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없는 첨단 기술의 궁전 앞에서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이십 년 넘게 밥을 먹은 사람도, 낯선 키오스크 앞에 서면 잠시 굳는다. 어디를 먼저 터치해야 할지,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확인인지 분간이 쉽지 않다. 모바일앱은 오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의 축적으로 이미 몸에 밴 동작이 되었지만, 대형 스크린은 저마다 얼굴이 다르다. 화면은 크고, 표정은 제각각이다.
가장 막막한 순간은 터치스크린 입력 앞에서 온다. 버튼처럼 눌린다는 감각이 없다. 켜짐과 꺼짐의 경계가 손끝에 잡히지 않는다. 누른 듯해도 누르지 않은 것 같고, 입력했어도 기계는 묵묵하다. 그 얇은 유리막 하나가 사람을 망설이게 한다. 어느새 그 기계가 온 거리를 점령했다.
키오스크의 어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궁전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쿠슈크(kūshk)에 닿는다. 이것이 튀르키예어 쾨슈크(köşk)로 옮겨가 작은 여름용 별장이나 정원에 세운 개방형 건물을 가리켰다. 지붕과 좌식 평상이 딸린, 바람이 드나드는 공간. 그 말이 유럽과 미국으로 건너가 정원의 작은 구조물을 뜻하게 되었고, 20세기 전후에는 길가의 박스형 가게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1930년대 튀르키예에도 이런 가게가 들어섰고, 역시 쾨슈크라고 불렀다. 궁전에서 시작한 말이 길모퉁이의 상자로 내려앉은 셈이다.
키오스크를 처음 만난 것은 모스크바 교환학생 시절이었다. 개방 직후 모라토리엄을 맞은 러시아의 시장은 황량했다. 유통과 소매는 새 기득권인 마피아의 손에 들어갔다. 범죄집단이라기보다 군부와 정보기관, 군산업 세력이 국유재산을 사유화하며 형성한 집단에 가까웠다. 기숙사 안 상점도 그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대로변을 따라 늘어선 작은 판매대들 역시 그 관리 대상이었다.
그곳의 가게는 우리네 가판대와 닮았다. 그러나 물건은 훨씬 다양했다. 담배, 술, 식재료, 기념품, 우표, 전화카드까지. 가격도 품질도 일정하지 않았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 위해 지하철역 앞 광장을 몇 번이나 오갔다. 서툰 러시아어와 더 서툰 거래 감각으로, 나는 늘 한 발 물러선 채 서 있었다. 공항 출입국 심사대보다 그 앞이 더 긴장되었다.
그때의 떨림이 지금 되살아난다. 유리 화면 앞에서 손가락을 띄운 채 망설이는 순간, 나는 다시 그 광장에 서 있다. 한때 바람이 통하던 작은 궁전은 사라지고, 대신 빛나는 평면이 나를 응시한다. 버튼이 없는 궁전 앞에서, 사람은 다시 자신이 낯선 존재임을 배운다.
10%의 신화와 100%의 속도
어릴 적 ‘인간은 뇌의 능력을 10%도 사용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문장은 묘한 위로였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90%나 남아 있다는 뜻처럼 들렸다. 아인슈타인도 15%만 썼다더라, 훈련으로 뇌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더라, 초능력은 결국 활용도의 문제라더라. 막연한 기대가 어린 마음을 부풀렸다.
그러나 현실은 조선왕조 왕들의 연대표를 외우다 자꾸 뒤섞였고, 화학 주기율표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면서도 유리 겔러를 흉내 내 숟가락을 쥐고 힘을 주곤 했다. 염력이 아니라 손목의 힘으로 금속을 구부리던 그 시절, 나는 90%의 가능성을 믿고 싶었다.
요즘은 ‘뇌의 활용’이라는 말을 거의 듣지 않는다. 뇌인지 과학은 사용도를 퍼센티지로 재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빈 캔버스에 색을 채우듯 단순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뜻일 터이다. 이것은 아마도 ‘학자’님들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기억’의 부담은 눈에 띄게 줄었다. 시험과 채용에서 ‘암기력’은 더 이상 결정적 무기가 아니다. 기계가 저장하고 검색한다. 기술이 인간의 가성비 낮은 활용을 대신 채워주는 셈이다.
