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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01. 2023

아수라(2016)같은 이 세상

살아도 사는게 아닌, 지옥 같은 이 세상

인구 48만의 중소도시 안남시는 재개발과 관련된 박성배 시장(황정민)의 재판으로 연일 시끄럽다. 그와 묘한 주종관계를 이루며 궂은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형사 한도경(정우성)의 하루하루는 위태롭고 피곤하다. 이제 일주일만 버티면 박봉의 경찰직을 버리고 안남시 시장의 수행팀장으로 옮겨 가기로 예정되어있기에 참을 뿐이다. 그러던 중에 재판과 관련된 뒤처리를 하다 사고로 동료 경찰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박성배 시장을 구속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검사 김차인(곽도경)은 그의 약점을 들먹이며 박 시장의 약점을 캐내어 오라 협박한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가기로 한 수행팀장에 대신 보낸 친형제 같은 후배 경찰 문선모(주지훈)는 자신의 역할마저 넘보며 무시하기 일쑤이다. 병원에는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중병 걸린 아내가 그를 기다릴 뿐이다. 이도 저도 할 수 없고, 이리로 저리로 갈 수도 없는 도경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것일까? 사는 것이 지옥이라면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이야기를 무심히 내뱉는 경우가 제법 될 것이다. 정말 죽을 생각은 손톱의 그림자 만큼도 없으면서 그 지옥을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경험할 법 없을 것 같은 지옥을 들먹이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한탄한다. 그 지옥이라는 것을 직접 보거나 경험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저 숨 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감사함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숨 쉬며 사는 이 세상이 지옥과 다름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특히무엇 하나 즐거울 일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런 생각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사는게 지옥인 아수라장 같은 세상


사실 화려한 캐스팅에 선 굵은 수컷들의 영화를 만든 제작자의 필모에 대해서도 나눌 말이 많은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를 접하고 사람들은 먼저 제목 <아수라>에서 많은 것을 짐작하고 판단하게 된다. ‘아수라’의 어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영화와 함께 포스팅되었기에, 생각보다 자주 쓰는 단어인 ‘아수라장’의 어원임을 새삼 인지하면서 영화관에 들어서게 된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답게 폭력의 집합체 그 자체이다. 대사의 상당 부분이 욕지거리로 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매 신마다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대변하듯, 대한민국의 대표 얼굴 잘생긴 배우 정우성은 늘 상처 투성으로 등장한다. 화면은 칙칙하고 습하고 어두운 골목에 비마저 내리고 그 빗속에 유혈은 낭자하게 흐른다. 애써 추측할 필요 없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승자 개념 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결말은 예상과 한치의 오차 없이 모두가 자멸한 생지옥의 극단으로 마무리된다. 이보다 제목에 충실한 영화를 꼽기에 쉽지 않을 만큼 영화는 직선적이고 멈춤 없이 내내 달린다. 엔딩 크레디트 조짐이 보이자 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사람들이 이해가 갈 정도이다. 지금 살아 있는 바로 이 순간이 아수라장과 같은 세계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디렉션이라면 절반 이상의 성공은 틀림없어 보인다. 올해 한국 영화들이 불편한 영화들이 제법 있었지만, <아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수라’라는 어원은 고대 인도 신화에서부터 존재하는 악귀와 선귀를 오가는 고대 귀신으로부터, 불교의 윤회사상을 설명하는 육도와 십계에 포함되는 ‘수라계’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싸움을 좋아하는 신’의 존재나 매일 싸움이 일어나는 ‘인계’와 ‘축생계’의 중간의 현존 세상, 혹은 사후세계 중 ‘삼선도(三善道)’ 중 카르마의 등급이 가장 낮은 ‘수라도’의 모습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수라’이다.


