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를 보고 난 후 질문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관심을 얻은 지 여러 계절이 지났다. 드라마의 미진한 완성도나 스토리 텔링의 미진함은 각자의 판단에서 좋고 아쉬움이 갈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트루키, 작화와 연출의 영역으로 한정한다면 솔직히 많이 아쉽다. 김은숙 작가의 번뜩이는 대사들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수채화에 던진 유화 물감처럼 이질감이 튀곤 했다.
특히 타이틀 롤인 송혜교의 연기는 업력으로 보았을 때 한계에서 쥐어 짜낸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자신의 실제 연령에 맞는 역할을 맡는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흥행했다. 이전에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거듭하며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식자들만이 찬사를 보내는 어렵고 난해한 영화인지, 아니면 모두가 떼구르 발을 구르며 손뼉을 치는 것이 좋은 영화인지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이번 작품 <더 글로리>도 마찬가지의 양가감정이 든다.
작품의 순수 비평적 평가를 뒤로하여 대중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주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주제는 ‘복수’다. 흔히 이 드라마를 ‘학폭의 르포르타주’ 즘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이 드라마에는 ‘학폭’이라고는 복수를 위한 구실과 개연만 던져 주는 도화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학교 폭력’은 그저 사건의 구성을 위한 이유로 그친다. 그 폭력의 구조적 양태와 사회로 미치는 영향, 그리고 만연한 폭력의 타성에 대한 성찰은 생략되어 있다. 아니 아예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더 글로리>를 보고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는 리뷰는 당황스럽다. 물론 파트 2를 기대하며 법조 전문가들이 이들 등장인물의 행위가 현행 형법에서 어떤 구속력을 지니는지 분석하는 콘텐츠보다야 낫다고 해야 할까. ‘학폭’이라는 사회적 이슈의 미끼를 던지고 유혈 낭자한 ‘통쾌한 복수극’을 보고 우리는 속 시원해하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드라마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복수를 ‘야생의 정의’라고 말했다. 복수는 개인이 받은 감당하기 힘든 분노와 고통에서 시작한다. 그 감정을 ‘합당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감정의 표출이 만연해지면 사회는 지속 유지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개인 분노의 표출 역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법과 규제라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 장치는 개인의 복수를 사회화한다. 문제는 법과 규제가 정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당한 만큼의 피해를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다. 이러한 정서를 담은 드라마 작화 기법이 바로 ‘복수극의 플롯’이다.
논픽션 작가이자 대학에서 미디어 비평을 강의하는 로널드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20가지 플롯>에서 복수극의 플롯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범죄, 끔찍한 사건의 발생
– 복수계획과 추적
– 대결
대표적인 복수극의 플롯에서는 전반부 ‘끔찍한 사건’ 부분에 많은 공을 들인다. 주인공이 범죄나 뜻밖의 사건으로 겪은 상처가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표현하는 데에 많은 설명을 한다. 반면 또 하나의 복수극의 플롯은 후반부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왜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를 설명하기보다 주인공이 복수를 계획하고 적대자를 찾아 나서고 맞서게 되는 일련의 복수행위에 중심을 둔다. 더 나아가 두 가지의 관점이 혼합, 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복수극의 플롯에 따라 영화가 이야기하는 복수에 대한 관점과 그 의미가 다르게 표현된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이 두 가지의 플롯을 작게나마 모두 차용하였지만, 결국 후자의 부분 ‘복수의 행위’에 더 공을 들이고 힘을 주었다. 이유는 한 가지다. ‘통쾌함’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유도하려는 의도다.