그 대신 다른 압박이 생겼다. 하루만 지나도 새로운 IT용어가 등장한다. 그 의미와 쓰임을 따라잡지 못하면 금세 뒤처진다. 뒤처짐은 곧 생활의 불편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이 적을수록, 학습의 여건이 부족할수록 그 간극은 커진다. 또 하나의 양극화가 ‘기술의 생태계’에서 자란다. 손바닥만 한 터치스크린 안에 또 다른 세렝게티가 펼쳐진다. 기술은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든다.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는 그 기능의 얼마를 쓰고 있을까. 기본 기능만 나열해도 수백 가지다. 그러나 손이 가는 것은 몇 개뿐이다. 새 앱은 습관처럼 내려받고, 운영체제는 나도 모르게 업데이트와 패치를 반복한다. 5G 광역대 네트워킹, 천만 화소 카메라, 8K 디스플레이, 그리고 실체가 잡히지 않는 ‘알고리즘’. 눌렀는지조차 분명치 않은 터치패드 위에서 결과는 늘 자동으로 도착한다.
이 모든 것이 과연 ‘꼭 필요한’ Must Have일까. 아니면 기술이 스스로의 관성에 취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닐까. 집단적 가스 라이팅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래서 지금 ‘적정기술’을 다시 떠올린다. 적정기술은 50원짜리를 100원짜리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가 아니다. 3인분 같은 2인분을 내미는 동정도 아니다. 모두의 삶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균형을 찾자는 제안이다.
이미 많은 장치는 인간의 효용이라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는 해상도, 인지 속도를 초과한 프로세서 경쟁은 사용자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자본의 증식에 가깝다. 우리는 평생 쓰지 않을 기능을 위해 값을 치른다. 물리적 고장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강제적 ‘진부화’ 때문에 멀쩡한 도구를 버린다.
이 과잉의 질주 속에서 가장 먼저 잃는 것은 호흡이다. 10%도 채 쓰지 못한다고 믿어온 인간이 100% 가동을 자랑하는 기계의 속도에 맞춰 숨을 몰아쉰다. 화려한 첨단은 어느새 감옥의 벽이 된다. 이제 묻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얼마나 더 빠르게 나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인간의 보폭과 속도를 맞출 것인가. 기술의 미래는 돌파가 아니라 멈춤의 미학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딸깍의 윤리
공장이나 건설현장에 서면 먼저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 “딸깍, 딸깍.” 투박한 버튼이 내는 짧은 울림이다. 두꺼운 장갑 위에서도 또렷이 눌리고, ON/OFF가 빛과 소리로 분명히 드러난다. 긴 연결선 끝에서 육중한 장비가 움직인다. 멀리 있는 거대한 기계의 상태를 손끝의 감각 하나로 확인한다.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세상은 이제 ‘터치 스크린’의 시대다. LED 액정 화면이 일상이 되었고, 스마트폰이 본격화된 15년 동안(15년 밖에?) 디지털 경험은 급격히 늘었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정전기나 압력 인식 방식으로 바뀌고, 자동차 대시보드는 스마트폰 폼팩터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대면’이 확산되면서 소매와 금융, 미디어 현장에는 “키오스크”가 자리를 지켰다. 사람 대신 화면이 응대한다.
그런데 산업 현장의 컨트롤러는 왜 여전히 기계식일까. 비용이나 유행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은 안전이다. 거대한 장비를 다루는 자리에서 정전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고, 습기로 오작동하며, 굵은 손가락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현장은 곧 전장이 된다. 그래서 동작이 확실히 전달되는 방식을 고집한다. 미국 대통령이 곁에 둔 핵무기 발사 명령기 역시 기계식 버튼이라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마지막 판단은 촉각과 물리적 저항을 통과한다.
이 단순한 장치는 유니버설 한 기술 적용, 곧 ‘적정기술’의 가까운 예가 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마트폰이나 보조 기기가 그렇다. 점자 키보드를 차용하거나 10개 미만의 버튼을 조합해 다양한 명령을 수행한다. ‘딸깍’하는 클릭 소리는 수행과 완료를 분명히 알려 준다. 그렇다면 키오스크 일부를 기계식 버튼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까. 자판기-밴드 머신처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구조 말이다.
