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어른이 필요하다
설날은 장사치의 분기 점과 같은 날이다. 직전까지 '설대목'이라는 말에 걸맞은 연중 매출의 정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 추이는 설날 당일을 기점으로 뚝 끊겨 버린다. 연휴가 이어지지만 일상에 기댄 장사들인 밥집이나 반찬 가게, 시장통은 아얘 문을 닫아 버리거나 사실상 개점휴업의 상태를 유지하기 십상이다.
방송, 공연, 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설 연휴에는 종일 방송이 시작되면서 '특선영화'들이 이어지고, 파일럿 프로그램의 반응 간을 보는 편성이 대부분이다. 그런 설날 편성 중에 뜻깊은 다큐멘터리 하나를 마주 했다. 경남 MBC가 제작한 인물 다큐를 MBC가 설 연휴 특별 편성한 것이다. 그 다큐가 <어른 김장하>다. 전국적으로 전파되었으면 싶은 다큐가 넷플릭스의 플랫폼을 타고 잔잔하지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다. 전격으로 11월 15일 뒤늦은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경남 진주에 있는 진주고등학교는 지방 명문고로 유명하였다. 예전부터 서울대 등 명문대학 진학률이 높았고, 정계, 법조, 행정, 그리고 과학, 의학, 이학 부문의 석학과 전문가를 대거 배출하였다. 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반 당시에도 진주 출신들을 어렵지 않게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에는 그저 고장의 학구적 풍토라 생각했다. 상경하는 인적 자원들이 자신의 고장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는 기대와 농경에서 산업으로의 개발 사회가 되면서 막연하게 서울에 가야 출세한다는 생각이 큰 몫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큐 <어른 김장하>를 보며 다른 이유를 찾게 되었다.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다고 한다. 쑥떡과 푸성귀로 끼니를 때우던 시골의 가난으로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사천의 한약방에 취업했다. 이것이 선생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이 되었다. 틈틈이 공부해 1962년 19세에 당시 최연소로 한약종사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해방 이후 첫 번째 면허여서 응시 자격이 "중졸 이상, 3년 이상의 한약종사자"로만 명시되어, 미성년자인 김 선생의 합격은 1년 보류 후 성인이 되어서야 면허가 나왔다. 바로 사천 용현면에 한약방을 열었고, 1973년 진주 석거리로, 다시 1977년 현재 남성당 한약방(폐업 중단)이 위치한 진주시 동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약방은 엄청나게 잘 되었다. 진주, 사천뿐 이니라 경남권, 전국에서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가격"이라고 본인이 밝혔다. 당시 한약은 재료원가 보다 훨씬 비싼 "기술료(지금의 공임)"가 붙게 되는데 이 수가를 조정하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약이라는 것이 일반 음식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 "효능"이 좋았기에 사람들이 찾아들고 재방문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아, 그의 상인으로서의 야이심과 의료인으로서의 재능이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하는 50년에 가까운 기간 진주시민들의 든든한 숨은 "뒷배"가 되었다. 10여 년 간 옛 진주신문(700인의 시민 주주 언론)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언론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왔다. 진주문화연구소,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진주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도 힘썼다. 두 단체는 진주가을문예를 27년 간 운영하며 지역작가를 발굴했는데, 시와 소설 분야 선정 지원금이 500만 원, 1000만 원으로 적지 않은 규모였다.
1992년에는 '형평운동 70주년'을 기념해 형평운동기념사업회 결성했다. '형평운동'이란 일제강점기, 개화기에 천민 신분이었던 '백정'의 신분 철폐 운동으로, 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한국의 대표적인 '차별 반대 운동'이었다. 김장하 선생은 이 단체의 사업을 주도해 2004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1984년 학교법인 남성학숙(학원재단)을 설립해 명신고등학교를 연 뒤, 1991년 국가에 헌납하였다. 당시 학교에 딸린 전답과 사업권까지 헌납하여 당시 금액으로 110억 원 가치의 국가 헌납이었다. 2021년 12월에는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면서 기금 34억 5000만 원 전액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하였다.
이 밖에도 사천 약방 시절부터 학생들의 장학금과 후원금을 수여하기도 했으나, 본인이 밝히지 않아 그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매년 새로운 2~30명의 장학생을 고교 1~2년, 대학 4년, 대학원의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와 생활비, 용돈까지 지급한 것으로 보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다. 지방 극단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지원이 있었다. 진주의 문화 저변에 그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는 것이다.
