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다쓰루(內田樹)의 글을 처음 만난 순간이 있었다. 오래 침묵하던 독서의 시간이 스스로 무게를 잃어 가던 무렵이었는데, 그의 문장은 메마른 사막의 모래층을 은밀히 적시는 빛비처럼 느껴졌다. 여러 권의 책을 읽어도 감평 한 줄을 꺼내기 어려웠던 침잠의 시간이 길게 이어졌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문학과 영화를 손에 쥐었다. 감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매개를 믿어 보려는 마음이었을까. 일상의 틈을 잡문으로 채워 보기도 했으나, 어딘가 서늘하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헛헛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읽기·쓰기·보기라는 일상의 루틴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작 읽기의 흔적은 늘 적막의 뒤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작가의 추천 글을 통해 우치다 다쓰루를 우연히 만났고, 그 순간이 긴 침묵을 깨뜨리는 작은 파문처럼 다가왔다.
그는 도쿄대학교 불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결정적으로 빚어 나갔다. 레비나스 철학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아 반유대주의와 윤리학을 탐구했고, 블로그와 매체 기고를 통해 언제나 거리와 접속해 있는 지성으로 살아왔다. 문학에서 정치, 교육에서 무도(武道)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의 글은 도시의 언저리에서 들려오는 어떤 낮은 숨소리 같았고, 그래서 ‘거리의 사상가’라는 별칭이 그의 이름에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괴짜적 기질과 아웃사이더적 태도,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입장이 겹쳐진 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독서 중독자다. 애서가이며 간서치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일상은 책으로 가득 차 있고, 방대하게 축적된 장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집필은 그가 감당해 온 삶의 양을 가늠하게 만든다. 단독 저서만 60여 권, 공저와 대담집까지 합치면 70여 권을 훌쩍 넘는다니,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 거의 경외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는 책을 공동의 자산으로 이해했고, 도서관의 존재 의미를 사회적 호흡의 순환으로 바라보며 언제나 사유를 확장했다.
“책이란 외부로 통하는 문입니다.
책은 독자를 ‘지금이 아닌 시대’와 ‘여기가 아닌 장소’로 데려가는 힘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닫힌 공간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기고 그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옵니다.
그 바람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책 주위로 모여듭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이번에 읽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는 한국 독자에게 먼저 도착한 드문 기획본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원서를 번역하는 통상적 흐름과 다르게, 역자인 박동섭 선생이 우치다 다쓰루의 여러 글을 직접 선별해 엮은 책이다. 강의록도 있고, 블로그의 일상적 잡문도 있고, 정식 기고문도 함께 담겨 있어 형식과 어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든 글의 중심에는 한결같이 ‘책’이 놓여 있다.
도서관과 학교 교육, 출판의 위기와 전자책의 확산까지 이 책이 가로지르는 영역은 넓다. 그의 사유는 도서관 관계자나 출판 종사자들이 바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만큼 비관습적이지만, 그 파격의 결에 묘한 설득력이 비치고 있어서 오히려 긴장을 풀 수 없는 매력을 지닌다. 나에게는 바로 그 낯선 설득이 단비처럼 다가왔다. 특히 "시장의 수요"가 글쓰기의 동기가 된 적이 없었다는 그의 고백에 오래 머물렀다. 독자의 수요란 책이 세상에 나온 뒤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말은 긴 잔향을 남겼고, 글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수요’를 미리 가정하는 태도가 글을 비틀어 놓는 기시감의 원천임을 새삼 깨닫게 했다.
우치다 다쓰루를 만나고 난 이후, 오랫동안 막혀 있던 읽기의 되먹임이 천천히 다시 열리고 있다. 책이라는 문이 바람을 통과시키듯, 그의 글은 내 일상의 적막한 틈에 작은 바람길을 만들었다. 그 틈으로 스며드는 낯선 바람의 냄새를 느끼며, 나는 다시금 읽기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비워진 자리의 빛, 도서관을 다시 생각하는 일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는 세 갈래의 길처럼 나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심층으로 귀결되는 책이다. 도서관에 대한 사유, 책이라는 사물과 정신에 대한 성찰, 그리고 출판을 둘러싼 구조와 현실을 탐색하는 글들이 서로 다른 어조로 흐르지만, 결국 같은 근원으로 모여든다. 그 중심에는 우치다 다쓰루가 말하는 ‘독자’와 ‘청중’의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그는 ‘책을 사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을 분명하게 분리해 바라보며, 자신의 글이 도달하길 바라는 이들은 언제나 ‘읽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일본의 전업 작가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이는 드물 것이라 하고,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조심스레 덧붙인다. 그의 단언은 단순한 취향의 표명이나 직업윤리의 강조가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선언에 가까운 태도다.