21세기 들어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와 OTT의 드라마들에서도 복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꼭 복수가 주제가 아니더라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복수와 관련한 이야기를 담아내곤 한다. 2010년 하반기 이후 개봉작을 보더라도, 복수를 전면으로 내세운 영화는 <용서는 없다>, <파괴된 사나이>, <해결사>, <죽이고 싶은>, <이끼>, <황해>, <혈투> 등 노력하지 않고 열거할 수 있다. 드라마도 <빈센조>, <법쩐>, 그리고 지금 한창 방영 중인 복수 대행을 다룬 <모범택시> 등이 있다. 이 밖의 콘텐츠에서도 직접 주제가 아니더라도 사건 중심의 장르는 대부분 크고 작건 간에 복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많은 영화, 드라마 콘텐츠가 이처럼 복수와 관련된 이야기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영화의 작품성과 상업적 목적에 대한 동시 만족의 욕구 때문이라고 유추된다. 문학작품은 물론 영화, 드라마 등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성한 작품들은 타인들에게 ‘선보이기’ 위함이다. 문화 생산물은 대중에게 공개가 되는 순간 평가에 노출된다. 잘 되었다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작품성과 상업적 성공이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양립한 평가의 프레임을 통과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흥행의 성적과 영화제, 시상식이나 평단의 평가를 동시에 얻을 경우 소위 '잘된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잘된 영화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잘된 콘텐츠'를 이야기한다. '잘된 콘텐츠'는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공감되어 회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또한 작품적인 완성을 위해 검증된 플롯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복수극의 플롯’은 '잘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검증된 장치라 여긴다. 그래서 제작자나 창작자는 이 만능 맥가이버 칼 같은 복수의 플롯을 포기하기 어렵다. 이야기 중간에 플롯을 넣어 생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아예 복수를 전면으로 내 세운다면 적어도 망하진 않을 것이라는 정서의 보험이 작동한다.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책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심은 인간에게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질병’이나 ‘독’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히려 복수심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겪은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복수는 인류를 뜻밖의 위험에서 구해준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수심과 그 행동의 시비에 대하여 고심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은, 주인공 동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어 마땅한 악인들이다. 입체적인 인물들도 아니고 아주 평면적으로 ‘나쁜 놈’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찜찜해진다. 통쾌하지만 결국 동은의 복수 행위도 ‘폭력’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합리화한다. ‘이 드라마는 학교 폭력이라는 사회적인 이슈를 마주하는 의미가 있으니까’라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기원전 1750년 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왕 함무라비 왕이 공포한 법전은 누구나 조항 하나로 잘 알고 있다. 일명 '함무라비 법전'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말로 '동해보복'이라는 원시 법의 원칙이 유명하다. 손해만큼의 동일한 손해로 되갚는, 똑같은 행동으로 보복을 허용하는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단적인 예로 부모를 구타한 아들의 손목도 잘려야 했고, 사람을 죽인 자는 당연히 사형에 처했다. 1901년 프랑스 탐험대가 페르시아의 고도 수사에서 발견한 이 법전은 한동안, 우르-남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성문법으로 사람들의 상식 리스트를 채웠다.
복수는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복수의 양태는 원시적인 야생의 상태를 벗어난 인간 사회에서 유일하게 증폭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된 성문법에서 기술한 복수와 유사한 '동해보복'이라는 형 집행의 원칙은 엄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견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원초적인 복수의 본능에 기댄다기보다, 오히려 그 본능적 원시성을 제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수렵과 유목의 긴 유랑의 세월을 마치고, 비옥한 토지와 농사 기법의 발달로 사람들은 얼굴 붉히는 일이 있어도 거주지역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 부대끼며 살게 되었다. 원시적 노매드의 본능에서 공동체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동물적이고 감정적인 보복의 연쇄작용을 야기하고 그 결과도 매우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다. 손해를 손해로 갚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것에서 시작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누구 하나가 죽어 사라지거나 둘 다 공멸할 수밖에 없는 극단을 치닫는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속적인 안위를 위해 지배계급은 '납득이 가는 중재'의 노력을 하였을 것이고, 수형자를 가둘 감옥도 없고, 벌금을 징수할 화폐경제도 태동하지 않았으니, 중재자가 제어할 수 있는 '동해보복'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함무라비 법전'에 인용된 가장 유명한 탈리오의 법칙에는 숨겨진 그 시대의 배경이 있다. '동해보복'으로 형을 받는 사람들은 권력이나 재력이 없는 일반 하층 서민들뿐이었다. 소위 기득권이라는 고위층은 손해에 대한 보상과 속죄의 급부를 경제적 배상으로 대신했다. 결국 동해보복으로 나의 손해와 피해를 가해자에 동일하게 가하는 것은 어찌 보면 통치자들의 공포 통치행위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득권은 그 손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 보상하면 그만이지만, 줄 것이 없는 하층 서민들에게는 자신의 손모가지를 걸어야 하니, 범죄에 대한 기회적 비용은 지위고하에 따라 철저하게 불평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흔한 말은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복수'의 행위를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해결의 구실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동해보복’은 법과 규제라는 국가나 사회 권력이 해야 할 일을 그저 힘없고 배경 없는 이들이 스스로 자력 구제하라는 또 다른 계급의 폭력이 될 수 있다. 특히 나의 단정과 확신이 단지 나만의 감정과 생각의 끝에서 낳은 결과라면 더욱 그러하다. 증오는 그저 또 다른 증오를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 글로리>의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성찰과 사유는 아쉽다. 학교 폭력을 전면으로 내 세워 마케팅하지만, 결론적으로 학교 폭력의 이야기는 사라졌다. 전형적인 복수의 플롯에서 가장 자극적인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복수의 행위가 미치는 여러 가지 파장의 의미를 무시한다. 그저 ‘통쾌함’만 주면 되니까.
