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셀링의 시대, 서사는 어디에

『서사의 위기』, 한병철

by 박 스테파노

현대 철학의 전면에서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라는 선명한 개념으로 동시대의 병증을 집요하게 진단해온 한병철은, 그의 최근 저작 『서사의 위기』에서 우리가 상실한 가장 근원적인 인간성의 토대를 다시 더듬는다. 이 책은 자극적인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향한 복고적 탄식이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범람과 데이터의 파편화 속에서 현대인이 어떻게 자기 삶의 맥락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스토리텔링’이 인간을 어떻게 소비의 질서에 예속시키는지를 냉정하게 해부한다.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의 사유를 비평적 지렛대로 삼아, 정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야기가 지녔던 ‘아우라’와 ‘지혜’가 어떤 경로를 거쳐 소멸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벤야민은 이미 「경험과 빈곤」에서, 근대인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더 이상 말할 이야기를 갖지 못한 채 침묵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전승될 경험이 사라졌다는 그의 통찰은, 단절된 시대의 예고였다.


한병철은 이 문제의식을 디지털 시대로 확장한다. 정보라는 미세한 입자들이 인간의 영혼을 덮어버린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그는 단언한다.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여기서 정보와 서사의 대립은 단순한 매체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둘러싼 충돌로 확장된다. 서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으며 삶에 방향을 부여한다. 반면 정보는 ‘지금, 여기’의 자극만을 증폭시키며 우리를 끝없이 갱신되는 현재 속에 가둔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서사의 위기』. 연합뉴스, 교보문고 제공


서사의 실종은 결국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라는 기형적 형식을 낳는다. 오늘날의 스토리텔링은 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인간을 고양하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는 장치로 전락했다.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 이 서사는,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할 능력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그 종착점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법을 잃은 채, 주입된 정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기계적 존재들만이 남는다.


한병철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정보의 소음 속에서 무작위성에 몸을 맡기지 않고 서사라는 이름의 닻을 내리는 법을 다시 묻게 된다. 이는 문학의 회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선 문제다. 그것은 “하나의 문제에서 또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연약하고 적나라한 ‘생존’”으로부터 벗어나, 삶에 다시금 아우라를 부여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서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다시 산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보의 사막에서 서사를 찾는 일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 『서사의 위기』, 한병철


한병철이 던진 이 서늘한 선언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의 중심을 정확히 겨눈다.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소비하고 유통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메마른 의미의 사막을 걷고 있다. 한병철은 이 지점에서 스토리와 서사를 단호히 구분하며 사유의 출발선을 긋는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정보는 찰나의 새로움에 기대어 생존하는 존재다. 그것은 확인되는 순간 효력을 다하고, 곧바로 무의미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부재중 메시지와 닮아 있다. 정보는 쌓이지만 응축되지 않는다. 축적은 이루어지되, 삶을 관통하는 무게로 변환되지 못한 채 다음 자극을 위한 연료로 소모될 뿐이다.


이에 비해 서사는 시간을 다루는 힘을 지닌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하나의 유기적 선으로 엮으며, 단절된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한다. 서사는 삶에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장치다. 정보가 시간을 잘게 쪼개어 우리를 끝없는 ‘업데이트의 강박’ 속으로 몰아넣는다면, 서사는 삶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며 존재를 깊은 심연에 머물게 한다. 정보 체제에서 시간은 점들의 나열로 흩어지지만, 서사 안에서 시간은 흐름을 얻고 비로소 역사가 된다.


정보 체제에서 시간은 점들의 나열로 흩어지지만, 서사 안에서 시간은 흐름을 얻고 비로소 역사가 된다. AI Sora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서사 위기는 단순한 문학 형식의 쇠퇴가 아니다. 그것은 곧 삶의 위기다. 자신만의 고유한 맥락을 잃은 채, 디지털 플랫폼이 던져주는 다음 이슈에 위태롭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더 이상 살아 있음의 형상이 아니다. 목적지를 잃고 파도에 떠밀리는 조난자의 모습에 가깝다. 정보의 쓰나미는 우리의 주의력을 잘게 분절시켜, 긴 호흡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관조적 머무름’의 능력을 조직적으로 훼손해 왔다. 관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즉각적인 반응과 자극에 대한 갈증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언어화하는 능력을 점차 상실해 간다. 알고리즘이 제공한 문장과 정서를 반복 재생하는 앵무새처럼, 겉으로는 끊임없이 소통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으로 말라간다. 이러한 생존의 상태는 필연적으로 심리적 탈진과 깊은 소외를 동반한다.



