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의 글쓰기, 어른의 말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 우치다 다츠루

by 박 스테파노

독서의 목적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지식과 인식을 넓히기 위해 책을 펼치기도 하고, 마음을 다독이거나 삶의 균열을 잠시 봉합하기 위해 문장을 빌리기도 한다. 요즘의 독서는 여기에 더해 정보 취득의 도구가 되거나, 경험을 이미지로 치환해 취향을 전시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목적이 무엇이든 한 권을 끝까지 읽고 나면 생각의 잔향이 남는다. 새로운 지식, 성찰의 계기, 방법론의 단서, 혹은 욕망의 충족 같은 것들이다.


요즘 내 독서는 대부분 글쓰기를 위한 준비 작업에 가깝다. 글쓰기의 개념과 이론을 익히기 위해 책을 읽고, 문학과 인문을 사유의 재료로 삼는다. 문학작품은 비평의 대상으로, 인문학 도서는 서평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다 보니 독서의 반응은 자주 한쪽으로 기운다. 비판과 분석의 시선이 앞서면서 감정이 스며들 여백이 줄어든다. 목적 없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숙제처럼 남는 이유다.


그럼에도 목적 가득한 독서가 뜻밖의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분투의 시간을 건너는 이들의 문장을 만날 때, 특히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그렇다. 매일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쓰다 보면, 결과와 반응을 둘러싼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내 글이 어렵고 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방향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런 말을 직접 들을 때의 곤혹은 더 크다. 최근 병증과 관련된 환자 단체 운영자들과의 자리에서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글이 너무 어려워요. 길기도 하고, 그래서 끝까지 읽지 않았어요.”


예전 같았으면 흘려보냈을 말이지만, 속에서는 반박이 움찔거렸다. 당신을 독자로 상정한 글이 아니라고, 복잡한 사유를 쉽게만 대하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저 웃고 말았다. 내 글은 재미없고 어렵다. 흥미와 속도를 앞세운 글을 못 쓰는 것도 아니다. 한때, 술술 읽히는 문장들은 생계의 도구로 삼아왔다. 다만 그 글들에는 영혼이 비어 있었다. 그런 생각이 겹치던 중, 다음 문장을 만났다.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 우치다 다츠루. 교보문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바보의 벽’,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은 고역일 따름입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우치다 다츠루는 우리가 갇혀 있는 ‘언어의 함정’을 말한다. 과거에는 언어 구사력이나 표현력, 어휘의 빈곤, 리듬과 울림의 부재가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의 글쓰기에는 다른 함정이 있다. 그는 이를 ‘평가의 함정’이라 부른다.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내 글이 몇 점을 받을지를 먼저 계산하는 태도. 좋아요와 댓글의 숫자를 확인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마음. 부인할 수 없이, 나의 이야기다.



요동치는 급변 사회, 야위는 언어의 시대


‘급변’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요동치는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다수라는 최대 집단이 가장 먼저 도태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다수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그 흐름에 휩쓸리기 쉽다. 우치다 다츠루는 이를 두고, 심각한 사회 변동이란 다수가 가서는 안 될 곳으로 집단적으로 이탈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말한다. 그 결과 정치와 제도는 삐걱대고, 시스템은 오류를 내며 균열을 드러낸다. 그의 책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는 이런 불안한 세계에서 글쓰기가 나침반이자 감지기, 곧 올바른 방향을 탐지하는 ‘센서’의 감도를 높이는 행위라고 말한다.


문사철을 넘나드는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의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는 고베여자대학에서 진행한 마지막 강의, ‘창조적 글쓰기’를 정리한 책이다. 원제는 『거리의 문체론 街場の文体論』으로, 그의 ‘거리의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저작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글쓰기 담론이 유행하던 시기에 소개되며 다소 마케팅 친화적인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그 내용은 유행과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정년퇴임을 앞둔 마지막 학기의 강의를 토대로 하여, 단순한 글쓰기 기술을 넘어 읽기와 쓰기, 더 나아가 언어적 삶 전반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저자 스스로 “이제까지 우치다 다쓰루가 이야기해 온 것의 종합”이라 말할 만큼, 그의 사유가 응축된 자리다. 한국어판 저자의 말에서 그는 한국과 일본이 처한 언어의 위기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짚는다. 요지는 분명하다. 모어가 앙상하게 야위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어가 야위어 간다는 진단은 영어가 일상의 ‘뉴노멀’로 깊숙이 침투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를 국제화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긍정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연구 통계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회화나 발음, 인식의 측면에서는 향상이 있지만, 언어 능력으로서의 영어 실력은 오히려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모어의 운용 능력이 약화되면서 외국어로 습득하는 영어 또한 함께 흔들린 결과다. 학습 연령을 낮추고 시간을 늘리며 평가 기준을 높였지만, 이는 여전히 반쪽짜리 처방에 머문다.


