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유시민
인문학이 유행이라는 말이 진부해진 지도 오래다. 식자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조금쯤 아는 티를 내야 한다는 분위기도 낯설지 않다. 그럴 때면 으레 동서양 고전을 읽으라는 조언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말은 쉽다. 소위 인싸가 되고 싶은 마음이나 내적인 수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반쯤 안고 고전을 펼쳤다가, 오히려 깊은 좌절을 맛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의 독해 능력을 탓하거나 문장이 엉터리라고 분개할 필요까지는 없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던 수많은 ‘인문학 특강’이야말로, 오히려 인문학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 주는 반증이라는 말을 어느 날 노교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천년의 사유를 두 시간 남짓한 강연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겸허의 마음, 서두르지 않고 집중해 읽으려는 태도에서 인문학은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인문학 교양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 세대 이전의 번역이거나, 불가피하게 제3의 언어를 거친 중역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많은 고전은 그 시대의 공기와 지역적 특성,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좀처럼 페이지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적 교양을 쌓거나 외부 활동을 위한 지적 자산을 보충하겠다는 이유로 고전을 읽고자 한다면, 나는 종종 ‘역사서’를 권한다. 그 추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지금, 여기, 나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애쓴다. 인문학을 향한 동기가 인싸가 되기 위한 가벼운 욕망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지금, 여기,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자리한다. 그 질문에 대한 갈급함이야말로 인문학의 심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의식을 탐구하는 철학과 심리학을 읽고, 인간 활동의 미적 구조를 사유하는 미학을 더듬는다. 이야기를 만들고 서사하려는 욕망을 따라 문학으로 향하고, 물질의 근본과 논리의 증명을 위해 과학을 공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들이 쌓여 만들어진 제도와 관습, 규범과 법칙, 문화와 기술은 우리의 취향대로 선택하거나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나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고, 때로는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가 된다.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 물음에 닿기 위해 역사를 읽는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읽는 재미에 있다. 다른 인문학서를 펼쳐 들고 목차를 넘기지 못한 채 책꽂이에 고이 모셔 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분명 한글로 쓰인 문장인데도 같은 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다 이내 멍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며, 그들의 생각과 선택, 행동이 빚어낸 흥망성쇠와 기승전결을 품은 서사다.
먼 나라의 옛이야기처럼 보이면서도, 지금 내가 발 딛고 사는 이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인물과, 언젠가 지도에서 짚어 본 기억이 있는 지역들이 등장한다. 그 안에는 늘 인간의 의지와 모험이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에 자연스레 끌리고, 과거의 장면을 통해 오늘의 나를 비추며 내일의 우리를 가늠해 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읽고, 그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사유하는 일은 분명 값진 경험이다.
좋은 소설이 독자에게 지속적인 집중을 요구하며 팽팽한 긴장의 실을 엮어 가는 작업이라면, 역사서는 다채로운 색의 짧은 실들로 카펫을 짜는 일에 가깝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하지 않더라도, 간헐적인 독서만으로도 충분한 사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고전을 읽어야 한다면 우선 역사를 펼쳐 보라고 조심스레 권하고 싶다.
시간을 건너는 대화, 역사를 읽는다는 것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표를 외우고 승자의 기록을 답습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의 두께 속에 묻힌 수많은 삶을 호출해 현재의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에 가깝다. 그 대화는 차갑기보다 뜨겁고, 정보라기보다 질문에 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하나의 인문학적 제의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이 물음에 정면으로 응답하려는 메타 역사서다. 이 책은 사건을 서술하기보다, 역사를 서술해 온 ‘역사가’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신을 따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에서 현대의 유발 하라리에 이르기까지, 인류 지성사의 별들을 하나의 성좌로 엮어 보려는 야심이 이 책의 밑그림이다.
'르포는 저널리즘(사실 보도), 역사 서술(과거 사건에 대한 이야기), 문예 창작(예술적 감정표현)을 넘나드는 문학 장르다.'
