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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쓴 죽음의 연서-「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회심

-죽는다는 것이 산다는 것에게

by 박 스테파노

똘스또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 때문이었다. 『파이 이야기』와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잘 알려진 그는, 2007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스티븐 하퍼 전 캐나다 수상에게 격주로 보낸 편지를 모은 책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의 첫 장에서 이 작품을 소개한다. 마텔은 최고 권력자에게 꾸준히 문학 읽기를 권유하며, 문학의 쓸모를 일깨우려 했다. 그것은 일방적이고 외로운 북클럽과도 같았다. 그 시작에 놓인 책이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나는 단순한 호기심에 붙잡혔다. 왜 그는 첫 편지에 백 년도 넘은 대문호의 중단편을 골라 보냈을까. 그의 이유는 의외로 소박했다. 한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실제로 작동하는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뿐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면 좋을지 꿈꾸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텔이 제안한 이 꿈의 길목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 나는 그 질문을 안고 책을 펼쳤다.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연방은 러시아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페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로 70여 년의 공산주의 독재는 스스로를 걷어냈다. 붉은 광장에서 탱크를 막아선 옐친의 모습은 철의 장막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기억되었고, 북방의 큰 곰은 다시 세상으로 걸어나왔다. 그 시기 대한민국도 북방 외교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분단 이후 적성국으로 남아 있던 나라들과 수교를 맺었고, 그 중심에 러시아가 있었다. 마침내 한글 수호의 상징 최현배, 민족 시인 윤동주의 이름이 새겨진 학교에 노어노문학과가 세워졌다.


러시아는 소비에트로 부터 또 다른 혁명으로 이름을 찾는다. AI Sora


러시아 문학과의 만남은 그렇게 큰 역사적 전환 속에서, 입시와 부모의 기대에 지친 한 미생이 꿈꾸던 작은 탈출구가 되어 다가왔다. 인사말조차 어색하고 끼릴문자도 낯설던 나는 그저 도스또옙스끼와 똘스또이, 고골과 고리끼의 책을 펼쳐보며 언젠가 공부하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다 러시아 소설과 리얼리즘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취업 시즌에도 도서관에서 소설과 희곡, 그리고 평론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리라 굳게 믿었던 듯하다.


러시아 문학을 깊이 알지 못해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뿌쉬낀의 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은 문고판으로도 익숙한 고전이다. 전공자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늘 이 두 거인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작가의 결이 다르기에 감상의 선호도 또한 시간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는 점이다.


전공자로서의 경험은 오히려 역전된 지도를 그렸다. 도스또옙스끼라는 가파른 언덕을 간신히 넘어선 문학 등반의 초심자 그 뒤에서 맞닥뜨린 것은 똘스또이라는 거대한 산맥이었다. 처음에는 도선생의 드라마틱한 삶과 격정적인 회심에 끌려가다가, 똘선생의 한가한 인생론과 담백한 묘사는 한적하고 심심해 보였다. 그러나 깊고 넓게 읽을수록 판결은 정반대가 되었다. 도스또옙스끼는 오를 때 숨이 찬 언덕이지만, 똘스또이는 끝내 시야 전체를 덮는 산맥이었다. 그 손을 들어준 작품이 『안나 까레니나』라는 회심기의 장편이었고, 그 세계관이 이어진 죽음 3부작의 대표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참된 참회록, 죽음에 대한 자각


똘스또이 소설론을 수업으로 듣던 복학생이었다. 당시 과제의 가장 큰 산인 『전쟁과 평화』를 넘고서야 비로소 똘스또이의 후기작들과 마주했다. 흔히 ‘안나 까레니나 이후'라 부르는 회심의 시기, 똘스또이가 쉰을 전후로 삶과 죽음, 인간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깊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는 『참회록』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며, 삶과 작품의 결을 동시에 바꾸어 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줄로 요약하자면 ‘죽음을 묘사하는 사유’라 할 수 있다. 똘스또이는 누구보다 죽음을 오래, 깊게 성찰했다. 「세 죽음」, 「주인과 하인」 같은 단편에서 죽음을 주제로 삼았고,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니나』 같은 대작에도 예외 없이 임종의 장면을 세밀히 새겨 넣었다. 그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제를 직접 이렇게 설명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죽음에 대한 묘사,
묘사로부터의 묘사.”


소설의 얼개는 단출하다. 지방 고위 법관 이반 일리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으로 시작해, 그의 삶을 되짚는다. 이어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고독한 내면을 집요하게 따라가고, 마침내 깨우침의 순간과 함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죽음의 의식이란 곧 필멸에 대한 자각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의 자각이 책의 주제. AI Sora


똘스또이의 영혼은 문명과 자연을 넘어서는 무언가, 그가 말한 ‘초자연적 무엇’에 이끌려 있었다. 그러나 그를 도덕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궁극적 동인은 죽음이었다. 그 심연은 이반 일리치의 고독한 목소리로 드러난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대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고독이었고, 지인들과 가족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느끼는 고독이었다. 바닷속 저 깊은 곳에서도, 땅 밑 저 아래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절대 고독이었다.”