최근 시행된 ‘베리어프리(Barrier-Free)’ 키오스크 의무화 법안 역시 그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장벽을 없앤다는 이름에는 이미 단단한 성벽이 전제된다. 다수가 안에 있고, 소수는 밖에 있다는 구도.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준다’는 태도. 이 이분법은 은근하지만 분명한 위계를 품고 있다.
기술은 누군가를 ‘위한’ 배려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양한 신체 조건을 처음부터 당연한 전제로 삼는 ‘모두의 영토’여야 한다. 시력이 약한 노인에게도, 휠체어 위의 시민에게도,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화면을 읽지 못하는 평범한 행인에게도, 직관적인 물리 버튼과 분명한 피드백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다. 진정한 적정기술은 사후적으로 장벽을 보수하지 않는다. 애초에 벽을 세우지 않는 설계에서 출발한다. 누구를 위한 통로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구조. 차이를 특별한 사정으로 분류하지 않는 태도.
보편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다. 손이 닿는 높이, 또렷한 음성 안내, 눌렀을 때 확실히 돌아오는 감각 같은 구체적인 배려 속에서 완성된다. 장벽을 허무는 기술이 아니라, 처음부터 경계를 상상하지 않는 기술. 그때 비로소 공간은 모두의 것이 된다.
‘첨단’은 분명 자랑스러운 성취다. 그러나 ‘적정하지 못한’ 적용, 효용을 넘은 too much는 다른 문제를 낳는다. 두어 자리 덧셈에 주판이면 충분한데 공학용 계산기를 내미는 꼴이다. 사용법부터 배워야 한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기계공업과 전자산업은 삶의 풍경을 바꾸었다. 정보는 풍부해졌고, 업무는 빨라졌다. 작은 컴퓨터 상자와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이 생활과 문화를 재편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정함이 사라지면 그 편리는 다른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원 고갈, 환경 파괴, 과잉 생산의 문제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더 큰 문제는 ‘디지털 격차’다. 기술을 다루지 못해 필수 서비스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 격차는 부의 차이, 학습의 조건과 맞물려 굳어진다.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된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기술’로서의 ‘적정기술’이 요청된다.
적정기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적절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력과 식수가 부족한 지역에 아이디어 상품을 선심 쓰듯 건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체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 치수관리의 근본 기술과 산업을 함께 이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기술은 속도를 자랑하기 전에 질문을 받아야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디까지가 필요한가. ‘딸깍’ 하고 분명히 응답하는 버튼처럼, 인간의 삶에 또렷이 닿는 자리에서 멈출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기술은 윤리를 얻는다.
매끄러운 끝, 사라진 촉각
첨단(尖端). 그 날 선 단어는 인류가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길의 다른 이름처럼 들린다. 뾰족한 끝으로 현실의 막을 찢고, 기어이 미래라는 영토를 넓히려는 의지. 우리는 더 얇고 더 매끄럽고 더 형체 없는 것을 ‘최첨단’이라 부르며 치켜세워 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평해진 시대, 뜻밖의 갈증이 시작되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더듬는다.
첨단(尖端)은 뾰족할 첨(尖)과 끝 단(端)이 만난 말이다. 사물의 가장 앞, 가장 날 선 부분을 가리킨다. 과학과 산업, 유행에서 가장 앞선 상태를 뜻할 때 이 말을 쓴다. 현실의 한계를 뚫고 나가는 선봉의 이미지. 여기에 다시 최첨단(最尖端)을 덧붙인다. 끝 위에 또 다른 끝을 세우며, 인간은 늘 다음 단계에 목말라 한다.
지난 십수 년, 기술은 ‘저항의 제거’를 목표로 달렸다. 돌출된 부분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고, 기능은 유리판 아래 픽셀로 정리되었다. 스마트폰에서 자동차 대시보드까지, 우리는 매끄러운 표면을 문지르며 세계를 조종한다고 믿었다.
이 매끈함은 조급함과 맞닿아 있다. 단 1밀리미터라도 줄여야 한다는 강박, 물리적 연결을 없애 얻는 효율이 곧 진보의 증표가 되었다. 그러나 저항이 사라진 자리에서 감각은 방향을 잃었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줄어들고, 화면을 ‘응시’해야만 결과를 확인하는 시간이 늘었다. 날카로운 진보가 오히려 직관을 베어낸 셈이다.
