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끊임없이 “진짜 소년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코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라난다. 이 길어지는 코는 의도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냉정한 진실성의 지표다. 피노키오가 진짜 인간, 곧 ‘진정한 인간(Authentic Human)’이 되는 순간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던 상태를 벗어날 때 비로소 찾아온다. 아버지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사회적 규범을 기꺼이 감당하는 성실성(Sincerity)을 선택했을 때다.
우리는 흔히 진정성을 내면, 특히 감정의 깊이에서 탐색하려 한다. 그러나 이 교훈적 동화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진정성은 마음속을 끝없이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맺는 정직한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1883)은 진정성이 단순한 ‘나다움’의 발견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타자 앞에서 책임을 감수하며 획득하는 ‘진실성’의 과정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
정치인이나 셀럽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하는 행위는 대개 ‘사과’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실시간으로 노출되는 시대에 사과조차 진부한 제스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과의 효용을 가늠하는 잣대로 ‘진정성’을 호출한다. 진정성 있는 사과란 사과하는 이의 진심을 대변할 것이라 기대되지만, 그것이 실제로 받아들여지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말의 효과를 넘어,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진정성’을 판별한다. 이처럼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문화와 경제, 정치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대중문화 기획자이자 컬럼리스트인 에밀리 부틀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에서 풀어낸다. 원제 <This is Not Who I Am>이라는 이 책은, 한글 제목에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독자의 시선을 끈다. 책의 서문을 펼치면 그 선택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곧 이해하게 된다. 부틀은 진정성의 효용보다 그 그늘과 오용에 주목하며, 단어의 정의부터 다시 묻는다.
“진정성은 본래 자유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교리가 될 때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 바로 진정성의 역설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개념에 나는 이의를 제기한다.”
–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첫 문장,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는 문학적 진정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 문학에서의 진정성은 작가가 구축한 비현실적 세계조차 개인의 내면 우주에서 비롯된다는 비평적 전제 위에 놓인다. 어렵게 들리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진정성이란 ‘개인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진리와 그 기준’에 관한 개념이다.
영어 authenticity가 ‘진정성’으로 번역되며 우리말에 정착했지만, 이 단어는 integrity나 sincerity와는 결이 다르다. 후자가 사회적 규범과 계약, 신의의 이행 여부를 가리킨다면, authenticity는 어원인 auto-가 말하듯 ‘스스로’에 방점을 둔다. 자기 소유, 자기 동일성의 달성에 가까운 의미다. 그래서 타자와의 관계보다는 자기 안의 진짜 마음을 지칭하는 데 더 자주 쓰인다.
흥미롭게도 ‘진정성’은 표준어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말이다. 오래 쓰였지만, ‘진정으로’라는 부사에 ‘~성’을 붙여 만들어진 개념어다. 번역의 틈에서 이 단어는 더욱 쉽게 오용된다. 익숙할수록 그 기원을 묻지 않게 되는 법이다.
에밀리 부틀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를 통해 ‘진정성이라는 거짓의 진짜’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예술 미학에서 출발한 이 개념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며 의미를 상실했고, 그 공백을 개인주의의 도덕적 버팀목으로 떠안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오래된 도덕률이 힘을 잃자, 진정성은 그 자리를 대신해 널리 유통되었다. 그러나 그 확산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또 다른 규범의 탄생일지도 모른다.
가짜의 얼굴을 한 진정성
에밀리 부틀이 정의하는 진정성의 첫 번째 의미는 ‘사물의 진정성’이다. TV 쇼 <진품 명품>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듯, 대상이 표방하는 가치의 진위를 판별하는 차원이다. 두 번째는 질적인 의미의 진정성으로, 우리가 흔히 “진정성이 있다”고 말할 때의 공감적 평가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자아의 진정성이다. 웰빙이나 미니멀리즘처럼, 자기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진짜 나’를 찾으려는 태도다. 진실의 기준이 외부가 아니라 자아 내부에 있다고 믿는 경향, 바로 그 지점이다.
문제는 진정성이라는 말이 진실이나 진리의 의미에 기생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진정성을 사실이나 진실 그 자체로 오해한다. 그러나 진정성은 오히려 ‘거짓’이라는 논리 개념에 더 가깝다. 누군가 사과를 했을 때, 그 사과의 진실성은 사실 성실성의 유무로 가려진다. 사과란 본래 상대의 공감과 수긍, 납득을 전제로 성립하는 사회적 규준이기 때문이다.
