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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서 우리로 흐르는 글의 숨결

에세이를 비평할 수 있을까, 『수월한 농담』을 읽고

by 박 스테파노

사적 경험이 ‘우리’로 건너가는 순간


문학을 이야기한다며 펜을 놀릴 때마다 마음 한편이 잠시 멈추곤 했다. 특히 ‘나의 이야기’로 펼쳐내는 글 세계 앞에서 더 그랬다. 장르 문학을 본격 문학의 하위에 두는 낡은 문단의 거만함을 비판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자전적 에세이와 사적 회고가 쏟아지는 오늘의 풍경은 그저 반갑지만은 않다. 읽는 이보다 쓰는 이가 더 많아 보이는 기이한 시절에, 자기 진술의 홍수는 때로 문학의 숨결을 흐리게 한다.


자전적 에세이를 문학의 자리에 둘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결국 ‘문학’이라는 말이 무엇을 품고 무엇을 밀어내는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과 맞닿아 있다. 다만 개인의 기억을 곧바로 비문학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경계하게 된다. 이는 문학을 허구나 서사적 장치에만 의탁시키는 협소한 정의로 스스로를 가두는 일에 가깝다. 문학은 언제나 말의 윤리와 감각의 층위를 동시에 통과하며, 때로는 가장 가까운 경험의 실핏줄에서 세계를 다시 열어왔다.


문제는 자전적 서술 자체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어떤 언어의 밀도와 어떤 사유의 리듬을 획득하느냐에 있다. 사적인 회고라 해도 그 속에서 세계를 관통하는 상징의 골격이 드러나고, 감정의 표면을 넘어 타인의 체험까지 일깨우는 잔향을 얻는다면 이미 문학의 영역에 들어선다. 자신의 사실을 적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이 남긴 균열과 공백, 설명되지 않는 여운의 형태까지 언어로 세공하려 할 때 ‘문학적 진실’이 솟아난다. 허구냐 비허구냐는 문학의 본질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어떤 진실을 어떻게 감각화하느냐가 더 핵심에 가깝다.


서점을 채우는 에세이들. AI Sora


그럼에도 회고적 에세이의 함정은 분명 남아 있다. 자기 미화, 감정의 과잉, 기억을 안정된 형태로 봉합하려는 욕망이 늘 주변을 배회한다. 과거를 단정한 서랍에 넣듯 글을 정리하는 순간 문학은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밀려난다. 문학은 닫힌 결말을 거부하는 섬세한 존재이기에, 회고가 완결의 욕구로 기울 때 긴장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기억의 불확실성을 스스로 경계하고, 감정의 잔향을 조금 남겨두며, 자신에게조차 설명되지 않는 ‘틈’을 용납한다면 그 불안정성에서 문학적 가능성이 피어난다. 자전적 에세이의 힘 역시 완성되지 않은 진실이 만들어내는 그 떨림에서 비롯된다.


자전적 에세이를 문학의 축으로 끌어오는 일은 단순한 장르 구분을 넘어, 한 개인의 경험을 어떻게 사회적·철학적·정서적 질문으로 변환하느냐의 문제와 얽혀 있다. 삶의 파편이 언어를 매개해 ‘나’의 경계를 벗어나 ‘우리’의 감각과 조우하는 순간, 그 글은 이미 문학의 공적 공간으로 이동한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사실을 넘어서는 운동이고, 개인적 고백을 지나 존재의 구조를 겨냥하는 사유의 형식이다.


결국 물음은 이것에 가까워진다. 자전적 에세이가 자기 삶의 표피만 쓸어내리느냐, 혹은 그 삶의 균열에서 새어 나온 어둠과 빛을 언어로 잡아내 타인의 내면을 여는 창을 만들어내느냐. 후자라면 장르의 이름이 무엇이든 문학의 본령에 접속한다. 자전적 서술이 곧바로 문학이 될 수는 없지만, 문학은 종종 그런 자전적 순간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자신을 넘어 타인을 향해 미세하게 기울어질 때, 그 길목에서 문학은 다시 숨을 얻는다.



이야기가 마음의 문을 여는 방식


대문호라 불리는 이들 가운데도 자전적 회고를 작품의 심장부에 간직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백록』과 『명상록』 같은 고대의 고전에서부터 소로의 『월든』,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도스또옙스끼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그리고 박완서의 빛나는 역작들까지 모두 삶에서 체화된 경험과 감정의 깊은 층위를 길어 올린 문학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개인적 회고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마음 속에 어떤 편견이 오래 눌러앉아 있었고, 그 편견은 고집에 가까웠다.


