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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미끄러짐과 애도되지 않는 존재들

박인환의 시학으로 읽는 <다음 소희>와 <미키 17>

by 박 스테파노

쓸모의 경계에서 ― 시스템과 외접선의 존재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스템’을 마주한다. 잠을 깨우는 스마트폰 알람도 하나의 체계이고, 아침 식사를 권하는 건강 관리 앱 역시 그 일부다. 출근길에는 도시의 교통과 이동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구조와 맞닥뜨리며, 일터에 이르면 모니터 너머로 업무를 관리하는 플랫폼 시스템이 펼쳐진다. 가게 문을 여는 이들에게는 포스기와 배달 애플리케이션이 하루의 첫 접점이 되고, 공공서비스나 의료 체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들까지 포함하면, 시스템은 더 이상 삶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심부에 깊이 박혀 있다.


시스템은 언제나 중심을 가진다. 그것은 효율과 판단, 가치와 생존을 규정하며,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남는 존재를 무심히 가른다. 살아남지 못한 자는 흔히 ‘죽은 자’로 치환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기록되지 않은 자, 감정이 허락되지 않은 자다. 자원과 효용의 값으로 존재하다 용도가 소멸되면 시스템의 삭제 버튼 하나로 사라지는 이들. 매트릭스의 행과 열, 셀의 틈새에 갇힌 존재는 값이 기준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아무 흔적 없이 지워진다. 시스템에서의 죽음이란 다름 아닌 ‘쓸모 없음’이라는 표식일 뿐이다.


시스템의 도식 이미자. 픽사베이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세계를 마주한다. 하나는 〈다음 소희〉(2023)가 보여주는 포스트모던의 감각적 리얼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미키 17〉(2025)이 상상한 복제된 트랜스모던의 디스토피아다. 전자는 시스템 안에서 감정이 탈색된 채 소모되는 청춘을 응시하고, 후자는 인격을 제거한 생명의 반복을 통해 존재의 대체 가능성을 실험한다. 서로 다른 장르와 미학을 품고 있음에도 두 영화는 공통의 외곽을 공유한다. 바로 중심에서 밀려난 존재들, 숫자와 지표로 환원된 이들이 할당받은 자리다. 존재의 소멸이 감각되지 않는 자리, 말하자면 외접선의 바깥이다.


박인환의 시는 오래전부터 그러한 외곽의 존재를 탐색해왔다. 제1회 박인환상 문학 이론 부문 수상작인 오문석의 「동심원을 넘어서: 박인환의 ‘외접선’에 대하여」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동일성 구조에 접속하는 접선으로서의 외곽적 존재를 개념화한다. 박인환의 시에서 ‘나’는 결코 ‘우리’로 포섭되지 않고, ‘그’는 죽음 이후에야 말 걸림의 감각을 얻는다. 중심을 공유하지 않는 원들 사이를 미끄러지는 그의 언어는, 동일성의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향한 미적 전략이자 윤리적 상상이다.


동심원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이 미세한 존재들은 내외부의 접점으로 인식되지 않는 한, 원주 밖으로 밀려난 무명의 파동일 뿐이다. 시스템은 오류 없는 균질성과 동일성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일방적 체계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는다.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의 해체와 파편의 시간으로 진입하면서, 살아남지 못한 존재들은 사고로 처리되거나 다음 대체자를 위한 소모로 치환되며 익명화된다. 동일성에 저항하다 밀려난 존재의 매몰은 박인환의 시절을 넘어 오늘의 사회,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까지 이어진다.


〈다음 소희〉의 ‘소희’와 〈미키 17〉의 ‘미키’는 모두 ‘쓸모’라는 좌표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고 결국 소진당한 인물들이다. 이 시스템적 구조 안에서 그들이 놓인 감각의 위치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일으킨 미세한 동심원은 중심에서 밀려난 내부의 궤적이며, 세계의 외곽을 따라 걷는 존재론이다. 박인환의 시학은 이러한 존재들―기록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 이들의 잔향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영화는 그 흔적을 쫓아 우리가 놓친 감각의 결을 복원하고자 한다. 잊힌 존재의 자리를 지우지 않고 응시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들이 제안하는 세계의 윤리다.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그 틈은 깊어진다. 통제와 계산의 언어가 세상을 덮을수록 감정과 기억은 그림자처럼 밀려난다. 그러나 예술은 그 어둠의 변두리를 비춘다. 영화와 시는 체계가 감지하지 못한 떨림을 복원하고, 인간이 여전히 감응하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박인환의 시가 그러했듯, 이 두 영화는 효율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 곧 쓸모 없음의 진실을 드러낸다.


