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
흔히 사람들은 그 척도에 기준하여,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구별해 낸다. 우리가 쉽게 쓰는 '정상'이라는 의미의 영어 'normal(보통의, 평범한)'의 어원은 "정사각형의, 정방형의"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normali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라틴어 형용사 normalis는 "목수들이 사용하는 직각자(곡척)"를 뜻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norma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라틴어 형용사 normalis는 나중에 "직각자에 꼭 들어맞는"이라는 뜻에서 "(유별나게 튀지 않고) 평범한"이라는 뜻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권력이란? "눈금"을 정할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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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normal)"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고 쉽게 사용하는 영어 단어다. 어원을 살펴보자면, "직각자(곡척)"를 뜻하는 라틴어 명사 "norma"로부터 시작된다. 이 단어가 파생되어 "기준, 표준"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규범"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rm으로 발전하였다. 같은 어원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명사 gnomon 영어 단어로 들어와 "해시계" 또는 "해시계의 지시 침"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니, 우리가 쓰는 "노멀"은 도량형의 규격과 그 척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언가의 기준과 척도에 들어맞는 상태를 "노멀", "정상"이라고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노멀(normal)"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ab-라는 접두어로 반대 의미의 부정어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나, 영어권에서는 흔히 "스페셜(special)"이라는 답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척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하다'라고 표현되는 이 세상 일반화의 규범 안에 들지 않는 것을 표현하게 된다. "스페셜~"이나 "특~"으로 표현되면 가치부여가 되는 기준이, 반대말의 의견만 부각하면 매우 부정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세상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드라마 흥행 문법이었던 미스터리, 스릴러, 재앙, 복수와 막장이 없는 동화 같은 스토리 텔링과 함께, 주인공 우영우의 독특하고 특별한 캐릭터 설정이 한 몫하고 있다. 자폐성 스펙트럼 장애, 그중 고기능 자폐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차별화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장애인을 소재나 캐릭터로 삼은 이야기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사뭇 다르게 다가옵니다. 자폐, 장애라는 대중들과 기득세력이 규정한 "비정상"의 존재인 주인공 우영우가 그저 평범한 "일반"이 되고자 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함"은 그 주체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라 말해 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참 특별하다.
발달장애 중 자폐인에 대한 영화, 드라마 작품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실화를 기반에 둔 조승우 주연의 <말아톤>, 그리고 어느 학술지나 공론회 보다 자폐인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이끌었던 더스틴 호프만, 톰 크루즈의 <레인맨>이 금방 떠 오른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자폐를 가진 사람보다 그 사람이 가진 자폐 스팩트럼이라는 병증이 주인공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고군분투 역경 극복이나 그의 고기능 특기를 이용하고 수단으로 삼는 주변인들의 몰지각적 인식과 "정치"라고 표현되는 이기심이 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사뭇 다르게 이야기를 펼친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주인공은 그저 독특한 캐릭터일 뿐이다. 쫄쫄이 빤스에 망토를 걸친 초인이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능력을 가진 것이 그의 슈퍼히어로적 특징이듯, 우영우에게 엄청난 암기력과 선입견 끼어들 틈 없는 중간자적 태도는 남다른 특징으로 역할할 따름이다.
주인공 우영우의 아버지가 부정한 취업이라는 공격에 괴로워하는 딸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은 온통 "정치"가 작용한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정치는 매우 '한국적'인 해석에 기대고 있다. 인간관계에서의 이해타산과 득실의 계산에 의한 작용과 행위를 통칭한다. 공부하고 시험 치고 돈을 버는 모든 이유는 이 정치행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것이 주인공 우영우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자 재능이 되었으니, 드라마는 잔잔한 동화로 그려낸 날 서고 매서운 풍자의 일침으로 다가온다.
드라마는 그런 주인공을 '완벽한 약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법정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션 클리어, 퀘스트 달성의 주역 중 하나로 그려낸다. 그녀가 가진 남다른 재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난제에 빠진 송사를 풀어 간다. 그녀의 장애는 그저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이 되고, 그로 인해 타인들에게는 역차별이 아니냐는 묘한 물음을 던져 주기도 한다. '장애'가 아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상함"이 "특별함"으로 변모되는 순간에 호응한다고 할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구분하는 자들은 어쩌면 "특별함"에 목을 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인가 싶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수긍이 가는 말이 된다. '능력주의'가 세상의 유일한 '공정'이라 우기는 세력들에게 소위 능력의 기준 "스펙"은 매우 중요한 변별력을 가진다. 지난 수년 동안 소용돌이쳤던 전 법무부 장관의 표창장, 인턴 활동 스펙 소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현 법무부 장관의 딸과 처가의 입시 연령대 친인척들의 내로남불식 스펙 쌓기는 그저 가진 자들의 일상다반사로 치부되는 듯하니까. 이 "스펙"이라는 단어 "Specification"의 어원과 어근은 "스페셜(special)"과 동일하다.