서사가 실종된 사회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가 아니라 정보를 사냥하는 포식자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 사냥에는 결코 충족이 없다. 정보는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를 가지기에, 우리는 만족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다음 자극을 향해 디지털 공간을 표류한다. 한병철은 “정보의 쓰나미는 주의를 파편화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무름을 방해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방해가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진정한 소통은 타자의 이야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스마트한 지배는 침묵과 머묾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게시하고, 공유하고, 반응하며 자신의 삶을 ‘스토리’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전시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스토리는 타자와의 깊은 연대를 향한 서사가 아니라, 소비를 목적으로 한 ‘스토리셀링’의 도구에 가깝다. 우리는 자신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고유한 아우라를 외면한 채, 무작위적인 데이터의 흐름 속에 자아를 내맡긴다.


결국 서사의 회복은 코앞의 자극을 좇는 시선에서 한 발 물러서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삶을 먼 거리에서 다시 조망할 수 있는 서사적 근력을 되찾는 일, 그것이 정보의 소음 속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가장 느리고도 근본적인 길일지 모른다. 서사가 돌아오는 순간, 삶은 다시 ‘소비되는 현재’가 아니라, 견디고 통과하며 건너갈 수 있는 시간으로 모습을 바꾼다.


헤로도토스가 전한 사메니투스 왕의 일화. AI Sora



멀리서 오는 지식, 침묵 속에 남는 이야기


한병철이 소환하는 발터 벤야민은 정보와 지식의 결정적인 차이를 ‘원격성’이라는 공간적·시간적 은유에서 포착한다. 벤야민의 사유 체계에서 지식은 언제나 ‘멀리서’ 도착한다. 이 원격성은 지식이 지닌 본질적 성질이다. 여기서 멀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경험의 깊이, 그 안에 퇴적된 시간의 무게를 가리킨다. 지식은 곧 세월을 통과해 오는 것이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이에 비해 현대의 정보는 바로 다음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단편적 단서만을 제공하며, 즉각적인 공감을 요청하는 데 급급하다. 정보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소멸을 향해 질주하고, 소비되는 즉시 무의미한 소음으로 흩어진다. 반면 서사적 지식은 한 순간을 넘어서 다가올 시간과도 연결되는 폭을 지닌다. 그래서 지식은 언제나 풍요로운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 앞에 도착한다.


서사적 지식에는 절제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는다. 한병철은 헤로도토스가 전한 사메니투스 왕의 일화를 통해 서사적 긴장의 본질을 짚어낸다. 포로가 된 사메니투스 왕은 자식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 앞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이후 늙고 허약한 하인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비로소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울음을 터뜨린다. 헤로도토스는 왕이 왜 하인을 보고서야 슬픔을 표출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바로 이 ‘설명의 부재’가 이야기를 수 세기 동안 살아남게 하는 발아력을 부여한다.


벤야민은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힘을 발견한다. 이야기는 모든 의미를 노출하지 않은 채, 그 핵심을 내면에 응축한다. 그러다 독자가 처한 삶의 국면에 따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시금 새로운 의미로 펼쳐진다. 서사는 완결되지 않기에 살아남는다.


그러나 현대의 정보 체제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설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내려 한다. 설명된 삶에는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니라, 흩날리는 티끌로 남을 뿐이다. 지혜는 본래 이야기되는 진리였지만, 정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지혜는 사멸하고 그 자리를 효율적인 ‘문제 해결 기술’이 대신한다. 우리는 조언을 나누던 이야기 공동체를 잃고, 각자의 디지털 블랙박스 안에서 알고리즘에 조율되는 고립된 개체가 되었다.


