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슬램덩크>는 왜 흥행에 성공했을까?
예전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걸 좋아라 하는 편이다. 특히 영화, 문학과 같은 콘텐츠, 텍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 볼수록 새롭다. '만화'에 대한 기억도 흘렸던 것 같다. 취학 전 내가 살던 집은 1층 작은 가게들이 늘어 선 건물의 옥탑 주택이었다. 그 집을 2층이라고 부르기 민망하게도 1층에는 떡볶이와 분식을 파는 가게와 만화가게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억지 서울행을 한 집은 고모, 삼촌들 까지 잠자리를 맡아 둔 그런 집이었다.
장손인 형과 달리 내 존재는 투명인간이었다. 당시 '일일학습'이라는 매일 배송되는 학습지는 두 살 터울 형의 흔적을 받아 보기 일쑤였다. 그런 내게 어느 누구도 한글 하나 자리 잡고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다. 북적대다 못해 작은 몸 히나 둘 곳 없기에 나는 종종 1층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분식집 이모는 밀가루 떡볶이 서너 가락을 내어 주기도 했고, 특히 만화방 할아버지는 나를 귀여워했다. 컴퍼스로 돌려놓은 것 같은 동그란 얼굴이 그 비결이 아니었나 싶기도.
만화방에서 주인 할아버지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만화책을 뒤적거렸다. 글씨를 알턱은 없지만 그림만으로 대충 알아먹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글이 눈에 익고 어느새 한글이라는 것을 깨치게 되었다. 만화방 할배의 중간중간 훈수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모친도 시간이 한참 지난 두에 "쟈는 만화로 글을 배운 아에요."라고 시인할 정도니 기억의 거품은 아닌 듯싶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글 선생은 '만화'였다.
그리고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대사를 치르고 나서는 내게 주는 보상으로 만화대여점으로 향했다. 긴 시험 주간 마지막 날은 2교시 정도 예체능 과목일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일찍 하교한 후 시간을 '시험방학'이라고도 했다. 그 시간에 만화를 펼쳐 들었다. <신의 아들>이나 <외인구단> 같은 수십 권의 장편을 친구 녀석이랑 주거니 받거니 돌려 읽었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 주시면 만화를 눈에서 떼지 않은 채 이어 읽었다. 공부를 그런 정성으로 하라는 모친들의 핀잔은 귓등을 스칠 뿐이었다.
이 만화에 대한 집착? 집중은 결국 책을 읽는 지구력을 주었다. 대학 전공 문학 고전을 3박 4일 쉬지 않고 읽을 체력을 그 시절에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에도 '시험 방학'이면 만화책을 들었다. 장르, 취향 관계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1990년에 발간했다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 덩크>였다. 31권의 전집이 나오기 전에 '소년챔프'를 통해 대원 이앤씨에서 독점 수입 연재하였다. 그 연재를 기다리는 간격이 싫어 전권이 나온 시절 배를 깔고 읽어 낸 기억이 새록 새록새록하다. 그 <슬램 덩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웬일일까.
애니메이션 <퍼스트 슬램덩크>가 올해 초 세간에 화제였다. 극장판으로 나온 이 작품이 향수를 일으켜 찾아든 중년은 물론 젊은 세대에게도 뜨겁게 이야기되고 있다. 지난 시절의 추억뿐 아니라 새로운 담론이 형성된다는, 즉 맥락이 형성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리메이크, 리덕션, 리부팅... 무엇이라 부르던 상관없이 원형의 큰 틀을 유지한 채 내러티브 포커스만 변화를 주어 또 다른 시각을 주었다는 호평들이 이어진다. 바로 '송태섭' 중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슬램 덩크>를 여러 번 보고, 작가의 스토리를 안다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바로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송태섭이니까.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 雄彦)는 일본 학원 스포츠의 전성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67년 생이니 소위 X세대의 전위 세대이고 일본의 경제 황금기에 청소년, 청년기를 보냈다. 초, 중학교 때에는 검도를 꾸준히 하였으나, 고등학교 진학 후 농구부에 들어간다. 친구 따라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농구 경기 특유의 끈적함의 미학에 매료되었다고도 후일담에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농구부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포지션은 가드를 맡았다고 한다. 누가 연상되지 않는가? 크지 않은 키의 포인트 가드. 이 농구부 활동에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농구 선수로 대학을 거거나 프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일진도 모른다. 결국 미대 진학도 생각하다가 금전적 이유로 근처 대학에 진학하고 열아홉에 처음 투고한 만화가 고교농구 이야기였다.