이 어원은 매우 의미가 특별하다. "특별하다"라는 뜻의 형용사 special은 "특정한(specific)"이라는 뜻의 라틴어 형용사 speciali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라틴어 형용사 specialis는 영어 단어 species(종류, 생물의 종)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여성형 명사 species에서 파생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라틴어 여성형 명사 species는 "바라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pecio에서 파생된 단어로 원래 "보기, 보는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나중에 "(보이는) 겉모습"으로, 다음에는 "(겉모습에 따라 구분되는) 물건의 품질 또는 종류"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스펙"은 규격, 명세, 사양 등의 의미를 가진 채 평가 대상이 합격과 불합격의 특정한 범주적 기준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토록 온갖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스펙 쌓기"는 어쩌면 스스로 특별한, 즉 이상한(special) 사람이고자 인정받기를 강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다름이 이상한 것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차별이 특별함이 되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다. (영어 단어 special은 "보다 >> 보기 >> 겉모습 >> 품질/종류 >> 특정한 >> 특별한"의 순서로 의미가 발전)
한 편에서 "이상한"이라는 드라마의 표제 자체가 불편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특권층이 좋아라 하는 "특별한"도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말로 가장 듣기 편한 표현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고유한"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좀 더 다듬어 보니 "오롯한"이라는 말이 떠 오른다.
사람은 저마다가 유일무이하고 모자람 없이 충분히 완성된 "오롯한" 존재이며, 그러한 이유로 인권과 인격을 존중받아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그 오롯한 저마다의 개인이 모여 합의를 만들어 규칙을 만든 것을 우리는 '척도'라고 이야기하는 것.ㅣ다. 그 척도는 법과 규범, 기준과 표준, 그리고 '정상의 범주'를 부여하는 '권력'이 된다. 그 권력은 의미 깊게도 오롯한 객체들의 '공론'에서 나온다는 정치 사회 원칙이 바로 민주주의가 아닐까 한다.
결국 "정상 사회"라는 것은 각각 "독특한 개인"이 모여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론"으로 형성된 "척도의 원기"가 공정하게 작동되는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목소리에 수렴하는 것은 "정상"의 척도의 작용이 아니다.
진보하는 사회의 어젠다는 일상과 연계되기에 파편화되기 마련이고, 그 다양한 어젠다의 우선순위 설정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진보적 정치가 될 것인데, 비판하는 자는 ‘분열 주동자’로 왕따가 되고 만다. 노동자든 공무원이든 소상공인이든 주부든 학생이든 한 목소리로 대동 단결하는 것이 ‘다양성 추구’가 아니다. 그것은 무서운 주장이다. 누군가, 어떤 우리들이 의도적으로 그어 놓은 "눈금"을 강요하는 폭거가 될 수 있다. 진보 정치세력이라 말하는 이들의 극단적 주장은 대학 때 교조 패권주의가 떠올려지는 아찔함을 만나게 해 준다.
또한 차별 금지라는 소극적 인식으로 소수자에 대한 연민과 이해로 받아들이는 우월적 교만함에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고유하고 특별하며 독특한 성정과 기호, 취향, 신념은 그 자체로 사회 도그마인 "정상"을 규정하는 최소 필수 원소가 되기 때문이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소수와 약자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전체와 모두를 존중하고, 편향될 수 있는 "눈금"을 '양심'과 '상식'이라는 척도의 권력을 나누는 일이 된다.
-<권력이란? "눈금"을 정할 힘> 중에서-
이렇듯, 개혁과 진보라는 것은 치열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한발 나아가는 진보된 이 세상을 꿈꾸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어쩌면 "공론"은 이 세상의 병든 곳과 아픈 구석을 치유해 줄 진정한 "금척(태평성대의 도량형)"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썩고 무능하며 작동하지 않는 정치가 하지 못한 것을 수없이 "빠꾸"맞은 드라마가 해 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의 힘은 늘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