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저널리즘, 그리고 글쓰기
사진과 카메라를 좋아하시던 부친의 영향으로 사진과 사진 찍기는 제법 익숙한 것이 되었다. 파견 근로자였던 부친의 휴가 귀국길에는 늘 새로운 사진 장비들이 함께 했다. 제대 후 이리저리 환영받지 못했던 복학생 시절 학보사 인화 암실에서 쪽잠으로 숙취를 풀어내던 기억도 있다. 덱톨이랑 폴리맥스 같은 인화약품이 가변지를 만나 풍기는 특유의 냄새까지 기억에 깊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 성인이 되어서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좀처럼 카메라를 잡지는 않았다. 일종의 애증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진'이라는 것은 기억 속의 애증뿐 아니라, 사진의 앞 뒷면처럼 확연한 '양면성'이 존재한다. 사진에는 의도와 느낌이라는 포커싱과 프레임에 대한 양면이 존재한다. 보도와 사실의 전파, 기억의 기록이라는 의도로 프레임을 설정하고, 동시에 당시의 분위기, 감정, 그리고 공감과 동조라는 감정의 포커스를 피사체에 맞추게 되니까. 그 의도와 감정이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나중에 사진을 보는 타인들의 다른 해석을 낳기도 하는 이유에서 그러하다.
또 한 가지의 양면은 바로 질문과 대답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어떤 사건과 순간의 실마리를 찾는 답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선입견과 편견의 일반화를 흔드는 날카로운 질문이 되기도 한다. 보도 사진은 그날의 쟁점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의도치 않게 앵글에 걸린 다른 피사체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위의 사진은 유명한 LIFE지의 전속 작가 존 로엔가드가 찍은 것인데, '미국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라는 사실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그의 방문을 보러 모여든 군중의 모습을 한 프레임에 담아 '독일인들은 어떤 생각일까?'라는 질문을 함께 던져 주고 있다. 물론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담은 로버트 카파의 '쓰러지는 병사'에 대한 연출 논란과 달착륙 사진에 대한 논란 등, 또 다른 의미의 후속 질문도 일으키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진은 직관적이라는 것과 비유적이라는 것의 양면이 있다. 이는 위의 의도와 감정에서 비롯된 파생 양가적 평가일 수도 있지만, 사진, 특히 보도 저널리즘 사진에는 직관적이고 무미건조한 객관성이라는 보도 준칙 같은 양상과 다양한 앵글과 풍성한 콘트라스로 작품 사진에 준하는 은유적, 직유적 의미를 전달하는 경향이 공존한다. 우리나라는 전자의 것이 대세라면 LIFE 지 등의 해외의 경우는 후자의 것들도 다수로 관찰된다.
개인적인 생각은 '비유적이면 어떻고 직관적이면 어때'라는 입장이다. 일전에 핀트와 포커스를 이야기하면서 사진과 저널리즘 글쓰기를 비유하여 어느 블로그에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 사진이 되기 위해 빛 반사로 거울상에 맺히는 순간, 글을 쓰기 위해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글자를 만드는 순간, '사실'은 작가의 주관적인 의도와 주장이 되는 것이니까.
사진은 '실사'라는 착시가 있습니다.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마그네틱 저장 필름에 거울 상을 통해 기록하는 것인데, 인화를 거치면 '사실'로 인지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사진은 '실제'가 아닙니다. 사실에 가까운 기록일 뿐이지요. 사진을 찍는 촬영자의 의도와 생각, 그리고 여건이 만들어 내는 작은 변형과 왜곡들이 숨어 있는 기록의 결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찍기는 글쓰기와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에서 피사체가 되는 대상을 고르고, 작가의 의도 방향에 맞추어 구도를 짜고, 깊이와 무게를 위해 노출과 심도를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포커싱을 합니다. 글쓰기도 그러하지요. 글의 소재와 글감을 골라내어, 어떤 형식으로, 구조로 담을지 생각한 후, 그 대상의 묘사, 설명, 논평, 감상을 맞추어 가니까요. 구도, 노출, 포커스 중 가장 많은 물리적 에너지와 시간은 '포커스'에 쓰기 마련이지요. 렌즈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고, 한발 두발 재어 가며 표현하고 싶은 대상이 최대한 '사실'인 듯하게 잡아 내는 일, 글쓰기에서 상세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논거와 분석이 그러한 작업이 됩니다.
