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라는 착각』, 안호기
피터팬이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그 선언은 단순히 나이를 거부하는 몸짓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경제적 주체’가 되기를 거절하는 선택에 가깝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일은 노동 시장에 편입되어 부를 생산하고, 가정을 꾸려 소비의 최소 단위를 이루며, 국가 성장의 톱니가 되는 과정을 뜻한다. 피터팬의 영원한 소년성은 이 성장의 궤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비생산적 즐거움’과 ‘놀이’의 시간을 지키겠다는 급진적 선언처럼 읽힌다. 도구적 합리성보다 인간의 자율적 활동을 중시하는 탈성장의 ‘공생’ 개념과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
피터팬과 잃어버린 아이들이 머무는 네버랜드는 소유의 감각이 희미한 곳이다. 나무 동굴은 함께 쓰이고, 사냥과 놀이로 얻은 것은 나누어진다. 플랫폼 기술 자본의 ‘디지털 영지’가 배타적 소유와 지대 위에 서 있다면, 네버랜드는 필요에 따라 자연을 향유하는 ‘공유지’의 풍경을 닮아 있다. 탈성장론이 말하는 ‘공공 서비스의 확대’와 ‘사적 소유의 축소’는, 이 아이들이 누리는 수평적 연대를 오늘의 언어로 옮긴 것에 가깝다.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가벼워지는 삶, 그 자유가 네버랜드의 공기를 채운다.
‘시계를 삼킨 악어’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는다. 끊임없이 울리는 ‘똑딱’ 소리는 근대 산업 사회의 직선적 시간, 곧 “시간은 곧 돈”이라는 효율의 리듬을 떠올리게 한다. 악어, 곧 시간은 우리를 추격하며 더 빨리 성장하고 더 많이 성취하라고 재촉한다. 피터팬이 그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붙잡히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성장의 가속을 벗어나 ‘느림의 미학’과 ‘순환적 시간’을 되찾으려는 탈성장의 몸짓과 포개진다.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은 피터팬이 네버랜드로 날아오르며 남긴 무언의 메시지처럼 들린다. 물론 고전 속 피터팬은 현실을 떠나 환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늘의 탈성장 담론은 이 세계를 네버랜드처럼 ‘살 만한 곳’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가깝다. 탈성장은 영원한 아이로 남자는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어 온 폭력적 성숙을 거부하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새로운 어른의 방식을 묻는 사유다. 결국 피터팬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성장이라는 신전에서 내려와, 함께 춤출 준비가 되었는가?”
선거철이 오면 공약의 중심에는 늘 ‘성장’이 놓인다. 우리는 큰 의심 없이 성장의 로드맵을 국가 지도자의 핵심 자질로 받아들이고, 그 능력을 기준 삼아 평가해 왔다. 그러나 정작 묻지 못한 질문이 있다. 성장은 과연 지속 가능한 약속인가. 무한한 동력을 얻어 끝없이 우상향하는 그래프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와 만물의 이치를 떠올리면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늘의 별조차 생애를 거쳐 사라진다. 성장만이 예외일 리 없다.
안호기의 『성장이라는 착각』은 이 오래된 믿음의 허구를 조심스럽게 벗겨낸다. 책은 ‘성장 중심’ 사고가 어떻게 굳어졌는지,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말이 어떤 이중적 역할을 해왔는지를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지속 가능성’은 성장을 넘어서는 개념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가면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포장에 가깝다. 정치와 경제, 윤리의 이름으로 성장이 당연시되는 동안, 행복과 존엄은 뒷걸음질쳤다. ‘지속 가능’이라는 언어는 한정된 자원을 특정 방향으로 쏠리게 만드는 완충 장치로 작동해 왔다.
성장은 언제부터 인간 삶의 목표가 되었을까. GDP가 오르면 마음도 함께 나아질까. 저자는 통계와 사례를 통해 그 느슨한 연결을 차분히 해체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사실상 기득권의 염원이다. 염원(Aspirational)은 조직의 욕망을 꾸미고, 정책의 구호가 되며, 반복되는 사회적 실패를 합리화한다. 결국 이 말은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이자, 오래 지속된 기만에 가깝다. 지속 가능한 삶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이윤을 위한 구조라는 점에서 그 은폐는 더욱 정교하다.
이 은폐는 정책 언어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저성장 시대에 청년 창업을 권하는 국가의 목소리, 노인을 위한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재배치되는 감정노동, 중소기업 지원을 표방하지만 대기업으로 환류되는 보조금 체계. 성장이라는 말은 삶의 동반자가 아니라 착취의 명분으로 호출된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성장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이며, 감춰진 욕망이다.
