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라는 배반의 미학, 그 투명함에 대하여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by 박 스테파노

번역이라는 흰 고래


독서는 언제나 다양한 책들과의 조우로 시작된다. 그 다양함은 흔히 장르와 주제, 집필의 의도와 용도라는 이름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독서의 목적이라는 개인적 기준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구분을 가로지르는 가장 보편적인 경계는, 모국어로 쓰인 원본서와 다른 언어를 거쳐 모국어로 옮겨진 번역서의 구분일지 모른다. 개인적 경험의 독서 이력을 돌아보면, 어느 쪽이 더 많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번역서는 대학 시절 학문의 현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텍스트였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던 시절, 우리는 원전을 직접 읽기보다는 번역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영어와 일어를 거친 중역본이었고, 러시아에서 직접 수학한 이들의 번역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보드카’가 ‘워드카’로 음차되어 등장하던 책을, 세로로 읽으며 거꾸로 넘기던 시절의 끝자락이었다. 이후 ‘열린책들’처럼 러시아 문학을 중심으로 세계문학을 다루는 전문 출판사들이 등장하며, 여러 겹의 중역을 통과하느라 희미해졌던 원전의 얼굴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텍스트를 읽는 일은 낯설지 않다. 성취 중심의 교육 환경 속에서 외국어 독해는 일상이 되었고, 수능 영어의 난이도가 원어민조차 고개를 젓는 수준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럼에도 외국어 텍스트를 곧장 모국어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출발어를 해체하고, 단어와 문법을 통과해 도착어에 이른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늘 불완전과 불신의 결합이다. 이런 이유로 독해는 언제나 시험의 얼굴을 띤다.


홍한별,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의 인상적인 표지. 교보문고 제공


"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광기의 치료제이고, 길들이기이자 낯설게 하기이고, 조각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고, 빵이자 결핍이고, 틈새이고, 메아리이고, 거울이고, 다시 탑이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관한 책이 아니라 번역에 대하여 쓰인 책이다. ‘관하여’가 대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라면, ‘대하여’는 그 대상을 마주 서서 응시하는 태도를 부른다. 이 책은 번역이라는 대상 앞에 선 번역가의 사유를 모은 기록이다. 번역이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곧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드러난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의 문을 흰 고래, 곧 『모비 딕』으로 연다. 제법 된 세대에게는 ‘백경(白鯨)’으로 기억되는 허먼 멜빌의 서사다.


이 인용은 번역의 성정에 대한 하나의 정의처럼 읽힌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를 불러와, 진정한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꺼낸다. 그러나 그 투명함은 매끈한 유리의 표면이 아니라, 금이 간 항아리에 가깝다. 그 틈새로 원문이 스며들어 보일 때, 독자는 번역문 너머의 작품과 조우할 수 있다. 다만 그 너머를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출발어를 알아야 하는 또 하나의 장벽이 남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흰 고래가 호출된다. 흰 고래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흰색을 옮긴다는 것, 그 불가능함


번역가로 살아온 저자는 책의 문을 중학교 시절 미술 시간으로 연다. 데생 시간, 미술 교사가 무심히 탁자 위에 올려둔 허연 석고상 하나. 미술을 조금 아는 친구들은 그것을 ‘아그리파’라 불렀지만, 학생들에게 주어진 도구는 검게 굳은 4B 연필뿐이었다. 검은 흑연으로 흰 석고를 그리라는 과제는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았다. 선을 덧댈수록 종이는 밝아지지 않고 점점 타들어 갔다. 한 반 예순 명이 제출한, 모두 새카만 ‘하얀’ 석고상들. 지나고 보니 실패가 아니라 불가능의 연습이었다. 흰색은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이 합쳐지면 흰색이 된다고 하지만, 그 백광은 무지갯빛을 품은 착시에 가깝다. 물감을 섞을수록 색은 탁해질 뿐, 흰색에 이르지 않는다. 이 재현 불가능한 흰색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불러온다. 이 소설은 읽은 사람보다 읽었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은 책이다. 막상 손에 들면 두께에 먼저 놀라고, 페이지를 넘겨도 흰 고래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둘까 싶은 마음이 스미는 이유다.


그럴 만하다. 이 소설은 화자 이슈메일이 고래의 어원부터 늘어놓으며 시작된다. 에이해브 선장의 집요한 추적과 무관한 문헌들이 이어지고, 고래 그림을 평가하는 장이 몇 장이나 계속된다. 생물학과 화석, 과거와 현재, 심지어 고래의 미래까지 다각도로 훑는다. 그렇게 모두를 불러 모아놓고, 그는 말한다. 고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다고.