외곽을 응시한다는 것은 중심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중심이 잃은 온도를 되찾는 일이다. 완전한 체계일수록 윤리는 더 단호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누가 기록되고, 누가 삭제되는가. 그 이름을 다시 불러내는 행위 ― 거기서 세계는 다시 인간의 얼굴을 얻는다.



외접선 위의 감각: 박인환과 잔류하는 존재들


박인환의 시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 그는 도달이 불가능한 감각, 중심을 향해 직진하지 못하는 궤도의 슬픔을 포착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시(詩)라는 언어의 형식으로 간신히 그려냈다. 그의 시가 다루는 것은 부재도 실종도 아니다. 도달하지 못한 상태, 도달이 금지된 감각, 그리고 그 경계에 남겨진 주체의 불확정성이다. 중심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옆으로 미끄러지듯 비켜서며, 결국 선을 이루지 못한 채 흩어져버리는 감각. 박인환의 언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떨렸다. 도착하지 못한 말, 집을 잃은 구문, 중심 없는 선율. 그의 시는 감정보다는 감각으로 존재를 환기했다.


그 떨림의 은유 속에서 박인환 시학의 핵심은 ‘동심원과 접선’, 그리고 ‘경계인과 균열의 희망’이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된다. 동심원은 동일한 중심을 공유하는 이들의 구조, 즉 동일성에 기초한 사회적 통합의 은유다. 전후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 집단적 순응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동심원은 우리라는 이름의 강요된 일체성을 상징했다. 시인 역시 그 중심의 언어를 대변하길 요구받았다. 그러나 박인환은 침묵하거나, 조용히 그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김수영과 박인환. 조선일보 자료사진


그가 머문 자리는 ‘외접선’이다. 중심을 공유하지 않는 두 원이 단 한 점에서 스치는 자리. 박인환은 그 접선 위에서 공동체와 신, 사랑과 죽음이라는 세계의 중심과 비스듬히 마주 섰다. 그 거리감 속에서 동일성은 해체되고, 병렬적 사유가 시작된다. 외접선은 그의 시학의 윤리이며, 시는 그 접촉의 행위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원 내부의 구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원의 외부에서 스치는 직선, 혹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타원의 접촉이기도 하다. 중심과 무관한 이 접선들은 개념의 외부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윤리를 드러낸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 그 선 위에 위태롭게 존재하는 이들, 즉 경계인. 박인환은 이 경계인들의 떨림을 포착했다. 그것은 단지 시대의 변두리가 아니라 균열의 가능성이며, 균열 그 자체의 미학이었다.


그의 시어는 오늘의 세계를 예감했다. 디지털 고립, 감정의 투명화, 자율적 자기착취, 반복적 피드백으로 작동하는 알고리즘 권력의 세계. 중심의 언어를 거부하고 경계의 침묵을 택한 그는 그 구조를 미리 목격한 증언자였다. 시는 균열을 감각하는 눈이며, 균열 너머를 바라보는 행위였다.


오늘, 우리는 박인환이 오래전 그려낸 외접선의 세계가 재현되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러나 그 풍경은 더 냉랭하고, 더는 말이 닿지 않는 방향으로 변주된다. 영화 〈다음 소희〉는 시스템의 핵심, 일터라는 감옥 속 소녀를 비춘다. 그녀는 실습생이라는 이름으로 훈련받으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다. 수십 통의 콜, 감정이 제거된 응대, 말과 말 사이마저 상품화된 세계 속에서 그녀는 부품이며, 기록조차 허락되지 않은 존재다. 그녀의 죽음은 제도가 소유하지 못한 죽음, 감정 없는 소멸이다. 존재의 기억조차 지워지기 위해 존재한 삶이다.