그 선택의 연장에서 책 제목이 품고 있던 문장의 의미가 서서히 드러난다. 우치다 다쓰루가 보기에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을 방문자 수나 대출 권수로 계량하는 행위는, 시장 원리주의의 거친 상상력에 기댄 단순한 발상에 불과하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를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이미 오해의 기원을 품고 있다. 도서관은 일종의 점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아니라, 세계의 미지를 감당하는 마음의 크기를 시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방문자가 두 배 늘었으니 유용성도 두 배 증가했다”는 식의 기계적 논리는 그의 시각에서 위험한 오독에 가깝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인간의 몸은 낮은 긴장과 조용한 경건함으로 자연스레 젖는다. 언어와 사유가 층위를 이루며 쌓인 공간에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른 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도서관은 예배당이나 모스크, 사원 혹은 신사와 은근히 닮아 있다. 이 모든 장소는 초월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을 불러오기 위해 ‘비워 둔 자리’를 마련해 두는 공간이다. 사람이 기도하고 떠난 뒤의 시간과 공간은 낭비가 아니라 성스러움이 깃들기 위한 전제다. 세계의 숨결이 닿는 문턱은 언제나 조금 비워져 있어야 한다.
“유대교의 유월절 식사 의례인 ‘세데르’ 때는 식탁에 자리를 비워 둡니다. 식기나 음식은 갖춰 놓고 자리만 비우는 것이지요. 메시아의 선구자인 예언자가 재림하길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그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재림을 위해 빈자리 하나를 마련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성스러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우치다 다쓰루는 도서관도 이러한 성스러움의 논리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월적인 것이 스며들 틈을 마련하기 위해 도서관은 가능한 한 넓고 절제된 환경을 갖추어야 하며, 소유의 흔적이나 생활감이 공간에 과하게 배어들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과소자극의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도서관이 방문자의 ‘무지’를 가시화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가’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무지와 온전히 마주하도록 돕는 조용한 장치다.
그의 사유는 여기서 책의 제작과 집필의 의미로 이어진다. 책을 쓰고 만드는 일은 이 세계의 내부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접촉하는 행위이며, 그 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판단해야 하는지 배우는 기술이고 지식의 장이다. 종교·철학·죽음·사랑·희망처럼 언어로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사유들이 그 중심에서 숨을 쉬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믿는 정치가들과 기업인들은 바로 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가장 불편해하고 멀리하려 한다. 그렇기에 책과 도서관은 그들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 거리 자체가 사유의 호흡을 지키는 마지막 조건이 된다.
도서관을 둘러싼 그의 언어는 제도 비평의 차원을 넘어서 지식과 영혼이 공존하는 장소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비워 둔 자리와 고요한 시간 속에서만 도착하는 어떤 진실이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의 독자가 잃어 가는 감각을 다시 일깨워 주는 조용한 호소처럼 느껴진다.
경계 너머에서 되돌아온 언어의 숨결
책은 늘 우리를 경계선의 저편까지 데려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데려오는 어떤 여정의 궤적처럼 느껴진다. 작가들이 ‘이야기’라 부르는 것들은 거의 언제나 그 왕복의 흔적을 품는다. 우치다 다쓰루가 책을 언어, 특히 모국어의 저장소로 들어가는 입구라 말했듯, 쓰는 일도 읽는 일도 결국 그 깊이를 알기 힘든 저장소로 향하는 통로를 더듬는 행위에 가깝다. 일상과 살짝 비켜선 세계를 더듬으며 손끝으로 접촉하는 일. 그 세계는 경계선 저편이거나, 지하의 음영이거나, 혹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정서의 저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책장에 책을 꽂는 사소한 행위조차, 언젠가 그 세계의 풍경을 스스로에게 데려오기 위한 작은 예행연습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읽게 될 책들을 집어 들고 책장을 채운 뒤 돌아오곤 한다. 실은 타인을 의식해서라기보다, 이미 그 책들을 독파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은밀히 작용하는 순간이 많다. 그 욕망이 커질수록 ‘언젠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압력도 비례해 짙어진다. 우리는 대체로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을 사지 않는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을 산다. 그 책을 읽어낼 만한 문해력과 정서적 여유를 갖춘 미래의 자기 자신을 조용히 상상하며, 그 가능성에 투자하듯 책을 들여놓는다. 희망의 제스처이자,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처럼.
