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 스테파노 Jun 29. 2024

'1979년 금당살인 사건'을 아시나요?

이름의 모든 것 #01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글쓰기를 할 때는 필명 같은 세례명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간 살아온 실명의 그늘이 짙고도 길게 드리워져 글쓰기에 주저하게 된 것이 큰 변명이 되었다. 여러 생각이 스며드는 요즘 내 이름 석자에 대해 되뇌어 보았다.


내 이름은 부친이 하루하루 버거운 일상 속에 출생신고 과태료에 쫓겨 부랴 부랴 동사무소로 향하던 육교 위에서 작명하였다. 무협지를 좋아하던 부친은 '영웅'의 '웅'자를 일찌감치 점찍어 놓고, 좋은 한자를 조합하셨다고 한다. 그 짧은 시건에 말이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철학'의 그 '철', 밝고 슬기로운 우두머리가 되라는 의미로 지으신 이름이었다. 슬기는 모르겠고 머리 둘레만큼은 '우두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케케묵은 가정사이긴 하지만 두 살 터울 손위 형의 경우, 작명 대가에게 거금을 들여 조부모께서 친히 장손의 이름을 받았지만, 경상도 보수적 집안의 둘째는 존재 미약이었기에 아주 '싼값', 바로 공짜로 지은 이름이었다. 태생부터 차별이었다. 형은 병원에서 출생하고 나는 집에서 산파 할머니가 받았다. 성년이 되도록 모친 간직한 제 배넷저고리 안에 있는 나의 탯줄은 털실이, 형의 것은 하얀 의료용 실이 묶여 있는 것이 나와 형의 출생 사이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어찌 되었든 내 이름은 자부심과 애정도 있지만, 불편함도 참 많은 이름이 되었다. 이름을 이야기하면 한 번에 알아듣기란 쉽지 않다. 격음이 있고, 외국인들이 힘들어하는 ~NG가 들어가 있으며, 석자 모두 강한 받침이 있다. 그래서 이름을 묻는 말에 대답할 때 버릇처럼 '박ㆍ철ㆍ웅! 이요'하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훈?', '철홍?', '철우?', '철분?', 그리고 '초롱?'까지 터널 속의 메아리처럼 정답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일단, 흔하지 않은 이름이니까. 그러다가 며칠을 울고 불구 개명해 달라고 모친에게 시위를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금당 살인사건' 아십니까?


1979년 6월 신문과 뉴스는 온통 희대의 살인 사건 보도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금당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다중 살인, 매장 은닉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일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동품 가게 '금당'의 주인 부부와 운전기사가 살인당하고 자신의 집 마당에 묻어 매장 은닉한 살인자의 사건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금당살인사건 당시 보도, 캅쳐=나무위키

