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그리고 이진숙
일본의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의결되었다. '강제 동원'이라는 흑역사는 아주 사소한 일로 치부 인정해 준 피해 당사자 국가인 한국 정부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기어이 해내었다. 이를 정치 민감하게 해석하는 이들이 가득하다. 특히, 이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친일의 프레임'이라 항변하는 쪽의 이야기는 턱없이 근거 미약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근거 미약한 주장은 기득의 논리가 되고 말았다. 이상할 것도 없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된 이진숙의 답변만 보아도 짐작 가능한 일이다. 위안부와 강제 동원, 역사 교과서의 문제에 대해 "논쟁적 이슈"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들에게 과거사의 문제는 늘 '해법'의 영역에 머물 뿐이다. '정석'의 범주에서 과거사를 마주할 용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전범(戰犯)은 전쟁 범죄(war crime) 또는 전쟁 범죄자(war criminal)의 줄임말이다. 전범이라는 개념은 국제형사법적 공식 용어다. 법 원칙에 따라 국내법에 준하게 준칙 된다. 죄형법정주의, 무죄추정의 원칙, 그리고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된다. 소위 말하는 범죄 구성의 요건은 국제규범에 준한 전쟁범죄로 인정되는 행위를 저질러야 한다. 그리고 범죄의 확정은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재판을 통해 죄가 확정되어야 전범이라는 공식적인 지칭이 가능하다. 예를 들자면 2차 세계전쟁 종전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 행위가 밝혀진 개인이나 기업, 단체에 대해서만 ‘전범’이라는 낙인이 허용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범이라는 의미가 매우 광의적이고 확장적이다. 대규모 근대적 전쟁범죄를 일으킨 국가를 통칭한다. 그래서 수사적 의미가 더 크게 작용한다. 전범국, 욱일기나 하켄크로이츠 등의 전범기, 전쟁에 부역하여 부를 창출한 기업인 전범 기업이라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서’의 영역이다. 일반인들의 빈번하게 사용하는 수사적 단어인 ‘전범~’은 법적 용례나 학술 용어로 인정받은 바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전후 80년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단어의 상용뿐 아니라 아직 해소되지 않은 배상, 보상, 사과, 용서의 문제가 대두되고 갈등하는 주된 이유가 된다.
지난 2023년 3월 6일 정부의 ‘강제징용배상 해법안’에 대한 논의는 다분하다. 시간이 쌓여 감정적인 대응보다 실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부쩍 늘었다. 그 말이 온전히 잘못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한국이 전략적으로 연대해야 할 대상이 일본이라 생각한다. 다만, 매듭을 지어야 할 것과 풀어야 할 것을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건설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희망할 뿐이다. 모든 것이 국민 다수, 되도록 전체에 대한 이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국익’이라는 대차대조표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의 이익의 총합이 ‘국익’이 된다. 국민 각자의 손해 득실의 합계는 물론, 영토에 비유되는 각종 지정학적 이익과 손해, 그리고 주권에 해당하는 실질적 경제적, 외교적 이익이 얼마나 수반되는지 따져 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더해 ‘국민 정서’라는 부분을 정무적인 계산기로 셈하여 보는 일은 유의미하다. 지금 확실한 것은 정부의 해결안 발표로 ‘정무적 편익’은 한참 마이너스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통합 편익’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정부와 지지 세력들은 ‘국익’, 특히 ‘경제적 편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도 플러스 요인으로 당장 실현되기에는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 어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눈 바 있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의 결정이 ‘정무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결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윤 대통령의 뿌리 깊은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자신은 통치하지,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스타일이 묻어난다. 그러나 모든 통치의 행위의 가운데는 올바른 정치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상식은 잊은 것 아닐까. 정치의 유불리와 입장으로 단어의 해석, 법 자구의 판례, 그리고 사전적 의미에 대한 견해가 논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노력 이전에 ‘상식’에 기대어 전체를 가늠하여 보기를 권하고 싶다. 반면에 이번 결정에 대해서 ‘국치’라는 말로 두리뭉실 비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실제적 이득이고 손해인지 명확하게 따지고 공론화하는 성의가 필요한 때이다. 그저 정서적으로 ‘나빠요’는 그저 정신 승리의 자기만족일 뿐이니까.