절망의 시대, 성장을 내려놓는 선택
『성장이라는 착각』은 이론의 언저리에 머물지 않는다. 책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이 사회가 지나온 궤적을 또렷이 가리킨다. 우울증과 자살률, 고립과 돌봄의 붕괴, 관계의 상실…. 성장의 이름으로 반복된 어떤 선택들이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부서뜨려 왔다. 이것은 더 이상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할 수 있는 고독사가 아니다. 저자는 ‘절망사(death of despair)’라는 개념을 호출하며 말한다. 공동체의 붕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체계의 선택이라고. 삶의 구조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데도, 개인의 책임만을 묻는 사회의 무책임을 책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짚어낸다.
“제가요? 이걸요? 왜요?”로 요약되는 ‘3요’의 언어 역시 가벼운 세대적 유행이 아니다. 이는 조직 사회와 성장 신화에 대한 정서적 저항에 가깝다. 이들은 성장을 체감하지 못한 세대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지 못한 채, 성공을 내면화하라는 압박만을 견뎌야 했다. 공정은 피부에 와 닿지만, 기후정의나 차별 해소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장의 과실을 누려보지 못했기에, 박탈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된다. 원래 없었던 것에 대한 박탈감, 그것은 기성 세대의 성장 담론이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통이다. 그래서 미래 담론은 유예된 약속이 아니라, 지금의 생존과 맞닿은 실천이어야 한다.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 역시 더 이상 거대한 이상으로만 말할 수 없다. 전기차, ESG 경영, 탄소배출권 거래는 어느새 자본의 면죄부처럼 작동한다. 그린워싱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구조화된 착각이다. 저자는 ‘E’만 강조되는 ESG의 편향을 짚으며, 이것이 환경을 위한 전략이 아니라 환경을 무기로 삼은 전략임을 드러낸다. 성장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이 착시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길을 잃는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대안이 탈성장(Degrowth)이다.
탈성장(Degrowth)은 GDP 하락을 뜻하는 ‘경기 침체(Recession)’와 다르다. 이는 무한 성장 신화에서 벗어나, 생태적 한계 안에서 인간의 웰빙과 사회적 정의를 우선에 두려는 계획적 재편을 의미한다. 기후 위기와 불평등이라는 이중 과제 앞에서, 탈성장은 점점 현실적인 선택지로 부상한다.
요르고스 칼리스는 경제 성장이 환경 부하와 완전히 분리(Decoupling)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만으로는 무한 소비 체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물질과 에너지의 총사용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행성 한계(Planetary Boundaries)’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그는 성장에 중독된 사회가 오히려 자율성을 잃었다고 비판하며, 적정 규모의 경제 속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강조한다.
세르주 라투슈는 탈성장을 경제 전략이 아니라 ‘문화적 혁명’으로 정의한다. ‘성장이 곧 진보’라는 믿음은 서구 근대성이 남긴 ‘상상의 식민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탈성장의 핵심은 소비와 소유가 행복이라는 상상에서 벗어나는 ‘상상의 탈식민화’에 있다. 그가 제시한 재평가(Reevaluate), 재개념화(Reconceptualize), 구조조정(Restructure), 재분배(Redistribute), 지역화(Relocalize),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 축소(Reduce)의 ‘8R’은 가치 체계 전환을 위한 구체적 언어다.
제이슨 히켈은 탈성장을 전 지구적 정의의 문제로 확장한다. 북반구의 과잉 생산과 소비가 남반구의 자원 약탈과 생태 파괴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그가 말하는 탈성장은 모든 것을 줄이자는 구호가 아니다. 군수, 광고, 사치 산업을 축소하고, 공공 서비스와 필수 인프라에 자원을 집중해 ‘공유지의 풍요’를 회복하자는 제안이다. 이를 통해 노동 시간을 줄이고, 시간과 관계의 풍요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오늘날 탈성장은 “가난해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풍요’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다. 자본의 증식보다 생명의 유지를 중심에 두는 돌봄의 경제로 나아가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기술 낙관주의에 기대는 ‘녹색 성장’이 실질적 탄소 감축에 실패하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탈성장은 가장 정직한 생존 전략으로 떠오른다. 결국 이는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이며,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갈 공생의 기술을 모색하는 여정이다.
비움의 윤리, 성장의 신전을 나서며
책을 읽는 동안 신앙의 문장들이 겹쳐 떠올랐다. 예수는 어쩌면 탈성장주의자였다. “두 벌 옷을 가진 자는 하나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덜 갖는 것이 진리였던 이 가르침은, 오늘날 자본주의와 결합한 거대 종교의 시스템 속에서 힘을 잃었다. 성장을 욕망하는 종교, 부동산에 투자하는 성직자, 영혼보다 브랜드가 앞서는 교회. 성장주의는 신앙마저 집어삼킨다. 저자는 종교를 직접 다루지 않지만, 이 책은 그 교차점에서 사유의 문을 열어젖힌다. 탈성장은 신앙의 회복이자, 해방의 언어일 수 있다.
