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건너는 이름, 키메라의 기억
인류의 상상력은 언제나 자연의 질서를 해체하고 다시 엮는 방식으로 공포와 경외를 길러 왔다. 그 상상력의 가장 선명한 결정체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 신화의 괴수 키메라(Chimera)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처음 또렷이 등장하는 이 존재는 앞은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의 형상을 지녔고, 입에서는 불꽃을 토해낸다. 이 기괴한 혼종성은 단순한 괴물의 외형을 넘어, 고대인이 감지했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야생성과 경계를 침범하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응축한다.
신화 속에서 영웅 벨레로폰은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타고 키메라를 쓰러뜨린다. 이 장면은 단순한 퇴치담이 아니라, 혼돈으로 표상된 자연을 인간의 지혜와 도구, 곧 재갈과 기술로 길들이며 질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문명화의 은유로 읽힌다. 괴물의 죽음은 곧 인간 세계의 안정이며, 자연을 해석하고 지배하려는 의지의 서사다.
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키메라는 점차 의미를 확장한다. 고대의 괴수는 중세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자 ‘기괴한 공상’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신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강제로 결합된 모습은 기만과 위선을 품은 인간의 마음을 닮은 형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이르러 인본주의가 대두하면서, 키메라는 전혀 다른 얼굴을 얻는다. 인간은 예술과 과학을 통해 자연에 없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제2의 창조자’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때 키메라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상상력의 자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변주된다.
현대에 이르러 키메라는 신화의 무대에서 내려와 실험실과 기술 담론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유전공학에서 서로 다른 종의 세포가 결합된 개체를 ‘키메라’라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고대 신화가 예감했던 경계의 붕괴가 현실의 언어로 번역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키메라는 더 이상 처단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포스트휴먼 시대의 하이브리드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기능한다. 인공지능과 신체의 결합, 유전자 편집으로 흐려지는 종의 경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무엇이 인간인가, 그리고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키메라는 이렇게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등장하며, 인간이 마주한 불안과 욕망을 정확히 비추는 거울이 되어 왔다. 한때 불을 뿜던 괴수는 이제 스크린과 실험대 위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되살아나,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정상성과 질서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조용히 드러낸다.
우리 세대에게 키메라는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팝페라 가수 키메라, 한국 이름 김홍희다. 초등학생들이 모차르트 <밤의 여왕>의 유명한 스캣을 흉내 내며 놀던 시절, 키메라는 신화가 아니라 텔레비전 속 이름이었다. 고대 신화에서 영웅의 탄생을 위해 희생된 괴물이었고, 중년 이상의 한국인에게는 한때의 음악적 추억이었던 키메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전혀 다른 이유로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자신을 죽인 벨레로폰보다도, 당시 국통령이던 팝페라 가수보다도, 의과학과 유전자 연구의 성과를 설명하는 단어로서의 ‘키메라’가 더 강력한 생명력을 얻은 셈이다. 이형의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이나 생명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키는 대명사로서, 키메라는 이제 인간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로까지 확장되었다.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몸속에 남은 타인의 흔적, 키메라의 과학
2015년, 미국 워싱턴의 한 남성은 당시 유행하던 친자 확인 검사 앞에서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검사 결과는 냉정했다. 아들은 친자가 아니며, 유전적으로는 조카에 가깝다는 판단이었다. 의심과 혼란 속에서 그는 추가 정밀 검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더 낯선 진실이 드러난다. 그의 침과 정자에는 서로 다른 DNA가 존재하고 있었다. 유전학자들은 이 현상을 ‘키메라 증후군(Chimerism)’이라 설명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그보다 앞선 2002년, 뉴질랜드에서도 보고된 바 있다. 한 여성의 혈액 DNA가 난소의 DNA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역시 키메라 증후군으로 진단되었다. 한 몸 안에 두 개의 유전적 서사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개인의 정체성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당시 유전 전문가들은 이러한 키메라 증후군의 원인을 태내 환경에서 찾았다. 대부분의 경우, 산모의 태속에서 이란성 쌍둥이 배아가 형성되었다가, 그중 하나가 임신 초기 사망하면서 남은 배아가 사라진 배아의 세포 일부를 흡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의학잡지 <Scientific American>은 이 과정을 비교적 차분하게 설명한다.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한 경우, 배아 중 하나가 아주 이른 시기에 소실될 수 있으며, 산모나 의료진조차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배아는 사라진 배아의 세포를 흡수하고, 결국 두 개의 DNA를 지닌 채 성장한다.