- <국익에 대하여> 본문 중 -
정부의 결정으로 당장 우리 국민들이 보는 손해는 무엇이 될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피해 당사자에 대한 보상의 적절성을 들 수 있다. 미지급된 청구금은 물론 법정 이자까지 국가가 지정한 재단을 통해 배, 보상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억만금을 주어도 완전한 보상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시간의 이자’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기억과 처지에 놓인 직접 당사자들의 상처는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상처를 더욱 두텁게 만들어 어떤 손길로도 어루만지기 힘들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진정한 사과’를 거듭 요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피해자의 이후 세대인 우리에게는 어떤 손익의 계산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괘씸하고 나쁜 놈들’이라는 정서적 황당함이 가장 큰 손해로 다가온다. 손해 감각이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인 ‘욕구’에서 출발하기에 당연하고 잘못된 생각이 아니다. 구체적 거증을 들 수는 없지만 과거의 일들로 인해 지난 80년 동안 힘든 과거의 반향이 매우 치열하고 숨쉬기 어려운 경쟁의 세상을 만들었다. 이에 대한 근원적 책임을 묻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것이 그들을 ‘전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상대에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정부안에 대하여 ‘굴종’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딱히 ‘대안적 해결안’이라는 것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여 일본 정부의 정중한 사과와 전범 기업의 적절한 배, 보상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정서적 편익’은 다시 극적으로 호전되어 플러스 지표를 나타낼 수 있을까? 해법 안의 주어에 ‘일본’이 있지 않다고 하는 지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주 작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정부의 행위에 분노하고 혀를 끌끌하기만 하면 끝일까?
우리는 ‘전범 기업’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범에 대한 판단은 분쟁의 소지가 있지만 승자의 논리다. 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국들이 전범 재판을 주도하기 때문에 승전국들과 승전국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전범이 안 되는 불공정한 형평성이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의 전쟁은 그러한 모호성에서 ‘전범’이라는 이야기를 서로 피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걸프 전, 그리고 지금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사실상 승전하면 우크라이나가 전범국가가 된다는 논리가 되고, 이스라엘은 학살의 정황에도 서방 국가의 비호로 정의롭지 못한 이유다.
그런데도 명확하게 ‘범죄사실’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단죄와 마땅한 보상이 필요하다. 집단살해죄(국제형사범죄법 제8조-학살, 제노사이드, 포로 학살), 인도에 반한 죄(제9조-강제노동, 고문, 전시 강간),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제10조-인체실험, 확인 사살, 소년병, 식민지), 제네바 협약 위반(제12조), 금지된 방법에 의한 전쟁범죄(제13조-배신행위) 같은 범죄사실은 명백한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우리의 대법원이 인정한 일본의 전범 기업들은 어떤 일을 벌인 것일까?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한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사늑약,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동남아 국가 복속 등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아전인수격의 당위를 내세워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공식적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의 숫자는 무려 650만여 명에 달한다. 지금도 극우 정파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들은 반성 없이 극우적 정치 성향을 내보이며 역사 왜곡 등에 앞장서고 있다. 일제는 1939년 7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기능공들을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제는 1944년 8월 기능공과 상관없이 조선인들의 강제노역을 합법화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은 미쓰비시다. 57만 명의 종사자를 400여 개의 계열사에서 거느리고 있다. 미쓰비시는 1870년 반란 제압에 일등 공신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정부로부터 알짜배기 나가사키 조선소를 할당받으며 설립되었다. 태생부터가 정경이 유착된 모양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군수 물품 생산의 주축기지가 되었다. ‘제로센’이라는 유명한 전투기도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생산했다. 당대의 독일, 영국, 미국 전투기에 비해 우수한 성능을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유명한 ‘카미가제-자살 특공대’의 상징이 되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는 일본 해군의 자랑인 당대 최대 규모의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건조한 곳이다. 각종 군함과 어뢰 등 폭발물도 납품하였다.