2014년 2월 18일. 전남 순천의 K고등학교 2학년이던 송 군은 지각했다는 이유로 담임교사로부터 체벌받았다. 체벌 중에 머리를 벽에 부딪치는 일이 발생했고, 같은 날 오후 다니던 태권도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졌다. 송 군은 뇌사상태 22일 만에 결국 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 공방이 지속되었다. 교사의 입장은 체벌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뇌사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아이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교사의 체벌이 직접 원인이라는 유가족의 입장이 맞서고 있었다.
사회의 관심은 순천경찰서의 수사와 전남도교육청의 감사에만 쏠려 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순천경찰서는 “교사의 체벌과 송 군의 의식불명이 인과관계가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의학적 소견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혼수상태로 되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 기사 본문 중 -
작은 소도시에서 한 학생이 담임교사로부터 체벌을 받은 날 저녁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22일 만에 사망하는 사건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당시 한동안 ‘순천 뇌사 고등학생’이라는 단어는 모든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1위가 되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은 현장에서 지인들이나 주변을 탐문하는 취재의 노력보다는 주로 인터넷을 뒤져 사건의 경위를 유추하고 네티즌들의 의견 공방을 찾아보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많은 사람은 체벌 교사의 폭력에 대해 비난을 하고 교사의 자질을 의심하면서 각종 청원의 움직임을 보였다. 수개월 경찰 수사와 교육청 감사가 늘어지던 중 다음 해 2015년 5월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송 군의 동생이 학교 복도에 갑자기 쓰러져 뇌사 판정을 받았다. 이 사고와 형의 사건 유관 관계는 더 이상 취재가 없어 파악하기 힘들다.
추후 기자가 취재 중 학교 학생들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평범한 한 사람의 교사였다는 것이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과 크게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 사건은 과정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크다. 학생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가장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공분은 커졌지만, 그것이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을 설명할 직접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신이 성장한 시대에 당연하게 여기는 체벌을 무감각하게 여긴 교사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크다. 이점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위한 근본 원인의 탐구에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윤된 폭력에 대한 타성을 살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은 모습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국가폭력과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뺄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학술 활동과 미디어, 출판의 조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있고, 그 폭력에 둔감한 대중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던 차에 매년 붉어지는 ‘학교 폭력’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물음을 던진다.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부터 ‘정의라고 여기는 것들도 폭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서로 다른 답을 낼 수 있는 다소 논쟁적인 물음까지 쏟아진다.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폭력의 정의’는 무엇이 될지, 그렇다면 그 ‘폭력의 반대말’은 무엇인지 끊임없는 의문들이 생각의 많은 면적을 자리 잡았다.
슬라보이 지제크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는 어려운 책이다. 부제가 ‘폭력에 대한 삐딱한 6가지 성찰’이라서 그런지 책도 비딱하게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폭력을 이해하려는 사유를 확장하기에 좋은 참고서다. 인내로 참아 낸다면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객관적인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관적으로 폭력이라고 지각할 때 바로 그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 슬라보이 지제크 <폭력이란 무엇인가> -
지제크가 분류한 폭력은 주관적, 객관적으로 양분된다. 이 중 객관적 폭력을 다시 상징적, 구조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관적 폭력은 폭력을 저지르는 행위자가 식별할 수 있다. ‘누구’, ‘어떤 놈’으로 명확하게 지적이 되고 그를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폭력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 그리고 정치, 사회, 경제적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을 이야기한다.