―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똘스또이


똘스또이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물음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그의 탐색은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항을 따라 직조되며, 끝내는 죽음으로 수렴된다. 그 심연에서 탄생한 회심적 성찰이 바로 똘스또이라는 거대한 산맥의 속살이었다. 그 전환의 중심에 『참회록』이 있다. 똘스또이는 이 책에서 한 동양 우화를 인용한다.


옛날, 초원에서 맹수에게 쫓기던 나그네가 마른 우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입을 벌린 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 올라갈 수도,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는 나그네는 가까스로 우물 중간에 난 관목 가지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때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 줄기를 갉아 먹기 시작한다. 줄기가 곧 끊어지고, 그는 용의 입 속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그네는 가지에 매달린 채 주위를 둘러보다 관목 위의 꿀방울을 발견하고는 혀끝으로 핥는다.


똘스또이는 자신이 바로 그 나그네와 다르지 않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확실성을 알면서도 삶의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려 꿀을 핥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꿀은 가족에 대한 사랑, 저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솔직히 고백한다. 더 이상 그 꿀방울은 달지 않다고. 잠시라도 죽음의 진실을 잊게 해주던 위안이 무력해졌음을 고백한다. 이 차이가 우화 속 나그네와 그 자신을 가르는 지점이었다.


『참회록』의 핵심은 바로 이 자각이다. 이제는 어떤 것도 죽음의 확실성을 덮어주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서 똘스또이의 참회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었다. 죽음을 자각하면 할수록 그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살 수 없었다. 참회, 반성, 거듭남, 모두의 근원은 죽음이었다.


안수(岸樹)정등(井藤)의 우화. AI Sora


따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 앞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바뀐다. 똘스또이가 내린 결론은 분명하다. 삶을 바로잡는 길은 죽음을 자각하는 데 있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내면의 선을 회복한다. 죽음을 인식할 때만 삶의 본질이 아닌 것들에서 시선을 거둘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할 때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있다.


그에게 자각은 선을 향한 추구이자 각성, 도덕과 윤리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불투명했지만, 문명과 자연의 대립 속에서 가까스로 붙잡은 결론이었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은 그 문턱에 이른다. 준비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문명화된 삶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선 또한 잃어버린다.



죽음을 가린 문명, 죽음을 드러낸 무덤


똘스또이에게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었다. 도구에서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문명, 풀 한 포기에서 인간의 몸에 이르기까지의 자연은 삶을 지탱하는 두 개의 버팀목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언제나 이 두 축에서 출발한다. 똘스또이의 초기 작품에서 이미 문명과 자연의 긴장은 뚜렷한 흔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셰베끄의 집무실에 모여 있던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전해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과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것이었다."

―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명화된 세계에서 이반의 삶과 죽음은 자리와 액수로 환원된다. 한 인간의 임종에 드리운 고통은 뒷전이고, 남은 것은 ‘얼마짜리 자리’뿐이다. 생전에 이반은 연봉과 처우, 곧 ‘자리’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사회 풍경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자리의 위용은 단순한 경제적 안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 사슬의 위계, 부풀려진 자존감,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정 욕망의 표식이기도 하다.


죽음에 이르러서조차 이반의 존재는 자리로 평가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차지하는 공간은 공동묘지의 묏자리이며, 그 자리마저 액수로 결정된다. 미망인이 집사 소꼴로프와 묘지 가격을 상의하는 장면은 똘스또이가 겨눈 비판의 핵심을 응축한다. 인간의 삶이 자리로 시작해 자리로 끝나며, 사랑과 우정, 연민 같은 본래의 가치들은 밟히고 만다는 사실이다.


똘스또이가 규정하는 문명은 단순한 기술적 산물이 아니다. 정치, 경제, 법률, 종교, 사교 전반에 걸친 체계이자 인간이 욕망으로 구축한 거대한 울타리다. 문제는 이 문명화의 과정 속에서 재산, 관습, 교양, 종교, 예술이 부도덕해진다는 점이다. 그것들이 위선적이라는 이유에서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문명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위선의 징표가 된다.


뚤라에 있는 야스나야 뽈랴나의 똘스또이 무덤. AI Sora


이 사유의 극점은 똘스또이의 무덤에 선명히 드러난다. 모스끄바 남쪽 뚤라현의 작은 마을 야스나야 뽈랴나, ‘빛나는 초원’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의 영지에는 작은 흙더미 하나가 있다. 십자가도, 묘비도, 안내판도 없다. 미리 알지 못한 방문자는 스쳐 지나가기 쉽다. 평지 위에 관을 놓고 흙을 덮은 이 무덤은, 화환도 추도식도 거부한 그의 유언을 그대로 따른 결과다.