장학 사업이나 문화 지원만 있던 것이 아니다. 김장하 선생은 시민운동에도 앞장섰다.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과 상임의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등을 맡아 진주와 지리산 지역의 생명 및 환경 보존 활동을 벌이며 후세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정폭력에 시달려 집밖으로 나온 여성들의 쉘터가 되는 "진주 내일을 여는 집"의 건립을 주도했다. 인터뷰와 언론 노출을 극도로 하지 않아 이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가 대승 불교의 큰 교리가 되었다.
김장하 선생은 이 처럼 많은 사회 환원과 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남들의 아프고 괴로운 일로 인해 번 돈이기 때문에 세상에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첫 공헌은 그의 나이 고작 23살 때였으며,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하고 이사장이 되며 본격작인 사회사업을 한 시기가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이다. 세월이 흐르며 "사회적 나이"라는 것이 더디 가지만 생각해 볼수록 부끄러운 일이다.
돈이라는 게 똥이랑 똑같다. 모아 두면 냄새만 풍길뿐이다. 그러나 밭에 흩어 뿌리면 거름이 되는 것이다. -김장하 선생 인터뷰 중-
이를 보는 사람들 중 몇몇은 "나도 돈 있으면 베풀고 살 수 있다"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장하 선생은 돈이 없을 때부터 사회로의 환원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그 덕인 몰라도 여러 사항들이 들어맞아 사업도 성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돈을 불리고 굴리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60년 동안 한약방만 해오신 분이고, 허름한 한약방 건물에 세든 집들은 30여 년째 같은 월세를 나다가 코로나 때에서야 변동이 있었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이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안되니 오히려 내려 주었다고 한다.
그 세입자 중 한 사람인 자전거 대리점 점주는 말한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대여섯 명이 있다면 좋은 세상이 되는데, 지금은 오직 한 사람만 있어서 불행한 세상이라는 것이라고. 빙하같이 큰 밑동을 물밑에 숨기고 있지만 너무나도 투명하여 그 속이 다 보이는 사람이 김장하 선생이라고 주위에서 말한다. 차 한번 가져본 적이 없고, 그의 한약방에는 80년대 걸어 놓은 에어컨이 달려있다. 30년이 넘은 다기를 계속 쓰는 이유를 묻자 선생은 답했다.
"깨지지 않데."
그가 세운 명신고등학교 입구에는 창설 정신인 "명덕신민(明德新民)"이라는 비석이 있다. 이는 사서오경의 <대학>에 나오는 말로 '참된 나를 찾아 세상을 밝히라'는 교육에 대한 대명제를 말한다. 일런 사상으로 전교조 탄압시절에도 그들을 이해한 재단 이사장이었다. 자신의 장학생이 시국사범으로 형집행을 받은 후 그를 찾아 "공부는 안 하고 데모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자네 같은 사람도 사회를 좋게 하는 한 축이고, 나는 그것에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유림의 반대에도 호주제 폐지 등 여성 인권 운동에 동참한 유일한 진주의 남성 유지였으며,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드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오랜 시간 후원한 사람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대통령 후보시절 만난 사람이라 아직도 "빨갱이"라고 협박 전화를 받곤 했다. 주위에서 시민후보로 진주시장 선거에 추대해도 거절했다. 정치가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 그 힘에 버티려면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가 1991년에 학교를 국가 헌납할 때도 전교조 찬동 세력이라는 오명도 있었고, 가족ㆍ권력ㆍ자본의 청탁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원칙에 모 국회의원이 이름만 거명한 사람을 고용 철회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그는 스스로 사회의 반골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차별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 여전히 슬프다고 전한다. 그래서 약방 문을 닫고서는 "장애인 차별 철폐"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뜻의 이유인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어른’은 그냥 다 큰 사람, 성인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어원을 살펴보면 ‘어른’의 뜻은 좀 더 한정된다. 중세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어른을 ‘얼운’으로 적었다고 한다. ‘얼운’은 동사 ‘얼우다’를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즉 ‘얼운’은 어간 ‘얼우’에 명사형 어미 ‘ㄴ’이 붙은 것이다.