"내가 고래를 아무리 해부해보더라도 피상적인 것 이상은 알 수 없다. 고래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 허먼 멜빌, 『모비 딕』"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42장 ‘고래의 흰색’에서 이슈메일은 흰색의 공포를 사유한다. 흰색은 고결과 순결의 상징이면서도, 동시에 형언하기 어려운 섬뜩함을 품는다. 색의 부재이자 모든 색의 응집이라는 역설 때문이다. 규정할 수 없는 흰색의 불확정성은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불러온다. 텅 빈 공백이면서 동시에 의미로 과잉된 상태. 흰색은 그렇게 근원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모비 딕』의 러시아판 일러스트. 안톤 로마예프, 아즈부카 출판사


흰 고래는 모든 것을 상징하면서도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절대적 공허다. 멜빌은 글자들로 주변을 빽빽이 채워, 중심의 흰 여백으로 고래를 형상화한다. 홍한별은 이 장면을 번역의 경험에 겹쳐 읽는다. 번역가는 언제나 의미의 공백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번역의 투명성은 번역가가 지워진 유리창처럼, 독자가 번역임을 잊고 읽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그 투명성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번역에는 서로 반대 방향의 방법론이 공존한다. 가독성을 중시해 의미를 옮길 것인가, 충실성을 앞세워 문장을 지킬 것인가. 흔히 의역과 직역이라 불리는 갈림길이다.


"서양에서 이루어진 번역 논쟁은 주로 두 대립 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단어를 단어로’ 번역하던 전통에 키케로(BC 106–43), 그리고 이후에 히에로니무스(AD 347–420)가 반기를 들어 ‘의미를 의미로’ 번역할 것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홍한별은 이 책에서 독자가 더 잘 읽을 수 있는 쪽에 무게를 둔다. 동시에 그것이 언제나 정답일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번역가는 잘하면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고, 어긋나면 모든 책임을 떠안는 이름이 된다. 저자는 이 숙명의 기원을 바벨탑 이야기에서 찾는다. 언어의 분열은 신의 처벌이었고, 번역은 그 균열을 메우려는 보속의 행위였다. 모두에게 주어진 짐이자,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노동이다. 그 과정에서 의미는 덧칠되고, 투명성은 희미해진다.


저자는 번역가를 ‘배신자’로 부르는 어원을 단테의 『신곡』에서 끌어온다. 『모비 딕』에서 출발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베니스의 상인』, 『루비야트』, 『성경』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고전의 틈새에서 번역의 흔적을 더듬는다. 벤야민, 보르헤스, 나보코프, 수전 손택, 이오덕의 사유를 가로지르며, 번역이라는 일이 지닌 빛나지 않는 중요성과 드러나지 않는 고단함을 말한다. 여정의 끝에서 ‘번역이란 사랑이다’라는 다소 느슨한 결론에 이르지만, 그 여운은 남는다. 이 책은 우리가 쉽게 내뱉던 ‘번역 탓’을 되돌려 보게 하고, 한때 일과 학업 사이에서 감당했던 번역의 시간을 조용히 다시 불러낸다.



투명한 문장, 보이지 않는 손


번역의 미덕으로 자주 호출되는 ‘투명성’은 한 겹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한 두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기만적이다. 하나는 번역이라는 행위를 최대한 숨겨 독자가 원문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이르게 하는 투명성이다. 외국어 특유의 결을 지우고 도착어의 문법과 정서에 맞게 다듬어, 문장이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이런 번역은 흠집 없는 표면을 유지하며, 독자가 ‘불신의 자발적 유예’를 통해 허구의 세계에 온전히 몰입하도록 돕는다.


"번역서를 읽는 행위는 일종의 ‘불신의 자발적 유예’를 전제로 한다. 어떤 허구든 불신을 유예하고 기꺼이 믿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지만, 번역서는 두 배의 유예가 필요하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허구는 믿어야 작동하지만, 번역서는 그 믿음을 한 번 더 요구한다. 이를테면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6)의 한국어 번역을 읽을 때, 독자는 11세기 스코틀랜드 인물들이 현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번역가가 자신을 투명한 유리창처럼 지웠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번역 투의 문장이 반복되거나 논리의 흐름이 끊기는 순간, 독자는 즉시 번역의 존재를 인식하고 원문과의 거리에서 오는 손실감을 체감한다. 이 의미에서의 투명성은 번역자와 번역 과정이 사라지는 ‘부재의 기술’에 가깝다.