나리아이 다케히코(成合 雄彦)인 이노우에 다커히코는 21세에 '소년 점프"'편집장 눈에 들어 <시티 헌터>로 유명한 호조 츠카시의 문하생으로 지내다가 1989년 자신의 댄행본 <카에데 퍼플>을 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슬램덩크>를 연재하며 '1억 부 클럽 만화가'에 이름을 올렸다.
농구에 대한 애정, 그리고 좌절의 아쉬움을 농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당시 일본의 사회상(꿈이 없는, 쉽게 포기하는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품 성공 후 그는 2006년 '슬램덩크 스포츠 장학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장학회를 통해 프로 농구 선수를 목표로 하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미국의 프렙스쿨(예비학교)로의 유학을 지원했다.
이렇듯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페르소나는 송태섭이다. 1990년의 만화 본은 강백호 중심의 서태웅에 대한 여러 가지 열등감의 극복이라는 성장 드라마였다. 그때 작가는 24~25세의 젊은 청춘이었다. 스스로 부각되지 않는 키 작은 관찰자로서의 드러냄이 버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50이 되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시절 그렇게 싫었던 여드름마저 싱그러워 보인다는 것을.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아직 구순기가 지나지 않은 심적 성장기에 있어서 그의 이상향은 '서태웅'이었을 것이다. 처녀작 <카에데 퍼플>에서 서태웅(루카와 카에데)이 최초로 등장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질투와 시기가 만연한 아직은 미숙한 나이에 서태웅을 주인공으로 내 세우기도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빨간 머리의 강백호가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만화 <슬램덩크>는 스토리 텔링이 전형적인 '황금코드'다. 바로 '성장 드라마'가 그 중심에 있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강백호가 농구 선수로 거듭나는 것은 물론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북산고의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안경 선배, 소연의 성장기가 병행 진행된다. 그뿐 아니라 3류 팀 조롱을 받던 북산고도 팀으로서 성장곡선을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상대팀들도 자신들 만의 드라마투루키를 지니고 있다. 모두 '도전과 성장'이라는 담론을 다양한 이야기로 타성적인 상호 텍스트의 맥락을 만들어 낸다. <슬램덩크>라는 콘텐츠가 가지는 여기에 있다.
작품의 주제가 이야기하는 가치가 "유행에 둔감한 절대 값"을 내포하기에 30여 년 전의 청춘이나, 지금 2023년의 청춘이나 공감대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농구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탄탄함은 그 주제 이야기를 잘 버티어 준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진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슬램덩크 2>를 기대하게 했으나, 제법 긴 호흡 후에 내어 놓은 작품은 의외였다. 농구 이야기이나 사뭇 다른 이야기 <리얼>이 그것이다.
<리얼>은 개인적으로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품 중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슬램덩크>와 전혀 다른 농구만화이다. 경기에서 '슬램덩크'가 나오지 않는 휠체어 농구에 대한 이야기다. 오토바이 사고로 여학생 다리를 다치게 만들어 학교를 그만둔 녀석, 공부 우등생에 운동 천재였지만 훔친 자전거를 타다가 똥오줌도 못 가리는 녀석, 중학 육상 신기록까지 세웠지만 골육종으로 한쪽 다리를 잘라낸 녀석, <리얼>은 현실에서 달아나려 해도 발버둥 마저 힘겨운 이 세 사람의 농구 이야기다.