쌍둥이 배아의 소실은 다태아 임신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 확률은 약 21~30%에 이른다. 이 수치를 떠올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키메라 증후군일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특별한 계기나 정밀 검사가 없는 한, 그 사실은 평생 드러나지 않은 채 몸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키메라 증후군은 ‘쌍둥이 소실 증후군(베니싱 트윈 신드롬, Vanishing Twin Syndrome)’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사라진 존재의 흔적이 살아남은 몸속에서 조용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경로는 골수 이식이다. 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골수 이식을 받은 사람은 후천적으로 두 개의 DNA를 가질 수 있다. 골수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을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 혈액의 공장이다. 골수 이식 수술에서는 병든 골수를 제거한 뒤, 기증자의 골수를 이식해 정착시킨다. 이때 새 골수는 기증자의 DNA를 지닌 혈액 세포를 계속 생산하게 되고, 그 결과 이식받은 사람의 몸에는 두 종류의 DNA가 공존하게 된다. 네이처지에 기재된 논문에 따르면, 골수를 기증받은 사람의 혈액 DNA는 기증자의 혈액 DNA와 100%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드물게 기증자와 수령자의 DNA가 혼합된 상태로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를 “혼합-키메라증”이라 부른다.
키메라는 병리적 특이 현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연구는 엄마와 자녀가 ‘마이크로 키메리즘(Microchimerism)’이라는 미묘한 메커니즘을 통해 깊이 얽혀 있음을 밝혀왔다. 이는 증후군이라기보다, 작지만 지속적인 ‘키메라 현상’에 가깝다. 모든 포유동물은 임신 기간 동안 태아와 모체가 유전자와 세포를 서로 교환한다. 그 결과 한 개체 안에 서로 다른 유전적 성질을 지닌 조직들이 공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 키메리즘이다.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몸속에 엄마에게서 건너온 세포를 품고 살아간다. 약 60년 전 이미 과학자들이 규명한 ‘모체 키메라 현상’이다. 동시에 태아의 세포 또한 엄마의 몸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거나, 오랜 시간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 임신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간이 아니라, 엄마와 태아가 서로의 몸을 오가는 쌍방향 교류의 과정이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키메라 현상은 심장, 간, 폐, 신장, 골수, 피부, 혈액, 갑상샘 등 다양한 조직에서 확인된다. 실제로 임신한 여성의 80~90% 혈액에서 태아의 DNA가 검출되는데, 이는 태아의 세포가 태반을 넘어 엄마의 몸 안으로 들어와 남긴 흔적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몸은 결코 단일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타인의 일부를 안고 살아간다. 키메라는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복합적인 존재인지를 조용히 증언하는 과학의 언어다.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타인의 흔적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완결된 하나가 아니었음을 말없이 알려준다.
법정에 호출된 키메라, 혈연과 진실의 경계
의학계 내부에서 주로 논의되던 ‘키메라 증후군’이 국내 대중에게 널리 각인된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이른바 ‘구미 3세 여아 살인사건’이다. 범인을 특정하기 위한 친모 논란 과정에서, 피고인 측이 검사가 제시한 DNA 증거에 대해 ‘키메라 증후군’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이 낯선 의학 용어는 법정과 언론의 중심으로 불려 나왔다.
2022년 경북 구미의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3세 여자아이 사건의 파기환송심 재판 과정에서도, 숨진 아이와 친모 사이에 친자관계가 성립한다는 검사 결과가 다시 제시되었다. 사건은 단순한 살인 혐의를 넘어, 혈연과 출산, 그리고 모성의 실체를 둘러싼 깊은 의문을 남겼다.