반대로 투명성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사유의 계보도 있다. 그 중심에 발터 벤야민이 있다. 그는 「번역가의 책무」 (1923)에서 번역이 원문을 가리는 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벤야민에게 투명성이란 번역문을 통해 원문의 빛이 그대로 스며 나오는 상태다. 이는 유려한 의역이 아니라, 구문과 구조를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직역을 통해 가능해진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번역은 오히려 원문의 언어적 긴장과 낯섦을 차단하는 벽이 되기 쉽다. 반면 원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번역은 빛과 공기를 통과시키는 아케이드처럼, 독자를 번역 너머의 원문으로 이끈다.


이러한 번역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기록매체를 재사용하기 위하여 이미 적힌 글씨를 긁어내거나 씻어내는 행위, 또는 그렇게 재사용된 기록매체에 작성된 문서의 형식)와 닮아 있다. 기존의 글 위에 새로운 글이 겹쳐 쓰이되, 원문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다. 여기서 번역은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매질로 존재하며 원문을 드러낸다. 영어 특유의 사물 주어나 수동태가 남아 있는 문장은 독자에게 번역 투를 강하게 인식시키지만, 동시에 그 뒤편의 원문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투명성을 획득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두 가지 상반된 투명성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번역가의 실체는 결국 지워진다는 사실이다. 번역의 흔적을 감출수록 번역가는 독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원문이 잘 보이도록 투명해질수록 번역은 원문을 보조하는 도구로 축소된다. 번역된 문장의 모든 단어는 번역가의 선택과 문장력의 결과임에도, 원저자가 직접 쓴 글자는 단 한 자도 없음에도, 번역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투명성이 지닌 태생적 역설이다. 원문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든, 원문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든, 번역가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투명성은 번역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동시에 보이지 않는 노동을 은폐하는 장치다.


처벌로서의 번역, 바벨. Collector.com제공


"나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러운 논리로 글을 읽게 하려고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이 개입할 때가 있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조지 스타이너는 『바벨 이후』에서 이 불안정한 균형을 소라고둥에 비유한다. 소라고둥에서 들리는 바닷소리는 사실 바다가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흐르는 혈류의 소리다. 번역 역시 원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만, 결국 문장으로 남는 것은 번역가 자신의 생각이다. 스타이너는 이를 ‘길들이기(domestication, 동화)’와 ‘낯설게 하기(foreignization, 이화)’라는 두 태도로 설명한다.


길들이기는 도착어 문화에 맞게 글을 이식하는 전략이다. 먼 곳의 식물을 옮겨 심듯, 원문을 독자의 토양에 적응시킨다. 그래서 ‘작가를 독자 쪽으로 데려오는 방법’이라 불린다. 원문의 형식은 희미해지고, 독자는 번역문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자연히 의역에 가까워진다.


반면 낯설게 하기는 ‘독자를 작가 쪽으로 데려가는 방법’이다. 번역가는 작가에게 다가가, 그가 도착어로 말한다면 어떨지를 상상한다. 직역에 가까운 문장은 생경하고 울퉁불퉁하지만, 출발어와 도착어의 마찰 속에서 언어는 미세하게 변형된다. 이 낯섦은 번역의 결함이 아니라, 원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번역의 틈, 인간의 몫


이 책은 번역가로 살아온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번역을 통해 인문학자로 서는 사유의 기록이다. 답을 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 그 불편한 질문의 지속 자체가 이미 문학의 높이에 닿아 있다. 바벨의 저주로 시작해 모두의 배반자가 될 수밖에 없는 번역의 운명을 더듬고, 개별 작품은 물론 문화사적 맥락 속에서 번역의 변주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낸다. 한국어권에서 번역이 차지하는 비중과 밀도, 그리고 그 충실도를 투명성으로 직관하는 문화 속에서 역자가 저자와 함께 바이라인에 이름을 올리는 관행에 대한 서술은 특히 인상적이다.