발터 벤야민. 위키디피아


이러한 서사적 진폭의 상실은 결국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진다. 과거의 이야기 공동체는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삶의 방향에 대해 조언을 건네는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조언이란 단순한 해법이 아니라, 한 삶이 어떻게 이어지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에 몰입해 머무르기보다, 각자의 디지털 공간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생산하고 소비한다.


정보의 쓰나미는 관조적 머무름을 방해하고 주의력을 파편화하며, 우리를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력에 끌려다니는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조언을 구하지도, 지혜를 나누지도 않는다. 대신 숫자가 제시하는 상관관계에 의존하며, 스스로를 관리 가능한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한다. 서사가 침묵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존재의 아우라를 잃고, 설명 가능한 기능으로만 남는다. 지식이 멀리서 오지 않는 세계에서, 삶은 더 이상 깊이를 축적하지 못한 채 소모된다.



팔리는 이야기, 사라지는 기억


신자유주의는 서사를 하나의 상업적 무기로 변질시켰다. 한병철은 이를 ‘스토리셀링’이라 명명하며, 그것이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집요하게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스토리텔링이 자본주의의 달콤한 유혹으로 작동하는 순간, 서사는 더 이상 삶을 관통하는 의미의 구조가 아니라 상품이 되고, 인간은 고유한 존재가 아닌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디지털 플랫폼은 서사적 응축의 장이 아니라 첨가와 나열의 공간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는 이야기라기보다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의 연쇄에 가깝다. 그 안에는 삶의 무게도, 시간을 통과한 성찰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 『서사의 위기』, 한병철


인간의 기억은 망각과 선택을 통해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빚어낸다. 기억은 모든 것을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얻고, 삶을 예술로 변환한다. 그러나 디지털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려 들며, 그 과잉 속에서 오히려 기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노말리사>(찰리 코프먼, 2015)의 주인공 마이클 스톤이 자기 입이 스스로 말을 쏟아내는 장면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히듯, 우리 역시 자유라는 가면 뒤에서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되어간다. 투명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비밀과 베일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정보로 환원된 ‘차가운 외설’로 남는다. 포르노가 곧장 본론으로 돌진하듯, 정보는 서사적 우회를 삭제한 채 자극만을 사냥한다.


이야기의 힘. AI Sora


서사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길은 다시 ‘이야기하는 존재’로 회복되는 데 있다. 한병철은 벤야민이 그려낸 치유의 풍경을 불러온다. 병든 아이 곁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영혼을 어루만지며 근원적인 신뢰를 회복시키는 행위다. 모든 질병은 내부의 막힘을 드러내고, 이 막힘은 이야기의 리듬 속에서 서서히 풀린다.


“이야기하는 손은 긴장, 정체되어 막힌 것, 경화된 것을 풀어준다. 그리고 사물을 다시 안정시킨다. 즉 다시 흐름 속으로 돌려보낸다.”

― 『서사의 위기』, 한병철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보여주듯, 진정한 경청은 타자의 시간을 ‘좋은 시간’으로 바꾸는 힘을 지닌다. 서사는 고립된 개인들을 느슨하지만 단단한 ‘우리’로 엮어내는 정치적 토대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정치적 행위는 이야기될 수 있을 때에만 지속성과 응집력을 획득한다.


코앞의 이슈에서 한 발 물러서, 먼 거리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아우라를 획득한다. 행복은 찰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로 길게 뻗어 있는 시간의 꼬리를 지닌다. 우리는 파편화된 정보를 사냥하는 일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다시 서사적으로 엮어낼 용기를 요청받고 있다. 이야기를 회복하는 일은 곧 인간으로 남기 위한 가장 느리고도 단단한 저항이다.



인내의 근육, 다시 이야기를 말할 때


『서사의 위기』 역자 서문에 인용된 피터 한트케의 문장은 사뭇 비장하다. 그 짧은 언술은 서사가 결코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지루함을 통과하게 하는 실존의 근육임을 단번에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인내’ 대신 ‘접속’을, ‘머무름’ 대신 ‘클릭’을 택하며, 스스로 서사적 동력을 마모시키는 쪽을 선택해 왔다.