영화 <아수라>는 이 어원들의 함의를 모두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싸움과 악의가 넘쳐나는 이 세상을 증폭시켜 묘사한다. 살아 있다면 인간과 짐승의 중간 단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죽어 저세상으로 갔다면 ‘삼악도’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선을 행한 사람들 중 가장 낮은 위치에 겨우 걸쳐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후세계 ‘수라도’ 중 어떤 세계는 7,000살 이상 살아야 윤회의 기회가 온다니 이것 자체로 크나큰 벌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아수라>에등장하는 사람들 중 ‘선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온갖 악의 중심에 서있는 것 같은 안남 시장 박성배는 물론, 그의 더러운 일을 대행하는 한도경은 처음부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뿐인가 희생양처럼 보이는 박 시장의 집사 은실장(김충호)은 물론이고, 형제 같은 선배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 같은 선모도 마음속에서는 남을 경멸하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할 뿐이다. 이러한 악의 세력을 응징해야 하는 검찰 조직은 어떠한가? 검사 김차인은 물론이고 그를 보위하는 수사계장 도창학(정만식)도 그저 갈등의 눈빛만 보일 뿐 결국 폭력적인 억압으로 타인을 무릎 꿇게 만들 뿐이다. 마지막 아수라장 같은 장례식장에서의 자멸에 포함된 모든 인물에서 ‘선함’을 찾을 수 없다. 찝찝하고 허무함에 불구하고 그 결말이 당연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기와 질투의 탑을 쌓아 오르다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지나친 폭력의 장면, 유혈의 낭자, 전체 필름 분위기의 우중충함, 그리고 뻔한 결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 속의 아수라장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 지옥 같은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가라는 공권력은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서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 후배들이 양심선언을 하며 그 농민의 사인을 진단한 선배 의사들에게 엄중하게 질문을 하였지만, 그들도 그 선배들의 연배가 되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조소 가득한 세상이 그러하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검찰이라는 집단이 보여 주는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주머니와 아랫도리 욕심을 채우고 서로 제 식구를 감싸는 모습은 어떠한가. 그뿐인가 자신에게 묻은 똥은 보지도 못할 것이면서 남의 얼굴에 묻은 겨를 나무라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남을 밟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는 오욕의 탑에 홀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타인을 깔아 뭉개는 것이 천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이라 해도 무리 없는 세상임에 틀림없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수라계는 불교의 십계론에서 어떤 세상일까? 법어는 이 수라계를 남을 경멸하고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수라계’의 본성이라 이야기한다. 겉으로 신사인 척 숙녀인 척 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저급한 선심의 흉내일 뿐이고 마음속으로는 남을 누르고 일어서고 경멸하고 싶은 마음의 경계가 바로 수라의 경계라는 것이다. 고도의 몰입적인 경쟁심과 질투심, 그리고 편집증적 망상을 특징으로 하는 아수라의 정신세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아수라의 본성은 접촉하는 모든 대상들을 ‘나’와 ‘나의 편’, 그리고 ‘너’와 ‘너의 편’으로 구분해서 상대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극단적인 이원적 지각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저 선을 그어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는 것에 혈안이 되어 버렸다.


경쟁하고 비교함으로써 끊임없는 질투와 분노, 공격의 에너지에 휩싸인 아수라의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그 마음과 세계를 잘라버리는 것이라 한다. 그냥 경쟁심을 줄이고 비교하는 마음을 자재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 질투와 분노, 공격의 에너지로부터 안전하게 생존하는 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남들을 경멸하고 내리까는 모습으로 나서지만 그 깊은 마음속에서는 헤어 날 수 없는 열등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수라계에서 경쟁과 비교를 거부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경쟁의 상대를 향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아수라의 마음은 상대의 모든 행위를 편중되고 치우친 계산법으로 분석, 해석하느라 쉬지를 못한다. 마치 고삐 없는 맹수의 등에 올라탄 사람과도 같아서 어디를 어떻게 나아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정신없이 치닫는다. 그러한 사람들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경쟁의 궤도를 이탈하는 것 밖에 없어 보인다. 그제야 우리는 아집과 욕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수라계에서 살아 남기 위해 경쟁하고 비교하며 밟고 올라서는 것에서 탈피하여 ‘아수라계’ 자체에서 벗어날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는 ‘협력’과‘연대’가 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사랑’이 될 것이다. 살기 위해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지옥에 가서야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는 게 지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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