〈미키 17〉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복제 가능한 인간 ‘미키’는 죽을 때마다 ‘다음 미키’로 대체된다. 자아는 복원되지만 연속되지 않고, 기억은 남지만 인격은 반복되지 않는다. 죽음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이 존재는 체계 속에서 사라지기 위해 살아간다. 인간성은 차단되고, 죽음은 업무 절차의 일부로 전락한다. 미키는 가장 완벽한 호모 사케르다. 동일성의 구심력이 규정했으나, 시스템이 보호하지 않는 존재. 존엄과 정체성, 자율성이라는 본성적 권리가 박탈된 채 벌거벗은 상태로 남는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유대 수용소의 무젤만처럼 사회적 삶(비오스)이 거세되고, 육체적 생존(조에)만이 남는다.


박인환의 시는 감정이 아닌 감각으로 존재를 환기한다. 말라붙은 문장, 미끄러지는 구문, 무표정한 리듬. 그것은 애도의 감정이 아니라 애도의 불가능성에서 비롯된 감각이다. 후대의 영화들은 이 비감정적 감각을 계승한다. 〈다음 소희〉에서 소희가 자신만 들리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그 잔여의 감각을 드러내고, 〈미키 17〉의 미키는 죽음과 재생의 반복 속에서 점차 감정을 잃은 감각의 존재로 남는다. 감정이 소진된 자리에 비감정적 감각이 놓이고, 그 감각이 증폭될수록 미세한 존재들의 죽음은 애도받을 수 없게 된다. 감각이 제거된 감정, 애도할 수 없는 죽음 ― 그것이 박인환이 일찍이 감지한 세계의 구조다.


(오른쪽 부터)박인환은 명동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시 ‘세월이 가면’을 지었고 이진섭이 곡을 붙여 노래가 됐다. 오른쪽 세번째는 영화감독 유두연, 왼쪽은 시인 박태진. 경향신문


박인환의 시는 예외적 감각의 기록이다. 그의 ‘나’는 언제나 ‘우리’가 될 수 없고, ‘신’은 불행하며, ‘죽음’은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사소한 미끄러짐으로 감각된다. 이 병렬적 존재들은 공통된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다만 외접선 하나로 스치듯 만난다. 장 뤽 낭시가 말한 ‘공통되지 않는 공동체’는 바로 이런 병치의 공간에서 가능하다. 중심의 공유 없이 존재의 간극을 인정하고, 각자의 궤도로 세계를 미끄러지듯 사유하는 것. 박인환의 시가 남긴 것은 예언이며, 그 예언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구현된다.


결국 이 글은 박인환의 외접선 시학을 바탕으로 〈다음 소희〉와 〈미키 17〉 속 존재의 잔류를 탐색한다. 그 잔류는 말해지지 않는 감정이자 기록되지 않는 감각이며, 구조적으로 배제된 자들의 침묵과 맞닿는다. 이 침묵은 기표와 기표를 연결하는 인지 지도의 결여 속에서 발화의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전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소진되고 잊혀지는 존재들. 그러나 그 미끄러짐은 박인환의 언어처럼 작고 끈질기게 궤적을 남긴다. 시도, 영화도 결국 묻는다. 중심 없이 병렬된 이 감각의 상태를 우리는 ‘없음’이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있는 있음’이라 부를 것인가. 박인환의 시학은 그 질문을 향한 하나의 응답이다.



<다음 소희>, 리얼리즘적 외접선 위의 슬픔과 감각


<다음 소희>는 ‘슬픔’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슬픔이 느껴지지 않기에 슬프다. 감정의 지층마저 제거된 자리, 남은 것은 감각의 필름뿐이다. 박인환 시가 그러했듯,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몸짓과 침묵, 리듬과 반복이라는 비감정적 장치로 한 존재가 체계 속에서 미끄러지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 미끄러짐이 바로 박인환 시세계가 말하는 외접선 위의 쓸쓸함이다.


