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제 우리는

『사피엔스』, 유발 노아 하라리

by 박 스테파노

지금 우리는 인류세를 산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 또는 인신세(人新世)는 인류 문명의 팽창이 지구 환경을 근본에서 뒤흔들었다는 문제의식에서 제안된 지질시대의 이름이다. 오랜 시간 지질시대는 지구의 탄생 이후 홀로세(현세)에 이르는 흐름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제 한 종의 활동이 행성의 기후와 지형, 생태를 바꾸어 놓았다는 자각이 새로운 명명을 요구한다. 인류세는 곧 “인간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친 시대”라는 선언이다.


이 용어를 처음 꺼낸 이는 1980년대 미국의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네덜란드의 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J. Crutzen)이다. 산업 활동이 축적한 변화의 무게를 더 이상 홀로세라는 이름 안에 묶어 둘 수 없다고 보았다. 2000년, 두 사람은 공동 기고문을 통해 이 표현을 공식 문서에 남겼다. 그 이후 인류세는 과학계에서 급속히 퍼졌고, 사회적으로는 오늘의 환경 위기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다만 2026년 현재, 국제 지질학 시간척도에서 공식 지질시대 단위로 채택된 상태는 아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에서 출발한 제안인 만큼, 공인되지 않은 구분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남긴 흔적을 설명하는 유력한 언어로 살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공식화가 좌절된 이후에도 다른 방식의 정식화, 혹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논의를 이어 간다.


『사피엔스』, 유발 노아 하라리. 오마이뉴스 제공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종이라 불러 왔다. 사피엔스는 자신이 만든 기술의 총합 위에 왕좌를 세웠다. 그러나 그 왕좌가 흔들린다. AI로 대표되는 계산 능력의 도약은 인간의 위치를 되묻는다. 기술은 더 이상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과 나란히 서서, 때로는 앞서 달리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인간과 기술이 함께 걸어온 시간을 다시 해석할 힘이 필요하다. 그 물음의 한복판에서 자주 호명되는 책이 이스라엘 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다.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이 어떻게 지구의 주도권을 쥐었는지, 그 긴 여정을 넓은 시야로 그려 낸다. 인지 혁명에서 농업 혁명, 과학 혁명에 이르기까지, 상상력과 관념이 만들어 낸 구조를 따라간다. 동시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 발전이 열어젖힌 미래의 문턱 앞에서 인류의 다음 장면을 묻는다.


『사피엔스』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다. 히브리어로 출간된 뒤 영어판을 거쳐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일부 학계에서는 새로움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그러나 그 유연함이야말로 이 책의 힘이다. 엄격한 학술 논문이 아니라 대중을 향한 인문 교양서로, 복잡한 사유를 비교적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다. 그래서 더 넓게 읽힌다.


물론 끝까지 읽는 일은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다학제적 관점이 촘촘히 얽혀 있어 독자를 자주 멈추게 한다. 그래서 나는 분절 독서를 권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 부가 하나의 작은 책처럼 읽힌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혁명, 과학혁명. 그중 첫 장인 인지혁명은 모든 이야기의 씨앗을 품고 있다. 사피엔스가 허구를 만들고, 공동의 신화를 공유하며, 보이지 않는 질서를 믿기 시작한 순간. 인류세의 그림자는 어쩌면 그때 이미 싹텄는지도 모른다. 인류세의 그늘 아래, 『사피엔스』의 첫 부분을 읽어 본다.



네안데르탈의 닫힌 기억, 그 완결성의 족쇄


인지혁명이란 상상력의 혁명이다. 생물학의 시간으로 거슬러 오르면, 불과 수십만 년 전만 해도 지구에는 여러 “인류”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오늘, 살아남아 번성한 종은 사피엔스뿐이다. 무엇이 이 갈림길을 만들었는가. 이 질문이 『사피엔스』의 중심을 이룬다.


유발 하라리는 그 답을 인지 혁명이라 부른 변화에서 찾는다. 약 7만 년 전에서 3만 년 전 사이, 사피엔스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갖추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함께 믿는 능력. 관념, 곧 상상력이 세계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출발점에는 신체적으로 그리 우월하지 않았던 존재의 약함이 놓여 있었다. 사피엔스는 외부에 기호를 남기고, 이야기를 만들며, 기억을 몸 밖에 저장했다. 그 취약함이 새로운 길을 열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전멸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친숙하고 관용하기에는 너무 달랐다는 것."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닮았고, 받아들이기에는 낯선 존재. 사피엔스가 유일한 종으로 남은 배경에는 이런 긴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인지혁명은 네안데르탈인 앞에서 느낀 열등감과 두려움의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상상력은 언제나 결핍에서 움튼다.