영화 <군함도>에 나오는 전범 기업이 미쓰비시다. 미쓰비시는 나가사키 인근에 작은 섬을 사들여 해저 탄광을 개발한다. 지하 1km가 넘는 곳에 탄맥이 있어 좁고 긴 탄로를 개척해야 했다. 좁은 데에다가 공기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온도가 45℃를 넘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다. 거기에 유독가스는 덤이었다. 미쓰비시는 이곳에 조선인들을 대거 징용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 수많은 조선인이 영문도 모르거나 거짓 약속에 속아서 이곳에 끌려와 고통을 받으며 강제 노역을 하다 죽어갔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5년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당하고 말았다.
미쓰비시는 중일전쟁에서 끌려온 중국 징용 노동자들에게 2015년에 공식으로 사과했지만, 한국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이유는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징용은 합법’이라는 말이다. 사실 ‘징용’이라는 말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의미’하기에 ‘강제’라는 말이 꼭 수식되어야 하는 말이다. 징용이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과하지 않았다. 미쓰비시 계열은 니콘 카메라와 기린 맥주가 유명하다. 그리고 한국 현대차 소나타의 람다 엔진은 미쓰비시의 엔진을 카피한 것이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있는 재벌인 미쓰이 그룹도 전범 기업이다. 미쓰비시 때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계열사인 미쓰이 광산이 일본 최대인 미이케탄광을 운영하고 있었다. 석탄이 군수물자로 쓰이게 되면서 미쓰이 광산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해 노역시켰다. 기린 맥주만큼 유명한 삿포로 맥주가 미쓰이 그룹 계열사다. 일본의 세 번째 재벌 스미토모도 전범 기업이다. 일본, 조선, 태평양, 중국, 만주 등에 산재한 120여 곳 사업장에서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미쓰비시, 미쓰이처럼 스미토모도 계열회사로 아사히맥주를 거느렸다. 대한민국 정부 금융위원회가 지난 2016년 12월 일본 손해 보험사인 미쓰이스미토모의 국내 진출을 허가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파나소닉의 옛 사명은 마쓰시타 전기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설립한 이 회사는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노동시켰다. 파나소닉은 현재까지 일본 우파의 중요한 후원 기업이다. 우파 정치의 육성기관인 ‘마쓰시타 정경숙’이 파나소닉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한국의 일부 리더십 강연자들이 이런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경영의 신’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후지코시는 2017년 3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에게 1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바가 있다. 후지코시는 도야마 공장에 근로정신대를 만들어 조선의 10대 소녀들을 끌고 가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시키고도 임금은 물론 최소한의 연명할 식사도 지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손해 감각은 ‘두려움’의 다른 말이다. 내 것을 누군가 빼앗아 버리거나, 내 것이 망실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다. 그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나의 존재가 잊힐까 하는 마음이다. 과거사에 대한 ‘정서적 분노’는 그 두려움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지금 무언가 매듭짓지 못하면 영영 잊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이렇게 가해 당사자의 적극적인 사과나 반성의 언행이 없다면 결국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과 고통스러운 시간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정치적인 해결에 대해서는 각자의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목소리를 거듭 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일’이다.