‘아무 것도 없음’의 무덤은 그의 후기 문학과 깊이 호응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집요하게 묻던 ‘자리’에 대한 단호한 응답처럼, 그 무덤은 오직 소박한 흙으로 존재한다. 이반 일리치가 법관의 지위, 부임지의 체면, 집의 장식과 가구, 심지어 그것을 둘러싼 인간관계까지 ‘품격의 자리’를 위해 집착했듯, 우리는 여전히 자리에 매달린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는 순간 이반은 깨닫는다. 그것들은 모두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남는 것은 오직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 그리고 그 물음에 반사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답뿐이다.


"거짓, 거짓, 그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행해지는 이 거짓, 무시무시하고 장엄한 죽음의 의식을 한낱 문병이니 커튼이니 식사에 나온 철갑상어니 하는 것들로 격하시키는 이런 거짓이 이반 일리치를 무섭도록 고통스럽게 했다."

―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명화된 삶의 해악은 단순히 속물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죽음의 의식을 가리고, 선의 회복을 지연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똘스또이에게 문명과 자연의 대립은 결국 인간 존재의 양대 버팀목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답은 그 둘 사이에서만 길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온다


스무 살 무렵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개인 인생의 허무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였다. 더불어 유한한 욕구와 속세적 욕심에 대한 경계의 교훈적 서사로 여겼다. 제정 러시아 귀족 사회의 허례허식과 상류층의 고질적 허영심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지만, 동시에 부유한 영주 출신인 똘스또이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데서 묘한 반감도 느꼈다. 그 시절 적어낸 리포트를 되짚어 보면, 정작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일어나서도 안 되며 일어날 수도 없다."

―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젊은 시절에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은 흔치 않았다. 극도의 곤궁과 불투명한 앞날을 마주하던 나였지만 죽음은 철저히 남의 일이었다. 이반의 부고를 접한 그의 동료들처럼, “나의 일은 아니고, 내게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도 없는” 현실 바깥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텍스트를 여러 번 마주하면서도 그 안에 굵게 자리 잡은 죽음을 굳이 불러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똘스또이의 미학적 특징은 ‘낯설게 하기’다. 그 낯섦은 원어의 문체를 모르면 온전히 체감하기 어렵다. 후기에 들어 똘스또이는 문명 전반을 비판했고, 삶 속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려한 수식과 장식적 문장을 거부하고 간결한 문체를 택했으며, 이 간결성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굳건히 만든다. 그 덕에 독자는 오히려 죽음을 체화하기 어려운 거리두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이 내 일로 다가오는 순간, 문학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오십이 넘어 죽음을 예감케 하는 병을 얻고, 소변줄과 콧줄을 달고 중환자실에서 남의 피를 맞으며 버티던 날들 속에 문득 이반 일리치가 떠올랐다. 용기를 내 다시 펼친 소설 속 문장마다 죽음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아, 이 소설은 죽음이 보내는 연서구였구나. 죽음이 삶에게 건네는 낯선 편지였구나.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AI Sora


이반이 옆구리의 통증과 역겨운 입맛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보인 무심한 태도, 장례식장에 모여든 동료들의 표정은 14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것이 똘스또이라는 산맥이 전해주는 낯섦이다. 그의 이름 또한 시사적이다. ‘이반’은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자 가장 존경받는 성인의 이름이다. 영어의 존, 프랑스의 장, 성경 속 요한에 해당한다. 흔한 이름을 주인공에 부여한 이유는 단순하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절대적 진리를 이름 자체로 각인한 것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은 똘스또이가 평생 붙들었던 화두 ― ‘어떻게 살 것인가’ ― 와 한 몸을 이룬다. 바로 이 “어떻게”라는 질문이 똘스또이의 오십 이후 삶을 이끌었고, 그의 장편과 단편, 논문과 평론, 우화와 동화까지 이어진 광대한 산맥의 뿌리가 되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대단히 끔찍한 것이었다."

―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단순하고 평범했다’는 말은 속세의 문명에 철저히 맞춰 살았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끔찍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러시아어의 접속사 ‘и(이)’는 영어의 ‘and’에 해당한다. 단순하고 평범해서, 그래서 끔찍했다는 말은 마지막 몇 시간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누구에게나, 지금 이 순간에도 닥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 지점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산다는 것”이 곧 “어떻게 죽는다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순간 몸서리치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린다.