"보라, 이야기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

– 페터 한트케, 『서사의 위기』의 역자 서문


이 문장은 서사가 여가의 장식물이 아님을 선언한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인내를 전제한다. 그러나 일단 완성된 이야기는 다시 인간이 삶을 버텨낼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구조가 된다. 인내는 이야기의 조건이며, 이야기는 다시 인내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디지털 정보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순환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서사적 머무름이 요구하는 기다림 대신 즉각적인 ‘접속’을 선택하고, 응시와 숙고가 필요한 자리에서 가벼운 ‘클릭’을 반복한다. 이 선택은 효율적이고 편리해 보이지만, 실상은 내면의 서사적 근육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접속과 클릭은 우리를 방대한 데이터 망에 연결하지만, 정작 우리 삶을 관통하는 고유한 맥락과는 거리를 벌린다. 정보의 사막에서 우리는 더 많이 연결될수록 더 깊이 고립되고, 더 활발히 소통할수록 더 큰 공허를 경험한다.


서사의 실종은 지식의 구조적 변형과 맞물려 있다. 한병철은 크리스 앤더슨이 「이론의 종말」에서 제시한 데이터 중심 세계관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시대에, 전통적인 이론과 개념은 쓸모없는 유물처럼 취급된다. 빅데이터는 ‘어째서(Wieso)’라는 질문을 삭제하고, ‘그냥 그렇다(Es-ist-so)’라는 무표정한 상관관계로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러나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일 뿐,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도록 이끌지는 못한다. 이론이란 단순한 가설의 집합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서사적으로 배열하여 세계에 맥락을 부여하는 하나의 이야기다.


AI는 서사를 삼켜 버린다. AI Sora



이론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데이터 기반 예측 모델은 인간을 이해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조정 가능한 수치로 축소한다. 알고리즘이라는 블랙박스에 삶의 제어권을 넘겨준 인간은 더 이상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위력에 끌려다니는 꼭두각시가 된다. 철학의 위기는 곧 이야기할 용기의 위기이며, 이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서술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포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서사의 회복은 단순히 문학적 감수성을 되찾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이며 실존적인 결단에 가깝다. 서사 속에 존재의 닻을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마비시키는 정보의 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병철의 통찰대로, 서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의 전제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적 행동을 이야기의 차원에서 사유했듯, 응집력 있는 서사가 뒷받침될 때에만 우리의 행위는 우연한 반응을 넘어 역사로 남는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묘한 힘을 부여한다. 정보가 우리를 영구적인 현재 속에 가두고 미래를 끝없는 업데이트의 반복으로 축소한다면, 서사는 먼 곳을 향한 시선을 회복시켜 희망을 가능하게 한다. 아우라를 지닌 미래는 오직 서사적 장력을 통해서만 도래한다.


정보의 사막을 표류하는 우리가 지금 길어 올려야 할 것은 더 정교한 데이터도, 더 빠른 전송 속도도 아니다. 그것은 무분별한 정보의 파편 아래 묻혀버린, 우리 삶의 고유하고 단단한 문장들이다. 그 문장들이 다시 이어져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생존’의 늪을 건너 ‘삶’이라는 이름의 대지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이야기할 용기, 철학의 마지막 닻


『서사의 위기』는 우리에게 단순히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할 용기’를 요구한다. 인공지능이 개념 없이도 작동하고, 빅데이터가 인과가 아닌 상관관계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시대에, 철학은 다시 서사적 성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론이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다. 한병철의 진단처럼 오늘날 서사의 위기는 곧 철학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사유란 결국 이야기를 거쳐 나아가는 위험한 모험임을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서사 속에 존재의 닻을 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정보의 소음에서 벗어나 타인과 깊이 연결되고 미래를 희망할 수 있다. 서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의 전제이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간만의 고유한 힘이다. 정보의 사막에서 우리가 길어 올려야 할 것은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잊혀졌던 우리 삶의 고유한 문장들이다.