종로에 있는 위안부를 추념하는 ‘소녀상’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수요집회는 얼마나 참여해 보았을까? 아니면 각종 지원과 후원에 간접 동참은 해 보았을까?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퍽퍽한 일상에 시간과 여유를 내기도 쉽지 않고 방법과 수단을 알아내기도 수월하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견해로 추천하는 일은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는 일이다. 관련된 도서, 영화, 연극, 뮤지컬, 음악을 적극 소비하고 여력이 된다면 작은 글쓰기로 기억하는 방법은 늘 유효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범’의 가해자들이 어떤 범죄적 행위를 하였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자료나 도서, 영상 자료를 찾아보는 일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2017년 영화 <군함도>가 그 실상에 접근한 영화였으나 개봉 전부터 여러 논란으로 의미가 크게 희석된 바가 있다. 반면 나치 독일에 대한 전범 기록은 매년 경신 중이다. 1994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킬링 필드>도 유명하지만, 중간에 숨어 있는 명작들도 참 많다. 특히 2009년 영화로 만들어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도 문학성 가득한 ‘전범 재판 영화’다. 문학과 예술의 영감을 주는 것은 물론 당시의 생생한 기억으로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콘텐츠들은 어떠할까?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화려한 모습은 자주 조명되고 있다. 최근의 영화들을 살펴보더라도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그리고 <영웅>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항쟁과 투쟁의 모습은 극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진짜 피해자들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위안부의 이야기를 다룬 <귀향>, <허스토리> 등의 작지만 강한 작품과 <아이 캔 스피크>같이 비유적인 함의의 작품들이 있지만, ‘대세의 콘텐츠’가 되지는 못했다. 최근은 독립영화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김복동>, <코코순이> 같은 작품들이 아는 사람만 찾아볼 정도이고, <유령>같이 역사적 시대정신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시대 배경을 패션으로 차용하는 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은 3월 1일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3.1 절’이었다. 이 3.1 절에 떠오르는 인물은 만세 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다. 3.1절은 유관순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19년 투옥된 수 1년간의 모진 고문 끝에 사망했다. 불과 18살에 생을 마감했다. 유관순이 태어난 지 120년, 생을 다한 지 100년이 지났고 해방 8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유관순에 대한 영화는 단 세 편이다. 그 이유가 3.1 운동은 ‘혁명적 운동’이라는 데에 있다. 혁명의 이야기는 권위주의적 시대에서는 참 불편한 이야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혁명의 기운을 쉽게 잊어 주길 바라는 기득 권력의 마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5144626
영화는 조선 독립에 대한 유관순의 내적 의지가 얼마나 강인했는지,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의지란 사실 얼마나 본래적이고 생래적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유관순이 18살에 죽었다는 사실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독재 정부에 항의하다 고문으로 사망한 학생들의 나이를 연상시킨다. 왜 젊은 영혼들(유관순이나 박종철이나)은 이리도 맹목적일 만큼 순수하고 강고한 것일까. 영화 속 대사처럼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죽음을 무릅쓰는가. 학생들이 갖는 불굴의 자유의지가 표출되고 오버랩될 수 있다는 점에서 1970년~1990년대 권위주의 시대 때는 유관순 영화가 의도적으로 기피됐던 것 아닐까. 물론 그보다는 유관순이란 인물이 갖는 투쟁 이야기를 국내외 안팎 정세, 세계사적 흐름 등등과 제대로 엮어내지 못한 서사의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여, 누군가 3.1 운동과 유관순의 희생을 세계사적 흐름의 의미로 잡아내야 할 때이다.
-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칼럼 본문 중 -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지진ㆍ화산 폭발 같은 천재지변? 전쟁ㆍ테러와 같은 인간의 광기? 살인ㆍ강간ㆍ폭력이 엄습하는 이 사회의 뒷골목? 아니면 끊임없는 청구서와 독촉의 전화? 이런 것들은 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영역에 있거나, 나와는 먼 이야기로 들려 '공포'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워 보인다. 진정 두려운 것은 '상실의 공포'가 아닐까 싶다. 상실에 대해서 여러 정의와 의견이 있겠지만, 상태의 설명으로 이야기하자면 불가항력적이고 복구 불가의 단절, 망실, 손해를 말한다. 더 이상 믿을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상실의 시대'가 온다. 두려움을 넘어 무기력과 자포자기가 이어지는 무서운 상실이 퍼져 버린다.
