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존엄성』,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적 서사의 축적이 비교적 짧은 나라 미국은 종종 정체성을 ‘이익의 준거집단’에서 끌어올린다. 그 과정에서 독특한 소속의 형식이 만들어졌다. 도시와 대학, 스포츠팀의 이름이 곧 정체성이 되었고, 로고와 색깔은 충성의 언어가 되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붉은 B가 새겨진 야구모자를 쓰면 노골적인 눈총을 받았고, 보스턴에서는 뉴욕 양키스 로고가 욕설을 불러왔다.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미국 대학이 생산한 로고와 굿즈는 패션이 되었고, 한국의 거리에는 ‘하버드’와 ‘예일’이 넘쳐났다. 소속은 학문이 아니라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설명한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존엄성』에서 그는 19세기 독일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의 구분을 불러온다.
"19세기 독일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Ferdinand Tönnies)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에서 ‘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의 이동이라고 명명했다. 즉 (시골의) 공동 사회에서 (도시의) 이익 사회로의 변화다. 이는 19세기를 살던 수많은 유럽인이 겪은 변화였으며 현재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 중인 사회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 <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프랜시스후쿠야마> 중에서
이 책은 그의 첫 베스트셀러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을 보완하고 수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가볍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논지는 대중의 기억보다 훨씬 승자 중심적이며, 불안을 자극하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자유주의의 자만을 대변했다는 오해, 이라크 전쟁을 부추겼다는 비난, 이후의 혼란을 그에게 전가하려는 태도까지. 후쿠야마는 자신의 주장보다 ‘잘못 기억된 주장’으로 더 자주 호명되어 왔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 진영은 그에게 더욱 날을 세운다. 그는 정치적 경쟁이 거의 끝났다고 보았고, 최근의 사건들을 일시적 변동으로 판단했다. 이런 맥락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존엄성』 서두에서 그가 자신과 『역사의 종말』을 다시 변호하는 장면은 방어라기보다 사유의 이동처럼 읽힌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정지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다.
후쿠야마는 정체성 정치의 출발점을 ‘자아’에 둔다. 정체성은 존엄한 내면의 자아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외부 세계 사이의 긴장에서 생겨난다. 인간은 늘 사회와 충돌해 왔지만, 자아가 본질적으로 존엄하며 사회의 평가 방식이 구조적으로 부정의하다는 인식은 근대에 이르러 분명해졌다. 이제 변화해야 할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규칙이 된다.
책은 자아 개념의 변천을 종교개혁에서 루소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훑는다. 다소 단순화된 서술이지만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그는 새로운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동력을 인정과 존경에 대한 욕망에서 찾는다. 이 욕망은 20세기 후반 교육과 정치의 ‘치료적 경향’ 속에서 증폭되었고, 마침내 과도한 요구로 팽창했다는 진단이다.
물론 논쟁적인 대목도 있다. 그는 민족주의를 “정치적 국경이 문화 공동체와 일치해야 하며, 문화는 주로 공통된 언어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교리”로 규정한다. 타당한 정의이지만,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소속과 감정의 층위를 충분히 담아내기에는 다소 경직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왜 사람들은 로고에 마음을 걸고, 소속을 소비하며, 존엄을 요구하는가. 후쿠야마는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지금도 사회의 표면 아래에서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흔들리고 있다.
열등감에서 태어난 깃발
근대 민족주의의 기원을 더듬으며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호출한다. 헤르더에게 각 공동체는 서로를 모방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였다. 기후와 지리는 관습과 감수성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은 자신이 놓인 환경에 적응하며 각기 다른 ‘천재성’을 길러 왔다. 후쿠야마가 주목하는 장면도 여기에 있다. “독일인들이 프랑스인을 따라잡으려 애쓰기보다,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그 순간에서 그는 근대적 자존감의 출현을 읽어낸다.
이 대목은 민족주의를 둘러싼 흔한 오해와 맞닿아 있다. 민족주의는 종종 “우리나라가 최고다”라는 구호로 이해되지만, 실제 출발점은 오히려 열등감에 가깝다. 이웃 나라의 힘과 성취를 먼저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왜소해 보이는 감정이 생겨난다. 민족주의자는 자국민이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지 못한다고 느끼며 탄식한다. 평범함에 안주하고, 지배에 순응하며, 전통의 쇠락을 방관하고 있다는 자각이 그 감정을 밀어 올린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마이클 콜린스가 낭만적 동지들보다 냉정한 영국 협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 비극적인 사례는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독일이 겪은 굴욕에 분노했고, 미국의 폭력적인 ‘명백한 운명’ 추구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을 전도하려 했다. 민족주의는 이렇게 인정 욕구와 열등감이 뒤엉킨 감정의 정치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민족주의의 부상은 단순한 인정 욕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포퓰리스트와 민족주의자들은 좌파의 다양성 담론을 재빠르게 차용한다. 헝가리와 폴란드는 유럽연합 안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비전을 주장하고, 반이민 정당들은 대규모 이민이 유럽의 수도들을 비슷한 얼굴의 도시로 만들며 고유한 개성을 지운다고 말한다. 특히 유럽의 낭만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전 세계 공공 공간에 로고를 심고, 먼 나라의 세금 정책까지 좌우하는 은밀한 제국주의에 분노한다.