탈성장은 후퇴나 퇴행이 아니다. 세상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호흡을 앞질렀고, 재화는 넘쳐 흘러 버려진다. 이 세계의 물질적 자원은 70억 인구가 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문제는 분배다. 그것은 10%, 아니 1%에 집중되어 있다. 일론 머스크는 하루에 백만 달러를 써도 수백 년이 걸리는 부를 홀로 축적했다. 그 부는 스스로 캐거나 경작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봉건 영지에서 거둔 소작료와 노동, 조공으로 쌓은 제국의 산물이다.
그래서 탈성장은 경제 패러다임의 교체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 적을수록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삶의 태도, 소유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는 영성의 또 다른 얼굴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문장은 ‘성장하라’는 명령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다만 욕망의 소음 속에서 실천되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날 성장은 거부할 수 없는 ‘세속적 신앙’이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신전에서 GDP는 전능한 신의 목소리처럼 울리고, 테크 관료와 자본가들은 “더 많이, 더 빨리”라는 복음을 설파한다. 일론 머스크의 부는 개인의 자산을 넘어, 데이터를 곡물 삼아 소작료를 거두는 ‘디지털 봉건제’의 귀환을 상징한다. 알고리즘의 성채 안에서 사람들은 연결이라는 이름으로 시간과 사유를 조공처럼 바친다. 이 구조 속에서 예수가 말한 ‘비움’과 ‘버림’의 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거대 종교가 부동산과 브랜드 가치에 집착하는 풍경은, 이미 하늘의 나라가 아니라 성장의 제국에 귀속되었음을 드러내는 서글픈 자화상이다.
탈성장은 이 신전의 기둥을 흔드는 ‘거룩한 불복종’이다. 결핍을 강요하는 고행이 아니라, 넘쳐나는 것들 속에서 가려진 진실을 직시하는 용기다. 제이슨 히켈은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성장의 강요에서 벗어날 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통의 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숨을 고르고, 타인의 노동과 자연의 희생 위에 세워진 편리를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발견한다. 무한 경쟁의 트랙에서 내려올 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문장은 추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탈성장이 향하는 곳은 ‘관계의 풍요’다.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세계에서, 소유하지 않아도 존엄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강력한 영성이다. 예수가 두 벌 옷을 나누라 한 이유는, 그것이 없어도 연대 속에서 삶이 지속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탈성장은 물질적 성취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 성취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1%의 탐욕을 위해 99%의 생태적 미래를 저당 잡히는 대신, 느리지만 깊은 삶을 선택하는 일. 그것은 자본의 제국을 떠나 생명의 나라로 향하는 현대의 출애굽(Exodus), 이 시대가 요청하는 가장 시급한 해방의 언어다.
느린 곡선의 힘 ― 탈성장의 불편한 진실
『성장이라는 착각』의 아쉬운 지점은 다소 급히 닫히는 결말과 주변을 훑는 방식의 담론에 있다. 특히 일부 보고서와 사례는 검증이라기보다 소개에 머문다. 대표적인 예가 ‘공유경제’에 대한 낙관이다. 에어비앤비나 우버, 플랫폼 기반 서비스들은 더 이상 공유의 가치를 품지 않는다. 그것은 자산 없는 이들에게 위험을 떠넘기는 ‘렌털 자본주의’이며, 플랫폼은 새로운 영지다. 공유를 내세운 공간에서 사용자들은 미세하게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털린다. 공유경제에서 ‘공유’는 이미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은 동시에 플랫폼 봉건주의를 경고한다. 이 대목은 글쓰기 플랫폼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창작자의 미세한 노동은 데이터로 환원되어 플랫폼의 자산이 되고, 창작자는 알고리즘의 변두리로 밀려난다. ‘응원하기’, ‘구독하기’라는 이름의 지불을 해야만 플랫폼이라는 영지에 머물 수 있다. 브런치스토리의 작가 멤버십처럼, 창작자는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데이터를 바치는 소작농이 된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물리적 토지 없이도 봉건적 권력을 행사한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이용약관이라는 추상적 통치 수단이 디지털 시민의 삶을 규정한다. 공유경제는 나눔이 아니라 동의 없는 추출로 변했다. 이 지점에서 탈성장은 기술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맞닿는다. 성장의 명분 아래 무분별한 혁신을 좇는 지금, 우리는 기술의 목적을 다시 물어야 한다. 기술은 관성적으로 발전할 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삶의 균열에는 무감각하다. 기능적 우수성과 기술적 ‘나이스함’만이 기준이 된다. 이 나라의 AI 수석이 엔지니어라는 사실이 우려로 읽히는 이유다.