상실은 여러 형태로 스며든다. 사고나 재해로 인연을 상실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신체나 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중에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잊힘에 생각보다 끔찍한 두려움이다. 우리는 그런 잊히는 두려움을 방지하고자 애쓰고 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우리의 기억에서 자신들의 불리함을 자꾸 지워 버리려고 온갖 방법을 간구한다. 그 방법의 하나가 ’ 공갈‘이다. 이제는 다 잊고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본다고 공갈을 내 세운다. “우리는 진정성으로 무장된 대중이라 소용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공포감은 실로 무섭게 스며들고 만다. 그리고 그 방법 또한 업그레이드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종 변형(異種變形)하여 실체를 느끼기도 이전에 우리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조성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공갈의 위력은 대단함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상실을 예방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아식별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누가 우리에게 이득을 주는 진정한 아군인지 판별부터 앞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모든 혁명의 역사는 처연하고 처절했다. 그러나 그 위에 서 있는 현재의 시간은 그 발버둥을 잊고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 땅 위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자꾸 생각해 내야 한다. 스스로 힘들다면 책을 찾아보고, 영화를 보며, 더 나아가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어 내야 한다. 상실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말이 현실감 있게 들리는 이유다. 생각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잊게 된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결말은 소년과 금단의 사랑을 나누던 한나의 자살로 마무리된다. 그 결말을 보면서 그 이유를 찾아 생각에 잠겼다. 성인이 된 소년 미하엘에 대한 수치심이 일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일들에 대한 참회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화가 다 담아내지 못한 결말의 이유는 원작인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프레모 레비, 엘리 비젤, 타우데스츠 보롭스키, 장 아메리 등 희생자들이 쓴 글, 그 옆에는 루돌프 회스가 쓴 자서전적인 글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그리고 강제수용소에 대한 학술적인 책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것들을 다 읽었나요?‘
“그녀는 적어도 이 책들을 신중히 주문했어요. 나는 몇 해 전에 그녀에게 강제 수용소에 관한 책들의 총목록을 구해 주었어요.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한나가 강제수용소의 여자들, 즉 여자 수감자들과 여자 간수들을 다룬 책들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나는 시대사 연구소에 편지를 써서 그녀의 요구에 맞는 특별 문헌목록을 우송받았어요. 슈미츠 부인은 읽는 법을 배운 뒤로 곧장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어요.”
- 소설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
한나가 전범 재판에서 항변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아는 여자들은 죽었고, 재판받을 때는 이해를 받을 수 없어서라고 스스로 말했다. 문맹자들이 겪는 일종의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처음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읽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대했다. 다만 20살 차이가 나는 소년이 읽어주기 전까지는 그저 종이였던 책의 존재가 본질로 변모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나가 문맹이라는 이유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녀 탓에 죽어 간 죄 없는 여인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글을 읽게 되면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본질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모든 것이 처연하고 처절하게 기록된 책과 활자에서 알게 된 것이다.
문맹은 무지를 대표 상징한다. 본질을 파악하지 못해서,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시간이 지나버려 사실을 파악하지 못해서 제 행동 의미를 모르고 저지른 잘못도 명백하게 죄다. 정치적 행위로 많은 본질이 훼손되었다. 더불어 감정과 정서도 상처받았다. 그렇다고 ‘원위치로’라는 구호는 그저 의미 없는 아우성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주체가 되는 주어가 없다는 지적도 그저 국내용이다. 해법이고 대안이라는 것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앞서야 한다. 그것이 육하원칙에 따라 시간과 주체의 설정이 된 구체적 계획과 행동 지침이 있을 때 비로소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저 느낌으로, 주워들은 말로, 남들의 의견으로 사실과 본질의 역사를 들여다보지 말고 스스로 기억하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할 때다. 더욱 많은 항거와 폭압의 기록이 콘텐츠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노력에 정부와 기득권의 책임감 있는 지원이 절실한 때다.
* 참고: 비즈한국 2017. 8. 13 - [광복절 특집] 일본 전범 기업들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