박인환은 ‘우리’라는 말이 작동하지 않는 쓸쓸함으로 가득한 세계를 오래전부터 써왔다. 그의 시에는 소속되지 못한 ‘나’와 닿을 수 없는 ‘너’가 존재한다. 그 사이에는 접촉보다 병치가, 정서보다 감각이, 중심보다 궤도가 놓인다. 영화 <다음 소희>는 이 시적 세계를 포스트모던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재현한다. 여전히 시스템은 존재를 관리하지만, 언어조차 제거된 상태에서 감각만이 남는다. 소희는 그 비감정적 감각의 가장 선명한 외곽선이다. 다만 그 선은 정형화된 도형에 속하지 못한, 예외적 존재다.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라는 말은 접촉될 수 없는 거리의 감각만 남긴다.


영화 <다음 소희> 속 실습생 소희. 트원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가 위치한 세계는 철저히 시스템 내부다. 소희는 중심을 공유하는 동심원이 아니라 자원으로 간주된다. 고등학생 실습생으로 투입된 콜센터에서 그녀는 좌석을 채우는 ‘seat resource’로 환원된다. 콜센터라는 미세 노동은 소희 같은 존재 없음의 자원을 집적해 자본을 창출하고 유지한다. 인간임에도 인간이라 불리지 못하며, 존재는 실적과 지표, 인센티브와 고객 만족도로 치환된다. 박인환 시에서 동심원이 강제하던 동일성은 현대에 와서 수치와 성과, 통계로 변모했다. 중심은 사라졌지만 주변화는 더 정밀해졌다.


현실의 필수 시스템은 ‘소희’라는 인격체를 ‘seat resource’로 환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고발하지 않는다. 고발은 말을 전제로 하지만, <다음 소희>의 세계에는 말할 주체가 없다. 대신 영화는 침묵과 감각, 묵음 속의 리듬으로 세계를 서술한다. 그 중심 외곽에 선 소희는 존재론적으로 외접선적이다. 중심을 갖지 못한 이 존재는 시스템과 순간적으로 접촉하나 결코 일부가 되지 못하고 다시 미끄러진다. 노동자이면서 노동 생산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학생이면서 교육의 주체로 호명되지 않는다. 이는 박인환 시에서 자주 드러나는 경계인의 무명성과 겹친다. 그는 「기적의 현대」에서 전신처럼 가볍고 재빠른 불안한 속력에 밀려 도시의 지평에서 싸운다. 싸움 뒤 황갈색 계단에 내려앉은 이들은 시대의 지하실, 사회적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자들의 비존재 공간에 있다.


영화 속 소희는 춤춘다.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다. 누구와도 말 닿지 않는 세계, 감정을 나눌 수 없는 고립, 언어를 잃은 존재가 택한 감각의 절실한 방식이다. 이 춤은 정서적 위로가 아니다. 감정이 제거된 자리에서 발생한 비감정적 운동이다. 들뢰즈는 감정적 의미가 분해된 이후에도 남는 감각의 층위를 사유했다. 박인환이 시에서 구성한 감정 없는 슬픔, 말 없는 외로움, 표현 불가능한 애도의 리듬은 <다음 소희>의 춤으로 옮겨진다. 소희는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구조 요청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신체 리듬으로 감각을 환기한다.


이 춤은 철저히 혼자만의 리듬이다. 극적이지도, 경쾌하지도 않다. 이어폰을 낀 채 혼자 듣는 음악에 맞춰 지하 공간에서 어색하게 흔들리는 몸짓이다. 흔한 청춘 영화의 에너지가 아니다. 말소된 존재가 마지막으로 붙드는 비언어적 저항 행위다. 박인환 시 「불행한 신」에서처럼,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을 고하는 처절한 외로움이 여기에 있다. 소희의 춤 또한 마찬가지다. 시스템은 반응하지 않고, 어른들은 외면하며, 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춤만이 유일한 응답이자 말 없는 언어다.


