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에는 규칙이 있다
띄어쓰기는
독서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바꾸면서,
독자들의 지적 능력을 바꾸어놓았다.
이는 지적 능력이 평범한 독자들도
더 빨리 읽고,
점차 더 어려운 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띄어쓰기 덕분에)
독자들은 단지 독서에 능숙해졌을 뿐 아니
집중력도 더 좋아졌다.
여기에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깊이 읽기'라고 부르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니콜라스 카 <The Shallows>-
니콜라스 카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띄어쓰기 하나가 이런 의미와 기능이 있다. 띄어쓰기는 문서는 읽기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명을 진행, 유지라는 장치ㆍ기계가 되는 인문의 발명품이다. 기계라는 것이, 장치라는 것이 정밀하게 동작하지 않으면 일의 진행과 유지에 지장을 가져올 수 있다. 잘못 작동된 장치의 운영은 문명의 변형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띄어쓰기를 지켜가며 글을 쓰는 행위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정보의 홍수시대에 띄어쓰기가 효율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보았다. 일견 주장의 논거는 이해가 가지만, 동조는 어려운 부분이다. 글쓰기를 할 때, 띄어쓰기뿐 아니라 문단의 나눔, 문장부호의 사용은 문자 외의 또 다른 유의미의 공간을 제공한다 믿는다.
최근 잡지를 보다 보면, 글 인쇄의 뭉터기를 하나의 오브제로 인식하고, 시각적인 힙함과 엣지를 부여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지점에서 줄 바꾸기가 된 경우가 있다. 문단의 나눔이야 편집자의 의도라 생각할 수 있어도 서술부를 수식하는 부사구 다음에 행을 바꾸고, 보조 동사나 보어를 나누어 놓기도 일쑤다.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읽을 맛이 떨어진다.
문자가 주는 정보의 작동 방식에 대한 깊은 고찰과 탐구가 아직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와 문장은 멋대로, 함부로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서와 문건을 이루는 각기 하나의 편집소들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공부는 그래서 아직 유효하다. 이런 공부와 고찰을 '편집의 인문학'이라고 한다. 가독력과 문해력이 떨어지는 미래세대가 속출하는 오늘날, 출판, 미디어, 언론, 그리고 글을 나르는 콘텐츠 플랫폼에게 시급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좋은 글은 말하기처럼 읽히는 글이라 생각하는 입장에서, 띄어쓰기는 말하기의 호흡을 전달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띄어쓰기 없는 문장은 쉼표 없는 랩처럼 들리지 않을까?
사정상 액정 깨진 핸드폰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사정에서는 띄어쓰기는 맞춤법과 함께 늘 트라우마다. 손가락이 두꺼워 나는 오타야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지만, 띄어쓰기를 플랫폼 검사기에서 검사하고 올리곤 한다. 매번 틀리는 것은 오답노트 소용없이 타임루프 타듯 반복이고, 가끔 맞춤법 검사기가 이랬다 저랬다 하기도 하여 서로 씨름하기도 다반사다.
라틴어는 그 쓰임새가 실용에서 멀어지면서 띄어쓰기와 구둣점을 발생, 진화시켰다. 더 이상 구어 쓰임이 없어지고 문어로만 남게 되자, 라틴어 성경의 인쇄 보급을 위해 띄어쓰기가 발명되었다니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경우가 이야기해 주듯 '쓰고 읽는' 문어의 세계에서 띄어쓰기는 매우 유용하다. 이는 각 형태소의 자립을 내포해 단어와 서술의 쓰임을 뜻깊게 만들어 준다. 통시적, 규범적 문제를 떠나 난해하지만 그 쓰임새가 있는 띄어쓰기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띄어쓰기, 보조적 도구가 진일보하기를 기대한다. 이글에도 여전히 띄어쓰기 오류는 넘쳐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