대구지법 형사항소1부(이상균 부장판사)는 미성년자 약취와 사체은닉미수 혐의로 기소된 석모(49)씨에 대한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유전자(DNA) 검사 결과를 근거로 석씨가 숨진 아이의 친모임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동시에 함께 검사를 의뢰한 석씨의 성인 딸들, 김모(23)씨 등 두 명과 숨진 아이 사이에서는 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론도 나왔다.
재판부는 석씨 측이 출산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한 사람이 두 가지 유전자를 가질 수 있는 ‘키메라증’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 석씨와 석씨의 딸들을 대상으로 추가 유전자 검사를 대검찰청에 의뢰했다. 그러나 이번 검사 결과 역시 수사 단계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시행된 검사들과 동일한 결론을 보였다. 더불어 증인 신문과 증거 조사 과정에서도 새로운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결과, 석씨가 실제로 아이를 바꿔치기했는지 여부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으로 남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7799
석씨는 2018년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 구미의 한 산부인과 의원에서 친딸 김씨가 출산한 여아와 자신이 몰래 출산한 여아를 바꿔치기해 어딘가로 빼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김씨가 거주하던 빌라에서 3세 여아의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기 전,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박스에 담아 옮기려 한 혐의도 함께 받았다.
결국 추가 검사와 재판 과정을 통해 숨진 여아가 석씨의 딸이라는 점은 재확인되었다. 다만 재판부는 “DNA 검사 결과가 석 씨가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사실까지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 이른바 ‘구미 키메라 증후군 주장 사건’의 최종 판결에서, 친모로 밝혀진 석모 씨의 ‘아이 바꿔치기’ 혐의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형사 사건을 넘어 의학적 호기심과 존재론적 질문을 증폭시켰다. 방 한편에서 발견된 여아의 시체가 과연 누구의 아이인지 밝히는 과정에서, 법적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의 진실 공방이 벌어졌고, 그 중심에 아이의 DNA가 결정적 증거로 채택되었다. 친모로 지목된 외할머니가 동기와 수단, 시간의 측면에서 범인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키메라 증후군’은 방어 논리로 소환되었다. 비록 법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키메라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시킨 계기로 남았다.
그러나 키메라 증후군이 말하는 이야기는 비정한 모정의 서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신비, 탄생이라는 사건과 모성애의 복합적 층위가 놓여 있다. 한 몸 안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유전적 흔적은,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얽힌 존재인지를 조용히 증언한다. 키메라는 법정에서 괴물처럼 호출되었지만, 그 실체는 오히려 인간 탄생의 깊고도 섬세한 비밀에 더 가까워 보인다.
뇌에 남은 생의 흔적, 모성의 키메라
출산 이후에도 지속되는 키메라 현상은 단순한 생물학적 잔여가 아니라, 엄마와 아이 사이의 깊은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징후다. 모체에 남은 태아의 세포는 면역 체계에 관여하며, 때로는 질병을 유발하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엄마의 몸을 돕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태아의 세포는 상처 난 조직으로 이동해 회복을 촉진하고, 손상된 부위를 재생하는 데 기여한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긴 이유 역시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조심스레 짐작해 볼 수 있다.
임신 기간 약 41주 동안, 엄마와 태아의 세포는 끊임없이 서로를 오간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그 세포들의 상당수는 엄마의 몸에 남는다. 조직과 뼈, 뇌와 피부에까지 스며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각인을 남긴 채 수십 년을 머문다. 한 명의 아이만이 아니다. 엄마가 품었던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의 흔적을 남긴다. 임신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거나, 낙태와 유산으로 중단된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태아의 세포는 여전히 혈류를 타고 엄마의 몸으로 이동해,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이 현상은 실제 의학적 성과로도 확인된다. 태아의 세포는 엄마의 유방암이나 류머티즘 관절염 증상을 완화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를, 태아로부터 전달받은 ‘신선한 세포’ 덕분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모체에 유입된 태아의 세포가 어머니의 심장 손상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도 이어졌다.