2001년부터 연재했는데 14권에서 15권 사이 6년의 공백이 있고, 1,500만 부만 팔린 덕에 한국에는 많이 회자되지 않았다. 장애인의 행동과 환경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에 놀라게 되고, 일본에서 장애인 소재의 만회나 이야기가 터부시 되는데도 연재를 감행한 것에 또 놀라게 되었다. 자신의 유명세로 더 상업적인 접근도 가능했을 텐데, 그는 자신의 유명세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사회의 부분을 제대로 알리는 데에 사용했다. 흔한 '감동 포르노'의 공식이 아닌 담담한 관찰자로서의 조응을 준다. 휠체어도 제대로 못 타던 주인공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사실감 있게 보여 준다.
이 '사실적 묘사' 때문에 논란의 가운데에도 섰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장점이자 매력이 이 '그림체'에 있는데, 사실적인 묘사에 중심을 두지만 대상의 포인트를 극화 부각한 화풍을 지닌다. 그러나 이 것이 '트레이싱 논란'을 야기하게 되었고 대부분 사실로 인정된다. 트레이싱이란 '투사'라는 말로 원본 그림 위에 새 종이를 대고 선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작업을 말한다. 예전 습자지를 대고 따라 그리기가 이에 해당한다. 최근 디지털 환경에서는 원본의 투명도를 높이고 그 위에 새 레이어를 덮어씌워 그리는 식이다. 모작이나 모방과는 다르다.
일본 만화계에서도 트레이싱이 사건화 되기도 하는데, 일본의 독자와 평단의 반응은 밋밋한 편이다. 이유는 트레이싱 폭로가 다시 저작권 인용 문제로 고소가 고소를 나아, 작가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곤 했고, 이제는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NBA 사무국에서도 별반응이 아직까지는 없다. 이유는 <슬램덩크>가 NBA의 동아시아 붐에 일조하기도 했고, 미국에서 이 만화가 그다지 유행하지 않아서다.
그러나, NFT 같은 디지털 지적 재산권이 보강되는 국면에서 새로운 이슈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그리고, 한국의 웹툰의 경우 트레이싱이 단순 배경이나 구도가 아닌 경우 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지금의 기준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트레이싱은 그의 <슬램덩크>의 명성에 흠이 되는 일은 틀림없다. 비윤리적인 일이 되기에 그러하다. 특히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결과물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양심의 문제이니까.
자신의 트위터에 '자위대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죽인 사람보다 살린 사람의 수가 많은 군대다. 이것은 긍지다'라는 트윗을 리트윗 한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 인터넷상에서 우익 논란이 일어났었다. 사실상 한국이 가장 큰 해외시장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타격이 될만했지만, 작금의 <퍼스트 슬램덩크>는 과거를 잊어버린 듯 화제가 특히 젊은 세대에게 열풍이다. 이 지점도 아이러니하지만 지금 세대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만화컷 질주나 강조 기법으로 '썬버스트'를 자주 애용하기에 욱일기 논란도 있었으나 이는 좀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트위터 팔로우 리스트를 보면 일본과 미국의 우파, 대안 우파 성향 정치인, 논객, 뉴스 렉카가 많다. 일본 내에서도 이런 이율﹕ 우익 논란이 있다. 단순히 특정 정치인을 지지한다 그 정도가 아니라 넷 우익이 즐겨보는 저질, 음모론 수준의 트위터도 팔로우, 구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 안 알려진 큰 흠결이긴 싶다.
요즘 콘텐츠는 '회상'이 대세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듯하다. 정지우 평론가님의 더 글로리, 재벌집 막내아들, 뉴진스, 그리고 글쓰기에서 언급되었듯이, <더 글로리>, <재벌집 막내아들>, 그리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시간의 중심은 과거에 있다. 지난 시간 속의 폭력에 대한 복수, 사회의 통사적 시계를 돌려 성장 시대를 회고하고, 향수와 추억을 살리는 감각의 활성화가 대세인 시대다.
