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
— 김동률 곡, 이소라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중에서
보이지 않는 길, 정상 없는 산, 헛된 희망과 무모함. 이 말들은 실은 사랑의 한때를 통과할 때 가장 눈부셨던 정조들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관계라는 이름으로 평가되는 순간, 지나간 감정은 흔히 ‘실패’나 ‘헛됨’으로 규정되곤 한다. 관찰자들의 눈앞에서 사랑은 너무 쉽게 무효 처리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살아낸 당사자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다른 이름표가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 외에 달 수 있는 호칭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 감정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 걸요
그대 두 손을 놓쳐서
난 길을 잃었죠
허나 멈출 수가 없어요
이게 내 사랑인 걸요
— 김동률 곡, 이소라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중에서
남들이 말하는 실패, 지난 감정, 허망함의 언어들은 어느 순간 서늘하게 가슴을 할퀴다가도 결국엔 반박을 유도한다. ‘이것은 내 사랑이다’라는 그 단호한 속삭임은, 두 손을 놓쳐 길을 잃어도 멈출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고백이다. 성공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조급한 삶의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미완의 사랑’을 헛됨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하여 조용히 맞서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소라의 목소리가 건네는 감정의 무게는 단순한 슬픔이나 체념이 아니다. 그 감정을 끝까지 견디려는 책임이자, 사랑을 이루는 모든 파편의 총체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대 없이 나 홀로 하려 한다고
나의 이런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려 말아요
— 김동률 곡, 이소라 노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중에서
이소라의 목소리는 방백에 가깝고, 그 방백은 곧 그녀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신념처럼 들려온다. 노래를 반복해 들을 때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이 사실 노래 자체를 향한 사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지만, 동시에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숨어 있게 하기도 하는 태도는 단순한 고립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축—노래—와의 관계를 지키려는 방식일지 모른다.
문득 <비긴어게인>에서 유희열과 이소라가 대화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유희열은 <스케치북>에 오랜만에 출연했던 이소라와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건 뭘까요?’라는 질문 끝에 ‘노래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에요?’ 했더니, 이소라는 ‘생각이요’라고 답했다.”
유희열은 그것이 곧 이소라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노래할 때 목소리만 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 말 위에 덧붙여 이소라는 “살아가는 이유라던지 존재 가치가 다른 거 외에는 없는데 이걸(노래를) 그냥 해버리면 난 아무 것도 아닌거야.”라고 고백했다. 그녀에게 노래는 재능의 발휘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사랑 역시 그와 비슷한 면을 지닌다. 누구에게나 작용하는 보편적 감정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대상 또한 일정하지 않다. 이성일 수도, 동성일 수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 인간 외의 동식물, 심지어 무형의 가치나 관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폭력의 문턱을 넘는다. 사랑의 사용법은 저마다 다르고, 그 다양한 방식들은 규정 이전의 감정들이다.
이소라의 노래는 그 사실을 잔잔한 여운으로 일깨운다. 보이지 않는 길로 향하는 발걸음들, 정상 없는 산을 오르려는 마음들—그 모든 무모함이 헛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생겨나는 흔적임을,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말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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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랑이 남기는 문장들
소설이나 영화, 노래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듯한 부끄러움이 스스로에게 번질 때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나 창작자가 언제나 의도적이고 치밀하게 인문학적·미학적 기표를 설계해 작품 속에 배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품은 독자와 관객, 청자의 눈과 귀, 마음에서 다시 태어나며,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의미는 확장되고 변주된다. 문학이나 영화, 노래가 본래 의미를 싣고 있다기보다, 우리가 그것을 의미로 읽어내고 받아 적고 감각해 내는 것이다. 결국 이 힘은 부단한 독서와 학습, 그리고 삶을 성찰하는 경험에서 길어 올려지는 것이고, 사랑도 종종 이러한 사유의 끝에서 더 오래, 더 깊게 간직되는 감정으로 숙성된다.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슬픔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만이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썼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눈물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결의이며, 자신을 흔들어 무너뜨린 감정의 진실을 끝내 바라보려는 용기다. 사랑은 그래서 늘 하나의 실험이다. 실패처럼 보였던 감정의 잔해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 흔적을 외면하지 않고 견디는 과정이다. 누군가를 통과해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곧 존재의 전환이며, 그 변화는 결코 실패라는 이름으로만 호명될 수 없다.
문학은 이 ‘낯선 사랑’의 얼굴들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산이 울다」가 보여준 것도 그러한 가능성이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사랑은 세상의 냉혹한 시선과 억압 속에서 흔들리지만, 그 순수함은 끝내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작품 속 인물들의 연약한 마음은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인을 향해 열리고, 사랑이란 결국 이해의 문턱까지 자신을 밀어 넣는 감정임을 일깨워 준다.
그러니 사랑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된 가장 근원적인 잠재력이다. 자기중심적 욕망의 껍질을 벗고 타인의 고통을 향해 조심스레 귀 기울이는 일, 조건 없는 호의와 작은 연대를 통해 삶을 조금씩 따뜻하게 데우는 일. 이러한 행동들이야말로 우리가 진리의 계명을 실제로 살아내는 방식이다. 문학 작품 속 다양한 사랑의 표정을 성찰하는 경험은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내적 용기와 지혜를 길러준다.
사랑은 종종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쳐 간 이름, 한순간 마주친 눈빛, 무심히 겹쳐진 하루의 동선—그 모든 것이 시간이 흐른 뒤 나를 뒤흔든 사건의 단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운명이라는 말은 예감이 아니라 회상의 다른 이름임을 이해하게 된다. 운명은 이미 일어난 감정의 궤적에서 역으로 드러나는 통찰이다.
그래서 사랑은 언젠가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나를 다시 써 내려가는 문장이 된다. 우리는 사랑이 남긴 문장들을 하나둘 모아 한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품는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예감이기도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을 다시 신뢰하려는 내적 고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