당시 38세의 범인은 사업이 어려워 지자,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마련하려고 했다. 그때 길을 지나다 본 '금당'이라는 규모 있는 골동품상을 점찍게 되었다. 바로 범행에 들어가 주인을 납치하여 금품을 강요하지만, 당장 없고 가족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말에 그의 부인과 운전사에게 당시 500만 원을 들고 오게 유인했다. 그러나 부인이 도착했을 때는 남편은 이미 숨진 상태였고, 부인도 이내 범인의 손에 목 졸려 죽고, 운전기사 마저 대검에 찔려 사망하게 되었다. 사건은 이후 점입가경으로 흘렀다. 장롱 속에 유기한 시체를 발견한 범인의 가족들(남동생, 사실혼 관계 내연녀)에 의해, 그때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지만, 더 안전한 장소라 생각된 집 마당에 시체들을 은닉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곧 미궁으로 빠졌다. 지금과 같이 납치된 것 같은 피해자들의 동선을 파악할 길이 없었고, 경찰들은 골동품상이라는 특성에 꽂혀 주변 원한관계나 골동품 유통망 등을 파헤치기만 했고, 그 과정에서 불법과 탈루가 발견되어 별건 기소만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 사위가 기관원을 사칭한다'는 고발의 별건을 내사하다가 혹여나 하는 마음에 그 사위를 소환해 조사하다가 그냥 혹시나 해서 '금당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추궁하니, 범인이 이나 못 이기고 범행 전체를 자백하였다. 추후 범인의 앞마당에 새로 심은 조경수를 걷어내고 시체 3구를 발굴하게 되는 것이 뉴스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그 38세의 연극영화과를 중퇴한 중산층 가정의 장남이었고, 그의 이름은 '박철웅'이었다. 사건의 충격이나 여파만 봐도 결말의 예상은 어렵지 않겠지만, 박철웅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사건 발생 약 16개월 만인 80년 10월 대법원이 사형선고를 확정 지었으며, 1982년 7월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 여파는 8살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한 지 3개월 남짓된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꼬마 박철웅에게 까지 미쳤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국민학교 입학을 하면 왼쪽 가슴에 손바닥보다 큰 노란 이름표를 손수건 위에 달고 다녔다. 기억으로 1학기, 1학년 정도만 달고 다닌 관례가 있었는데, 오버로크(휘갑치기)로 수놓은 이름표는 '1학년 XX반 OO번 홍길동'이라고 저 멀리서도 인식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것이 사달이 난 이유였다. 고학년 장난꾸러기 형들부터, 동네 입 가벼운 아주머니들까지 '살인범', '금당 살인사건'이라 하며 히죽이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입학식/명찰, 사진=서울신문/ 지마켓



그래도 소중한  이름


그때 집안 어른들도 심각하게 개명을 고민했었다 나중에 전한다. 그러나  이름의 원작자인 부친이 반대했다. 부친은  탄생이 '복덩이'라고 생각했다. 조부의 도산으로 부랴 부랴 서울에 올라와 졸지에 20명이 넘는 대식구의 가장이  한량의 분투기는 힘겨웠다. 그때 입만 늘었다 하며  존재를 불편해하는 구성원도 있었지만,  탄생 이후 부친은 해외 파견 근로자로 정규직을 얻고, 각종 수당에 아파트 분양 0순위라는 특전으로 다시 집안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믿었다.  모두가 '이름' 기운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사건 이후 이름에 큰 불만이란 없었다. 종교 덕에 스테파노라는 '본명(세례명을 천주교에선 '본명'이라고 한다)'을 얻었고, 외국계 회사를 오래 다녀 CW라는 이니셜로 한동안 익숙하게 지냈다. 가끔 동명을 만나지만 아직 밀접히 지낸 사람은 없고, TV 드라마나 영화 속의 주인공은 부르기 힘든 제 이름을 쓰지 않아 한편 속 편했다. 물론 어쩌다 한 번씩 나오긴 했다. 드라마 <유리구두>의 소지섭의 극 중 이름이 '철웅'이었고, 영화 올드보이의 감금시설 관리인 오달수의 이름이 '박철웅'이었다.


돌이켜 보니 이름 하나에도 여러 사연과 기억들이 스며든다. 부친이 지켜 준 이 이름에 걸맞게 살아왔나 자책이 들기도 한다. 그 이름을 제대로 지켜 주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맘이 무겁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 중 이불을 천장 끝까지 걷어 차는 실수와 잘못, 실패와 비루함 때문에 이름을 부끄럽게 한 것만 같다. 한때 까칠한 사회생활이 있었고, 전투적인 키보드 워리어였으며, 신념만 가득한 선동가였기에 이름에 많은 상처가 났다. 그런 중에 이곳에서 또 다른 이름을 다시 앞장 세워 본다. 진심으로 응원 주는 글 친구들의 덕분이다. 내 필명 박 스테파노는 좀 더 괜찮은 이름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쉽지 않은 투병 속에 이야기를 뚜벅뚜벅 쓰고 싶다.

이름이 뭐야, 캡쳐=슬램덩크

이전 10화 니콜라이 베른시테인의 '대장장이 실험'을 아시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