소로의 『월든』,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키백과 사진


나이가 들면서 시간은 느슨해지고 사유의 결은 군데군데 비어 갔다. 그런 변화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채워 나가는 에세이를 다시 바라보고 싶어졌다. 세상에 쏟아지는 회고적 글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고 싶었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 이런 형식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스며들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최근인 2025년 9월에 출간되어 많은 반응을 얻은 송강원의 『수월한 농담』을 펼쳐 들었다.


『수월한 농담』은 슬픔의 결을 따라가는 책이다. 그 슬픔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작동 방식을 더듬고, 서로의 결여와 상실이 만들어낸 감정의 구조를 들여다본다. 생각보다 흔하고, 뻔하게 보이며, 익숙한 고백으로 구성된 이야기인데도 묘하게 울림이 남는다. 그 울림은 문장의 구성, 즉 말의 세공에서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에세이라는 장르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사람을 책으로 상상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사람의 삶을 내 손으로 펼쳐보는 상상. 적당한 조명 아래 편안한 책상에 앉아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미처 단어로 태어나지 못한 순간까지 상상하며 책을, 삶을, 사람을 읽는다. 사람을 쓰는 일은 어쩌면 가장 성실한 사랑일지 모른다.”

― 송강원 『수월한 농담』


사람을 쓰는 일이 성실한 사랑이라면, 그 시작은 어떤 순간도 외면하지 않는 응시에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흔하게 들리는 투병과 돌봄의 서사도 단순한 병력의 기록이 아니라, 그 순간들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을 성실하게 받아 적은 기록일 때 비로소 진실에 닿는다.


작가의 엄마이자 옥이는 폐암 4기를 진단받는다. 8.9퍼센트라는 생존 확률은 삶의 우선순위를 한순간에 뒤집고, 그 먼 물리적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신호가 되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픔이 모든 것을 삼킬 것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보다 조용하고 단정하다. 엄마는 체념이 아닌 수긍의 태도로 시간을 보내고, 아들은 깊게 가라앉았던 우울의 비늘을 벗으며 삶의 표면을 다시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 작가는 발전소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행복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 한가운데 엄마가 있었다. 엄마의 깊은 슬픔을 덜어주고 싶던 그 마음은 성장 과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굳어갔다. 퀴어 정체성과 그 자각이 불러온 혼란 속에서 그는 자주 먼 곳을 서성였고, 방황의 바깥에서 우울이 자리 잡았다. 우울에 잠식된 삶은 의미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엄마의 시한부 소식은 그 우울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용기가 되었다.


‘비생산적인 일’을 싫어하던 엄마는 세 번의 항암 실패 후 치료 중지를 결정한다. 서로의 배려가 미로처럼 얽힌 시간은 차츰 한길로 정리되고, 그제야 엄마는 오래 잃었던 생기를 되찾는다. 죽음을 앞둔 삶조차 삶이며, 죽음이 있어야 삶이 완성된다는 상식적이면서도 잊히기 쉬운 진리가 또렷해진다.


불안을 돌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작가는 비로소 깨닫는다. 엄마를 향한 마음의 기본값이 슬픔이었다는 사실을. 수태 중 품었던 우울의 고백은 그의 마음에 오래 머문 먹구름의 계보를 설명해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서로 닮은 슬픔은 희미한 위로가 된다.


송강원 『수월한 농담』. 유유히 출판사


슬픔을 마주하는 일은 그 모양을 정확히 간직하고 바라보는 일이다. 가슴마다 다른 결을 가진 품은새처럼 슬픔은 다채롭다. 그렇기에 타인의 슬픔을 관찰할 때 판단이나 단정은 폭력에 가깝다. 이미 다 아는 일이라 치부하는 성급함은 타인의 상처에 돌을 던지는 셈이 된다.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그 문을 연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어쩌면 내가 ‘나를 중심에 둔 회고적 서사’에 대해 가졌던 섣부른 시각이 바로 그 닫힌 문이었을지 모른다. 공들인 이야기와 정제된 문장은 그 문을 미세하게 열어젖혔다. 결국 나의 이야기의 총합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은 조각 모음에 가까울 것이다. 문학은 이 조각들에서 반사되고 투사되는 빛을 건져 올리는 일이라 생각하게 된다.



딸 같은 아들의 시간, 그 수월한 애도


『수월한 농담』을 읽고 생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갈래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이 개인사가 글을 쓰는 삶으로 이어졌고, 그 글이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의 틈새마다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가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개인의 성장담이나, 순간의 감상만 남기고 쉽게 사라지는 이야기와는 결이 달랐다.