-『역사의 역사』, 유시민-
『역사의 역사』는 흔히 말하는 인문학 교양을 위해 가볍게 집어 드는 ‘역사서’는 아니다. 저자 역시 서문에서 이 책을 ‘역사 르포르타주(reportage, 르포)’로 읽어 주기를 요청한다. 이 책은 완결된 역사서라기보다, 본격적인 ‘역사서’를 만나기 위한 정제된 안내서에 가깝다.
인문학적 독서의 관점에서 이 책을 비평적으로 조망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저자가 견지하는 ‘서사’와 ‘공감’이라는 두 개의 축이다. 그는 역사가 과학적 엄밀성만으로는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역사는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인간에게 말을 걸어야 하며, 이러한 신념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 역사가들의 목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저자가 요약해 둔 고전의 내용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왜 이 역사가들이 호출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저자가 도달하고자 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더듬는 과정이다. 이 비평 역시 ‘서사로서의 역사’와 그 이면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공감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역사를 사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해 온 과정을 서술한 문자 텍스트로 정의하면서, 그것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주체에 따라 ‘역사가’와 ‘역사학자’를 구분한다. 명확한 경계는 없지만, ‘역사학’이 학문이라면 ‘역사 서술’은 예술에 가깝다고 그는 말한다.
이 문제의식은 에드워드 H. 카의 유명한 테제와 맞닿아 있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는 『역사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유시민은 랑케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사학, 즉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건조한 사실의 나열보다 역사가의 해석과 문체가 살아 있는 서사를 분명히 선호한다. 이는 역사를 과학의 영역에서 문학의 영역, 혹은 그 경계로 끌어오려는 시도다.
이 여정은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대비에서 시작된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의 정확성’을 중시한 투키디데스보다, 때로는 허황된 이야기조차 마다하지 않으며 당대의 풍속과 사람들의 삶을 생생히 전하려 했던 헤로도토스에게 저자가 더 깊은 애정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유시민이 생각하는 역사의 효용이 ‘교훈’이나 ‘전략’이 아니라 ‘이해’와 ‘재미’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지닌 산만함 속에서, 서로 다른 문명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 했던 관찰자의 호기심을 읽어 낸다. 반면 권력 투쟁과 전쟁의 인과를 냉정하게 분석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건조한 리얼리즘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태도는 역사를 ‘과거 정치의 기록’으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 삶의 총체적 기록’으로 확장하려는 인문학적 의지의 표현이다. 역사가 지배층의 권력 다툼에 머문다면, 그것은 대중의 삶과 단절된 박제된 지식에 그칠 뿐이다.
인문학이 인간의 무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유시민의 이러한 접근은 지극히 인문학적이다. 그는 역사서의 미덕으로 ‘사실의 정확성’에 더해 ‘서사의 아름다움’과 ‘감정적 공감’을 꼽는다. 이 책에서 저자의 감정이 가장 깊이 이입되는 대목은 동양의 역사가 사마천을 다룰 때다.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이라는 치욕을 겪고서도,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삶을 놓지 않았던 사마천의 이야기에 저자는 오래 머문다.
사마천에게 역사는 객관적 사실의 배열이 아니라, 부조리한 권력과 비정한 운명에 맞서는 ‘발분(發憤)'의 서사였다. 저자는 『사기』의 「백이 열전」을 인용하며, “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라는 질문이 2천 년의 시공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는 역사가가 물리적 사실을 넘어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주관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극적인 사례다. 랑케식 실증주의가 배제하려 했던 역사가의 ‘감정’이야말로, 역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임을 유시민은 사마천을 통해 증명해 보인다.
서사의 광장에서 역사를 다시 묻다
이 책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중화 중심의 역사관을 병치하고, 더 나아가 이를 하나의 사유 지평 안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에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나란히 놓아 서양 역사 서술의 기원을 더듬는 한편,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을 통해 이슬람 문명권이 구축해 온 독자적인 역사 인식을 호출한다. 특히 이븐 할둔의 등장은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낯선 충격을 안기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킨다.