인간은, 특히 나이 든 인간은 왜 지나간 기억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일까? 생각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르지 않는다. 지금 애써 막아 내려는 기억들이 시간이 흘러 희미해지고, 어쩌면 훗날 억지로 꺼내어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하기 힘든 기억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잊을 수도 없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는 것,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 이것을 망각할까 두려워서가 아닐까. 다른 세대와 시간을 산 존재들을 과거에 가두려는 상술 같은 것은 끼어들 새도 없는 "망각의 두려움".
IT에서 이야기하는 컴퓨팅은 인간의 인지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 그것들을 처리하고 연산하고 산출하는 프로세스와 보관방법이 인간의 뇌구조, 활동과 유사하다. 컴퓨팅에서 데이터의 보관은 잘게 쪼개어 저장소에 담아 놓는다. 그것이 디스크가 되던지 다른 저장장치가 되던지 깊숙이 담아 놓게 된다. 평소에는 그 데이터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데이터가 필요한 순간에 호출하여 재생, 복원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문제가 발생한다. 데이터가 너무 깊숙이 있어 호출시간이 지연되거나, 혹은 어디에 보관되었는지 파악하기 힘들어 존재는 하지만 망실한 것이나 다름없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컴퓨팅에서 '메모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자주 꺼내 쓰는 데이터나 중요한 데이터를 깊숙한 저장소가 아닌 입출력 공간과 가까운 곳- 메모리라는 공간에 따로 보관하는 것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 데이터를 불러올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그 메모리의 공간이 생각보다 크지 않고 쉽게 망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매일 습관처럼 하는 생각들은 부러 하지 않아도 금방 기억으로 재생된다. 하지만, 꺼내 보고 싶지 않거나 애써 밀어낸 기억들은 불러오기가 쉽지 않다. 지금 아픈 생각들, 제어할 수 없이 공격하는 기억들을 지우고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그 기억들을 호출하고 싶을 때 할 수 없다면 더 답답하지 않을까. 저 깊은 곳 저장소에 넣어 둘지, 가까운 메모리에 담아 돌진 선택의 몫이고, 더 나아가 그 기억들을 영구삭제할지도 선택의 몫이지만 말이다.
망각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마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중-
잃어버린 기억을 재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기록이 남아 있으면 유용하기도 하다. 사진이 되었든 편지가 되었든 일기가 되었든, 하다 못해 함께 나눈 채팅이 되었든 SNS답글이 되었든 그 기록들은 당장은 보기 싫어도 훗날 유용하다.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고 정확하니까.
어쩌면 <슬램덩크>라는 옛날의 콘텐츠가 내게는 그런 기록의 파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사실이었고, 지금도 그 마음의 본질은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화된 이별 후에 찾아드는 추억과 기억들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애써 밀어내지 않기로 하는 이유도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기억이 나면 기억이 나는 대로 생각이 떠올려지면 떠 올려지는 대로 하기로 하는 것. 언젠가는 그마저도 희미해질 것이고 그 희미해짐이 아쉬울 테니까 말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런 의미에서 작가와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 시절의 낡은 만화방의 기운, 너덜 해진 돌려 읽던 만화책의 냄새, 허벅지 벅벅 긁어 대며 껄껄 웃어젖히던 친구의 웃음, 그리고 그 속의 나를 잠시라도 떠 올리는 일이 된다.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그 기억을 되살리며 고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송태섭이에요. 그 작고 존재감 약한, 그러나 그 송태섭이 참 그리워요."라고 말이다.
옛날의 콘텐츠를 레트로라 하든, 복고라 하든, 주억 팔이라 하든 크게 다가오질 않는다. 뭘 그리 상술로 내 아들들의 시간을 내 과거에 두고 싶은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그 오해는 당장 풀어 납득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가두어 두는 사람 없는데 모여드는 것을 갇힌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지나간 시간의 콘텐츠를 나는 '기억'이라 부른다. 그 기억은 동일한 시살이나 꺼내어 볼 때마다 빛깔이 바뀐다는 것은 50살 정도 되니 알 것 같기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