서울 강서구 엘지아트센터 유플러스 스테이지에서 우치다 다쓰루가 인터뷰 잡지 ‘아이브’ 주최 콘퍼런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브 제공


우치다 다츠루는 단언한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다. 영어 몰입 교육이 전제하는 사고는 언어를 자동차나 계산기처럼 성능 좋은 도구로 오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이기 이전에, 언어로 구성된 존재다.


“우리가 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피이자 살이고, 뼈이자 피부입니다. 얼마나 양질의 언어인가, 어떻게 생긴 언어인가, 어떤 특성을 지닌 언어인가에 따라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 감각,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영향을 받습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모국어가 앙상해지면, 모든 언어적 창조 행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가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시작한 이유 역시, ‘글로벌’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어가 급격히 야위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는 외국어 교육을 부정하거나 폄훼하려는 주장이 아니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우주관과 윤리, 미의식과 조우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어적 편견은 흔들리고, 사고의 지층은 재편된다. 우치다는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경이와 환희를 말한다. 외국어와의 만남은 결국 모어의 운용 능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지적 창조를 통해 모어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 출발점은 언제나 여기라고 그는 말한다.



설명의 거리, 언어의 경의


첫 수업의 문을 열며 그는 뜻밖의 과제를 내준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덜렁거리는 인물’에 대해 글을 써오라는 것이다. 채점 기준도 명확하다. 그것은 ‘설명하는 힘’. 그는 일류 작가에게 예외 없이 이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하시모토 오사무(橋本治),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모두 설명을 잘합니다. ‘설명을 잘하는 작가’를 떠올리면 순간적으로 이 세 작가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설명이라는 능력이 작가적 재능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은 여러분도 잘 아실 테지요.”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설명을 해설이나 줄거리 요약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설명이란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초점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 이 거리 조절은 언어 사용의 핵심이다. 타인과 공감하려면, 나의 시야를 신체에서 떼어내 조망해야 한다. 거기에는 언어만 있고 신체적 실감은 없거나, 혹은 실감만 있고 언어는 없다. 이 불균형의 틈에서 언어는 태어난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는 오직 그렇게만 태어난다. 창조적 언어 활동이란 이 ‘끊임없는 불균형’을 높은 밀도로 유지하는 일이다.


AI 생성물이 넘쳐나는 지금, 사람들은 감상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감상은 거대 언어 모델이 가장 잘 수행하는 영역 중 하나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약한 것은 설명이다. 묘사라 불리는 설명적 서술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며, 그 고유함은 사람마다 다르게 빛난다. 그래서 나는 AI 활용을 고민하는 교수 친구들에게 ‘설명과 묘사’를 반드시 과제로 넣으라고 권한다. 뻔한 감성은 읽고 나면 사라진다.


설명의 달인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 ⓒK.Kurigami


설명이 빠진 글은 번뜩임을 과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독자에 대한 배려나 경의는 사라지고, 글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글은 몇 점짜리인가.’ 우리는 그런 학업 성취의 과정 속에서 길들여져 왔다. 정직하게 쓴 글은 평가가 박했고, 남들이 좋아할 만한 생각을 빌려오면 반응이 좋았다. 이는 독자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를 얕잡아보는 태도다.


우치다 다츠루는 여기에 독자에 대한 경의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대신 존재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공포다. 독자는 읽고 평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위를 거스르면 출판은 멀어지고, 구독과 좋아요는 사라진다. 그러나 공포와 경의는 다르다. 경의란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세요.’라는 태도다. ‘부탁입니다. 좋아요를 주세요.’라는 간청과는 전혀 다르다.


“경의는 ‘나와 독자 사이에 먼 거리가 있다’는 감각에서 생겨납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보통 말투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이 ‘멀다’는 감각이 언어의 창조를 자극한다. 평소 쓰지 않던 언어를 고르고 다듬어 말을 건네는 행위, 그것이 글쓰기다. ‘마음을 다하는 태도’가 독자에게 보내는 경의다. 언어가 얼마나 절실히 건너가기를 바라는지, 그 바람의 밀도가 표현의 창조를 밀어 올린다. 그러나 오늘의 글쓰기와 출판은 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경의를 ‘쉬운 말, 듣기 좋은 말’로 오해한다. 이는 분명한 착각이다.