빈소에 들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이 감각은 분명하다. 향 냄새와 음습한 공기 속에서 죽음을 잠시 체감하다가, 밖으로 나오며 들이마시는 신선한 공기가 다시금 생존의 징표가 된다. 그리고 이내 죽음을 타자의 일로 밀어내며 거리 두려 한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직접 넘어선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에 대한 회심의 순간이 된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 레프 똘스또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문학은 죽음을 통해 삶을 묻는 일


처음 언급한 얀 마텔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덧없는 것에 열중하고, 매정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명쾌하고도 간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평가했다. 이 소설에는 허세도, 천박함도, 가식도, 거짓도 없으며, 쓸데없는 표현도 없고 지루할 틈도 없다는 이유에서 걸작이라 평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다만 이름이 지닌 무게가 아니라, 문장과 묘사 속 영혼의 손길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의 배경은 1882년이다. 시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낯설지 않다. 제정 러시아와 오늘의 모습은 같을 리 없지만, 사건과 묘사, 생각과 말들은 지금 우리와 불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학의 위대함은 여기서 드러난다. 소설과 등장인물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자리를 바꾼다. 청춘의 날, 나는 하인 게라심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상류층과 기득권의 화양연화를 통쾌하게 읽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병을 얻어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소설은, 내가 바로 이반 일리치였음을 고백하게 만드는 회심의 계기를 주었다. 자리 바꿈은 부지불식간 이루어지고, 삶의 점검으로 이어진다.


러시아 문학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 나는 도스또옙스끼에 비해 똘스또이를 낮게 평가하곤 했다. 삶의 이력과 양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드라마틱하게 심연까지 내려갔다 솟구치는 도스또옙스끼의 인물들에 비해, 똘스또이의 인물들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일대기, 문학 외 저술을 접하며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까. AI Sora


러시아 문학의 지형은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라는 두 거대한 봉우리로 이루어진다. 미하일 바흐찐이 두 작가의 소설을 독백적 구조와 다성악적 구조로 구분했듯, 문체와 미학적 지향점은 상반된다. 도스또옙스끼가 인간 심연의 격렬한 대화를 포착하는 데 천재성을 보인다면, 똘스또이는 삶의 닫힌 전체성을 서사시적으로 구현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성취는 더욱 근원적이며, 광범위한 깊이를 지닌다.


도스또옙스끼의 문학을 ‘언덕’으로 비유하는 것은 폄하가 아니다. 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압축 속에서 전개되며, 문체는 긴박하고 불안정하며 속기적이다. 인물들은 좁은 방, 광장, 문턱과 같은 한정된 크로노토프 안에서 격렬한 정념과 이념을 쏟아낸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자의식을 폭발시키고, 이념의 화신이 된다. 수직적 심리 깊이를 탐색하는 그의 독보적 재능은, 언덕의 절정만큼이나 높지만, 광활한 세계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반면, 똘스또이의 문학은 광대하고 영속적인 산맥과 같다. 초기 문체는 러시아 귀족 사회, 전쟁, 사랑의 웅장함을 풍부한 수식으로 섬세하게 엮어낸다. 그는 전지적 서술자로서 역사와 개인의 운명, 우주 질서와 도덕적 문제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문장은 의식의 미세한 변화와 신체 움직임을 새김눈처럼 기록하며, 독자에게 인생의 ‘전체적인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특히 후기 문체의 변화는 그의 문학이 단순한 미학을 넘어 근원적 탐구로 나아갔음을 입증한다. 신앙적·윤리적 전향 이후, 『부활』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그는 화려한 수식을 배제하고 극도의 간결성을 추구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예술의 궁극 목적을 도덕적 진리의 보편적 전달에 두겠다는 작가적 윤리적 결단이었다.


단순성의 미학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사물과 관습을 익숙한 이름이 아닌 원초적 시선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은 습관화된 위선과 악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과 마주한다. 도스또옙스끼가 혼돈과 대립으로 진리를 찾는 것과 달리, 똘스또이는 명료한 언어로 도덕적 해법으로 이끈다.


도스또옙스끼가 독자에게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똘스또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해답까지 포함한 거대한 세계를 펼친다.


말년의 똘스또이 모습. AI Sora


똘스또이의 문학은 개별 인물의 고뇌를 넘어 시대와 역사를 포괄하는 총체적 인간 경험을 담았다. 그의 서사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인류의 도덕적 여정 그 자체이며, 평범한 삶의 진실을 가장 웅장하게 기록한 언어의 정수를 보여준다. 러시아 문학의 두 거봉 중, 삶의 모든 지평을 담아낸 똘스또이의 산맥은 더 넓고 견고한 문학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종교적 통달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의 죽음은 오히려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주변 사람들의 위선과 비인간적 태도는, 사실 이반이 타인에게 취했던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가 ‘거짓’이라 부르는 이기적 태도는 삶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덤을 소박히 남긴 거장의 생각을 짚을 수 있다. 죽음을 향한 시선은 똘스또이의 경고이자 분노이기도 하다. 죽음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우리에게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 그 경계에서의 사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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