반면 ‘진정성 있는 사과’는 받는 사람보다 사과하는 자아의 확증에 더 크게 의존한다. 자기 기준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감각이 오갈 때, 진정성은 성립한다. 그 판단은 언제나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와 목격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지점에서 진정성은, 거짓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더라도 솔직해 보이면 충분하다는 태도로 기울어진다. 진정성의 기준은 늘 개인의 자아 내부, 저마다의 나름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 ‘가짜의 진짜’는 쉽게 발견된다. 문화비평가인 에밀리 부틀은 셀럽과 예술의 영역에서 그 단서를 포착한다. 인플루언서 문화와 자서전적 소설·에세이의 유행이 그 대표적 사례다. 과거의 셀럽이 비범한 재능을 지닌 영웅이었다면, 오늘날의 셀럽은 평범한 일상을 전면에 내세운 인플루언서다. 리얼리티 쇼, 블로깅, 그리고 솔직해 ‘보이는’ 일상에 대중은 열광한다. 그 이면에 치밀한 각본과 뒷광고, 가십이 숨어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집단이 아닌 개인의 자아 기준으로 그것을 진정성으로 받아들인다.
“영웅은 큰 사람 Big man이고,
셀럽은 Big name이다.”
-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중에서
1990년대 힙스터들이 주도했던 하위문화에 대한 반발은 그 핵심을 밀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흡수되었다. 드러내는 듯 감추는 브랜드와 트렌드는 일상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며 착각을 낳는다. 인플루언서의 일상이 곧 자신의 내면 자아인 것처럼 느끼는 착시, 이상적 자아를 가상으로 설정해 셀럽과 동기화하는 내적 자기 도취가 진정성이라는 껍질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진정성이란,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착각이 빚어낸 또 하나의 거짓일지도 모른다.
문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전적 이야기가 범람한다. 자전적 에세이, 수기 형식의 수필, 경험에 기반한 소설들이 문단을 채운다. 문학은 본디 비현실을 창조하는 거대한 거짓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러나 자전적 작문은 정반대의 길에 서 있다.
그 성행의 이유는 정보가 과잉된 시대에 경험의 진위를 둘러싼 시비를 피하기 위한 안전한 전략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맹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혼자만을 위한 비밀 일기가 아니다. 누군가 읽어주기를 전제하는 순간, 글은 꾸밈과 허구를 피할 수 없다. 자전적 경험은 하나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기록된 모든 문장과 문단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진정성’이라는 믿음은 이러한 글쓰기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이 된다. 에밀리 부틀은 문학뿐 아니라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진정성의 달콤함, 진실성의 고통
에밀리 부틀이 진단한 ‘진정성에 대한 집착’은 개인의 심리적 취향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문명 전반의 미학적·윤리적 좌표를 이동시키는 하나의 전회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이성적 진실성’과 ‘감정적 진정성’의 충돌이다. 진실성이 객관적 사실과 타자와의 약속을 전제로 하는 외부 지향적 규범이라면, 진정성은 오직 자기 내면의 일관성만을 기준 삼는 내부 지향적 신념이다. 이 둘이 뒤섞이는 순간, 현대인은 진실을 더 이상 검증해야 할 사실이 아니라 느껴야 할 감정으로 오인하게 된다.
문학에서 이 강박은 ‘오토픽션(Autofiction)’과 자전적 에세이의 과도한 비대로 드러난다. 한때 소설은 허구라는 가면을 통해 보편적 진실을 탐색하는 미메시스(Mimesis)의 장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독자들은 작가가 얼마나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가에 열광한다. 물론 아니 에르노가 『세월』(2022)에서 보여준 성취는 사적 기억을 사회적·역사적 층위로 확장한 데 있었다. 그럼에도 대중의 소비 방식은 종종 “이것이 작가의 진짜 경험인가”라는 진위 확인에 매몰된다. 고백의 정치는 이렇게 타자의 자리를 조금씩 지워간다.
“모두에게 진정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갈수록 집착함에 따라, 우리는 예술 전반에 걸쳐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번역될 수 있는 자아의 흔적을 찾는다. … 우리는 예술가들의 작품에 불필요한 추궁을 하게 되었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논쟁하게 되었으며… 때로는 예술을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중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전시할수록, 독자는 고백의 ‘강도’에 압도되어 그 내용의 사실적 정합성을 따질 거리를 잃는다. 미학적으로 보자면, 예술이 진리를 향한 매개가 아니라 자아 숭배의 성소로 변하는 순간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거짓말의 쇠락」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거짓이며, 그 거짓을 통해 진실보다 더 깊은 진실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성에 사로잡힌 현대 문학은 허구할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으며, 객관적 진실성에 이르는 우회로를 차단하고 있다.
영화 미학에서도 이 대립은 선명하다. <타르>(토드 필드, 2022)의 리디아 타르는 예술적 진정성을 권력 남용의 알리바이로 삼는다. 바흐와 베토벤의 진정성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타인의 삶, 즉 진실성을 파괴한다. 이 영화는 ‘진정성 있는 예술가’라는 환상이 어떻게 사실의 왜곡과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냉정하게 드러낸다.
