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모든 것 #02 | 이름은 기호이자 존재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
움베르토 에코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은 숀 코넬리 주연의 영화로 먼저 만났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뒤, 찾아든 두툼하다 못해 분권 된 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놈의 [서문]에서 같은 줄을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미 판독 불가한 어리석은 비디오 키즈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다 몇 년 뒤 <젊은 작가의 고백>, <창작 노트>에서 '서문을 어렵게 쓴 이유'에 대해 읽게 되었다.
'험한 산을 오르는데 어찌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가려하는가, 각오와 끈기를 넘어야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욕지거리 나오는 고백 아닌 고백이었다. 그때의 욕지거리는 읽는 힘과 버릇을 주기는 했지만.
드라마 시리즈로도 리메이크되어 공개된 이 작품은 기호학자, 언어학자 이자 철학도였던 저자의 풍성한 역사적 고찰과 신학과 종교, 상징과 기호의 탐구를 보여 준 충격 깊은 역작이다. 그럼에도 불구 아직도 아리송한 것이 있다. 바로 제목 <장미의 이름(Il dome della rosa, The Name of The Rose)의 의미다. 소설과 영화 모두, 작품 어디에도 '장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마지막 에필로그(상단 인용)에서 언급한 알듯 모를 듯한 선문답 같은 한 줄이 전부다.
작가에게도 독자들이 관련한 항의성 질문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도무지 모르겠는데 해설 좀 바란다고 말이다. 집필 당시의 제목은 <수도원의 범죄 사건>인데, 사건에 집중하는 추리에만 집중할 것 같아서 화자인 수습 수사의 이름을 넣어 <멜크의 아드소>라고 다시 결정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결국 당시 이탈리아의 출판계가 고유 명사의 제목을 기피하여 다시 '장미'의 이름을 넣었다고는 밝힌 바가 있다. 그러나, '장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증은 더 커지게 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뒤로 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이 책의 말미에 실린 6 보격 시구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것이 어째서 책의 제목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비로소 대답하거니와,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해석에 대한 결론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해석하고 들어가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
'독자의 숙제로 남긴다'라니. 역시 움베르토 에코 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름의 해석들이 풍성하게 덧붙여지고 있다. '장미'라는 것이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신앙의 의미로 쓰이기에, 종교적 신앙과 인간적 심미의 고찰이라는 해석부터, Rosa가 아니라 Roma가 잘못 읽힌 것이라는 설명도 뒤따른다. 에코도 이 설명에 동조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14세기의 교회의 힘이 약해지던 격랑의 시기에 교권과 교리를 수호하려는 봉쇄 수도원의 무리수에 대한 것이라는 풀이가 그럴듯하다.
나의 개인적인 해석은 좀 다르게 바라본다. <장미의 이름>은 거꾸로 해석하자면, 제목의 단초가 된 <이름밖에 남지 않은 장미>로 해석된다. 과거의 권세와 영광이 다 스러져 가더라도 결국 '이름'은 남게 된다는 것이다. 씁쓸할 수도, 다행일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내일의 지금에 대한 평가라 할까.
'내 것이지만 남들이 많이 쓰는 것은?'
어릴 적 수수께끼 단골 질문이다. 답은 '이름'이다. 이름은 다른 무엇과 구분하여 지칭하는 순간 탄생하는 마법의 기호다.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각종 식물과 동물, 생활 속의 사물과 산과 강 같은 자연과 생각의 틀이 되는 개렴과 정의, 이 모든 것을 특별하고 오롯하게 구분하는 순간 이름이 된다.
이름의 기원, 유래, 역사를 찾아보다가 부질없음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고를 하고 꿈을 꾸는 순간부터 이름이 탄생했을 테니까. 굳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하늘의 신이 붙여 준 아담과 하와가 이름의 처음이라 한들, 태곳적 곰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이내 환태하여 만든 아이의 이름이 시조라고 이야기하여도, 사람이 스스로 사람으로 인지하는 순간 이름도 탄생하였을 것이다.
'일컫다'는 단어에서 '이르다'라는 어형에서 파생된 의미라는 수업시간에 나올 뻔 한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으려 한다.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 그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이름을 남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서 나오는 '장미'가 누구의 이름인지, 무엇의 명칭인지, 어떤 것의 상징인지 굳이 알으려 들지 않아도, 우리에게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이름은 남았으니까.
아까운 젊음이 사그라져 간 10.29 참사가 난 지 많은 날이 지났다. 위패도 없는 분향소와 영정도 없는 조문에 비판이 이었고, 기어이 '명단 공개 논란'이라는 주변인들의 말싸움이 본질을 가리고 있었다.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 채 말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1568311?sid=102
명단 공개와 관련해서도 “정부는 공개를 희망하는 유가족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라 공개가 가능한 희생자의 이름을 온전한 기억과 추모를 위해 공개해야 한다”며 “나아가 공허하고 혁신적인 애도가 아니라 참사의 재발방지와 사회적 추모를 위한 정부의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유가족들과 함의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기억과 추모를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라고 촉구했다. -기사 본문 중-
유족들이 정리를 하며 '이름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한다. SNS에서도 잘난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들고, 법과 도리를 들먹이며 반대와 찬성의 공방을 벌이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그 이름들이 유족과 남은 이들에게 남긴 '의미'가 그것이다. 그래서, 유족들은 처음부터 위패 하나 없는 분향소의 결정도 누구 하나에게 물은 바 없는데, 소중한 가족의 이름을 기억할 권리는 달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단 공개 반대 논리에 '부끄러운 죽음'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허언이 그들에게 비수가 되었을지도.
‘하늘은 녹(祿) 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이들은 이름을 가져 마땅하다. 일단 존재를 하는 순간 들에 핀 하루살이 꽃 한 송이도 이름을 달고 시들어 간다. 물론 이름이 없는 풀들도 있다. 발판에 있는 이름 없는 풀들을 잡초라고 부른다. 주된 재료가 되는 것들이 이름이 되는 요리와 달리 그렇고 그런 한 끼니 때움은 이름이 없다. 그냥 밥상, 그냥 국밥, 그냥 매운탕 같이 말이다. 이렇듯 이름은 누군가에게 '의미'와 '의의'를 줄 때 꼴을 갖춘다.
소설 <장미의 이름>을 한 줄로 추리자면, '추호의 의심 없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풍자다. '의심 없는 믿음은 악마'라고 에코는 이야기한다. 스스로의 아집과 인지의 부조리에 갇혀 확증 편향에 빠진 모두에게 주는 고전 같은 경고다. 자신이 믿는 것으로 타인의 소중한 이름을 가리거나 밟아 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작품을 스스로 짜깁기라고 이야기하며, 방대한 역사 사실과 철학의 이야기들은 '이름'때문에 집필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친한 편집자가 소설을 권하자 거절을 거듭하다가 책상 속에 넣어둔 '중세 수도사들의 이름'의 메모를 발견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운명 같은 일이라고 할까.
고대에 로마인들은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고 했다. 이름이 운명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동반하는 고유한 식별자임에 틀림없다. 내 것이지만 남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