‘버튼(Button)’의 어원을 더듬으면 다른 장면이 열린다. 고대 프랑스어 ‘보통(Boton)’은 꽃봉오리, 혹은 밀어 올려 솟아난 것을 뜻한다. 안에서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생명의 움직임. 버튼은 기계의 내부와 인간의 외부가 맞닿는 자리에서 솟아난 작은 약속이다.
기표적 관점에서 보자면, 버튼은 인과관계의 상징에 가깝다. 누르면 반드시 무언가 일어난다는 믿음. 손끝에 닿는 단단함, 눌렀을 때의 반발력, 이어지는 ‘클릭(Click)’ 소리. 이 짧은 연쇄는 내가 물리 세계에 개입했다는 확인이다. 반면 매끄러운 터치스크린은 신호만 남긴다. 촉각의 되돌림이 없다. 응답 대신 침묵이 돌아온다. 그것은 부재의 소통에 가깝다.
최근 산업계 곳곳에서 기계식 장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기능을 터치 패널에 넣었던 자동차 제조사들이 물리 다이얼과 버튼을 되찾기 시작했다. 고가의 디지털카메라와 키보드 시장에서는 ‘손맛’이라 불리는 타건감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매끄러움의 시대 한가운데서, 사람들은 다시 저항을 찾는다.
기술의 끝은 더 날카로워지는데, 손끝은 점점 둔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회복하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감각일지도 모른다. 눌렀을 때 분명히 되돌아오는 작은 저항, 그 확실한 촉감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저항의 귀환
가장 극적인 반전은 책상 위에서 시작되었다. 효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노트북의 나비식 키보드가 조용히 사라지고, 묵직한 기계식 키보드가 자리를 대신한다. 얇고 가벼운 것이 미덕이던 기술의 문법이 흔들린 자리, ‘적정 수준의 소음’과 ‘확실한 반발력’이라는 오래된 가치가 돌아왔다. 이는 단순한 도구 교체가 아니다. 유리판을 두드리는 감각에 지친 몸이, 뇌로 또렷이 전달되는 물리적 피드백의 ‘쾌락’을 다시 찾은 사건에 가깝다. 텍스트를 입력하는 추상적 행위는 깊은 스트로크를 통과하며 비로소 손의 노동이 된다.
카메라 시장의 풍경도 닮았다. 모든 설정을 터치 액정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사용자들은 상단의 아날로그 다이얼에 다시 손을 얹는다. <FUJIFILM X100V> (후지필름, 2020)의 성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¹ 셔터 스피드 다이얼을 돌릴 때의 미세한 걸림, 조리개 링의 분명한 클릭감은 촬영에 ‘의도’를 새긴다. 자동화의 편리함은 사람을 관람자로 밀어내지만, 손끝의 저항은 다시 창작의 자리에 세운다.
이 흐름은 단순한 복고(Retro)가 아니다. 기술의 과신에 대한 신체의 응답이다. 인간은 ‘도구적 인간(Homo Faber)’으로서 사물의 저항을 통해 자신을 확인해 왔다. 아무런 반발 없이 미끄러지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통제의 감각보다 소외를 먼저 느낀다. 감각이 되돌아오지 않을 때, 주체성도 함께 흐려진다.
물리적 버튼의 귀환은 ‘최첨단’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진보란 인간의 신체성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감각과 얼마나 정밀하게 공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뾰족한 끝(尖端)이 현실을 뚫는 선봉이라면, 그 끝을 붙드는 것은 여전히 온기를 지닌 손가락이다.
우리는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갈증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화려한 픽셀의 속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자각. 손끝에 걸리는 작은 저항, 그 ‘꽃봉오리’ 같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인간은 기계와 다시 악수한다.
가장 앞선 기술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깨운다. 매끈한 유리판을 떠나 버튼으로 돌아온 손가락은, 차가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틈을 드러낸다.
결국 이 귀환은 ‘의도된 저항’의 회복이다. 터치스크린은 모든 정보를 평평하게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모든 조작을 비슷하게 만든다. 반면 물리적 버튼은 형태와 위치, 누르는 힘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남긴다. 그것은 기계가 신체에 건네는 최소한의 예우다. 뾰족한 끝(尖端)만을 좇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진보는 단지 앞을 뚫는 힘이 아니라, 그 사이로 인간의 감각이 숨 쉴 틈을 남기는 일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