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설명하려는 오래된 실패

『세계 종교의 역사』, 리처드 할러웨이

by 박 스테파노

보이지 않는 것을 갈망하는 인간


종교는 인류가 출현한 이래 세계를 이해하고, 고통을 해석하며, 죽음이라는 절대적 허무에 맞서기 위해 쌓아 올린 가장 거대하고 정교한 상징의 집합이다. 리처드 할러웨이의 『세계 종교의 역사』는 그 오랜 영적 분투의 궤적을 한 권의 지도 위에 펼쳐 보이려는 시도다. 종교사를 읽는다는 것은 낡은 신화를 발굴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문명의 뿌리와 인간 내면의 깊이를 비추는 거울 앞에 서는 경험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동물은 어떤 종교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아마도 동물은 우리보다 더 자기 생명과 일체가 된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생명의 흘러감에 대해 항상 생각하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렇게 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세계 종교의 역사, 리처드할러웨이> 중에서


우리가 할러웨이의 서사를 따라 힌두교의 베다에서 현대의 신종교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함께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인간다움’의 기원을 더듬는 일이기 때문이다. 종교사는 인류의 도덕과 예술, 정치가 태어난 자리이자, 문명이 처음 숨을 고른 장소다. 종교적 맥락을 떼어낸 채 유럽의 중세 미술이나 중동의 오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어딘가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리처드 할러웨이, 『세계 종교의 역사』. 교보문고 제공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는 타자에 대한 근원적 이해에 있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가장 강력하게 형성해 온 장치다. 서로 다른 신념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를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해 온 오래된 습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할러웨이의 『세계 종교의 역사』가 돋보이는 지점은, 정통 신학자가 아닌 신앙의 경계에 서 본 ‘열린 관찰자’의 시선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데 있다.


러웨이는 교리 중심의 설명을 경계하고, 각 종교가 태어난 시대와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뇌를 이야기로 풀어낸다. 종교는 여기서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내야 했던 삶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성공회 주교 출신이라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인간적인 갈망과 숭고함을 함께 바라보며, 종교가 저질러 온 역사적 폭력에 대해서도 조용하지만 분명한 거리를 둔다.


물론 이 책 역시 통사적 저작이 지닌 한계를 피하지는 못한다. 인류 전체의 종교사를 다룬다는 선언과 달리, 서술의 무게중심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로 대표되는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 실려 있다. 동양 종교의 복잡한 사유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토착 신앙은 상대적으로 간략히 다뤄지며, 때로는 서구적 틀 안에서 해석된다. ‘Little History’ 시리즈의 성격상, 각 종교 내부의 깊은 분파 갈등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이 단순화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입문서로서는 충실하지만, 종교가 지닌 실존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리처드 할러웨이의 『세계 종교의 역사』는 끝내 하나의 질문을 우리 앞에 남긴다. 인간은 왜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이토록 오래, 집요하게 갈망해 왔는가. 이 책은 종교가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조용히 경고한다. 결국 종교사를 읽는 일은 타자의 신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의미에 대한 갈증’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할로웨이의 안내를 따라 인류의 영적 지도를 더듬고 나면, 우리는 종교라는 거대한 강이 흘러온 방향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 강이 끝내 향하려 한 곳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라는 바다였음을.



의미를 향한 갈증의 지도


전직 성공회 주교인 리처드 할러웨이는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에 대해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시선에는 종교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하고, 진정한 신자들이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식의 노골적인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종교에 대해 글을 쓰는 이들 가운데에는 개인적 불만이나 상처를 품은 경우가 적지 않다. 신자들은 신의 존재, 혹은 최소한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반대로 극단적인 반종교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이 허황되며 해롭고 때로는 잔혹한 폭력과 살인을 낳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동일한 에너지를 쏟는다.


그럼에도 리처드 할러웨이가 쓴 이 세계 종교사는 세심하게 균형 잡힌 문장과 간명한 서술로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책은 전반적으로 공정하고 차분하다.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모든 종교를 동등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신앙이 지닌 매혹과 위험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그 배경에는 그의 이력이 놓여 있다. 할러웨이는 ‘신앙을 버린 주교’로 잘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전 수장이었던 그는 2000년 사임 이후, 평생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 왔다고 말해 왔다. 현재는 인기 방송인이자 다작 작가로 활동하며,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 밝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종교적 소명에 대해 원망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 책은 수천 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종교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때로는 쇠퇴를 따라간다. 동시에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질문, 우리가 왜 종교를 갈망하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할러웨이는 그 이유를 인류의 기원과 우주 속 우리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 고독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는다. 종교는 공동체 의식을 나누고, 궁극적인 정의의 심판자를 상정하며, 사후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희망에 대한 갈증을 달래 왔다. 그래서 종교의 시작에는 언제나 두 개의 질문이 놓여 있다.