작가는 엄마가 죽은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의 결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는 슬픔을 정확하게 받아들인 자들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시간 감각이다. 엄마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삶이 갈라져 보이는 경험은, 마치 역사의 시간을 예수의 이전과 이후로 나눈 오래된 구분법과 닮았다. 한 존재의 죽음이 시간을 재편하는 방식이 이토록 유사하다는 점이 묘하게 울림을 남긴다.


누군가의 사멸을 지켜보며 생기를 되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가능한 까닭은, 그 죽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극심한 우울 속에서 죽음이 유일한 해결처럼 느껴졌던 작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굳이 살아야겠다고 애쓰지 않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삶을 정당화하는 가장 명료한 명분이 비로소 생긴 것이다.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직면하면서 오히려 살아 있다는 감각이 두드러지는 경험은 과잉도 모순도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최선의 길은 결국 삶을 아낌없이 살아내는 일이다.


돌봄은 헌신이 아니라 사랑의 교환. AI Sora


송강원은 엄마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동안 본능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후 3년 동안 정기적인 글방 모임에서 문장을 다듬어 오늘의 책을 만들었다. 책 속에서 작가와 엄마는 절임처럼 유리병에 담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시간을 글 속에 절여 두었다는 고백은 담백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선명하다. 그 글의 중심에는 관찰이 있다. 세상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절임병에 담는 일, 그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자 태도였다. 병실에서 엄마에게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되겠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그래라, 그건 네 버전의 나니까.”

― 송강원 『수월한 농담』


글이란 결국 세계에 대한 ‘나의 버전’을 펼쳐 보이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글은 자기 안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과 접촉한다. 그 접촉이 점처럼 짧은 찰나일 수도, 넓은 면처럼 깊은 반영일 수도 있으나, 활자화되는 순간 글은 이미 세계와 맞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수월한 농담』이 만약 엄마의 죽음을 앞둔 한 아들의 기록에 머물렀다면, 읽다 말거나 다 읽고도 아무 생각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반전이 주는 전율과는 다른 종류의 납득이 글의 중반에 이르렀을 때 찾아왔다. 읽는 내내 아들과 엄마의 유대는 유난히 친밀했고, 그 친밀함은 때때로 나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아버지나 다른 가족 이야기를 대하는 작가의 거리감은 순간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쪽의 이야기만으로는 편향의 골에 빠질 위험이 있어, 이 감정이 죽음의 감내라는 아름다운 서사를 흐리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결이 바뀌었다.


“그들은 나를 ‘딸 같은 아들’이라고 했다. 딸 같은 아들. 아주 오랜만이었다. 딸 같다는 말이 부끄러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사이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

― 송강원 『수월한 농담』


작가는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다. 나는 성소수자, 게이, 퀴어, 동성애자라는 표현을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공부한 적도 없으며,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직감적인 공감에 닿은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알고 있다’고 착각해 온 무지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책 초반부부터 놓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단서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들과 엄마의 애정이 우정처럼 보인다는 문장을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에서 침대를 붙여 손을 잡고 있던 장면, 미국에서 힐댄스를 위해 함께 하이힐을 사러 다니던 장면, 의상실에서 일하던 엄마 곁에서 취향이 발달해 춤과 연기를 향하게 된 성장의 내력은 둘 사이의 유대가 내가 상상하던 깊이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관계는 이들의 세계 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죽음과 고통, 그리고 상실을 ‘수월하다’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지점과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낸 시간 자체가 이미 수월하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농담처럼 오갔던 일상의 일부였다. 이 글이 작용한 첫 번째 효력은 작가 자신에게 돌아갔다. 그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지우고, 애쓰지 않으며 살기로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영화 <헤드윅>. Killers Film 제공


그리고 이 글은 내게도 퀴어라는 정체성과 감정의 층위를 가장 현실적으로 설명해 준 첫 번째 문장이 되었다. 나에게 ‘다름’을 처음 인정하게 만든 경험은 뮤지컬 <헤드윅>을 본 순간이었다. 그 무대에서 성적 정체성은 그저 존재의 또 다른 결일 뿐 중요도의 상위에 놓이지 않았다. 특히 주제가인 <The Origin of Love>가 말하는 ‘등을 맞댄 하나의 존재’라는, 플라톤의 「향연」의 오래된 신화적 형상은 다양성의 뿌리가 되는 친밀한 이미지를 열어주었다. 『수월한 농담』은 그때의 감정에 이해와 공감의 결을 덧씌워 주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잡음과 감응 사이, 글의 얼굴들


에세이라는 말을 기원으로 더듬어 들어가면, 이 장르가 어디에 뿌리를 두는지 자연스레 드러난다. 미셸 드 몽테뉴가 자신의 글을 essais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것을 ‘시도’ 혹은 ‘시험해봄’의 뜻으로 사용했다. 확고한 논증이나 완결된 체계보다, 생각의 방향을 시험하고 마음의 무게를 달아보는 행위 자체가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에세이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 완성보다 움직임에 가치를 두는 문학적 형식에서 출발한다.