책은 지금 우리 곁에서 가장 조용하고도 확실한 공공재에 가까운 존재다. 아무리 읽어도 줄어들지 않고, 사용해도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사용가치는 원리적으로 무한하다. 만 명의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만 가지의 기쁨과 사유의 빛을 길어낼 수 있다. 우치다 다쓰루가 말하듯, 책은 사유의 도구를 넘어 공동체를 이룰 기반을 제공한다. 책을 매개로 우리는 먼 나라의 사람, 먼 시대의 사람들과 한 순간 공존하고,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마주한다. 죽은 자들과의 연결은 모든 공동체의 뼈대를 이루는 가장 오래된 연대의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이 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공재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사람과
자신이 낸 만큼 빠짐없이 회수하려고 하는 사람이
과반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출판 위기를 말하는 수많은 담론 속에서 정작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부재하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낯설게 느껴졌다. 이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접한 문화 영역 전체에서 반복되는 구조다. 사람들은 위기의 원인을 손쉽게 독자 탓으로 돌린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낮아졌기 때문’, ‘학교 교육의 실패로 지적 능력이 쇠퇴했기 때문’, ‘스마트폰 탓에 종이책이 멀어진 때문’이라는 식의 설명들. 이런 말들에는 독자를 가능한 한 싸고 즉각적이며 부담 없는 오락을 원하는 존재로만 간주하는 편견이 깔려 있다. 독자를 소비자 이상의 존재로 보지 못하는 시선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출판 위기는 소비자의 눈이 흐려지고 지갑이 닫히고 경쟁 상품이 늘어난 탓으로 보인다. 언제부턴가 출판을 설명하는 언어는 상거래적 용어로 수렴되어 버렸다. 경기 불황이 지갑을 닫게 하고, 자기 개발을 게을리해 독자의 안목이 둔해졌으며, 디지털 기술 발달 때문에 종이책이 밀린다는 식이다. 이유는 언제나 출판 외부의 탓으로 넘어간다.
우치다 다쓰루는 이런 흐름 한가운데에서 다시 책의 공공성과 증여의 성격을 환기한다. 책을 쓰는 일은 독자에게 건네는 선물이고, 출판인의 근본 과제는 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길러내는 일’이라 말한다. 높은 문해력을 갖춘 독자를 수백, 수천 명 길러내는 일. 그들이 처음으로 지갑을 열 때 선택할 책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일. 출판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독자를 늘리는 데서 출발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촉진제 중 하나가 바로 좋은 서평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서평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서평을 쓰는 이들의 마음가짐에 있다. 독자를 선물의 수신자로 대하는 태도, 언어와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안내자로서의 책임을 잊지 않는 태도. 이러한 마음이 사라질 때 서평은 단순한 상품평으로 축소되고, 책이라는 공공재의 힘은 서서히 가늘어진다.
책은 여전히 경계 너머에서 되돌아온 언어의 숨결을 품은 채, 우리의 손길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부름에 얼마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침묵의 신호를 얼마나 예민하게 듣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조심스러움의 문 앞에서 쓰는 서평
서평을 본격적으로 쓸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서평’이라는 말이 떠오르면 대학 시절, 숨 가쁘게 작품을 따라가며 매주 제출하던 과제의 고역이 먼저 앞섰다. 기업에서 수많은 보고서와 기술 문건을 읽고 정리하던 지난 시간도 여전히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책에 관한 글쓰기가 사소한 기쁨일 리 없었다. 오래된 말 ‘독후감’과 서평을 겹쳐 두었던 인식 역시 내 안의 거부감을 키웠다.