존 도커 같은 사회학자는 폭력이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 행동 고유의 특성’이라는 결론을 내었다. 개인 간의 살인이나 집단 간의 대량 학살은 인류사의 어느 시대나 발생했고 앞으로도 계속 재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일신 신앙이 주된 주류로 자리 잡은 현대 종교의 영향으로 이야기한다. ‘신의 뜻’으로 모든 폭력을 객관화하고 마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소수를 학대하고 학살하는 일은 고대 성경에서부터 지금의 현대 국지전까지 ‘명분’으로 포장되고 말았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도덕률은 흔한 구호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도, 그에 맞서 군비를 늘리는 바이든도, 그에 기승을 부려 핵무장을 주장하는 일본 보수 정치 세력들도 모두 그렇게 외친다. 폭력이 안 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사전 포석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쌍생아로 잉태하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폭력은 안 되고 폭력을 증오한다. 그래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응징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 응징의 방법은 당연하게도 다시 폭력이다.
미국을 흔히 ‘폭력의 역사 위의 나라’라고 비판한다. 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영화가 <투 다이 포>, <크래시>, <이스턴 프라미스> 등의 문제적 명작을 만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7)>다. 영화는 조용한 인디애나 시골 마을의 인심 좋은 식당 주인 톰(비고 모텐슨)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톰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된다.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던 일행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손님을 구하려다 톰은 그들을 무의식적인 전문가적인 폭력의 손길로 제압한다. 영웅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톰의 실체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 아들도 자신의 유전적 모습을 닮아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을 반복하게 되자. 결국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미국 건국의 상징인 필라델피아로 향해 그곳에 있던 자신의 ‘폭력의 기원’을 처단하기에 이른다. 역시나 끔찍한 폭력으로 폭력을 끊으려 한다. 이것이 ‘폭력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계속 사슬 모양으로 되풀이되면서 진행될 뿐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폭력에 관대할 때를 은연중에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복수’에 대한 이야기는 참 관대하다. 나 역시 그 주변인들과 한 가지다. 심지어 동일한 ‘학교 폭력’의 양상도 자기모순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한다. 한 부류가 어떤 부류를 가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에 분노하는 일은 당연하다. 가해한 부류의 사회적 배경과 경제적 지위가 그들의 폭력을 가중했고, 사후의 처리도 그 사회적인 불평등이 작용하는 것에 더욱 분노한다. 반면 늘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때리고 맞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저 ‘가정 폭력’으로 분리해서 바라보고, 내 일이 아니니 혀를 끌끌하고 만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폭력의 양상은 늘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있다.
내가 위치한 곳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로를 건너 정반대 편으로 건너가야 알 수 있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말’을 꼭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고되는 문헌을 읽고 그간의 영화, 드라마의 콘텐츠를 생각하다 보니 점점 어려움에 빠졌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대척점에는 권력이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말을 체득할 만큼 내 지적이고 학구적인 탐구력이 충만하지 않았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떠올리기도 하고, 어릴 적 성당에서 강조하던 평화라는 말도 찾아보았고, 지난 영화 리뷰와 비평에서 이야기한 용서라는 개념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폭력의 반대말이라고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자료를 읽고 글을 쓰다가 반대말을 찾게 되었다. 폭력의 반대말은 ‘폭력’이었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대중을 이해하면서도 우려스럽습니다. 혹자는 자기 생각과 판단이 개인의 범주를 떠나 '모두'의 판단이라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사건’의 모습은 단면을 잘라 오판하기 십상이 됩니다. 소수의 다른 의견이나, 다양한 판단에 대해 '사회적 비용'이 든다며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칼이 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엄청나게 잠재적인 폭력이 도사린 위험한 생각입니다. 특히 정보가 희박한 타인들 사이의 문제, 해외의 전쟁과 분란, 그리고 가십의 사건들.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의 것이 '정의'가 되곤 하니까요.
