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 yang Feb 18. 2019

 망명자의 연인들

<캐롤>의 테레즈와 <대니시 걸>의 게르다가 사랑하는 법




<캐롤>과 <대니시 걸>은 그 제목에서부터 주인공, 혹은 영화 속에서 보다 중심이 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명시하고 있다. 적어도 ‘정치나 사상, 종교 등의 이유로 자기 나라에서 탄압이나 위협을 받는 사람이 이를 피해 다른 나라로 감’이라는 망명의 사전적 정의를 따를 때 영화 속에서 망명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 잃을 게 더 많은 이들. 자신이 속한 곳에서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는 인물인 캐롤과 베게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전의 삶이 제공했던 것들을 기꺼이 던져버린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캐롤과 베게너가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존재감이 워낙 압도적인 탓일까. 두 영화 모두 막상 극의 큰 축을 담당하는 주인공의 심경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자면 이들은 모든 걸-베게너의 경우 말 그대로 목숨까지-잃을 수 있는 위태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건만, 영화는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나 내적 갈등 묘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의외로 두 작품이 공들여 그려내는 건 상대를 속수무책 따라갈 수밖에 없는 테레즈와 게르다의 내적 갈등이다.


이들은 관계에서 시종일관 약자로 그려진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로 가려는-혹은 이미 가 있는-상대의 결정은 야속하게도 연인인 자신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내린 것처럼 보이고, 상대에게 이미 매혹되어버린 이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상대가 내린 결단에 따르는 것뿐. 연인을 이해하고 싶고, 돕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하고 슬퍼하는 그녀들의 혼란에 영화는 초점을 맞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는 주체성을 향한 캐롤과 베게너의 로드무비이자 사랑에 대한 테레즈와 게르다, 즉 ‘호구’들의 성장 영화로 읽히기도 한다.



캐롤과 베게너는 대체로 흔들림 없는 곧은 태도(물론 캐롤은 딸을 잃지 않으려고 잠깐 ‘돌아’갔다 오긴 하지만)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들의 옆을 지키며 바라보는 연인들의 시점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두 사람이 온전한 자신을 찾기 위해 망명을 떠난다면, 테레즈와 게르다는 자신을 매료시킨 연인을 ‘따라가기’를 택하는 쪽이다. 테레즈는 “함께 갈래요?” 라는 캐롤의 제안에 주저 없이 직장과 약혼자를 내팽개치고 그녀를 따라가고, 게르다는 “어떻게 당신을 해치는 일을 내가 도울 수 있겠냐”면서도 결국 베게너를 죽일 수도 있는 수술을 위해 독일로 향한다.


연인이 가는 곳이라면 사실은 어디든 상관이 없었기에, 두 사람의 동행은 일견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테레즈는 거절을 못하고 점심 메뉴조차 선뜻 정하지 못하는 캐릭터로, 게르다는 남편보다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초조해하며 아기를 원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러나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면서, 게르다는 베게너를 보내고 릴리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여러 의미로 변해간다. 풍경 사진만 찍던 테레즈는 사람들을 찍기 시작하고 신문사에 취업하며, 게르다는 릴리를 그리면서 작가로서 성공한다. 직업적인 성장보다 더 근원적인 건 물론 그들의 내면적 성장이다. 한 번도 상대를 거절하지 못하던 테레즈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고, 게르다는 베게너를 릴리로 인정하고 해방시켜줌으로써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로 날려버린 스카프처럼 그 자신도 해방된다.



캐롤과 베게너를 그저 이기적인 존재로 치부하기 어렵듯이, 테레즈와 게르다의 사랑이 수동적이라고 단언하는 것 역시 석연치 않은 일이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담론이 있어왔지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세나 태도를 사랑의 한 정석적인 방법이라 하자. 굳이 권위자의 말을 빌려오자면 “사랑은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문장이 아닌 수행문이다,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혁명이다.”라는 알랭 바디우의 멋진 문장이 있다. 사랑한다는 선언을 수락한 순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기 위해 자신의 호흡법을 바꾼다. 테레즈와 게르다의 이러한 변화야말로 캐롤과 베게너보다 한수 위의 사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더 많이 변하고, 더 많이 내어준 쪽이 관계의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견딜 수 없어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 만했는데도’ 상대와 함께하기 위해 현재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이 될 각오로 망명길을 따라간 것이니 말이다. 테레즈와 게르다 두 사람의 위기는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혹은 사고)처럼 닥쳤으나, 자신이 한계 지웠던 지점을 뛰어넘고 극복해냄으로써 그들은 확장되고 깊어진다. 시작은 불가항력적이나 끝은 자신이 선택한 셈이다. 호구면 어떠하고 을이면 어떠한가. 그럴 마음이 생기는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통해 기꺼이 자신이 변화를 인정하고 깊어진다면 그 자체로 기적과 같은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세상의 호구들이여, 억울해하지 말라. God bless you!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