지난 10년의 글쓰기를 돌아보면, 자발적으로 쓴 서평은 손가락으로 세어도 남을 만큼 적다. 대부분은 공짜 책 한 권을 받아보려 ‘서평단 모집’에 응했고, 마감에 쫓겨 숙제처럼 써낸 글이었다. 그런 원고를 보낸 출판사들이 나를 다시 찾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책의 판매를 돕는 일종의 전단지로 서평을 규정해온 선입견 탓에, 나는 늘 과도할 만큼 냉정했고 때로는 불필요한 비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의 책읽기는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문학적 글쓰기를 본격화하는 흐름에 따라 문학 쪽의 비중이 조금 늘었으나, 여전히 전체로 보면 비문학이 압도적이다. 전문서·개념서·실용서는 직업적 생존을 위해 읽고, 역사와 철학은 오래된 취향을 따라간다. 문학이라 부르기 모호한 에세이나 회고록을 펼치기도 하고, 장르의 경계를 흐리는 책들도 검은 호기심에 이끌려 들여다본다. 그런데 예전에는 자신 있던 독서의 기록이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졌고, 그 흐릿함을 붙잡기 위해 다시 서평이라는 형식이 문턱에 걸렸다.
그러나 서평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여전히 소년 시절의 독후감 잔재가 고개를 든다. 추천의 형식이 결국 광고로 귀결되는 글들, 팬심조차 홍보의 어조를 피하지 못하는 광경이 오래된 회의를 남겼다. 그래서 국내 서평을 찾아 읽기 시작했으나 실망이 잦았다. 특히 ‘서평’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책 자체는 사라지고, 책쓴이의 명성이나 글쓴이의 위치가 지나치게 앞서 있는 글들이 많았다. 서평이 책의 공공성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개인의 경력과 인맥을 과시하는 무대로 변질되는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 서평란을 지탱해 온 미치코 가쿠타니나 드와이트 가너의 수준을 바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광고인지 서평인지 모르게 흐려진 기사들 대신 ‘책에 대한 사유’를 읽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꺾였다. 책의 공공선이 누군가의 허영 아래 묻히는 장면을 반복해서 목격하면서, 나는 서평이라는 글쓰기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문장 하나가 오래 머물렀다.
“누구나 서평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
— 『서평가 되는 법』, 김성신
나는 과연 ‘누구나’의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아무나’에 가까운지 스스로에게 자주 물었다. 솔직히 말해 많은 서평을 접할수록 실망이 컸다. 책이 중심이 아닌 글이 많았고, 사유보다 인맥과 사적 사연이 귀퉁이를 가득 채운 글들이 적지 않았다. 책의 세계를 열어 보이기보다 개인의 배경을 증명하는 방식의 글들이 너무 많았다.
그 고민을 이어가던 중, 우치다 다쓰루의 문장이 도서관에 대한 내 오래된 감각을 되살렸다.
"‘지적’ 상태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조심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앎에 대한 ‘예의 바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 내 앎이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에 관한 ‘유한성의 자각’이 지적 상태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이렇게 ‘무한한 앎을 향해 열린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고요."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과 에코의 『장미의 이름』, 그리고 영화 <인터스텔라> 마지막 장면의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를 떠올리면, 도서관은 본래 ‘장서가 무한한 장소’라는 전제를 품는다. 그 무한 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배운다. 평생을 읽고 배워도 세계의 한 귀퉁이에만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지만, 그 방대한 세계의 어느 구석에는 내가 닿을 작은 방이 있고, 그 방에 내가 보탤 수 있는 문장 하나가 남을 수 있다는 믿음이 독서를 계속하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일은 그 무한 앞에서 남기는 나의 유한에 대한 조용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이 겸허와 조심스러움이 빠진 글은 결국 ‘아무나’의 글로 흘러간다. 서평은 책의 세계를 열어 주기 위해 쓰는 글이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잃는 순간 글은 독자의 시간을 빼앗는 장식으로 주저앉는다. 나는 그 장식의 편에 서고 싶지 않았다. 서평을 다시 써보겠다고 마음을 고쳐 세운 것도 결국 그 조심스러움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결국 서평을 쓴다는 일은 애정이나 분노, 찬탄이나 실망을 드러내는 일이기보다, 거대한 도서관의 기척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태도에 가깝다. 책이 건네는 목소리를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으며, 타인의 사유를 나의 언어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마음. 내가 모르는 것의 광막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름 속에서 말해보려는 작은 용기. 그 긴장이 서평의 윤리를 만든다.
서평을 다시 쓴다면, 아마도 그 긴장 위에서 낯선 문을 여는 방식일 것이다. 책이 먼저 서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한 줄의 흔적을 남기는 것. 그 흔적이 비록 티끌만큼 미약하다 해도, 바로 그 미약함을 자각하는 순간 ‘아무나’의 글을 건너갈 가능성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