난독을 뚫고 읽어낼 힘이 필요하다. AI Sora


한병철의 저서가, 그리고 대개의 철학서가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역설적이다. 그 문장들이 지나치게 ‘투명’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사의 위기』를 포함한 그의 저작들은 일상적인 단어를 철학적 개념으로 전도시켜 사용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투명성’, ‘피로’, ‘서사’라는 말은 그의 문장 안에서 서구 철학사의 거대한 맥락을 응축한 암호가 된다. 독자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철학적 함의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더구나 그는 헤겔, 하이데거, 벤야민의 사유를 에스프레소처럼 농축해 제시하기에, 행간에 잠긴 사유의 빙산을 보지 못하면 문장은 단편적인 격언으로 흩어져 보일 뿐이다.


철학서가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정보’가 아니라 ‘지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즉각적인 이해와 소비를 목표로 하지만, 철학은 관조적 머무름과 인내를 요구한다. 빠른 처리에 길들여진 우리의 뇌는 멈춰 서서 되새김질해야 하는 철학적 문장의 리듬에 저항하며, 이를 ‘난독’이라는 통증으로 경험한다.


여기에 번역과 중역의 과정을 거치며 생기는 의미의 굴절이 또 하나의 장벽으로 덧붙여진다. 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로 저서를 독일어로 쓴다. 국내에 소개된 모든 책들은 번역의 손을 거친다. 여기에서 또 일반 대중들의 문해와 틈이 벌어진다. 학술서와 철학서 번역이 연구자와 학자의 영역으로 고착된 현실 속에서, ‘서사의 위기’라는 제목은 오히려 역설처럼 다가온다.


그럼에도 이 고통스러운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서사가 사라진 시대에 철학은 우리가 ‘데이터 기록’이나 ‘알고리즘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거의 유일한 닻이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비판대로, 오늘의 사회는 우리를 ‘벌거벗은 생존’의 상태로 몰아넣으며 무의미한 소통과 소비의 순환 속에 가둔다. 철학서를 읽는 행위는 이 정보의 쓰나미에 몸을 맡기는 대신, 자신만의 맥락과 아우라를 되찾으려는 실존적 저항이다.


난해한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는 시간은 파편화된 주의력을 다시 엮고, 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야기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가깝다. 철학은 효율적인 문제 해결의 기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삶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빚어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텅 빈 삶’을 채울 고유한 문장들을 발견한다. 철학서를 읽는다는 것은 자본이 설계한 ‘스토리셀링’의 그물을 찢고, 자기 삶의 서사적 동력을 회복하려는 가장 고결한 투쟁이다.


철학의 난독을 넘어서는 길은 강단에 머무는 전문 학자의 번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장의 결을 살릴 수 있는 문장가와 작가들이 역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이는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에서 강조한 ‘서사의 복원’을 실천으로 옮기는 중요한 경로가 된다.


철학의 난해함도 이야기의 힘으로 깨보자. AI Sora


철학은 체계화된 학문 이전에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유를 남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철학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렌즈를 깎았고, 존 로크는 의사이자 공무원이었으며, 발터 벤야민은 대학에 정착하지 못한 채 기고가이자 문장가로 살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역시 교사와 정원사, 건축가로 일하며 사유를 밀고 나갔다. 이들에게 철학은 논문의 형식에 갇힌 지식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서사적 투쟁이었다.


학문적 엄밀함에만 매달린 번역은 종종 텍스트가 지닌 서사적 호흡과 아우라를 제거해 버린다. 반면 작가적 감수성을 지닌 번역은 철학자의 사유를 독자의 삶과 접속하는 살아 있는 문장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를 철학적 사유라는 모험에 초대하는 서사적 연대를 만들어 낸다. 철학이 직업이 아니라 태도이듯, 번역 또한 정보의 이전이 아니라 서사의 전승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직업군으로서의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텍스트의 심연을 응시하고 그것을 고유한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철학적 태도다. 문장가들이 길어 올린 사유의 문장들은, 현대인이 상실한 ‘관조적 머무름’의 시간을 회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수요일 연재
이전 02화역사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