하지만 이 춤은 구조에 흡수되거나 정치화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콜 수를 채우고 가입 이탈 방어 실적에 매달린다. 팀장이 죽고, 실습생이 죽어도, ‘다음’이라는 말은 이어진다. 이 반복성은 박인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병치와 닮았다. 「목마와 숙녀」에서 시인은 도시 침묵 속 반복되는 패턴을 따른다. 변화 없다. 감정의 성장도, 갈등의 해결도 없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사라질 때, 오직 고립만이 시들러 가는 슬픔으로 미끄러진다.


소희의 죽음은 사회적 사건이 아닌 구조적 귀결이다. 그녀 자리엔 ‘다음 소희’가 들어오고, 시스템은 무탈하게 돌아간다. 이 반복성은 공포가 아니라 무감각으로 다가온다. 팀장도, 소희도 애도되지 않고, 누구도 의미화하지 않는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처럼 그녀는 애도되지 못한 존재로 잊힌다. 버틀러는 사회적 규범과 권력 관계가 애도의 가능성을 결정하며, 어떤 삶은 애도받을 자격이 없다고 지적한다. 이 차별적 애도는 특정 생명을 공적 담론에서 배제하고 권리 없는 존재로 만든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그런 존재를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나라로 가고 싶다고 표현했다. 그 마음은 누구의 목소리도 울리지 않는 침묵의 구조다. 이 침묵은 <다음 소희>의 핵심 미학이기도 하다. 영화는 분노하지 않고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감각하게 만든다. 시처럼, 대상이 아니라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각은 윤리의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이 감각의 윤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중심을 향하지 않고도 존재를 감각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박인환의 외접선 시학은 중심 공유 불가능성을 인정하며, 병렬적으로 스치는 존재들이 마찰 없이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을 윤리로 제시한다. <다음 소희>는 이 시학을 영상 언어로 구현한다. 말없이 춤추고, 끝내 말하지 못하지만 존재가 감각되는 순간, 영화는 묻는다. 이제 당신은 소희를 느꼈는가? 존재가 감각되지 않는 시대에, 감각을 회복할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트원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는 분노하지 않고 고발하지 않는다. 대신 감각을 복원한다. 그 복원이야말로 윤리의 출발점이자 박인환 시학의 핵심이다. 그는 중심을 향하지 않음으로 존재를 긍정했다. 외접선 시학은 닿지 못한 채 존재하는 관계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낭시가 말한 ‘공통되지 않는 함께 있음’의 감각이기도 하다. 소희와 형사의 관계는 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형사는 소희의 자취를 따라 걷는다. 그 발걸음은 애도되지 못한 삶의 자리를 감각하려는 윤리적 움직임이다. 시인의 리듬과 관객의 감각이 만나는 외접선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형사 오유진을 따라 소희의 자취를 걷는다. 그는 그녀를 알지 못했고, 끝내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걷는다. 그걸음은 애도의 형식이 아니라 외접선 하나, 잠시 스치듯 구성된 관계의 윤리다. 그것이 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영화가 감각할 수 있는 한계다. 이제 우리 차례다. ‘다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여기의 쓸쓸한 미끄러짐을 감각할 차례다. 말하지 않더라도, 춤추지 않더라도, 존재가 ‘존재했음’을 감각하는 것. 그것이 침묵의 윤리학이 남긴 과제다.



<미키 17>, 복제된 자아는 존재를 대체 가능한가


<다음 소희>가 감정의 지층을 제거한 감각적 리얼리즘으로 슬픔을 환기했다면, <미키 17>은 감각조차 삭제된 세계에서 복제된 존재가 ‘살아 있음’을 묻는다. 복제·프린트·재생산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인격은 반복 교체되고, 기억은 고정되지만 자아는 표류한다. 중심 없는 존재가 오직 기능으로 환원되는 이 구조는 더 이상 삶의 주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효율적이며 소모 가능한 자원만이 존재할 뿐이다. 소희의 감정 없음이 존재의 침묵을 암시한다면, 미키의 감정 없음은 존재의 복제를 통해 제거된 잉여성을 드러낸다. 두 영화 모두에서 이 감정의 탈색은 비감정의 윤리라는 미학적 공통분모로 수렴한다. 박인환이 포착한 외접선 위의 존재들―중심에 닿지 못한 주변 존재들은 여기서 우주 식민지의 복제 생명체로 재현된다.