이븐 할둔은 『역사 서설』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를 ‘아사비야(Asabiyyah, 연대 의식)’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역사를 직선적 진보가 아닌 순환의 구조로 파악했다. 유시민은 신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중세에 사회구조적·환경적 요인을 통해 역사 법칙을 사유하려 했던 이븐 할둔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이는 역사가 영웅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집단의 결속과 사회적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는, 현대 사회학적 통찰의 선구적 장면을 드러낸다.
서구 근대 역사학이 태동하기 훨씬 이전, 사막의 학자가 길어 올린 이 냉철한 통찰은 독자에게 서구 중심주의라는 익숙한 안경을 잠시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 저자는 낯선 이론을 자신의 언어로 차분히 풀어내며, 역사가 시간의 연쇄뿐 아니라 공간의 다양성 위에서 읽혀야 함을 강조한다.
근대 역사학으로 시선을 옮기면, 저자는 랑케의 실증주의와 E.H. 카의 상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지만, 무게추는 분명 카 쪽으로 기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명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과 깊이 맞닿아 있다. 유시민은 랑케가 꿈꾸었던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신기루에 가깝다고 본다. 모든 역사 서술은 선택과 배제, 해석의 과정을 통과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좋은 역사서는 역사가의 사관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역시 비판적으로 호명된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고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본 통찰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인간의 개별적 의지와 우연성을 과도하게 소거했다는 한계도 함께 지적된다. 그럼에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시선에서 역사를 다시 쓰려 했던 마르크스의 태도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인문학적 가치로 남는다.
그러나 저자의 시선은 고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언급하며, 전통적 역사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물학·지리학·인류학이 결합하는 ‘빅 히스토리’의 흐름을 포착한다. 역사가 이제 문헌 고증의 울타리를 넘어 과학적 통찰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다만 저자는 여기서도 과학적 결정론에 안주하지 않는다. 물질적 환경이 역사의 큰 흐름을 형성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시 한 번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호출되며, 역사의 외연은 생물학과 지리학, 나아가 뇌과학으로까지 확장된다. 문헌에 매달리던 전통적 역사학이 과학과 조우하면서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둘러싼 더 거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융합적 접근이 주는 지적 쾌감을 긍정하면서도, 그 사유가 전부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한다.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왜’를 끝까지 대답해 주지 못하며, 인간의 ‘도덕적 선택’을 대신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라리가 지적했듯,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허구를 믿고 협력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유시민은 이 지점에서 역사가 바로 그 ‘허구’, 곧 인류를 하나로 묶어 온 공동의 기억이자 이야기임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다.
역사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의 역사서
물론 이 책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방대한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는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독서 노트나 요약에 머문 인상을 주고, 서구와 중국을 제외한 제3세계의 역사, 여성사나 미시사적 관점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저자 특유의 계몽적 어조가 독자에 따라서는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의 역사』가 지닌 미덕은 이러한 한계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난해한 역사 철학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고, 자신의 독서 경험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독자를 역사 사유의 장으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를 박물관의 진열장에서 꺼내 시민들이 토론하는 광장으로 옮겨 놓는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독서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가들은 각자의 시대와 맞서며 그 답을 찾으려 했던 구도자들이었다. 헤로도토스의 호기심, 사마천의 한 맺힌 절규, 이븐 할둔의 냉철한 분석, 마르크스의 혁명적 열정, 하라리의 과학적 상상력은 모두 인간을 이해하려는 서로 다른 방식의 몸부림이다. 유시민은 이 상이한 목소리들을 지휘해 하나의 교향곡처럼 엮어 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정보가 과잉되고 사실이 파편화된 시대에, 이 책은 흩어진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서사의 힘을 증명한다. 그 서사 안에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려는 인문학적 정신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미래를 향해 쏘아 올리는 희망의 화살이다. 이것이 유시민이 『역사의 역사』를 통해 건네는,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제언에 가깝다.
책장을 덮으며 독자는 깨닫게 된다. 역사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와 나누는 살아 있는 대화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을. 그렇게 이 책은 역사 입문서이자, 역사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인간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의 기록으로 남는다.
