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모든 것 #04 | 이름은 의미가 담긴 대명사
2주 만에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다. 여러 번 위기를 바꾼 김에 오늘은 다소 가벼운 이야기부터 풀어낼까 한다. 오늘은 조선시대 허균의 한글 소설로 유명한 '홍길동'이야기다. 시험에 나오는 것이니 전 국민이 아는 도둑놈이 되었다.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제법 된다.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 한 도적 때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임꺽정,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놈'으로 유명하다.
'홍길동'은 세대가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그 인기는 여전하다. 인기가 이름을 기억하는 척도라면 말이다. 그 이유는 단지 전래동화처럼 되어 버린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홍길동전>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온갖 관공서 금융기관 등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견본 문서 이름난'의 예시가 늘 '홍길동'이니까.
디지털의 기술이 보급되면서 요즘은 관공서 대면 방문이 적어졌다. 그리고 방문하더라도 신청 양식을 건너뛰어 구두로 민원 신청을 받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 증빙을 남겨야 하는 경우는 신청 양식을 쓰게 되는데, 공공 민원 양식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에게 '홍길동'은 듬직한 챗봇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따라 써 봐요."
홍길동이 이처럼 전 국민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예전 기발한 면서기의 재기 넘치는 민원 업무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엄청난 연구 끝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 그 이유와 논리는 제법 납득이 간다. 나중에 붙인 아전인수격의 해석일지 몰라도 그럴듯하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이름 중'홍길동'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래도 그 이유가 회자되고 있기는 하다. 대략 정리하자면, 이런저런 조건을 만족하는 이름을 찾던 한 공무원이 홍길동전을 보고 무릎을 탁 쳤을 수도 있겠다 싶다.
우선 '성명ㆍ이름'임을 쉽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홍길동전>의 명대사 호형호제가 떠오르는 대목인데, 서얼 출신의 홍길동에게 '이름'은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연유에서 '홍길동'이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지하기 쉽다.
동명이인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전 통계는 조사하기 힘들지만, 2008년~2021년 출생자 중 '길동'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단 5명이다. 홍 씨와 연결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진다. 내 이름이 '견본'이라면 기분이 묘할 수도 있고 놀림감도 되기 쉽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름이기에 '견본'이라는 의미가 직관된다. 이런 이유에서 후손이나 당사자가 항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허구성이 더해진 고전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취했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이미지가 좋다. 이름이 잘 알려진 경우 생각보다 '악명'일 경우가 많다. 범죄자나 역사의 매국노, 독재자, 각종 가십거리의 주인공 등 말이다. 홍길동은 도둑놈인데 의적이라는 이미지가 좋고, 누구나 다 아는데 거부감이 안 든다.
마지막으로 이 지점이 사실 가장 그럴싸한 것인데, 이름 세 글자가 모두 받침이 있다. 한글의 완결이 되는 받침이 있어서 견본으로 따라 쓰기가 쉬어진다. 기입란의 높이와 너비가 도전적으로 좁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견본을 보고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줄 수도 있다. 내 이름도 만만치 않기에 더욱 공감이 된다. 박. 철. 웅. 꽉 꽉 채운다.
'견본 이름'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존 도(John Doe) / 제인 도(Jane Doe) 나 존 스미스(John Smith), 조 형제들(Joe Bloggs, Joe Public)등이 있다. 미국에서는 John Q. Public, Joe Blow 등이 많이 쓰인다.
'핸콕(Hancock)'도 비슷하게 쓰이는 이름이다. 유래는 다소 엉뚱하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정치인들이 서명할 때, 유독 크게 서명한 정치인이 '존 핸콕'이어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냥 견본이 아니라 '자필 서명'을 대신하는 대명사처럼 쓰인 것이다. 2008년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핸콕〉의 제목도 이런 이유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이 기억이 상실되었을 때 서명란의 견본인 '핸콕'을 그대로 써서 이름이 되어버렸다. 역시 망나니 슈퍼히어로의 에피소드 다운 설정이다.
대영제국 시대 영국군에서 가장 흔한 Tommy Atkins라는 이름은 '영국 군인'이라는 관용어가 된 시절이 있다. 일본에서는 야마다 타로(山田太郎), 야마다 하나코(山田花子)가 비슷하게 쓰이는 이름이라고 한다. 세계는 이미 하나로 통하는 관성이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그 기류가 좀 바뀌었다. 공공기관 외에 은행이나 증권사 등에서는 다른 인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민은행 전 국민, 신한은행 김신한, 그리고 김신용, 김 뱅크 등 너무나도 직관적인 대체제가 나온 바 있다. 카카오에서는 라이언, 어피치 등 자사의 3글자 캐릭터 이름을 사용하곤 한다. 예전 뉴스에 일부 지역의 관공서에서 '홍길동' 대신 배우 '박보검'을 쓴 일도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름은 흔히 '고유명사'로 치부된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들으면 욕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모든 이름은 '대명사'가 아닐까 싶다. 이름이 나를 고유하게 군 분해 주는 유일한 식별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동명이인이나 기타 유사 발음 등 고유식별자라고 하기엔 유예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식별자(ID)를 가지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메일 아이디, 각종 시스템 아이디, 온라인 닉네임, 그린고 필명, 예명 등. 이제는 '이름'이라는 것은 '고유함'을 담보하지 못한다. 오히려 주민번호, 학번, 군번, 면허번호 등이 유일한 '나'를 식별하는데 더 효과적인 시대가 되었다.
이름 깃든 여러 함의는 그저 활자로 표시되는 세 글자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평생 나를 부르고, 불러 세우고, 다시 뛰게 만든 그 이름 석자엔 인생의 주름이 로그로 쌓여 있을 것이니까. 엄마가 밥때를 알리며 부르는 이름, 이젠 실제 하지 않아 만질 수 없는 망자의 이름, 각 잡아 앉은 내무반에 부는 숨결 하나에 우렁차게 외치는 관등성명 속의 이름은 디지털식 표기로 매 한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시간의, 그 공간의 기억과 의미가 깃든 아날로그의 이름은 같은 모양일 수 없으니까.
홍길동이 살아서 호형호제도 못했던 설움은 후대의 대표적인 대명사가 되어 한을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얼이라는 가장 비천한 사람이었고, 도둑이라는 쉽게 인정하지 못할 일을 한 역적이었다. 그런 인물이 관공서와 기관의 견본 대명사가 되었다니. 그 시작이 어찌 되었든 우리들 가슴에는 한발 나가는 마음이 늘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