<미키 17>은 단순한 SF가 아니다. 감정을 제거한 미래 세계에서 복제된 존재는 스스로 고통을 자각하며 자아를 재구성하려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고통을 감각하는 존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혹은 "감정을 제거당한 복제 자아도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다. 중심 없는 세계의 외곽 존재들, 감정 없는 감각, 비언어적 고통으로만 존재를 구성하는 이 시선은 박인환의 외접선 시학과 맞닿는다.


‘17번째’라는 수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인격 부재와 인간 존재의 대체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다.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죽음은 장례가 아닌 삭제이고, 재생은 탄생이 아닌 출력이다. 마카롱 가게의 폐업, 노조와 보험 없는 삶은 그를 시스템의 예비 부품으로 환원한다. 고통과 혼란이 발생해도 시스템은 응답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상반신 프린트 과정은 알고리즘이 빚어낸 미세한 진동 속 존재 미끄러짐을 보여준다.


미키의 정체성은 숫자로 환산되고, 이름은 인격이 아닌 기호로 기능한다. 죽음과 재생은 감정적 사건이 아니라 행정적 절차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라는 티모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은 정서적 무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감각의 층위를 삭제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이 시스템에서 가장 위험한 누수이자, 제거 대상이다.


박인환의 ‘쓸쓸한 미끄러짐’이 소환된다. 감정 없음이 슬픔의 결여가 아니라, 압축된 형태의 존재 감각임을 드러낸다. 그의 시가 포착한 감정의 탈중심화는 <미키 17> 속 미키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기억은 남지만 감정은 없다. 과거의 냄새, 연인의 머리카락, 함께 본 풍경 일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나’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자아는 재생되지 않고, 감정은 백업되지 않으며, 존재의 확신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미키는 언어로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 채 신체적 잔여 감각으로만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영화 <미키 17>속 미키 17과 18.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제공


니플하임은 인간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감각적·윤리적 결핍의 행성이다. 감시하는 크리퍼, 감염된 몸, 기억의 유사성 속 자아 분열, 시스템이 요구하는 ‘필요한 죽음’―이 모든 과정 속에서 미키는 인간적 주체를 멈추고 살아 있는 시스템 코드가 된다. 그러나 감각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머리카락 냄새를 떠올리고 자율적으로 고통을 느끼며,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이는 복제 존재가 감정적 자율성을 회복하려는 첫 신호이자, 존재 자격을 시스템에 요구하는 선언이다. 하지만 감정 회복은 허용되지 않는다. 반복적 복제는 감정 누락을 기본값으로 삼기 때문이다.


<다음 소희>에서 존재가 춤으로 자신을 표현했다면, <미키 17>에서 미키는 감정 없는 상태로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들뢰즈의 ‘감각-존재’와 맞닿는 이 감각은, 감정이 제거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윤리적 흔적이다. 감염과 통증은 존재 재개를 상징하며, ‘나는 고통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은 인간적 범주 이전의 윤리적 시도다. 박인환의 외접선 개념은 중심 없는 존재도 감각으로 병렬 연결될 수 있음을 전제하며, 미키는 그 병렬 위에서 유영한다.


<미키 17>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기억은 백업되지만 존재는 연속되지 않고, 감정은 결여되지만 고통은 발생한다. 복제와 교체 속 관계는 정서적 결속이 아닌 감각적 접촉이며, 고정된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흔들림 속에서만 존재는 잠시 모습을 드러내며, 곧 삭제되고 다른 미키로 교체된다. 그는 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자식도 아니며, 단지 시스템의 재고이자 소모품일 뿐이다. 이 서사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보편화되는 비정규 존재를 은유한다. 감정 없이 작동하도록 요구받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17번째 복제체다.


