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이 아니라 깊은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먼저 마음 한구석의 좁음을 인정하게 된다. 쓰는 일은 결국 안에 넘치던 말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며, 그 말이 도착할 자리를 상상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자리를 독자라 부르지만, 그 독자가 반드시 타인일 필요는 없다. 때로 글은 가장 먼저 쓰는 사람 자신에게 읽힌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시작에는 언제나 작고 은밀한 드러냄의 욕망이 놓여 있다. 숨기고 싶으면서도 끝내 내보이고 싶은 마음. 부정하고 싶어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동기. 나 역시 그 욕망을 품은 채 문장 앞에 앉는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한 뒤로, 정기적으로 이어지던 기고들은 하나씩 멈추기 시작했다. 일정이 사라지자 글도 함께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글은 외부의 요청으로만 존재하는 일이 아니었다. 쓰지 않는 시간은 쉼이 아니라 지연에 가까웠다. 오래 침묵할수록 안쪽에서 무언가가 쌓였다.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다 증상에 가까웠다. 쓰지 않으면 통증처럼 돌아오는 무엇. 결국 다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복을 위한 기록이었으나, 문장을 이어 가는 동안 어느새 다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 마음이 나를 참여형 매체로 이끌었다. 누구나 글을 보낼 수 있고, 때로는 기사와 나란히 놓이는 공간. 몇 해 전 인연이 닿았던 곳들에 시민기자의 이름으로 글을 송고했다. 영화와 정치에 대한 짧은 글들이었다. 채택과 반려가 번갈아 왔다. 채택된 글이 화면에 떠 있을 때면, 그것이 특별한 성취라기보다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글이 세상 속 어딘가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서서히 다른 요구로 변해 갔다. 나는 점점 매체의 호흡에 맞추어 쓰고 있었다. 채택되기 쉬운 주제를 먼저 고르고, 더 빨리 쓰기 위해 생각의 시간을 줄였다. 최신작과 유행을 선택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고, 이미 누군가 먼저 썼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문장을 재촉했다. 글은 점점 짧아졌고, 문장은 생각을 따라가기보다 속도를 따라갔다. 가독성을 이유로 단락은 잘게 나뉘었고, 제목은 의미보다 반응을 고려해 만들어졌다.
어느 순간,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구라는 형식에 적응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장이 편해질수록 사유는 얇아졌고, 이해되기 쉬워질수록 내가 말하고 싶던 복잡함은 사라졌다. 누군가 요구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 요구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부끄러움과 피로가 함께 밀려왔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그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경고처럼 느껴졌다. 단순하게 말하는 습관, 빠르게 정리하려는 태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축소하려는 충동. 그것들이야말로 복잡한 삶을 함부로 다루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느린 문장은 늘 뒤늦게 도착한다. 이미 다른 이야기들이 지나간 자리, 사람들이 흩어진 뒤의 광장에 남겨진다. 나는 그 고요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 속에 서는 일이 불안해, 문장을 스스로 재촉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문학이 원래 머무르는 곳은 바로 그 늦은 자리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된다.
글을 쓴다는 일은 말을 늦추는 일이다. 생각이 충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말이 글처럼 신중해지기를 바라고, 글은 말처럼 즉각적인 소비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태도. 문학은 언제나 이해보다 체류를 요구해 왔다.
재미와 흥미는 종종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재미는 순간을 밝히고, 흥미는 오래 머문다. 우리는 웃음으로 하루를 견디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질문 하나로 오랫동안 살아가기도 한다. 문학은 대개 후자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당장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감각을 남긴다.
어렵고 느린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래서 언제나 시대와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어긋남 속에서만 지켜지는 것이 있다. 복잡한 것을 복잡한 채로 두려는 노력, 이해되지 않는 결을 함부로 정리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 태도가 사라질 때, 문장은 편리해지는 대신 가벼워진다.
나는 이제 글의 쓸모를 다른 자리에서 생각한다. 그것이 얼마나 널리 읽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쓰였는가 하는 문제. 결국 글을 밀어내는 힘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서 나온다. 결과는 늘 예측과 다르게 흘러가지만, 어떤 각도로 문장을 밀어냈는지는 남는다.
문학은 애초에 답을 주는 일이 아니었다. 질문을 오래 붙들어 두는 방식에 가까웠다. 답은 질문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거나, 끝내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를 다음 질문으로 이끈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늦게 쓰려고 한다. 서두르지 않고, 문장이 생각을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한다. 말과 글 사이에 다시 거리를 만들고, 그 사이를 건너오는 시간 속에서 사유가 제 속도를 찾도록 내버려 두려고 한다.
늦게 도착한 문장은 대개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