'정의'의 기준은 생각보다 사람마다 다채롭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세상 현상들에 대하여 '어쩔 수 없어'라고 자위적 자문자답하는 자기 모습에서 시시껄렁한 '복수'의 마음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구어 놓은 작은 결실을 기다리는 지금도 팔자와 신세에 대한 푸념은 아직 마음 구석 한가득하니까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의 시선과 말들이 혹 '복수'의 마음은 아니었는지 되새겨 봅니다. 또한 지금 권력을 부여잡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복수’는 아닌지 이따금 의문이 드는 요즘입니다.
-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박 스테파노, 본문 중 -
연초에 <더 글로리>의 전반부를 이야기하면서 사적 복수를 이야기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가 자행하게 되는데, 정의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채롭게 존재한다. 저마다의 정의를 똑같이 통일하려는 것을 우리는 ‘전체주의’나 ‘독재’라고 경계한다. 이처럼 우리가 존중하고 지키려는 자유 민주주의에서 정의의 모습은 저마다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권력’이다. 다수의 위임에 의한 정당한 권력이 정의를 규준하고 사적 복수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폭력의 대치점에 권력이 있다’는 말은 유효하다.
복수심은 지극히 ‘사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즉시 사회화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공공의 것이 되고 만다. 이럴 때 필요한 사회적인 단절의 도구는 ‘법과 규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 속 세계나 현실은 법과 규제의 테두리에서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복수는 매번 ‘개인의 것’으로 다시 돌아온다. 폭력의 반대말이 결국 폭력으로 돌아오듯이 말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인간은 가장 추악한 면을 드러내고,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개인의 복수건, 사회의 복수이건 간에 잔혹함 그대로 드러낸다. 그 이유는 관객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라보는 관객에게 불편함과 두려움을 던져 줄 뿐이다. 정서적으로 복수심에 공감하지만, 그 복수의 행위에 동의를 주저할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드라마는 추악하나 인간들은 악순환되는 복수의 고리를 끊는 것이 아닌 계속되는 사슬을 이어 나갈 뿐이다. 물론 관심을 받은 김에 그 추이를 이어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되풀이되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복수와 응징만 남았다.
앞선 복수 플롯의 상이함과 유사함을 떠나 복수가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함께 공감된다. 그러한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를 낳을 뿐이라고 말한다. 복수의 잔혹한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적어도 복수의 부질없음에 대해서는 각인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생활 속의 사소한 일들에 분노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가슴을 가졌다. 복수가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통 큰 용서나 구원은 심심한 이야기로 환영받지 못한다. 늘 당하기만 하는 일상에서 조곤 대는 것보다 확실하게 고함 한 번 쳐 주는 콘텐츠가 환영받는 모양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 복수만큼 쉬운 일도 없다. 그리고 그 복수가 당연하다 하더라도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닌 사회의 것이 되는 성숙한 생각이 필요한 때다.
<소년심판>을 보면서 영악한 청소년들의 범죄를 보고 손가락질하던 손이, <더 글로리>를 보고 힘없이 당하는 청소년들에게 연민을 느껴 꽉 쥔 주먹을 만다. 어떤 감정이 진짜 우리의 기준이 되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편에서 ‘학폭의 해결’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야구에는 160을 던지는 투수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그의 학폭을 그저 철없던 시절의 실수로 밀어낸다. 아버지의 법적 전문성과 법 권력을 업고 가해자가 된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그 피해자들은 또 다른 피해를 볼까 두려워 학업을 포기하는 세상이 되었다.
학교 폭력은 더 이상 ‘주관적 폭력’으로 인지해서는 안 된다. 어떤 누구의 ‘특정 범죄’로 이야기되어 선 안된다. 학폭은 ‘객관적 폭력’이다. 가장 흔하게 행하여지는 현실과 디지털 세상에서의 언어폭력은 상징적 폭력이 되어 온 사회에 만연하게 숨어들었다. 그리고 경제, 사회적인 위치에 따른 불평등으로 오는 피해는 이제 일상이 된 구조적 폭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학폭’을 이야기하려면 이런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지금 이곳에는 소수와 약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객관적인 폭력이 행사되고 있지는 않을까? 고의적 배제와 의도적 고립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 참조 및 인용 밑글:
> '폭력'의 반대말을 찾아서 - 순천팔마고등학교 교사, 전직 기자 고승효 님 에세이
>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 존 도커
> 폭력의 철학 - 사카이 다카시
> 폭력이란 무엇인가 - 슬라보예 지제크
>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 박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