다만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후반으로 갈수록 논의의 무게가 다소 느슨해진다. 무엇보다 ‘기계번역’이라 명명된 AI 번역을 다루는 대목에서 기술적 이해의 한계가 드러난다. 인문학적 사유의 깊이에 비해, 기술을 사용자 관점에서만 해석한 자가 학습적 정보들이 개입되며 사실과 어긋나는 지점들이 발생한다. 이는 홍한별만의 오류라기보다, 저널리스트와 법조인, 작가들이 AI를 성급히 호출할 때 흔히 반복하는 실수에 가깝다. 기계학습과 AI 추론을 동일시하거나, 알파고와 ChatGPT 같은 거대언어모델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인식은 대중적 오해의 연장선에 있다. 오랜 번역 도구 사용자로서, 과거 규칙 기반 자연어 처리 기술의 연장으로 AI를 이해한 데서 비롯된 간극처럼 보인다.


특히 후반부 ‘기계시대의 번역가’ 장은 전체 서술의 결에서 다소 튀어 오른다. ‘AI’라는 거대한 담론을 비켜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번역이 그 기술적 충격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영역 중 하나라는 점도 조급함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 급박함 자체가 또 하나의 ‘번역’처럼 읽히는 아이러니를 남긴다.


AI 번역의 확산은 번역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더욱 위협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사람은, 적어도 의역을 하는 사람은 품사나 문장구조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번역한다. 하지만 기계는 ‘beauty’라는 명사나 ‘crowded’라는 한정 형용사를 서술어로 번역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주어를 바꾸고 문장구조를 뒤집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하는 번역에서는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가장 흔한 오해는 거대언어모델의 작동을 단순한 일대일 단어 치환으로 환원한다고 믿는 습관적 편견에 있다. 과거의 규칙 기반 번역(Rule-Based Machine Translation, RBMT)과 달리, 현대의 신경망 기반 AI는 단어를 고차원 벡터 공간의 점으로 치환하며 의미를 고정값이 아닌 관계의 함수로 파악한다. 트랜스포머 구조의 핵심인 어텐션 메커니즘은 문장 내 모든 요소의 상호 영향력을 계산해, 하나의 단어가 맥락에 따라 수많은 표현으로 변주되는 다대다 대응을 수행한다. 이는 기계가 사전을 넘겨보는 수준을 넘어, 의미 공간을 이동하며 문맥을 재구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어텐션은 인간의 독해 방식과 닮아 있다. 대명사의 지시 대상을 찾기 위해 앞선 문장을 되짚듯, 기계는 질의(Query), 색인(Key), 가치(Value)의 계산을 통해 의미를 조율한다. “river bank”에서 ‘river’가 ‘bank’를 지형의 의미로 기울게 하듯, AI는 단어들이 서로를 비추는 의미의 그물망을 구축한다. 텍스트는 선형적 나열이 아니라 입체적 관계망으로 재조립된다.


"사람의 언어는 명징하지 않다. 사람의 언어는 텍스트뿐 아니라 여백을 통해서도 말한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그럼에도 인간 번역과 기계 번역의 차이는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맥락의 재발명’이라는 층위다. AI는 확률에 따라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고 손실을 최소화하지만, 인간은 그 공백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끊임없이 암시하듯, 번역은 언어 사이의 불일치를 견뎌내는 작업이다. 기계의 맥락이 데이터의 축적을 통한 수렴이라면, 인간의 ‘틈’은 우연과 도약, 미학적 결단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때로 의도적으로 오역하고, 창조적으로 배반하며, 그 굴절 속에서 기계가 닿지 못하는 통찰을 길어 올린다. 바로 그 지점에서 번역은 기술을 넘어, 여전히 인간의 일이 된다.



틈을 건너는 언어, 번역의 미덕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보여주듯, 인간 번역가가 언어 사이의 ‘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현대적 사례는 데보라 스미스의 『The Vegetarian』 (한강, 2016) 번역이다. 스미스는 한국어 원문의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를, 영미권 독자에게 익숙한 유려하고 수식적인 문체로 과감히 굴절시켰다. 기술적 기준에서 보면 이는 원문의 정보를 변형한 오류에 가깝다. 확률의 최적값을 좇는 AI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경로다. 그러나 이 의도적 오역과 문체 변주는 원작의 정서를 영어권 문화 안에서 새롭게 폭발시키는 ‘창조적 배반’으로 기능했다. 스미스는 간극을 봉합하는 대신, 그 틈에 새로운 문학적 호흡을 불어넣었고, 그 도약은 기계의 기능적 대응이 닿지 못하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언어의 유희와 음성적 효과가 핵심인 텍스트에서 인간의 틈 활용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1865)의 말장난들은 출발어의 소리와 도착어의 의미가 어긋나는 절망적인 간극을 드러낸다. AI는 ‘Tail’과 ‘Tale’의 발음 유사성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이를 한국어에서 전혀 다른 체계의 말장난으로 치환해 원문의 효과를 되살리는 결단에는 이르지 못한다. 인간 번역가는 단어를 버리는 대신, 독자가 느꼈을 당혹감과 즐거움이라는 정동을 복구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다. 기계가 의미 보존을 목표로 한다면, 인간은 때로 의미를 희생해서라도 텍스트의 생명력을 지키려 한다. 이 굴절의 순간이야말로 인간 번역과 기계 번역을 가르는 경계다.