그렇다면 ‘얼우다’는 무슨 뜻일까? 뜻밖의 해설이 나온다. 바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다’라는 뜻이다. ‘얼우다’는 이미 신라 시대 향가 서동요에서부터 등장한다. 이 ‘서동요’에서 나오는 노랫말 중 하나인 ‘얼운다’가 바로 사랑을 나누다, 성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비유적인 사고가 필요해 보인다. 그저 남녀상열지사가 가능한 생물학적 능력의 성숙도를 이야기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니까 말이다.
남녀가 사랑을 이루는 결과는 2세의 생산과 가정의 성립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만 성인이 됐다고 다 어른이 아니지 않은가. 생물학적,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이란 무엇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가정, 사회, 약속, 업무, 신의... 그 수많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의 총체일까.
김장하 선생의 경우 "복 받은 사람"이라 그런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의 행동에는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마음만 먹는다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김장하 선생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뜻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뜻을 행동으로 책임진 사람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어른이란 자신의 뜻을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 그런 어른들은 저마다의 우주를 가진다. 작던 크단 간에 자신의 우주를 가지고 그 우주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다.
"경험"이 구박받는 시대가 되었다. "~라떼"라고 조소받는 세상이다. 어떤 사람이 나이 든 나에 대한 비판으로 "협소하고 한정된 경험으로 가르치려 든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지적은 반은 맞았다. 내 태도의 문제가 있었다. 다소 급하고 공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반은 틀렸다. 경험치의 가치는 총론이 아니라 각론에서 나온다. 직접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고, 보장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이곳만 보더라도 그럴듯한 개념과 외국 석학의 따옴표로 경험한 적 없는 총론의 어설픈 따라 그리기만 내세우고 전문가 행세를 한다. 모두 어설픈 사유이고 거죽의 담론일 푼이다.
기업에서 프로젝트 수주를 따내는 경쟁 PT를 수백 차례 치르어 내었다. 성패를 떠나, 공통된 기억들도 제법 되는데, 그중 하나가 최종 의사결정자들의 마지막 질문이다. 우선 가격 경쟁력을 묻는다. "얼마"에 대한 직접적이고 날것의 질문을 던진다. 총론의 영역이다. 그리고 빠지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레퍼런스 있어요?". 해 본 적이 있는지 그 해 본 경험에서 얻고 느낀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라는 주문이다. 각론에 대한 질문이다.
다양한 관심사가 곧 전문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환경, 인권, 노동, 정치, 평등,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애호가와 관심가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들을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관심이 있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직접 행하여 얻은 것을 "경험"이라고 한다. 그 경험이 어른이 되는 우주를 만들어 준다. 김장하 산생은 모든 것에 직접 경험하여 자취를 남겼다. 그가 자신의 우주를 책임지는 방식인 갓이다.
아직 세상은 어른을 필요로 한다. 지식이나 지혜의 전수만이 그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세상은 그 어른을 "정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쓰레기 같은 이야기들로 자기 계발서라고 우기는 글 쪼가리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폄하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그런 책은 쓰레기다. 몇 년 안에 빌딩을 사게 해 주고, 단기간에 수십억을 만들어 준다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 어른의 이야기보다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다. 어른이 실종되고 있다.
"해봐서 아는데"라는 거드름은 거품이 된다. 하지만 "해 봐야 알게 되는 것"도 세상에는 가득하다. 나이 오십이 되니 어른이 그리워졌다. 설 연휴에 한창 선배인 교수직을 은퇴하신 옛 직장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다. 내 처지에 대한 걱정과 지속 가능한 버팀에 대한 덕담이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 지나가요. 너무 괴로워 마요. 다 지나갑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비책도 당장의 도움도 없었지만, 그분의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살아 봐서 아는데"라는 "~라떼"의 이야기가 힘이 된 것이다. 왜! 그분은 자신의 우주를 책임지고 있는 "어른"이시니까.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는 팍팍한 일상에 큰 선물이 되었다. 아직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시간이 남았다는 위안을 얻었다. 돈이 아니라 뜻을 키우고 행동하며 내 작은 우주를 책임지고 싶다. 그분의 표현대로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 오르며 이 깊은 산을 건너고 싶다. 신이 준 선물이자 벌이 "나이가 들어야 알게 되는 참된 뜻"이 아닐까 한다. 아직 어른이 필요 없다면 굳이 영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누군가 어른이 필요한 모두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