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선의 반댓말이 아니야

주인공이라는 환상, 침묵이라는 공모

by 박 스테파노

어린 시절, 가진 것 없던 연년생 형제에게 놀이라 부를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골목에 또래 아이들 몇만 모이면 그날 하루는 풍성했다. 공터와 골목길을 떠돌며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던 놀이의 거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딱지 한 장, 구슬 몇 알이 있어야 했다. 아니면 작은 밑천으로 판을 키우는 잡기에 능해야 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눈을 뜨면 늘 곁에 아웅다웅할 상대가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어린 날은 꽤 든든했다.


형과 나의 놀이터는 종종 집 안으로 옮겨왔다. 다락방을 뒤적였고, 애써 개어 놓은 이불이 가득한 서랍장을 산처럼 기어올랐다. 작은 집 안에서 우리는 탐험가가 되었고, 모험가가 되었다. 무엇보다 자주 벌어진 놀이는 총싸움이었다. 손가락만 있어도 충분했다. 연필이나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서로를 겨누며 "탕!" 소리를 냈다. 막대기로 하는 칼싸움은 집안의 암묵적인 금지였다. 숙부가 어린 시절 그런 장난을 하다 눈을 다쳐 의안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싸움은 허용된 유일한 전투였다. 소란이 문제였지만, 우리는 금세 방법을 찾아냈다. 슬로모션으로 움직이거나 무음으로 싸우는 방식. 그 조용한 전쟁은 집 안의 공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충분히 흥분시켰다.


머릿속에는 주말 극장에서 보았던 서부극의 장면들이 가득했다. <역마차>, <하이눈>, <OK목장의 결투>. 존 웨인과 헨리 폰다가 우리 안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두 형제는 서로의 가슴을 겨누고 서부의 총잡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골목집 안에서 벌어지는 결투였다.


결투의 날들. 황헌만, 이화동(1978).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문제는 단 하나였다. 판정.

누가 먼저 맞았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오직 서로의 양심과 배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승부는 상상의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끝났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장렬한 죽음이 있었다. 패자는 몸을 비틀며 쓰러졌고, 총에 맞은 배우처럼 길게 숨을 토하며 바닥에 누웠다. 어린 형제에게 죽음은 연기였다. 하지만 그 연기는 제법 진지했다.


그러나 그 승부가 언제나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총알을 피했다고 주장하거나, 치명상이 아니라며 버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대개 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형은 짜증을 냈고 항의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늘 먼저 무너졌다. 천천히, 총에 맞은 사람처럼. 그 장면은 어린 내 눈에도 꽤 장엄해 보였다. 형은 늘 먼저 죽어주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기억은 또렷하게 남았다. 형의 양보는 오래 마음에 남았지만, 다른 한 가지도 함께 남았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죽지 않으려 했을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어린 마음의 고집쯤으로 넘기려 했다. 그런데 인생의 어딘가에서 한 번 크게 넘어지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오래된 장면들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 세계가 만들어 놓은 중심의 중력 안에서 구심과 원심을 오간다. 그 흐름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밀려나며 균형을 만든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오래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늘 복잡하지만 선한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은 단순하고 악한 존재라는 식의 설정. 어린 시절 마음속 어딘가에 만들어 두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망상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깨달음은 어린 시절 총싸움에서 좀처럼 죽지 않던 그 아이의 마음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얼굴들


인간은 자신을 복잡한 사연을 지닌 선한 주인공으로 이해한다. 반면 타인은 쉽게 단순한 악역으로 정리한다. 이 낡은 구도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자아를 지키려는 본능과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서사적 감각이 맞물릴 때, 이런 장면이 만들어진다.


심리학은 이를 또렷한 이름으로 설명한다.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와 '자기중심적 편향(Egocentric Bias)'.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말할 때 사정부터 떠올린다. 피할 수 없던 상황, 얽힌 관계, 마음속 갈등. 그러나 타인의 잘못을 볼 때는 사정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라는 단정뿐이다. 복잡한 나와 단순한 타인. 이 대비는 그렇게 조용히 굳어진다.