문학 전공 수업에서 작품을 나누어 읽으며 썼던 과제들이 자연스럽게 ‘에세이’라 불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유의 연습과 정신의 도약, 그 두 가지가 장르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말의 ‘수필(隨筆)’이 더 두터운 문학적 실감을 품는다. 마음과 생각이 흐르는 대로 붓을 따르는 글, 형식보다 사유의 움직임을 우선하는 글이라는 뜻을 담는다. 이 한자 표기만으로도 장르적 성격이 은근히 투영된다. 규범적 구조보다 ‘생각의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 논증보다 감각과 사유의 결을 좇는 방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수필이라는 말은 중국 문인들의 글쓰기 구분에서 비롯되었고, 일본 근대를 거치며 오늘의 번역어로 자리 잡았다. ‘쓰는 대로 적는다’는 뜻을 품지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장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 문학에서 수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정조—서정, 내면성, 인문적 성찰, 사적 기억의 형상화—는 한국어 속에서 따로 빚어진 미적 층위에 가깝다. 말의 장식이 아니라, 단어 자체가 기원을 조용히 상기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래서 수필은 정서·경험의 표정을 강조하고, 에세이는 개념적 긴장과 사유의 추적을 좀 더 전면에 두는 경향으로 나뉜다. 에세이가 사유의 궤적이라면, 수필은 체험의 감각과 인상을 정돈하는 글에 가깝다. 신춘문예에서 ‘수필’이라는 장르명을 따로 명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뤼쉰(魯迅). 중앙일보 제공


나는 개인적으로 ‘잡감문(雜感文)’이라는 명칭을 오래 좋아해왔다. 이 표현의 결을 따라가면, 그것이 단순한 단상 모음이 아니라 중국 근대 문학사의 한 지점에서 특정한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기원을 묻는다면 뤼쉰(魯迅)의 산문집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는 짧은 산문들을 묶으며 굳이 수기, 산문, 평론으로 나누지 않고 ‘잡문’이라 부르며 사려 깊고도 냉정한 관찰을 짧은 문장에 눌러 담았다. 그의 잡문은 사적인 감상이 아니라, 당대의 폭력과 모순을 직시하는 인식의 단편들이었고, 그 결 속에서 인간과 사회를 해부하려는 태도가 분명했다. 이후 잡문이라는 말은 동아시아 문학권 전체에서 단상의 기록, 시평적 사유, 사회적 감각의 스케치라는 넓은 의미로 확장되었다.


물론 ‘잡문’이라는 명칭이 뤼쉰의 발명만은 아니다. 중국 전통 산문에는 ‘잡기’, ‘잡유’, ‘잡론’ 같은 표현들이 오래 존재했다. ‘잡(雜)’을 붙인 말이 다양한 생각의 묶음을 가리키는 용례였기 때문이다. 다만 근대 문학사의 맥락에서 뤼쉰의 글이 그 의미를 새롭게 정초했고, 이후 잡감문이라는 말이 하나의 문학적 인식으로 굳어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잡감문을 말할 때 떠올리는 것은 짧은 글의 형식만이 아니다. 사유가 응결되는 속도,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 감각과 사유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문장이 태어나는 방식까지 함께 상기한다. 뤼쉰의 산문이 그 원형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복합적 사유와 미학적 긴장을 글의 리듬으로 가져가는 작가에게 잡감문은 단순한 ‘단상’의 그릇이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속도를 정제해주는 언어의 도구에 가깝다. 그래서 요즘 에세이가 점차 ‘개인의 사변적 회고’라는 틀로 굳어져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잡감에는 언제나 사적 사유를 통해 세계로 열리는 발산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주장을 세우며 의미를 세계로 흘려보내려는 질문이 문학의 본령이었다. 그러나 이 중심은 서서히 주변으로 밀리고, 문학의 유행에는 극도로 사적이고 폐쇄적 서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단순함의 그림자를 건너는 글쓰기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던 자리에서 마틴 스코세이지를 가리키며 그의 말을 대신 전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 문장은 스토리텔링의 가치가 높아진 시대에 창작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이 문장은 동시에 깊은 틈을 품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자칫 개인적인 것으로만 머무를 수 있고, 공명이 부재한 자기연민이나 자기현시의 욕망으로 기울 위험이 크다. 이런 이유에서 회고조의 자기 서사는 여전히 쉬운 선택지가 아니다.