영화 말미 등장하는 18번째 미키는 복제 체계가 결코 끝나지 않음을 상징한다. “나도 행복해져도 돼”라는 고백은 허공에 흩어지고, 숫자가 이름을 대신한다. 반복과 삭제, 복제와 잉여성의 부재는 박인환 시학의 외접선적 사유와 겹친다. 이름 없는 존재, 닿지 못한 감각,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존재는 거기 있으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미키 17>은 박인환의 ‘쓸쓸한 미끄러짐’이 미래 디스토피아로 전이된 형태다. 복제된 존재가 감각으로 자아를 인식하고, 비감정적 고통을 통해 ‘살아 있음’을 재구성하는 행위, 그것이 외접선 위 존재가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자구다. 영화가 끝난 뒤 남는 것은 절망이 아닌 질문이다.


“복제된 존재도 애도받을 수 있는가?”
“감정을 제거당한 존재에게도 윤리는 적용되는가?”
“우리 또한 반복 가능한 존재로 복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는 프린트될 수 없고, 감정은 백업되지 않는다. 시스템은 대체하지만, 감각은 복제되지 않는다. 그 미세한 흔들림, 존재의 마지막 언어만이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일지 모른다.



회전하는 중심과 바깥의 감각 - 박인환, 정주희, 봉준호의 외접선적 사유


시스템의 오래된 프로토타입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터’다. 회전 운동으로 동력을 만들고, 그 에너지를 다른 형태로 전환한다. 이 원형의 움직임은 균질한 힘을 중심에서 원주로 퍼뜨린다. 자본은 이 회전 운동의 속성에 특히 친숙하다. 효율 극대화, 즉 최소 투입으로 최대 산출을 추구하는 체계에서, 중심에서 일정 속도로 회전하며 힘을 배분하는 이 메커니즘은 최적 구조다.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 대부분도 이 회전 운동에서 비롯된다. 화력, 수력, 원자력, 풍력 모두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든다. 문제는 속도다. 회전 속도가 올라갈수록 생산 가치는 증가하지만, 원심력 또한 배가된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압력은 원심력으로 변해 경계의 존재들을 밀어내고 흔적 없이 삭제한다.


이 경계에 선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플랫폼 노동자라는 이름 아래, 그들은 미세한 노동을 바치며 시스템 회전체 위에 겨우 중심을 잡는다. 배달, 배송, 분류, 접수, 상담과 같은 사소한 행위뿐 아니라, 무심코 적어 내려가는 문장과 단어, 생각조차 알고리즘과 기계학습이라는 무자비한 중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슈트를 입고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이들도 다르지 않다. 기술 스타트업이라 불리는 사무실에서 반복적 코딩과 업무를 견디며,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곧 ‘다음’이 된다. 미끄러짐은 곧 오류, 도태는 곧 실패로 낙인찍힌다.


이 경계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존재는 내부의 또 다른 동심원이 아니라, 중심 밖에서 외접해 오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시스템 외부에서 다가오는 이 시적 존재들만이 원주 끝에 닿아 있던 이들이 탈락할 때 흔적을 감지하고 애도한다. 그것은 관측되지 않던 파편을 위한 위로이자 또 하나의 접촉이다. 외접선 위의 존재만이 중심의 언어로는 다다를 수 없는 균열의 시간과 자리를 껴안을 수 있다. 파편화된 존재들이 서로를 느끼고 연대할 수 있다면, 기술과 자본이 예측할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이 된다.


일러스트. 경항신문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박인환의 시, 영화 <다음 소희>, <미키 17>은 서로 다른 매체와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존재론적 풍경 위에 선다. 그것은 바로 포섭되지 않는 주체가 외곽을 맴돌며 남기는 미세한 흔적, 곧 외접선 위의 감각이다. 이 글은 세 텍스트가 동일성·동심원의 폭력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중심을 가진 존재들이 외접선에서 스치는 방식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묻는 바를 조망한다.


첫째, 박인환의 시학은 근대적 동일성―주체와 공동체의 일치를 전제로 한 동심원적 언어―을 부정하고, 여러 ‘나’와 ‘우리’가 중심을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외접선 위에서 병렬되는 접점을 제안한다. 그의 시 속 “나”와 “우리”, “생”과 “사”, “신”과 “인간”은 결코 융합되지 않는다. 그 간극에서 비로소 감각하는 주체가 남는다. 이 ‘쓸쓸한 미끄러짐’은 전통적 정동이 아니라, 정서가 제거된 자리에서 진동하는 비감정적 감각이며 존재론적 공간을 열어젖힌다.