언어는 말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기록의 수단이며, 텍스트보다 언어가 먼저 태어났다. 말로 전해진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의 압력 속에서 왜곡되고 누락되며 각색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으로 여겨졌고, 문자 이전의 시대는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라 불렸다. 그러나 문자가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사실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는 화자와 필자의 위치에 따라 뉘앙스와 표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역사 무용론자’들은 역사를 빛바랜 옛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는 단지 어제를 회상하기 위해서도, 오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품고,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함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역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과거의 사실을 복원하는 일이 역사가의 1차적 책무라면, 그 사실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해 현재로 불러오는 일은 ‘서사’의 영역에 속한다. 유시민은 이러한 역사 인식에 대해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연대기적 사건의 건조한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사람의 꿈과 욕망, 사람의 의지와 분투, 사람의 관계와 부딪침”이 빚어낸 거대한 드라마이며, 불완전한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의 흥망성쇠에 관한 기록이다.
기록을 넘어 서사로, 역사를 읽는 이유
우리는 흔히 역사를 객관적 진실의 집합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예측 불가능한 우연, 그리고 사회 제도가 뒤엉켜 형성된 삶의 궤적이 숨 쉬고 있다. 역사가가 당대의 무수한 사건들 가운데 의미 있는 장면을 선별해 언어로 엮어내는 행위는, 파편화된 과거의 정보들을 ‘이야기’라는 그릇에 담아 독자에게 건네는 소통의 작업이다. 서술 환경과 관점이 달라져도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힘 있는 서사로 구현될 때 비로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흔들 수 있다는 통찰처럼, 박제된 기록이 아닌 살아 있는 감동으로 현재의 내면을 두드리는 일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역사 서술은 엄밀한 고증이라는 뼈대 위에 문학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살을 입힐 때 완성된다. 우리가 오늘도 수천 년 전의 역사서를 읽으며 전율을 느끼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고뇌와 성취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과거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길, 그 종착에는 결국 사람과 세상을 잇는 매혹적인 이야기, 곧 위대한 서사의 회복이 놓여 있다.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실로 엮어 만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없이 역사를 쓸 수도 없지만, 그저 사실을 기록하기만 한다고 해서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 『역사의 역사』, 유시민
역사 속 사건과 현상들을 읽으며 일정한 법칙과 패턴을 발견하고, 이를 분석해 예측의 도구로 삼는 일은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유효한 사유 방식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AI 시대의 ‘머신러닝’이 작동하는 예측 학습의 기본 원리와도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 읽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지적 활동이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한 사유의 모험이 된다. 그래서 역사는 유용하다.
『역사의 역사』는 저자의 말처럼 본격적인 역사 읽기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에 가까운 책이다. 나는 책의 가치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을 ‘읽히는 속도’에서 찾는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와 소재를 다루지만, 이 책은 놀랄 만큼 매끄럽게 읽힌다. 그만큼 글쓴이의 존재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읽을 때 그 사람의 말과 목소리가 함께 떠오를 때 좋은 글이라고 느끼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유시민 작가가 귓가에서 열변을 토하는 듯한 환청을 경험하기도 했다.
『역사의 역사』는 또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독서를 미뤄 온 이들에게, 역사가 무엇이며 그 서사가 어떻게 시간을 건너왔는지를 한눈에 조망하기에 적절한 길잡이다. 여기에 더해,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지를 스스로 간추려 보는 일은 분명 값진 소득으로 남는다. 나아가 보다 깊은 지적 탐구로 들어가고 싶다면, 책에 등장하는 역사가들과 주요 저작을 하나씩 파고드는 장기적 독서 계획 역시 충분히 매혹적이다.
더 나아가 바람이 있다면, 이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쓰고 리부팅하는 작업이 누군가의 의지로 시도되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의 시대를 말하는 ‘당대의 이야기’, ‘당대의 역사’는 과연 쓰이고 있는가. 아직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헤로도토스나 랑케, 사마천 혹은 토인비가 되어 우리의 이야기를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세대론의 형태일 수도 있고, 그 서술자가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