영화 <조커> (토드 필립스, 2019)에서 아서 플렉은 자신의 폭력을 설명할 긴 이야기를 갖고 있다. 사회적 소외, 가난, 조롱, 오래된 상처. 그는 분노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낸다. 그러나 그를 밀어붙이는 주변 인물들은 거의 언제나 평면적이다. 잔인하거나 무심한 얼굴들. 그 세계에서 그는 이해받지 못한 인간이며, 타인은 그를 몰아넣은 악역에 가깝다. 이 구조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방어 장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내면의 균열을 덮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그렇게 인지 부조화는 잠시 잠잠해진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사회적 삶을 무대에 비유했다. 우리는 그 위에서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주인공을 연기한다. 타인은 종종 배경이 되거나, 이야기를 긴장시키는 반동 인물(Antagonist)이 된다. 최근 자주 언급되는 '주인공 증후군(Main Character Syndrome)'은 이 감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SNS의 환경은 그것을 더욱 부풀린다. 자신의 삶은 정교하게 편집된 이야기로 바라보지만, 타인의 삶은 단편적인 이미지와 짧은 문장으로만 접한다. 그 사이에서 맥락은 지워지고, 타자를 이해할 기회는 줄어든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제공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자신을 순결하고 선한 존재로 규정한 채 현실의 더러움과 거리를 두려는 의식이다. 타인의 결함은 또렷하게 보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깨끗한 자리에서 판단한다. 헤겔은 이를 도덕적 순수성처럼 보이지만 결국 불행한 의식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보았다. 니체 역시 『선악의 저편』에서 같은 지점을 겨냥한다. 고통받는 내가 선하다는 믿음은 언제나 비교를 필요로 한다. 상대를 단순한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우월감은 삶을 긍정하는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를 낮추는 방식으로만 유지된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장면은 더욱 급진적이다. 타자의 얼굴에는 무한한 복잡성이 담겨 있다. 그러나 타인을 악으로 환원하는 순간 그 얼굴은 사라진다. 타자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관 속에 갇힌 표지로 변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그것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살해와 닮아 있다.


이 인식이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될 때 상황은 더욱 거칠어진다. 우리 집단은 복잡한 신념을 지닌 공동체로 그려지지만, 상대 집단은 세뇌당했거나 단순히 악한 무리로 묘사된다. 칼 슈미트가 말한 동지와 적의 구분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상대는 더 이상 인격이 아니다. 사연과 맥락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빌런만 남는다. 오늘날의 혐오 표현과 확증 편향은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얻는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타인의 얼굴을 지워버릴 때, 세계는 조금씩 더 좁아진다. 그 좁아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잊는다. 타인 역시 자신만의 서사를 지닌 또 하나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빌런의 자리


누구나 자기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상처도 있고 망설임도 있으며 후회도 있다. 그 복잡함은 결국 하나의 믿음으로 귀결된다.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믿음. 그러나 우리의 길을 막는 타인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서사의 균형을 흔드는 존재, 평면적인 빌런이다. 이렇게 구성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입체적인 인간이 되고 타인은 단순한 역할로 축소된다.


이 자아 중심적 서사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가의 외교 전략과 정치의 언어 속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자신은 복잡하기 때문에 선하고, 타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악하다는 이분법. 그 구조는 오늘날 국제 정세의 폭력성과 국내 정치의 비겁한 침묵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된다.


"Make America Great Again(MAGA)"이라는 구호는 헤겔이 말한 '아름다운 영혼'의 국가적 변주처럼 보인다. 도덕적 순수성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세계 질서의 중심에 놓는 태도.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을 세계 평화와 거의 같은 의미로 말한다. 베네수엘라 압박이나 이란 공습 같은 군사적·경제적 개입도 그 언어 속에서는 도덕적 결단으로 포장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2014)는 전쟁 속 군인의 고뇌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화면의 구조를 오래 바라보면 다른 장면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외상(PTSD)은 깊고 숭고하게 묘사되지만, 그가 겨누는 타자들은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축소된다. 한쪽의 고통은 서사가 되고 다른 쪽의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 구조는 트럼프의 정치적 상상력과 어딘가에서 닿아 있다.


이야기 속에서 미국은 복잡한 주인공이 되고 베네수엘라와 이란은 단순한 빌런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평화는 어느 한 국가가 독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한 나라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곳의 역사와 시민의 삶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적대의 표식뿐이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결국 타자를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배치된 등장인물로 만든다.


이러한 서사적 단순화는 국내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헌정 질서를 정면으로 흔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판단을 미루었다. 정치적 유불리와 경제적 이해관계, 사회적 분위기를 살피며 입장을 보류했다. 스스로를 신중한 중립자로 자리매김하며.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작년 4월 한남동 관저에서 나와 지지자들과 인사.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년 10월 아이오와주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 AP 연합뉴스 제공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잔혹한 의도가 아니라 사유의 멈춤이었다. 자신의 역할과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상태. 계엄이라는 분명한 폭력 앞에서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는 그와 닮아 있다. 복잡한 사정을 앞세워 민주주의의 가치를 단순한 정치 싸움으로 축소하는 일. 그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비롯된 합리화다. 침묵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관찰자라 믿지만, 그 침묵은 불의가 계속 돌아가도록 돕는 가장 성실한 조연이 된다.