"우주 자체 및 우주가 어디에서 왔는지 하는가?"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질문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반복되었을 것이다. ‘저 너머에는 누가 있는가?’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질문은 같았지만, 대답은 서로 달랐다. 바로 그 차이가 종교사의 탐구를 매혹적으로 만든다. 할러웨이는 기원전 13만 년경, 인류가 죽은 이를 매장하기 시작하며 종교적 믿음의 흔적이 처음 나타난 시점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사이언톨로지스트와 세속적 인본주의자,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연대기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현대 주요 종교의 영향도. Tes.com 제공


이처럼 방대한 주제를 다루는 저자들은 대개 자신이 익숙한 종교나 문화에 무게를 싣기 마련이다. 그러나 할러웨이는 그러한 유혹을 경계한다. 그는 기독교의 여러 분파 사이에서도, 이슬람교와 성공회 사이에서도 편파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종교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려는 태도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다.


그의 시선은 때로 불편할 만큼 솔직하다. 오늘날 중동의 첨예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무함마드가 613년 전파하기 시작한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 요소를 이전 전통에서 가져왔는지, 이슬람교가 유대교에 얼마나 깊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언급하지 않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할러웨이는 그런 침묵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의 메시지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다. 무함마드 역시 본인이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망각한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자 아브라함의 메시지, 즉 우상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신[알라]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no God but God’는 것이었다.”

- <세계 종교의 역사, 리처드할러웨이> 중에서


이 책이 주는 인상은 분명하다. 할러웨이는 신앙을 옹호하지도, 파괴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 왜 끝없이 의미를 찾고, 보이지 않는 것에 기대며 살아왔는지를 조용히 되묻는다. 『세계 종교의 역사』는 신의 연대기가 아니라, 의미를 갈망해 온 인간의 긴 고백에 가깝다.



망치를 닳게 한 모루


리처드 할러웨이는 신의 뜻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주장하며 자신만의 종교를 세우는 이들—대개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는 방대한 사례를 훑으면서도 늘 전체의 윤곽을 놓치지 않는다. 종교는 흔하디흔하다고, 영적 시장에는 언제나 새로운 종교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교리가 기존 체제의 이익과 특권을 위협하는 순간, 판도는 뒤집힌다고 덧붙인다. 예수가 1세기 예루살렘에서, 무함마드가 7세기 메카에서 겪었던 일이 바로 그 증거다. 많은 종교는 시작부터 신흥 이단이었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종교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는 종교가 모든 폭력의 근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 학자들도 있다. 저명한 종교사가 카렌 암스트롱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과거 가톨릭 수녀였던 그는, 이제 한 발 물러서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며 말한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대부분 정치적·사회적·인종적·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되며, 종교는 종종 그 명분으로 호출될 뿐이라는 주장이다.


할러웨이는 암스트롱의 견해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도, 종교 자체를 면책하지는 않는다. 그는 종교가 역사상 최악의 폭력에 기여해 온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신이 우주를 사랑으로 창조한 존재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종교가 신을 오해해 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만 13만 년에 이르는 종교의 역사와 신학을 400쪽도 안 되는 분량에 담으려다 보니, 몇 가지 불균형은 피할 수 없다. 퀘이커교도들이 한 장을 온전히 할애받는 반면, 감리교도와 침례교도들은 소외되었다고 느낄 여지도 있다.