『수월한 농담』은 이 주저함을 조금 덜어주는 힘을 지닌다. 우선 문장이 훌륭하다. 오랜 시간 문장을 다져온 작가의 숨결이 드러난다. 물론 장마다 밀도의 기복이 있고, 후반부는 다소 성근 초심의 기색도 배어 있지만, 첫 장면들을 여는 문장은 깊고 설득력있다. 성별을 넘나드는 문체의 결이 살아 있고, 최근 여러 곳에서 유행하는 생성 언어모델이 흉내내기 어려운 문장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세상과의 접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 책이 모친의 투병과 가족의 분투기에만 머물렀다면 그저 수월하게 읽힌 활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는 시대가 놓친 고충과 소수들의 곤궁이 겹쳐 있다. 외항선 기관사였던 부친의 부재, 시집살이에 지친 모친을 향한 연민은 그 시절을 지나온 다수에게 공명한다. 작가는 현대에 만연한 우울증과 성소수자로서의 고립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죽고 싶었다고, 실제로 죽음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그 고립의 해방을 역설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시간의 동반’에서 찾는 지점은 문학이 이르는 길과 맞닿아 있다.


신형철의 말처럼, 문학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단순해 보이는 것이 실은 복잡함의 덩어리임을 끝내 지켜보는 태도다. 진실은 단순하다는 말과 진실은 복잡하다는 말이 동시에 옳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비유를 선호하지 않는다. 특히 감정과 심리의 영역에서 그렇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상정하지 말라.” 이 명제는 중세 신학 논쟁 속에서 태어나 근대 과학의 정신을 정초한 날카로운 도구였다. 단순함은 명료함이었고, 명료함은 우아함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면도날은 무뎌졌다. 단순함이 닿지 못하는 영역은 넓어졌고, 단순함은 오히려 위험해졌다.


단순함은 때로 설명의 경제를 위해 유용하지만, 그 명료함은 복잡한 것들에 대한 침묵을 요구하기도 한다. 오컴의 원리가 기술적 간편함의 기준으로만 이해될 때, 우리는 질문의 가능성을 잘라내는 침묵의 칼을 손에 쥔 셈이다. 복잡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설명 가능성’이 아니라 ‘설명 불가능성’을 견디는 힘이다. 이해하려 들기보다 이해할 수 없음의 여백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과 모호 속에서 인간성을 발견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이는 철학적 겸손이며 동시에 윤리적 책임이다.


복잡함과 다채로움은 늘 불편하다. 예술과 인문학이 불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함의 숏컷에 길들여져 있다. 한국 사회가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는 지금, 이 단순함 추종은 불편하다. 문학이 소외되고 인문학이 패션이 되는 이유도 같은 자리에서 비롯된다. 문학이란 결국 불편한 질문을 복잡한 서사의 타래 속에 묻어두는 일이라 생각한다.


진실은 단순할 수도, 복잡할 수도. AI Sora


진실은 모호하고 중첩되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복잡함은 세계의 속성이며, 단순함은 해석의 전략이다. 진리는 단순성에서가 아니라 복잡성의 정직함 속에서 빛을 드러낸다. 드러난 그것을 우리는 진실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라는 말보다 ‘잡감문’이라는 표현이 더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잡감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감상과 단상’의 묶음이다. 체계적 구조보다 순간적 사유와 관조를 중시하는 고전적 기록 방식으로, 일상의 미세한 감각이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짧은 단상을 짧은 리듬으로 적는다. 잡감은 서사가 약하고, 논증을 완결하려 하지 않으며, ‘사유의 파편’에서 힘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현대적 에세이의 오래된 조상이기도 하다.


세 장르의 이름은 겉보기에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자주 겹친다. 에세이는 사유의 흐름, 수필은 체험의 감각, 잡감문은 단상의 기록에 중심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형식은 개인적 경험을 언어의 결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문학적 가치를 얻는다. 장르가 다르더라도 글 속에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드러나고, 그 방식이 독자의 사유를 흔드는 순간, 글은 이미 문학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문학의 지층은 언제나 진실을 향한 더듬임에 가깝다. 단순함의 숏컷을 넘어 복잡함의 정직함을 드러내야 하는 시대에, 나는 오히려 잡스럽지만 다채로운 감상과 사유가 넘치는 문학의 시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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