우치다 다츠루는 오랜 독서와 집필의 시간을 통과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글쓰기의 본질은 ‘독자에 대한 경의’에 있다는 것. 실천의 언어로 말하면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가 글쓰기 수업에서 설명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명이란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일이며, 그 바탕에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놓여 있다. 독자가 기꺼이, 기분 좋게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 설명에 고유하고도 풍부한 색을 입힌다.



기분 좋게 읽힌다는 것


글을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글을 세상에 내보내는 까닭은 하나로 수렴되는 듯하다. 독자가 기분 좋게 읽어 주길 바라는 마음. 다만 여기서 말하는 ‘기분 좋음’은 술술 읽히는 문장이나 시대의 유행에 영합하는 글쓰기를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디지털 환경을 핑계 삼아 글은 더 짧고, 더 쉬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와 익숙한 아포리즘을 늘어놓으며 친근함을 가장한다. 그러나 기분 좋게 읽히는 글은 쉽고 뻔한 글이 아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독자를 싫어하는 저자가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쓰면 좋아하겠지?’ 하고 엷은 미소를 띠는 사람이 전문 작가 중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글을 구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독자를 바보로 아는 책’을 사는 사람은 학창시절에 ‘교사를 얕보고 합격 최저점을 받는 리포트’를 쓴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필시 초록동색입니다. 언어를 발신하고 수신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들은 속이 메슥거리지 않습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우치다 다츠루는 글쓰기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출력하는 일’로 보지 않는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소설을 쓸 때마다 체력을 소진하며 매번 새로 굴을 파고, 그 끝에서 새로운 수맥을 찾아야 한다는 고백—에 깊이 공감한다.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전해지지 않아도 문제지만, 한눈에 다 알아버릴 만큼 쉽게 읽혀도 곤란하다. 이 상반된 요구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점이 글쓰기의 숙명이다. 그 분열을 또렷이 의식하며 써 내려간 텍스트는 아름답다. 경탄이 나올 정도로. 이런 글들은 언어적 모험의 기념비로 문학사에 남는다. 다만 ‘읽기 쉬우면서도 전대미문의 내용을 말하라’는 모순적 요청은 종종 선언문으로만 남는다. 이 모순을 견디는 힘이 곧 글쓰기의 과제이자 수준의 척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치다 다츠루는 ‘애니어그램’, ‘에크리튀르’, ‘읽기 쉬움(readability)’, ‘수신자’ 같은 기본 개념을 되풀이한다. 그는 쉽게 의도된 ‘만인을 향한 메시지’야말로 실은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않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인간은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중요한 말은 놓치지 않는다는 통념과 달리, 우리는 ‘들어도 상관없는 것’을 능숙하게 배제한다.


아기와 엄마 간의 메타 메시지. 베이비뉴스 제공


그래서 타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어렵다. 이때 필요한 것은 ‘메시지의 설정에 관한 메시지’, 곧 ‘액자의 틀’이다. 액자의 틀은 이렇게 말한다. “이 안에 있는 것은 그림입니다. 현실의 사물이 아닙니다.” 이 틀을 보지 못하면 그림도 보지 못한다. 더 나아가 세계 전체를 오인할 위험에 놓인다. 액자의 틀과 틀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은 인간에게 지극히 긴급한 생물적 과제다.


갓난아이는 공기의 파동으로 엄마의 말을 듣는다. 그 의미를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파동과 함께 어루만짐과 돌봄이 반복되며, 그것이 ‘나에게 온 메시지’임을 깨닫는다. 언어 획득의 출발점은 ‘기호’가 아니라 ‘수신자’라는 감각이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거짓의 소산이다. 본 것처럼 착각하고, 들은 것처럼 착각하며 문장을 짓는다. 그러나 이 착각은 ‘이 메시지는 내 앞으로 왔다’는 예비적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 부탁에 응답할 수 있는 이는 세계에서 나 혼자뿐이라는 선택 의식. 메시지는 말한다. 이 일을 수행할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그 순간 수신자는 확신한다. ‘내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존재한다’와 ‘당신이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두 문장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밀어 올린다.