비덴베르크시의 한 성당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는 루터. 크리스천 투데이 제공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정교한 신념 체계를 간결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세부는 종종 희미해진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아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유명한 장면도 그렇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망치를 들지 않았다고 보지만, 할러웨이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 장면을 받아들인다. 결국 종교는 신화와 전설을 사랑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런 선택들은 오류라기보다 학자로서의 태도에 가깝다. 이 책이 우리 시대에 건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종교가 지닌 놀라운 생존 본능에 대한 통찰에서 드러난다. 할러웨이는 종교를 “수많은 망치를 닳게 만든 모루”에 비유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세계 바깥에 놓인 존재와 개념을 언어로 설명하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세계 종교의 역사』는 그 한계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에서, 인간이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이해하려 애써 왔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간략함이라는 이름의 선택


종교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다소 엇나간 기획처럼 보인다. 21세기 서구 사회의 신앙 풍경을 꿰뚫는 통찰은 분명 깊고 날카롭다. 은퇴한 에든버러 주교이자 스코틀랜드 성공회 수장이었던 저자의 경험 또한 문장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디까지나 ‘역사서’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종교의 “간략한 역사”를 쓴다는 것은 본래 무모에 가까운 시도다. 종교는 거대하고, 어쩌면 인류 자체만큼이나 방대하다. ‘종교’라는 개념은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하는지조차 합의된 적이 없다. 마법과 철학, 미신과의 경계는 흐릿하고, 미학과 형이상학, 경제와 정치 사이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 왔다. 그럼에도 할러웨이는 메리 더글러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에밀 뒤르켐, 키스 토머스가 남긴 사유를 거의 호출하지 않은 채 이 과제에 뛰어든다. 여기서 ‘간략하다’는 말은 밀도 높은 압축이라기보다, “그럴듯한 작은 모형” 혹은 “커피 한 잔 분량의 읽을거리”에 가깝다.


이 책은 가벼운 접근을 택한 ‘간략한 역사서’다. 할러웨이의 서술에는 의식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분명한 개신교적 시선이 배어 있다. 그는 종교적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이 인간에게 직접 말하는 계시를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이 지점에서 학제적 비판이 가능해진다. 인류학자들이 주목해 온 의례와 몸의 감각, 집단적 수행의 의미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인간 경험의 여러 층위가 빠져나간다. 그는 신토, 고대 그리스의 다신교, 아메리카 원주민 신앙을 온전한 종교로 간주하지 않으며, 아프리카나 남미의 토착 문화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서술은 대체로 이야기 중심이다. 모든 이야기는 억압적인 사회 질서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한 인물들—이집트의 모세, 예수 그리스도, 무함마드—로부터 시작된다. 이 구도는 메리 튜더 이전의 종교사에서 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여기서 종교는 본래 유익하며, 사회가 경직되고 제도화될 때 비로소 악이 된다. 들을 귀만 있다면 하느님의 목소리는 관대하고 진실하지만, 허영과 독기를 주입하는 것은 인간 사회라는 식이다.


세계 종교의 날 포스터. Freepik 제공


러웨이가 종교의 본질로 붙드는 핵심은 우상 숭배를 금하는 두 번째 계명이다. 위대한 종교 혁명은 언제나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는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 나크를 무함마드나 개신교 개혁자들과 나란히 놓으며, 화려한 종교를 혐오한 인물로 묘사한다. 우상 숭배자를 경멸한 유일신론자였다는 설명이다. 이 책의 중심에 유럽 종교개혁에 대한 찬가가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패하고 우상숭배적인 가톨릭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용감한 개신교도들의 순간은, 저자가 처음부터 향해 온 서사의 정점처럼 그려진다.


물론 할러웨이는 자신의 역사 서술에 깃든 개신교적 목적론을 완화하려 애쓴다. 그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를 성실하게 다루지만, 시선은 기원전 1천년기에 머문다. 이후 중국 사상과 조로아스터교까지 살피지만, 이들 역시 전체 서사 속에서는 막다른 길처럼 처리된다. 유대교는 비중 있게 등장하지만, 기독교의 모태라는 전통적 역할에 한정될 뿐, 예수 이후의 유대교 역사는 빠져 있다.


이슬람교 역시 주로 중세의 한 사건으로 다뤄진다. 할러웨이는 이슬람교의 형성과정에서 폭력적 지하드와 밀수를 무력 충돌의 은유로 제시하며, 지옥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교회의 경전은 공포감 면에서 쿠란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21세기 근본주의를 신학적으로 예비된 결과처럼 암시한다. 이 역사에서 근대성은 주로 미국의 기독교 및 준기독교 운동—퀘이커교, 모르몬교, 여호와의 증인, 사이언톨로지교—의 전개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이 책은 ‘종교의 역사’라기보다, 서구 개신교적 시선이 선택한 종교 이야기의 지도에 가깝다. 간략함은 분명 미덕이지만, 그 간략함이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지웠는지를 함께 읽을 때, 이 책은 비로소 제 자리를 드러낸다.