"번역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편안한 한국어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최근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네 가지 번역본을 오가다 보니, 번역이 단순한 언어 변환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통역이 중심 의도를 빠르게 교환하는 구어의 기술이라면, 번역은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번역은 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인문학적 독해의 결과다. 그 깊이에 이르지 못한 작업은 결국 언어 변환기에 머문다.


‘번역(飜譯)’이라는 말 자체가 이 역동을 품고 있다. ‘번’은 뒤집고 번득이는 움직임을, ‘역’은 풀어 전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한 면에 새겨진 문양을 다른 면에서 다시 드러내는 재구성의 과정이다. 『설문해자』(허신, 121)가 ‘역’을 “말을 바꾸어 서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 정의한 것도, 번역을 소통의 매개로 보아온 동양적 시선을 보여준다. 서구의 ‘Translation’ 역시 라틴어 Translatio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경계를 넘어(Trans) 옮겨놓는(Latus) 행위를 뜻한다. 번역은 언어의 등가 교환이 아니라, 한 문화의 사유 체계를 다른 문화로 이식하는 이동이다. 번역가는 텍스트를 등에 지고 경계를 넘는 수행자다.


문화학의 전회 이후 번역은 더욱 복합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수전 배스넷은 번역을 문화 간 협상의 과정으로 보았고,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소피아 코폴라, 2003)는 번역에서의 상실과 동시에 태어나는 새로운 의미를 암시한다. 발터 벤야민은 「번역자의 책무」에서 번역을 원문의 ‘사후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원문은 번역을 통해 잠재된 의미를 드러내며, 서로 다른 언어의 만남 속에서 ‘순수 언어’를 향한 열망을 노출한다.


그래서 번역은 반역과 배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창조적 파괴다. 타자의 문화를 자기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언어를 확장하는 행위다. 오늘날 번역은 디아스포라와 포스트콜로니얼리즘 같은 담론과 맞물리며, 정체성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역동의 장으로 작동한다.


번역의 목표는 최선이 아니라 최적이다. AI Sora


가장 바람직한 번역은 무엇인가. 직역과 의역이라는 기술적 구분을 넘어선 관점이 먼저 필요하다. 가장 바람직한 번역은 저자가 스스로 수행하는 번역일지 모른다. 완벽이 아니라 최적을 말하는 이유는, 번역이 본질적으로 상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아니더라도 학습과 연구, 통찰로 그 텍스트에 가장 깊이 천착한 이가 충분한 언어 훈련을 거쳐 옮길 때, 손실은 다른 의미로 보상된다.


나보코프의 사례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각운까지 살려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직역과 방대한 주석을 택했다. 그 결과는 네 권짜리 번역본이었다. 짧지 않은 운문소설이 주석과 해설 속에서 거대한 사유의 숲으로 확장된 셈이다.


이제 번역은 AI와 디지털 도구의 시대를 맞아, 언어 기술을 넘어 또 하나의 인문학적 전문 영역으로 깊어져야 한다. 과거에는 창작의 경계에서 번역을 선택한 이들도 많았지만, 앞으로는 창작의 주체가 번역의 철학과 미학을 체득하는 방향이, 기계가 침투할 수 없는 언어의 여백을 지켜낼지 모른다. 이는 전문 번역가를 폄훼하려는 말이 아니다. 번역가들 역시 고유한 전문성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하나의 이정표처럼 남는다. 번역을 둘러싼 사유를 한 단계 밀어 올리며, 지적 여행과 인문학의 또 다른 풍경을 찾는 독자에게 조용히 권할 만한 책이다.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스토리셀링의 시대, 서사는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