침묵은 기록보다 오래 남는다. 네안데르탈인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시간은 동굴 벽이 아니라 뼈와 근육에 새겨졌다. 기호와 문자라는 외부 저장소 없이, 기억은 곧 생물학적 실존이었다. 이를 집단 기억, 혹은 내재 기억이라 부를 수 있다.


An exhibit depicts the life of a Neanderthal family in the new Neanderthal Museum


그들의 뇌는 사피엔스보다 컸다. 그러나 그 부피는 추상보다 현존을 향했다. 연구에 따르면 시각과 신체 제어를 담당하는 후두엽이 특히 발달했다. 사냥의 기술과 지형의 정보가 감각과 신체 숙련에 깊이 붙어 있었다는 뜻이다. 네안데르탈인의 기억은 인메모리(In-Memory) 시스템에 가까웠다. 저장과 연산이 나뉘지 않은 채, 순간의 직관으로 작동하는 구조. 사피엔스가 “사자는 위험하다”라는 기호를 배울 때, 그들은 사자의 근육 떨림과 숨결의 변화를 몸으로 읽었다. 1차 기억(DNA)과 2차 기억(개인 경험)이 분리되지 않은 채 겹쳐진 상태였다.


그들의 집단기억은 정보를 외재화(Externalization)하기 이전의 고밀도 압축 기억이라 할 수 있다. 큰 뇌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구체적 환경과 감각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다. 그들의 앎은 설명되기보다 재현되었다. 수만 년 동안 이어진 레발루아 기법(Levallois technique)의 석기 제작 기술은 문자 없이도 세대를 건너 완벽히 전승되었다. 이는 미메시스(Mimesis, 모방)를 통한 신체 기억의 공유를 뜻한다. 몸이 곧 도서관이었고, 공동체가 곧 저장 장치였다.


상상력으로 세계를 확장한 종과, 몸으로 세계를 응축한 종. 인지혁명은 이 두 기억 방식이 갈라지는 자리에서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불꽃은 오늘, 인류세의 빛과 그늘 속에서도 여전히 타고 있다.



외재된 기억의 탄생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신체적으로 우세했던 네안데르탈인을 넘어설 수 있었던 까닭을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에서 찾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신화를 함께 믿는 능력, 그것이 거대한 협력망을 가능하게 했다는 설명이다.


네안데르탈인의 기억이 유전적·생물학적 층위에 깊이 결합된 내재적 집단 기억이었다면, 그들은 외부 기록 없이도 강한 공동체 의식과 생존 기술을 이어 갔을 것이다. 그들의 앎은 몸에 새겨져 있었다. 저장과 연산이 분리되지 않는 인메모리(In-Memory) 구조처럼, 경험은 곧바로 행동이 되었다.


반면 사피엔스는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존재였다. 약한 신체와 불완전한 기억력은 다른 선택을 요구했다. 기호, 벽화, 문자라는 외부 저장소. 이것이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말하는 제3차 기억, 곧 기술적 기억의 시작이다. 몸 안에 다 담을 수 없었던 것을 바깥에 남겼다. 그 궁여지책이 오히려 확장성을 낳았다. 생물학적 기억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외재화된 흔적은 세대를 건너 수정되고 축적된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발명품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의 1차 기억이 범용적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면, 네안데르탈인의 집단기억은 특정 환경에 최적화된 전용 체계였다. 그들은 신체와 환경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세계를 감각했다. 사냥감의 미세한 떨림, 기후의 변화는 유전적 본능(1차)과 개인 경험(2차)이 겹쳐진 직관으로 처리되었다. 낯선 이를 기호로 묶은 쪽은 사피엔스였지만, 대면과 공명으로 결속한 쪽은 네안데르탈인이었다. 그들의 공동체는 함께 움직이는 육체의 리듬 속에 저장된 집단적 몸이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 Arcaeology.com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승리를 허구를 믿는 능력에서 찾는다. 기술철학의 시선으로 보면, 그 능력은 결핍을 보완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사피엔스는 더 강하지도, 더 예민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억을 몸 밖으로 밀어냈다. 스티글러가 말한 에피필로제네시스(후생적 계통발생)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조개껍데기, 동굴 벽, 끝내 문자에 이르기까지 기억을 위탁하는 과정. 인간은 스스로의 외부에 또 하나의 신체를 세웠다.