반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하마구치 류스케, 2021)는 진정성이 아니라 진실성에 이르는 길을 그린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연극적 세계에 머문다. 그가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은 내면을 파헤치는 독백이 아니라, 타자 미사키와의 대화, 그리고 연극 대본이라는 외부의 텍스트를 경유하는 고통스러운 수행이다. 이 영화는 진실이란 자기 안에서 캐내는 보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천천히 구축되는 성실한 과정임을 말한다. 부틀의 지적처럼, 진정성에만 매달릴 때 영화는 관음적 리얼리티 쇼로 전락하지만, 진실성에 주목할 때 비로소 세계와 이어진다.
‘진정성’과 ‘진실성’의 층위 차이는 현대 정치의 분열을 이해하는 열쇠다. 진실성이 원본성과 순수성에 집착하는 미학적 태도라면, 진정성은 그 주관적 확신을 공론장에 강요하는 정치적 행위다. 정체성 정치는 종종 “나는 피해자로서의 진정성을 지녔으므로, 나의 주장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흐른다. 이는 한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경고한 ‘같은 것의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다.
진정성은 이제 개인이 세계를 향해 휘두르는 칼날이 되었다. “내 마음이 상처받았다”는 호소는 “그것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무력화한다. 정치는 합의의 기술이 아니라, 누가 더 진정성 있는 분노를 드러내는가의 경연장이 되었다. <This is Not Who I Am>이라는 영어 제목은 이러한 자아 과잉 상태에 던지는 반문처럼 읽힌다. 나를 증명하려는 강박이, 나를 고립된 섬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성은 달콤하다. 복잡한 검증을 건너뛰고 ‘나의 진심’이라는 말 한마디로 도덕적 우위를 선사한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공론장의 토대인 공통 세계를 잠식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정치가 가능하려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실적 진리’가 보존되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자아의 진정성을 잠시 내려놓고, 타자와의 진실성 있는 계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진정성이 “이게 진짜 나야”라는 독백이라면, 진실성은 “우리가 마주한 이 사실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화다. 문학의 허구와 영화의 프레임, 철학의 사유가 향해야 할 곳은 더 이상 진정해 보이는 자아가 아니라, 비정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다. 자아라는 감옥의 창살을 닦기보다, 그 창을 열고 밖으로 나설 용기가 요구되는 시간이다.
자기 돌봄의 이름으로
책의 후반부에서 에밀리 부틀은 진정성을 자아실현이라는 심리학적 범주 안으로 끌어온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돌봄(self care)으로서의 진정성이다. 인터넷 시대의 진정성은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도약이라기보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려는 집요한 태도에 가깝다. 그 태도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을 강조하는 순수성과 고백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소셜미디어가 아이러니와 과잉으로 혼탁해질수록, 한때 자아실현을 암묵적 목표로 삼았던 업로딩과 포스팅, 블로깅, 자전적 에세이는 어느새 고백성사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부틀은 이러한 진정성이 오늘날의 극단적으로 분열된 정치 상황을 부추겼다고 진단한다. 소셜미디어라는 파편화된 매체 환경이 정체성 정치를 가속했고, 진정성은 “이쪽인가, 저쪽인가”라는 분명한 편 가르기를 요구한다.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 젠더와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들은 진정성이라는 명분 아래 끊임없이 대립을 증식시킨다. 변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선언과 함께 말이다.
“진실이 반드시 진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에밀리 부틀> 중에서
문학에서의 진정성은, 설령 거짓이 개입하더라도 전체 서사 속에서 충분히 흡수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거짓을 인정하는 솔직함, 바로 그 태도가 진정성으로 호출된다. 그래서 진정성은 고백의 언어로, 자신의 가식을 인정하는 제스처로 유통된다. 그러나 그 고백이 곧바로 거짓과 가식을 교정하거나 해소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부틀의 질문이 등장한다. “This is not who am I.” 이를 의역하면 “이게 나야?”라는 되물음이다. 이 질문은 결국 오래된 철학적 물음,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우리는 지금, 나의 삶이 남들보다 더 ‘진짜’임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아실현이라는, 실은 무게 없는 말에 눌려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자아실현은 단번에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과 대화하는 긴 과정과 그 결실이다. 진정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 지점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은 어쩌면 성급한 욕심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려는 노력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그 흔적이 바로 철학과 역사, 문학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는 동시대의 사례들을 통해 개념을 정리해 주는 책으로 읽힌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개념서라 할 수 있다. 철학의 쓸모를 환기시키며 쇼펜하우어와 사르트르를 소환하지만, 그 깊이를 단숨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다소 무거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도어 오프너로 개념서를 읽는 선택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다만 그 개념의 정리와 정의가 더 정교하고 포괄적이기를 바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번역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유의 맥락을 온전히 전달하고 문장의 완결성을 지탱하는 번역에 대한 갈증이 남는 독서였다.
※ 이 서평은 이전에 발행했던 서평을 보완 확장하여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