-블로그 게시글 <핀트와 포커스> 본문 중-
그동안 봐온 보도 사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 근래에 있었다.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었다. 바로 2016년 11월 23일의 보도 사진이다.
2016년 11월 2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지금의 대통령실 자리)에서 한일 정보보호협정 서명하기 위해 입장하는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 주위로 사진기자들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취재거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날 국방부 공보과에서 한일 정보보호협정 취재 공개를 요구하는 사진기자들에게 협정을 공개할 수 없다고 하자, 기자들의 항의가 거세어졌다. 마치 절대 권력인 듯 국방부 측이 찍은 협정 사진조차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에 사진기자들은 협정이 밀약이지 않은 이상 비공개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 취재거부를 결정하고 위와 같은 단체 행동을 하고, 역사에 기록하기 위해 현장을 담은 사진을 남겼다.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진이 의미하는 이야기를 읽어 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당시 신선하고 소름 돋는 감정도 일곤 했다. 공정과 상식을 위한 아주 '직접적'인 날 것의 촬영인데도 한 바닥 풀이가 가능할 정도의 이야기와 질문, 그리고 답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의 기술이 문제도 아니고, 데스크의 킬이라는 현실적인 제한도 사실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보도 사진은 질문이 없었다. 무리하게 답을 쫓고 있지 않았나 싶다. 데스크가 원하는 답, 네티즌이 클릭하는 답, 그리고 내게 이익이 되는 답.
사진의 힘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하는 힘, 그리고 답을 찾아내는 힘 말이다. 예술성 높은 은유적 프레임에 강한 콘트라스, 그리고 극적 연출이 없어도, 사실을 그대로 전하려는 사진 기자의 '한 발 다가선 줌 인'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사진 기자들 사이에서 질문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맞는 일인가? 옳은 일인가?'라고. 그 질문에 답을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생각한다.
저널리즘의 어원이 라틴어의 'diurna(나날의 간행물)'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날마다의 이야기가 저널리즘인 것이다. 바로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에도 이어 질 듯 하지만 지속되어야 하는 우리 범인(凡人), 아주 작은 시민들의 일상다반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전문가'는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범인'들이 아닐까?
2011년부터 어쩌다 정치의 일을 어쩌다 공무의 일을 잠시 했다. 그 시작이 어느 돈 없는 시민 후보, 초보 정치인을 위한 '사진 봉사자'였다. 중저가의 카메라 두어 대를 짊어지고 그 기적 같은 여정을 함께 했다. 그 길 위에서 평생 철도 노동자로 살아온 형님에게 정치적 의미의 사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엄청난 기술적 이론도 아니고, 거대한 정치 담론의 해석도 없었다. 그 형님의 주문은 단 한 가지 '피사체를 사랑해라'였다.
그래서, 남들보다 짧은 단렌즈로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서 촬영하다 보니 제 사진이 바뀌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피사체가 정치인, 정치 셀럽, 연단의 사람들, 참석 주요 인사에서 단상 아랫사람들, 손뼉 치고 노래하는 무리들, 무등 태운 가족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취재하고 기록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사진 이야기 덕분에 글쓰기를 다시 반성하게 되었다. 플랫폼 보상에, 공모 당선에, 쉬운 출간에 눈이 멀어, 눈에 띄기 위한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보니 원래 잘 아는 이야기, 잘하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을 이야기를 저버리고 있었다. 질문도 하지 않은 채, 답만 구하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2011~2017 서울의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