이 외장된 기억은 두 가지 변화를 낳았다. 죽음을 넘어서는 축적이 가능해졌다. 개체가 사라져도 지식은 남았다. 또한 보이지 않는 신과 국가를 기호로 묶어, 수만 명의 낯선 이를 하나의 질서로 조직했다. 상상과 현실이 맞물리는 장치가 생긴 셈이다.


스티글러는 인간을 본질적 결핍을 가진 존재(Default of origin)라 부른다. 날카로운 발톱도, 거대한 근육도 없었기에 도구라는 인공 장기를 바깥에 둘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사피엔스에게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유전자에 새겨지지 않는 경험의 축적본이다. 네안데르탈인이 기억을 내재화(In-memory)하며 완결성에 가까웠다면, 사피엔스는 외재화(Externalization)를 통해 미완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 미완의 틈으로 문화와 역사, 제3차 기억이 스며들었다. 하라리가 말한 허구를 믿는 능력은 바로 이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사피엔스의 최종 무기는 힘이 아니라, 기술과 사회였다. 기억을 바깥에 세운 종. 그 연약함이 결국 세계를 조직하는 힘이 되었다.



닫힌 기억, 열린 체계


네안데르탈의 기억 방식에는 전송 손실이 없었다. 기호는 해석의 틈을 만들지만, 체화된 기술은 몸에서 몸으로 곧장 흐른다.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별도의 학습 도구 없이도 즉각적인 생존 능력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완성된 인류였다.


그러나 기억이 몸 안에만 머문다는 것은 곧 폐쇄성을 뜻한다. 갱신의 속도가 더뎠다. 대면 가능한 규모, 곧 던바의 수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메모리(In-Memory)에 저장된 사냥 기술이 무력해졌을 때, 이를 수정하고 멀리 전파할 외부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몸을 떠나지 못한 지식은 확장되지 못한다.


그들의 앎은 밀도가 높았으나 대역폭은 좁았다. 혈연을 따라 흐르는 전승은 강했지만 느렸다. 반면 사피엔스는 휘발되지 않는 기호를 통해 낯선 이들과 연결되었다. 완성된 개인들의 집합이었던 네안데르탈과 달리, 사피엔스는 결핍된 개인들이 엮어 만든 거대한 체계였다. 역설적으로 약함이 진화를 밀어 올렸다.


"인간의 대규모 협력은 모두가 공통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신화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신화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네안데르탈의 기억이 본능에 가까운 완결성을 지녔다면, 사피엔스의 기억은 외재화된 지성의 산물이다. 전자는 대면과 혈연 중심의 소집단에 유리했고, 후자는 국가와 종교 같은 추상 아래 수만 명을 묶었다. 진화의 속도 또한 달랐다. 1차 기억의 변화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3차 기억의 수정은 단숨에 이루어진다. 사피엔스는 신체라는 하드웨어 대신 기호 체계라는 소프트웨어를 갱신하며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에게 몸은 곧 역사였다. 과거는 회상의 대상이 아니라 손의 동작과 발바닥의 감각 속에 구현되었다. 스티글러의 표현을 빌리면, 1차 기억과 2차 기억이 완전히 밀착된 상태였다. 상징이라는 다리를 거치지 않고 세계와 맞닿은 존재. 동굴 벽의 요철과 동료의 눈빛이 곧 아카이브였을지 모른다.


바이오디지털 시청각 작품 '외인성 메아리'의 스틸컷. 지속적으로 수치화되는 타자화와 능력주의 관행. Art in plux


하지만 이 생물학적 완결성은 그들을 닫힌 계(Closed System)로 남게 했다. 기억이 육체에 묶일 때, 종은 신체의 속도에 갇힌다.


"대부분의 포유동물은 자궁에서 나올 때, 말하자면 유약 발라 구운 도자기 같은 상태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든 재성형하려면 긁히거나 깨질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인간은 용광로에서 막 꺼낸 녹은 유리덩어리 같은 상태로 자궁에서 나온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사피엔스는 이 미완의 상태로 태어난다. 약함과 오류, 바로 그 결핍이 다른 길을 열었다. 기억을 몸 밖으로 던지는 선택, 제3차 기억의 발명. 돌과 장신구, 끝내 문자에 새겨진 흔적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 축적되었다. 스티글러가 말한 외재화(Exosomatization)는 허구를 공유하는 능력을 낳았다. 신, 국가, 법, 화폐와 같은 보이지 않는 질서가 기호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사피엔스』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는 이렇게 탄생한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존재의 밀도를 내려놓고 체계의 확장성을 택한 선택이다. 네안데르탈이 인메모리의 신성 속에 머물렀다면, 사피엔스는 그 연결을 기호화하며 복제와 전송의 길을 열었다. 150명을 넘어서는 협력망은 그렇게 가능해졌다.