흐름을 붙잡는 언어, 어른의 글쓰기


우치다 다츠루 역시 창작이란 머리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신체적 실감을 동반하며, 그 끝에서 어떤 ‘흐름’과 조우하는 일이라는 점에 깊이 동의한다. 문제는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발명자가 아니라 포착자에 가깝다. 그러나 흐름을 붙잡기 위해서는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는 글쓰기에서 ‘어떤 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과 ‘붙잡기 위해서는 숙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을 빌려 자아의 성립을 설명한다. 자아는 자기 내부에 ‘나는 존재한다’는 실체적 확신이 축적되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의 이미지를 향해 ‘저것이 나다’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자아는 성립한다.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받는 강렬한 보상은 이 ‘자아의 편취’다. 자아를 획득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마치 신의 시점에서 자신을 조망하는 능력을 얻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쾌감을 반복하며 자아를 강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외부와 실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가능한 것은 동일화뿐이다. 가상적인 동일화는 전능감에 가까운 감각을 낳고, 인간은 그 대가를 기대하며 반복적으로 타자와 자신을 겹친다. 성숙이란 이 동일화가 점차 매끄러워지는 과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교적 빠르게 타자와 동일화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이를 ‘어른’이라 부른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우치다 다츠루는 말한다. 어른이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국면에 놓여 있으며, 어디에 위험이 있고 어디에 출구가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입장과 분수를 알고, 자신에게 기대되는 책임의 무게를 인식하는 사람. 이 말들—입장, 분수, 주제—는 모두 공간적 은유다. 자신을 포함한 풍경을 일정한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인식이다. 사회적 성숙이란 신체의 성장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동일화할 수 있는 타자의 수가 늘어나며, 상공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이것이 곧 ‘설명하는 힘’, 대상과의 거리 조절 능력이다.


이 책은 글쓰기의 외피를 두른 ‘어른의 말’에 관한 이야기다. “생성적인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언어가 전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수사적으로 아름다운지, 논리적인지, 정치적으로 옳은지와 무관하게, 전해지는 언어와 전해지지 않는 언어는 분명히 갈린다. 아무리 난해하고 비논리적이어도 전해지는 말은 전해진다. 반대로 명료하고 정확하며 운율이 고운 언어라도 전해지지 않는 말은 끝내 닿지 않는다. 차이는 단 하나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화자의 절박함이 깔려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자신의 말을 건네고 싶다는 필사의 마음이 언어를 움직인다. 언어는 뜻밖의 지점까지 도달한다. 전해지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열의다. 그 열의는 혼신에서 나온다. 메타 메시지는 머리로 꾸민 문장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난다. 언어의 표층이 아니라 언어의 혼에서 온다.


어른의 글쓰기. AI Sora


“언어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모태로 삼아 생성됩니다. 그것을 ‘소울’이라고 불러도 좋고 ‘산 것’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언어야말로 진정으로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뒤흔듭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 김경원 옮김> 중에서


언어의 근원에는 형태 없는 메아리와 떨림이 있다. 그것은 비언어적이며, 때로는 죽은 자에게서 산 자로 건너온다. 언어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을 토양 삼아 태어난다. 그곳에서 길어 올린 말만이 타자의 깊은 곳을 흔든다. 우치다가 말하는 ‘혼’은 관념적 정의와 다르다. 훨씬 생물적이고 역동적인 상태다. 직접 말할 수 없고, 말해질 수 없는 결여의 양태로 전해진다. 집단과 민족, 종족의 소울 역시 그렇게 형성된다고 그는 본다.


일본 사상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시기와 질투를 지나 존경과 경탄에 이른다. 그들은 대중과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도, 전문가들만의 폐쇄적 언어에 갇히지 않는다. 난해한 서구 이론을 집요하게 독파한 뒤, 일반 독자의 언어로 풀어낸다. 철학과 문학을 해설하는 그들의 내공은 경이롭다. 반면 한국에서는 익숙한 철학자의 문장을 아포리즘처럼 늘어놓은 책들이 반복된다.


어떤 학문이 특수한 지식과 기능을 낳았다면, 그것을 전문가들 사이의 서열 경쟁에 소진하기보다, 아직 그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건네는 일 또한 학문의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세계에서 이런 태도는 드물다. 지식은 종종 ‘평가의 언어’로 환원되어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하는 도구가 된다.


자신의 글쓰기가 무겁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혼신의 설명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알아보는 독자는,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 설령 그가 나 혼자일지라도, 충분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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