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의 꼴값론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오늘도 몸 뉘일 곳을 찾아 길을 헤매다 보니 더 깊게 깨닫게 되었다.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1952-2023)가 지난해 3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다. 뉴에이지류의 음악은 기피하는 편이다. 이유는 ‘기청감’ 때문이다. 데자뷔가 기시감이라면 기청감은 무언가 들어봤음 직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뉴에이지 거장들의 음악은 무드와 안정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지만, 솔직히 ‘오롯한 특성’을 느끼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런 연장선에서 잘 듣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동양판이라며 극찬하기도 하지만, 롤랑 조폐의 <미션, 1986>에 등장하는 ‘가브리엘의 오버에’의 감동을 주기에는 간발의 못 미침이 있다고 생각한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기어이 아카데미를 쥐게 된 2015년의 명작 <레버넌트>에서의 음악은 화면이 담아낸 이야기와 풍광을 압도하거나 감싸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도 그 영화에 담긴 음악은 ‘인간의 체념’이 만든 ‘사소한 희망’이라는 의미 전달은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호불호가 있을 뿐 대단한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말과 글은 힘이 있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나라는 인간은 혁명가도 아니고, 세계를 바꾼 것도 아니고 음악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닌,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겠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자서전 중-
소인배처럼 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남에 대해 수군거리기 일쑤다. 그러는 동안 선한 사람은 시대와 세상의 아픔을 가지고 온종일 씨름 중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거울에 비추고 한탄하고 괴로워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온갖 혁명과 혁신이라는 것은 주변과 타인의 혁신이 아니라, 결국 자기 변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소위 잘났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들은 타인들의 잘못을 탐지하고 발견하기를 고대한다. 그 잘못을 하나라도 건지면 트집을 보태어 언론, 뉴미디어, SNS에 떠들어 댄다. 자신의 좁은 견해가 정답이며 혜안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 생각들이 모두 ‘잠정성’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와 응원을 고대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일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하며, 그것들의 전시를 커리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진짜 됨됨이가 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남들보다 한숨 더 일찍 일어나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의 거울을 비추어 볼 뿐이다. 이 하루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늘 묵시록의 주인공처럼 하루를 열어 간다. 해가 저물 때면 자기 스스로 생각의 저울에 올려놓고 아침에 생각한 결심들에 대한 아쉬움을 반추하고 아쉬워한다. 이 삶에는 거대한 ‘담론’ 같은 것은 없다. 이 하루에는 그저 소박한 종말론적 다짐만 굳세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런 ‘된 사람’이 몇몇만 있어도 이 세상은 살만해진다고 믿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느님이 디스카운트를 해 준 끝에 선한 사람 예닐곱이 없어서 불기둥을 마주했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이런 된 사람을 찾기는 매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된 사람이란 타인이 평가하여 대단하고 정의로우며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양심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의 자화상 같은 사람이다.
세상에 온통 암울한 뉴스뿐이다. 누구는 죽어 나가고, 어떤 이는 억울해하며, 많은 사람이 하루를 버겁게 보낸다. 이런 세상에 ‘잘난 사람들’만 차고도 넘친다. 모든 일에 잠정적 의견을 들고 들어와 담론이며 혜안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 중에 스스로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자를 찾아볼 수 없다.
보시니 좋았다.
-창세기-
신은 자신의 형상, 모상을 만들어 인간을 창조하였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 속에 신이 간직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의 양심을 담아 주었을 것이다. 이 양심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이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다. 이는 교육이라는 자극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양심의 발견이 곧 혜안이고 깨달음이 된다. 인간은 ‘꼴값을 알고 다할 때’ 자신의 깨우침에 다다른다.
나는 보잘것없지만, 신의 모습이 담긴 꼴값대로 살기를 희망한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글은 그의 삶의 자화상과 같다. 그런 글쓰기가 보잘것없지만 위대한 끄적임이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