상징의 옷, 역사라는 이야기


포스트모던적 감수성을 지닌 이들은 역사가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언제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역사 서술은 여전히 섬세한 기술이다. 조악한 역사는 이데올로기를 숨기지 못한 채 드러내고, 진부한 주장을 조악한 문장에 실어 반복한다. 반대로 좋은 역사는 깊은 지식 위에서 작동한다. 과거를 통해 독자의 예상을 뒤집고, 당연해 보이던 장면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사유를 흔든다.


이 기준에서 보면, 유감스럽게도 할러웨이는 아쉬운 역사가다. 문제는 사실 왜곡이나 사료 비판의 부족만이 아니다. 그의 서술은 지나치게 흑백 논리에 기대어, 경건한 개인들이 괴물 같은 국가 권력에 맞서는 동일한 도식을 반복한다. 로마 제국이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이해하지 못해 박해했다는 설명은 나오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위해 집요하게 기록하고 각색하며 서사를 증폭시켰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종교개혁 역시 용감한 신앙이 타락한 가톨릭을 정화하려 한 사건으로 그려지지만, 그 배후에 놓인 사회적·기술적 변화, 이를테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빠져 있다. 반종교개혁 시기 ‘피의 메리’가 영국 개신교도를 학살한 이야기는 강조되지만, 같은 시기 영국 전역, 특히 아일랜드에서 개신교도들이 가톨릭을 잔혹하게 탄압했다는 사실은 침묵 속에 남는다. 이런 사례는 적지 않다.


이 책은 종교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표지에 주요 독자로 명시된 어린 독자들에게는 그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주일학교 설교를 연상시키는 문체는 깊이를 더욱 희석시킨다. “다윗은 위대한 전사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지만, 결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마치 AI 성우가 ‘오늘의 말씀’을 낭독하는 장면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세속적secular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시대’를 의미하는 라틴어 세쿨룸saeculum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eternity에 반대되는 일시적인 시간, 교회와 반대되는 이 세상, 종교적 계시에 반대되는 인간적 사고를 의미하게 되었다."

- <세계 종교의 역사, 리처드 할러웨이> 중에서


그럼에도 할러웨이는 마지막 장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낸다. 그는 종교라는 인간 문화의 가장 기이한 형식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성찰한다. 과학과 자유주의, 세속주의와 종교적 보수주의, 세계적 다양성과 탈식민주의, 그리고 근본주의가 충돌하는 교착 상태를 그는 공감하되 독단 없이 진단한다. 문제의식은 정확하다. 다만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편향된 ‘소규모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더 넓고 관대한 이해에 있을 것이다.


세계 종교의 심볼. 알파위키 제공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종교들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관통하는 공통의 결을 붙잡으려는 시도다. 그 열쇠로 제시되는 개념이 상징(symbol)이다. 종교의 언어를 상징으로 읽을 때, 우리는 다양성 앞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종교를 기의가 아니라 기표로 받아들일 때, 인간 세계 너머의 무엇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는다.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교리와 제도를 아는 데 그치지 않는다. 종교는 단순한 믿음이나 복종이 아니다. 믿음과 복종마저 상징으로 읽을 때, 그것들은 시대를 넘어선 지혜가 된다. 믿음은 자신의 확신과 오만을 내려놓는 일이고, 복종은 나보다 더 큰 실재를 인정하며 한 걸음 물러서는 태도다. 존재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어쩌면 종교란 시대와 문화라는 천으로 재단된, 믿음이 입는 하나의 의복일지도 모른다. 할러웨이가 펼쳐 보인 인류의 영적 지도는 그 의복들의 문양과, 그 옷을 입고 남긴 얼룩까지 함께 보여준다. 서구 중심성과 단순화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건네는 통찰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옷 아래에서 고동치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향한 인류의 공통된 심장 박동을 확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종교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신의 이름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배우는 근원적 겸허함의 연습이다. 할러웨이의 안내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종교라는 정교한 상징 체계들이 결국 ‘나’라는 좁은 세계를 넘어, 저 너머의 신비로 우리를 연결하려 했던 오래되고도 아름다운 시도였다는 사실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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