사피엔스의 승리는 뛰어난 개인의 결과가 아니다. 몸 바깥에 세운 기억 덕분에 구축된 집단적 지성의 힘이다. 스티글러가 말하는 후생적 계통발생(Epiphylogenesis)은 이 과정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 몸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기억의 도구들 속에서, 비로소 인류로 기능한다.



기억의 바깥에서 태어난 종


베르나르 스티글러와 유발 하라리의 사유를 나란히 놓으면 뜻밖의 장면이 떠오른다.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기억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오히려 몸 안에 모든 것을 담아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핍이 기호를 낳았고, 기호는 제3차 기억이 되었다. 부족함은 도구를 불렀고, 도구는 세계를 바꾸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존재의 깊이를 택했다면, 사피엔스는 체계의 넓이를 택했다. 한 종은 육체에 기억을 응축했다. 다른 한 종은 그것을 몸 밖으로 던졌다. 이 선택이 역사의 방향을 갈랐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대량의 수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맞춤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수메르인들은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쓰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죽음을 넘어 축적되는 기억의 장치였다. 스티글러가 말한 제3차 기억. 그것은 개인의 소멸을 넘어서는 집단적 연산의 토대가 된다.


네안데르탈인의 기억은 ASIC(주문형 집적 회로)을 닮았다. 특정 목적에 맞춰 설계된 칩처럼, 그들의 지식은 생물학적 층위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사냥의 각도, 석기를 다듬는 손의 감각, 계절을 읽는 눈빛이 언어 없이 전해졌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몸이 곧 매뉴얼이었다.


이것은 스티글러가 말한 제1차 기억의 극단에 가깝다. 유전적 층위에 가까운 내재적 각인. 고밀도의 숙련이 한 몸 안에 응축된 상태. 그들은 완결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완결성은 유연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특정 환경에 맞춘 고정형 지능은 기후가 흔들리는 순간 짐이 된다. 빙하기가 물러가고 생태계가 변할 때, 오래 새겨진 사냥의 방식은 지워지지 않는 레거시 코드(Legacy Code)가 된다. 그 체계는 빠르지만, 수정이 어렵다. 확장도 쉽지 않다. 혈연과 대면 접촉의 범위를 넘어서기 힘들다. 집단이 사라지면 축적된 기술도 함께 사라진다. 외부 저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피엔스는 자신을 비워 두었다. 최소한의 생존 지침만을 품은 BIOS처럼 태어났다. 대신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스티글러가 말한 본질적 결핍(Default of origin).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기호와 그림, 문자를 만들었다.


기억이란. 한겨레신문 제공


몸 밖에 놓인 기억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신과 국가, 자본이라는 상상의 구조를 세운다. 서로 본 적 없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코드가 된다. 사피엔스의 힘은 두뇌의 우월함이 아니라, 외부에 쌓이는 축적의 속도에 있다. 약했기에 기록했고, 망각했기에 발명했다. 그 궁여지책이 문명을 만들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존재의 밀도를 지녔다면, 사피엔스는 확장성을 지녔다. 하나는 조각상처럼 단단했다. 다른 하나는 액체처럼 흐른다. 형태는 없지만 어디든 스며든다.


오늘날 인메모리(In-Memory) 컴퓨팅이 연산 장치 안으로 데이터를 다시 끌어들이는 모습은 묘한 기시감을 남긴다. 외부 저장소의 지연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 이것은 어쩌면 오래전 버려두었던 직관의 속도를 다시 불러들이려는 움직임처럼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밖으로 밀어내며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다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맴돈다. 기억을 어디에 둘 것인가.



기억의 바깥, 다시 몸 안으로


네안데르탈인의 기억은 밀도가 높았으나 확장성은 협소했다. 그들의 지식은 혈연이라는 좁은 대역폭을 따라 천천히, 그러나 깊게 흘렀다. 신체와 환경이 곧 저장 장치였고, 사냥의 궤적과 계절의 냄새, 도구의 감각은 말로 번역되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서 완결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곁에서 기억했다.