이 지점에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동질화하는 힘에 맞서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협력과 명예, 소속이라는 윤리를 내세워, 권리의 확장과 시장 효율성을 앞세운 자유주의가 약화시킨 충성심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세계화가 소수의 승자에게 과도한 보상을 안겨준다는 진단에서 후쿠야마의 시각은 비교적 익숙하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짚는 그의 태도는 현실적이다.
"오늘날 자유민주 국가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본 이상을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지는 못하다. 국민의 권리가 빈번히 침해되고 법은 부자 및 강자들과 빈자 및 약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으며, 시민들은 참여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참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자유의 목표와 평등의 목표 사이에는 본질적인 갈등이 내재한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자유는 종종 불평등을 심화하고 결과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자유를 감소시킨다. 민주주의의 성공은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들을 최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추는 것에 달려 있다. 즉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이의 균형, 그리고 합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 있는 국가와 그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법과 책임성의 제도 사이의 균형이 관건이다."
– <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프랜시스후쿠야마> 중에서
다만 이 진단은 글로벌 유력 매체들이 주로 비춰 온 지역에 머무른 시야에 가깝다. 급부상하는 글로벌 도시들과 기존 메가시티의 세계화를 더 깊이 들여다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민국가의 시대가 2, 3순위 도시와 지역의 성장에 힘을 실어주었다면, 이제는 서로의 성공에 더 밀접한 이해관계를 맺는 글로벌 도시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 풍경은 어딘가 덜 민주적인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맨해튼에서 점점 보기 어려워진 뉴욕 양키스 팬들의 모습이 문득 겹쳐진다. 소속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형식은, 소리 없이 바뀌고 있다.
존엄이 정치가 될 때, 민족주의의 두얼굴
정치 전공자도, 전문 정치인도 아닌 자리에서 바라본 나의 견해는 후쿠야마의 체계만큼 단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민족주의적 정서는 현대 정치의 일시적 파동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적 특징처럼 보인다. 이는 애국심과 다르다. 평상시에는 이웃과 법을 공유하는 느슨한 관계로 머물지만,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 감정은 곧 정치로 전환된다. 그 틈에서 민족주의는 동원되고, 갈등이 길어질수록 정치의 형태로 굳어진다. 모스크바의 압력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르파 민족주의 전통을 자극했고, 그 결과로 지난하고 이익 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민족주의를 비이성적 감정으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성격이 아니라 목적과 방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민족 자결을 요구하는 힘이 될 수도 있고, 반부패 운동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영토 회복주의나 폭력적 배타성으로 기울 수도 있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이 향하는 정치적 종착지다.
20세기 유럽의 사례는 이를 분명히 한다. 더블린에 자치 의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군사적 정복으로 르비우를 차지하려는 욕망은 같은 범주에 놓일 수 없다. 이들은 다시 유대인 말살과 유럽 정복을 꿈꾸었던 게르만 민족주의와도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모두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지만, 판단의 기준은 전혀 다르다.
후쿠야마를 읽을 때에도 이 구별은 필수적이다. 오늘날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트럼프, 브렉시트, 오르반의 헝가리, 에르도안의 터키, 푸틴의 러시아,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까지 한데 묶인다. 반면 오바마, 메르켈, 유럽연합과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는 또 하나의 덩어리로 처리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프랑스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마크롱은 올랑드보다 이민 문제에 강경했으며, 폴란드는 러시아에 가장 적대적인 국가 중 하나다. 헝가리의 언론 탄압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러시아의 국가 폭력과 동일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
새로운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는 ‘정체성’이라는 고상한 언어보다 더 단순한 조건에서 성장했다. 저비용 이민의 확대, 금융 위기 이후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자유주의 정당들 스스로의 실패가 그것이다. 폴란드 시민 플랫폼의 부패, 헝가리 기존 정치 세력의 무능은 극우의 부상을 설명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된다.