책은 대안의 사례로 유럽 도시들의 정책 실험을 든다.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프라이부르크. 이곳에서 시도된 전환은 ‘덜 쓰고도 더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논의, 지역화폐와 공유자산의 재구성, 돌봄의 재분배. 문제는 그 길이 멀고 불편하다는 데 있다. 기득권의 저항, 익숙함의 관성, 그리고 ‘풍요’에 길들여진 감각을 거스르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가진 것도 없는 보수주의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말한다. 탈성장은 퇴보가 아니라 삶의 속도를 다시 맞추는 일이라고. 더 많이 갖고, 더 빨리 도달하는 삶이 아니라, 덜 갖고, 가까이 머물며, 천천히 사는 삶으로의 전환. 성장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상상은 불편하지만, 그것 없이는 내일이 오지 않는다.
이미 그 징후는 곳곳에 나타난다. 퇴사를 말하고, 도시를 떠나고, 나눔과 돌봄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환 중이다. 책이 말하는 탈성장은 이 작은 흐름들의 모자이크다. 지금 여기의 탈성장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강속구 투수가 느린 커브를 던지기 어렵듯, ‘천천히’는 말보다 훨씬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빠름에 길들여진 세계는 느림 앞에서 흔들린다.
멈춤의 언어, 의도된 불편
‘탈성장(Degrowth, Décroissance)’이라는 말에서 ‘(De-)’를 ‘탈’로 옮길 때 생기는 부정적 뉘앙스와 수축의 이미지는 분명 대중에게 거부감을 준다. 실제로 이 용어는 학계와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전략적 적절성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도발에 가깝다.
탈성장 담론의 선구자 세르주 라투슈는 이 단어를 ‘미사일 단어’라 불렀다. ‘성장은 곧 선(善)’이라는 현대 사회의 신념에 균열을 내기 위한 충격 장치라는 뜻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같은 온건한 표현은 기존 시스템에 흡수되기 쉽지만, ‘탈성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질문이야말로 사고의 출발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탈성장을 ‘경기 침체’와 동일시하는 착시에 있다. 경기 침체는 성장 중심 체제 안에서의 실패이며, 실업과 빈곤을 낳는 파국이다. 반면 탈성장은 성장에 기대지 않아도 삶의 질이 유지되도록 사회 구조를 다시 짜는 ‘계획된 축소’다. 탈성장론자들이 즐겨 쓰는 비유처럼, 비행기의 추락과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일은 다르다. 그러나 ‘탈-’이라는 접두사는 하강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하며, 이 개념을 설명하기 어려운 언어적 함정이 되기도 한다.
탈성장에서의 ‘탈-’은 단순한 뺄셈이 아니라 벗어남에 가깝다. 요르고스 칼리스는 이를 ‘상상의 탈식민화’라고 부른다. “성장해야만 행복하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경제 지표의 하락이라는 착시 너머에서, 자율성과 돌봄, 공동체라는 가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이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장이라는 착각』은 비판적이면서도 따뜻하다. 독자를 가르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책은 대안을 약속하지 않지만, 방향을 질문한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그 멈춤이 시작이라면, 이 책은 길을 잃은 시대의 이정표에 가깝다.
물론 아쉬움도 남는다. 기자 출신 저자의 제네럴리스트적 한계는 다수의 스페셜리스트 인용으로 메워졌고, 각주는 많지만 연구의 깊이는 고르지 않다. 사례 역시 다소 시대에 뒤처진 나열로 보인다. 대선 시기를 겨냥한 출판 탓인지 비문과 오탈자도 눈에 띈다. “202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을 치르었다”와 같은 간단한 오류는 급한 마무리를 짐작하게 한다. 담론을 점진적으로 쌓아 가기보다 사실을 병렬로 나열한 구성 역시 아쉽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금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연하게 여겨 온 성장과 자본의 언어를 잠시 멈춰 바라보게 만든다. 특히 도입부에 인용된 루이블랑의 말—“자본주의란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자본을 전유하는 체제”—은 1851년에 쓰였음에도, 오늘날 빅테크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전혀 낡지 않다.
『성장이라는 착각』은 독자를 선동가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자신 안의 조용한 질문가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가 믿어 온 단어들, 익숙하게 사용해 온 언어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자각은 변화의 첫걸음이다. 그 걸음을 멈추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더 많이 만들고 서로 건네야 한다. 글과 말이 여전히 알고리즘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 글은 작년에 서평 의뢰를 받아 쓴 글을 조금 더 보충하여 다시 퇴고하여 쓴 글입니다. 두 배 정도 이론적 확장을 했고 내용 보완이 있었으며, 숙제로 급히 적었던 사유를 거듭했습니다. 공저 평론집 원고 주석 작업에, 감기가 걸려 심화된 독서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