둘째, <다음 소희>는 시학을 포스트모던 리얼리즘 이미지로 번안한다. 고객센터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seat resource”로 환원된 소희는 말을 잃고 춤으로만 존재를 드러낸다. 영화는 감각의 언어를 불어넣어 시스템 내부 폭력을 가시화한다. 소희의 춤과 그를 따라 걷는 형사의 발걸음은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접선 위의 움직임’이며, 관객은 말없는 몸짓으로 윤리를 마주한다.


셋째, <미키 17>은 트랜스모던 디스토피아 속에서 복제된 자아가 감정과 기억의 경계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그린다. 17번째 미키는 죽고 다시 살아나지만, 감정은 오류로 처리된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는 순간, 미키는 시스템이 놓친 외접선적 존재, 즉 진정한 호모 사케르로 부활한다. 니플하임 바이러스 감염은 존재론적 감각의 회복이며, “나도 행복해져도 돼”라는 고백은 시스템이 금지한 감정의 윤리적 요청이다.


세 텍스트를 관통하는 것은 소외된 존재의 감각적 잔류다. 두 영화 모두 시스템의 원심력에 의해 중심을 가질 수 없는 존재, 즉 외접선 위에 간신히 닿은 주체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감각되지 않고 애도되지 못한 삶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프레카리아트의 윤리」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는 죽음 이후조차 공동체에 포함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 노동자들은 죽음에서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실습생 소희의 죽음이 그러하고, 미키의 반복 복제가 그러하다.


박인환에게 시는 중심에 닿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도달할 수 없는 중심을 향해 달리다 멈춘 자리, 그 외곽에서 스치는 감각들을 언어화하려는 행위였다. <다음 소희>의 형사 오유진과 <미키 17>의 미키 또한 중심을 공유하지 않는 자들 간의 외접선을 긋는다. 그들의 비명은 거세된 음성으로 남아, 우리 안에 묻힌 익명과 소외의 균열을 드러낸다.


박인환 시 「열차」에서 열차는 중심을 향해 달리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 광선의 진로를” 따라간다. 열차는 체제 중심부의 기호가 아니라, 포섭되지 않은 존재들을 싣고 “미래에의 외접선을 눈부시게 그으며” 굴러가는 타자의 이동선이다. “다음 헐벗은 수목의 집단 / 바람의 호흡을 안고 / 눈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닌, 상흔을 지나온 감각의 여백이다.


열차가 그리는 외접선의 시학. Gemini


<다음 소희>의 무음 속 춤, <미키 17>의 복제 통증의 기억, 열차가 따라가는 외접선 선로는 서로 다른 형식 안에서 동일한 감각의 미끄러짐을 수행한다. 박인환이 노래한 “검은 기억은 전원에 흘러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나듯 말이다. 다만 시인이 바랐던 미래, 열차의 종착점에는 “우리들의 황홀한 거리”나 “혜성보다 아름다운 새날보담 밝게” 빛나는 노동의 불빛따위는 없다.


그들이 남기는 흔들림과 켜켜이 쌓이는 슬픔의 지연은 단순한 정서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말로 다 표현되지 못하는 실존의 울림이자, 우리 사회가 놓쳐서는 안 될 근본적 감각의 촉구다. 영화의 미학적 장치와 서사는 외접선 위 존재들의 미세한 흔적을 포착하며, 우리에게 그들과 함께 ‘황홀한 영원의 거리’를 감각하고 경험하며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을 연다.


박인환의 시어, 정주희 감독의 시선, 봉준호 감독의 서사는 중심 바깥에 내던져진 감각과 말을 잃은 고통, 시스템 경계 너머 존재의 불안정성을 조명한다. 이 흔들림을 언어로 환원하는 것이 비평이며, 오직 외접선 위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근원적 질문이다. 우리는 멈춰 다시 묻는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 그것은 중심인가,
아니면 외접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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