민족주의는 광기가 아니다. 그것은 존엄이 훼손되었다는 감각이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는 방식이다. 문제는 늘 하나다. 그 번역이, 어디를 향하느냐는 것.
매끄러운 정체성의 균열
우리는 민족과 국가, 사회를 말할 때 쉽게 ‘정체성’을 부른다. 정체성은 시간과 상황이 바뀌어도 유지된다고 믿는 핵,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임시적인 답변에 가깝다. 이 질문은 고대의 ‘테세우스의 배’ 역설에서 시작해 오늘의 사회심리학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과 감정의 과잉 속에서 정체성은 더 이상 내면에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호출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것은 진실이라기보다 탈진실(Post-truth)의 언어에 가까워지고 있다.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에 실린 단편 「스무드」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 작품은 한국계 3세 듀이가 출장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며 겪는 짧은 사건에서 출발한다. 서울의 광장에서 그는 우연히 극우 집회를 마주하고,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는다. 사소해 보이는 이 장면에는, 오늘의 세계가 품은 균열이 응축되어 있다. 정체성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 갑작스럽게 부여된다.
소설이 겨누는 질문은 분명하다. ‘인종’이라는 구분은 과연 무엇을 설명하는가. 인간은 단일 종(Homo sapiens)이며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현대 유전학은 인간의 차이가 인종의 경계에서 끊기지 않고, 이동과 혼합 속에서 연속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피부색이나 눈 모양은 전체 유전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프리카 내부의 유전적 다양성이 전 세계 인구 전체보다 크다는 사실은, 인종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조악한 도식인지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인종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인종은 오랫동안 지배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어였고, 객관적 진실이라기보다 권력에 봉사해 온 서사였다. 「스무드」의 듀이가 ‘동양인-한국인’으로 분류되며 동시에 환대와 배제를 경험하듯, 인종은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맥락으로 여전히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인종을 보지 않는다’는 색맹적 선언은 위험해진다. 차별의 역사와 축적된 마찰을 지운 채 동일성만을 말하는 순간, 현실의 고통은 다시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무지의 윤리다.
결국 인종은 과학적으로는 허구에 가깝지만, 사회적 역사 속에서는 무게를 지닌 실재다. 우리는 인간이 단일 종이라는 사실을 붙잡으면서도, 그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불평등의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한다. 정체성은 매끄러울수록 위험해진다. 지워진 맥락이, 언제나 그 아래에서 다시 말을 걸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무게
철학에서 정체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한 개인이 ‘같은 존재’로 남아 있음을 설명하려는 사유에서 출발한다. 존 로크는 정체성의 핵심을 의식, 곧 기억의 연속성에서 찾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잇는 기억의 사슬이 존재를 성립시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정체성은 결코 개인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혈연과 민족, 직업과 사회적 위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고, 그 자각은 삶을 지탱하는 실존적 바탕이 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은 점차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는 언어로 변하고 있다.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는 이성적 토론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라는 확신에 기대어 작동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존엄성』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즉 투모스(Thymos)가 집단적 분노와 결합할 때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감정의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에 디지털 알고리즘이 결합하면, 개인은 보고 싶은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좁은 정체성의 방에 머문다. 이때 정체성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 아니라, 진실을 가리는 필터로 기능한다.
정체성은 본래 단선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역사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 구성된 실재이며,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문제는 이 과정이 성찰을 잃을 때 발생한다. 감정적 자극과 외부의 선동에만 반응하는 정체성은 쉽게 조각나고, 그 파편 속에서 개인은 오히려 더 불안정해진다. 정체성이 실존으로 남을지 허상으로 흩어질지는, 자신을 얼마나 비판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후쿠야마는 이러한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신념에 입각한 국가 정체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구상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보편 규범으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민족과 종교가 지닌 역사적 실체성을 억압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의 통합은 공동체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언어와 기억을 지워내고, 승인된 가치만을 강요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는 민주적 선택의 폭을 좁히고, 특정 이념에 맞지 않는 공동체를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공통의 언어와 경험을 나눠 온 전통적 민족주의가 오히려 사상의 다양성과 실제적 유대를 품을 가능성에 대해, 그는 충분히 응답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다시 묻는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넘어선다. 그것은 “나는 어떤 역사와 맥락을 떠안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에 가깝다. 정체성은 선택된 감정이 아니라 감내해야 할 시간이며, 선언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래서 정체성은 우리를 안락하게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와 다시 마주 서게 만든다. 그 불편함 속에서만 정체성은 탈진실의 가면을 벗고, 하나의 사유이자 삶의 태도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