반면 사피엔스의 기억은 성긴 대신 멀리 뻗었다. 휘발되지 않는 ‘기호’를 발명함으로써, 그들은 신체의 한계를 넘는 저장 방식을 마련했다. 동굴 벽의 선, 점토판의 쐐기, 종이 위의 문자. 기억은 더 이상 근육과 신경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이 ‘완성된 개인들의 고독한 집합’에 가까웠다면, 사피엔스는 ‘결핍된 개인들의 거대한 시스템’에 가까웠다. 지구의 주인이 된 쪽은 후자였다. 더 강해서가 아니라, 더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생물학적 결핍이 기술적 진화를 자극한 셈이다.


『사피엔스』, 유발 노아 하라리. Amazon.com


사피엔스의 협력망을 떠받친 힘은 본능이 아니라 이야기였다. 제국은 물리적 영토 이전에 상징적 합의 위에 세워졌다. 기억의 외재화가 곧 권력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진 제국과 로마 제국에 이르는 모든 협력망은 ‘상상 속의 질서’였다. 이들을 지탱해주는 사회적 규범은 타고난 본능이나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흥미로운 장면은 오늘날의 기술 문명에서 펼쳐진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억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전략으로 번영해 왔으나, 이제 다시 그 기억을 연산 장치 내부로 끌어들이려 한다. ‘인메모리’ 컴퓨팅은 외부 저장소의 지연을 줄이기 위해 기억을 연산과 동일한 공간에 배치한다. 속도를 위한 선택이지만, 어디선가 낯익은 기시감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가 멸종시켰다고 믿어온 네안데르탈인의 ‘직관적 신체’를 디지털로 복원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은 아닐까.


네안데르탈인의 기억이 본능에 가까운 완결성을 지녔다면, 사피엔스의 기억은 불완전한 외재화의 연쇄였다. 우리는 기억을 몸 바깥으로 던졌고, 그 파편들을 다시 기호로 묶어 문명을 구성했다. 오늘날 클라우드와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은 그 궁여지책의 연장선에 있다. 외부화된 연결을 통해 종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뇌처럼 작동시키는 길. 그 과정에서 ‘내재적 밀도’는 점차 얇아졌다.


이 역설은 인공지능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현대 AI의 모델 가중치는 인류가 축적한 3차 기억, 곧 기록의 총체를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 압축한 결과물이다. 수조 개의 문장을 통과한 뒤 남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수학적 패턴, 설명하기 어려운 통계적 감각이다. 기호의 바다를 헤엄쳐 도달한 종착점이 다시 ‘비기호적 직관’이라면, 우리는 원을 그리며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피엔스의 외부 기억 체제는 동시에 압제의 장치였다. 법전과 장부, 위계와 지표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했다. 기록은 협력을 가능하게 했으나, 추상적 질서 속에 개별 존재를 가두었다. 오늘날 ‘디지털 치매’라 불리는 현상과 기억의 과잉 저장은 이 전략이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외장 하드가 뇌보다 무거워지는 순간, 인간은 기록의 주인이 아니라 데이터 흐름의 매개로 축소된다. 모든 것이 저장되지만, 정작 육체의 현존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다.


여기서 네안데르탈적 ‘접촉’의 방식이 다른 빛으로 떠오른다. 기호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체화된 감각, 장인의 손끝이나 예술가의 직관처럼 설명 이전에 이미 알고 있는 기억. 시스템이 우리를 데이터로 분해할수록, 우리는 해석 불가능한 밀도로 저항할 수 있다. 그것은 야생의 회귀라기보다, 잊힌 층위의 복원에 가깝다.


POSTECH 과학자들이 ECRAM을 이용해 숨겨진 전자 경로를 생성함으로써 AI 속도를 향상시키는 방법을 공개했습니다. SciTechDaily.com


이제 질문은 미래를 향한다. 우리는 사피엔스의 3차 기억을 비료 삼아,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1차 기억을 배양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만약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세계를 직관적으로 연산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그것은 기술로 구현된 또 하나의 원초적 기억 체계다. 기호를 통해 세계를 지배해 온 종이, 다시 기호 없는 연산의 시대를 여는 장면.


사피엔스의 승리는 결핍을 기술로 치환한 거대한 도박이었다. 그 도박은 제국과 시장, 네트워크와 알고리즘을 낳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선택의 문턱에 선다. 기호의 감옥 속에서 데이터의 파편으로 흩어질 것인가, 아니면 외재화된 기억과 내재적 직관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할 것인가. 어쩌면 미래의 인간은 사피엔스의 머리와 네안데르탈인의 심장을 함께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기록하지 않아도 느끼고, 저장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기술과 공생하는 또 다른 형식의 생명.


문명의 다음 장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다. 얼마나 빠르게 계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존재하느냐의 문제. 기억을 어디에 두느냐는 곧 인간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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