오랫동안 키메라 현상은 ‘뇌를 제외한 전신’에서만 발생한다고 여겨져 왔다. 뇌는 혈뇌 장벽으로 보호되어 있어, 외부 세포의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허치슨대, 워싱턴대, 시애틀대 공동 연구팀은 여성의 뇌에서도 키메라 현상, 곧 마이크로 키메리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성의 뇌 안에서 발견된 다른 사람의 세포는, 그 여성이 임신했던 태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 혈뇌 장벽은, 모성과 생명의 교류 앞에서 완전히 닫힌 문이 아니었다.
이 연구는 태아의 세포가 뇌 질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태아의 세포가 엄마의 몸에서 질병을 완화했듯, 뇌에 유입된 태아의 세포 역시 알츠하이머, 곧 치매의 발병을 늦추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준다는 결과가 제시되었다. 실제로 치매를 앓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태아의 유전자를 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태아의 세포가 엄마의 뇌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사실은, 혈뇌 장벽을 넘어 뇌에 자리 잡은 태아의 세포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세포들은 오랜 시간, 때로는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엄마의 뇌 속에서 살아간다. 이번 연구에서 태아의 세포가 확인된 여성 가운데 가장 고령자는 94세였다. 임신이 끝났거나, 낙태나 유산으로 중단된 경우에도 아이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어도,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났어도, 엄마의 뇌 어딘가에 존재의 자국을 남긴다.
어쩌면 엄마가 평생 자식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는 비유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과학은 이제, 엄마가 실제로 자신의 머릿속에 자식들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증언하고 있다. 키메라는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모성의 깊이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의 변이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그는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이행한다. 몸의 변화만을 말하는 일이 아니다. 의지의 방향이 바뀌고, 감각의 결이 달라진다. 그 변화는 흔히 ‘느낌’으로 설명되지만, 결코 감정에만 머무는 일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여성이 엄마가 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재구성된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수호신처럼, 혹은 원더우먼처럼 이전에는 없던 능력이 솟아나는 이유 또한, 엄마의 몸 안에 남은 자녀의 세포들이 만들어낸 흔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문으로 모성은 ‘어미 모(母)’에 ‘성질 성(性)’을 쓴다. 이는 엄마라는 역할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본래 성질과 성향을 뜻한다.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엄마는 오로지 자녀를 향해 준비된 존재처럼 보인다.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아무리 내어주어도 늘 모자란 쪽은 엄마다. 그렇다면 자녀는 어떤 존재일까.
‘배속에 있을 때가 효자’라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엄마의 심장이 손상되면, 태아의 세포는 그 부위로 이동해 암적 세포나 바이러스와 싸울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세포로 변한다. 엄마가 아기를 인간의 형체로 빚는 동안, 아기는 엄마의 아픈 곳을 고치며 응답하는 셈이다. 임신 중에 특정 질병이 사라지거나, 오래된 체질이 완화되는 이유도 여기에 놓여 있다. 엄마와 아이의 유대는 감정 이전에, 이미 몸속 깊은 곳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도 모친과의 인연을 잠시 멈춘 채 지내고 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깊어져 버린 시간의 골을 조용히 바라본다. 이제는 그 틈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힘이 조금은 생긴 듯하다.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다면, 많은 독서와 꾸준한 학습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의 근원에는 모친이 있었다는 점이다. 해외 근무로 자주 부재하던 부친을 대신해,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감당하려 했던 시간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단함이 쌓였을지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소진되었을 모성의 총량 또한,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오직 자식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유일한 존재처럼 보인다. 기술이 고도화되고 인간의 존재 의미가 점점 축소되는 시대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을 통해 각자의 소중함을 부여받고 유지한다. 이것이야말로 설명되지 않는 섭리가 아닐까. 만약 신이 존재하고, 신의 은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엄마’라는 존재를 세상에 내려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엄마들은, 그 자체로 이미 은총이다.
•참고: 의학전문지 하이닥
(https://mobile.hidoc.co.kr/healthstory/news/C0000611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