나의 고통은 이야기로 남고 타인의 고통은 숫자가 되는 세계에서 윤리는 자라기 어렵다. 그 구조 속에서 사람은 쉽게 자신을 선한 주인공으로 믿는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악으로 밀어 넣는다.


진정한 주인공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복잡함만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복잡함도 함께 인정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빌런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아의 감옥에서 한 걸음 벗어난다. 12.3 계엄이라는 비극 앞에서 우리가 내려야 할 판단의 기준은 하나다. 인간의 존엄이다. 복잡한 이유 뒤에 숨는 태도는 선함이 아니라 나약함에 가깝다.


서사의 독점을 멈추고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이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한 가장 조용하고도 확실한 이정표다.



결여의 자리


"미덕은 진정으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이고, 악덕은 무지의 결과다. 따라서 선을 알게 되면 당연히 행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명제가 등장한다: "아무도 알면서 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람들은 흔히 선과 악을 마주 선 두 존재로 이해한다. 밝은 날개의 천사와 검은 뿔의 악마. 오래된 상상력은 언제나 그 두 극단의 형상을 그려왔다. 그러나 이 도식은 단순할 뿐 아니라, 진실에도 가깝지 않다. 초대 교회 시절 마니교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읽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을 맞서는 두 원리로 설명하려 했던 사상. 그러나 교회는 오래전에 그 해석을 오류로 판단했다. 단순한 신학적 실수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정통 교리에서 선은 절대자의 자리와 연결된다. 절대자란 다른 무엇과 나란히 놓일 수 없는 이름이다. 비교도, 반대의 축도 허용되지 않는다. 유일신 신앙에서 신은 절대자이며 동시에 절대 선이다. 따라서 선의 반대말이 악이라는 통념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인가.

신학은 오래전부터 다른 방식으로 답해왔다. 악은 선의 반대가 아니다. 악은 선이 사라진 자리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 그 빈자리 자체가 악이다. 이 설명은 소극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더 넓은 이해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 역시 이 틀 안에서는 악의 한 모습이 된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유대 여론에 맡긴 빌라도를 떠올려보자. 그는 칼을 들지 않았다. 다만 판단을 미루었다. 손을 씻는 몸짓으로 책임에서 물러났다. 그 침묵과 유보가 결여였고, 그 결여가 악이 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 가리키는 것도 여기에 있다. 거대한 악의 의지가 아니다. 선이 무엇인지 분명한 상황에서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는 상태. 생각하지 않음, 결단하지 않음, 행동하지 않음. 그 평범한 공백이 악의 통로가 된다. 착한 사마리인의 비유도 같은 지점에 닿는다. 흔히 사랑의 교훈으로 읽히지만, 그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은 결여에 있다.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돕지 않았다. 그 비어 있음이 악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1890. 고흐는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해 준 성경 속 사마리아인을 그렸다. 조선일보 제공


권력의 일탈 앞에서 판단을 미루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중립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침묵으로 제도를 지탱하는 일이다. 상식과 양심이 사라진 자리에 악은 조용히 들어선다. 그 상태를 단지 진영의 갈등이나 정념의 충돌로만 설명하는 것 역시 결여다. 의도와 무관하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악의 공동정범이 된다.


변명은 언제나 같다. 몰랐다는 말, 상황이 복잡했다는 말. 그러나 그 말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악의 언어다. 무지는 언제나 악덕의 토양이다.


혼란은 길고 걱정은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분명한 눈이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 바라보는 일. 그 결핍을 알아채는 것이 판단의 시작이다. 또 다른 싸움이 아니라, 잊힌 양심을 다시 불러내는 긴 노력. 그것이 어쩌면 계몽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가장 조용한 의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빈 손가락을 총처럼 겨누며 서로를 향해 "탕" 소리를 내던 날들이 있었다. 그 놀이의 끝에서 누군가는 쓰러져야 했다. 나는 좀처럼 죽지 않으려 했다. 끝까지 버티며 이야기를 바꾸려 했다.


이제는 다른 장면을 상상한다. 그날의 결투로 돌아가 정정당당히 쓰러지는 나. 악당이어서가 아니다. 선함이 부족했던 시간을 조용히 인정하며, 그 부족함을 오래된 속죄처럼 받아들이며.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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