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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마 Jan 21. 2020

그 정도 반가움으로 헤어졌다

텍사스 출신 햄버거 직원





황급히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13미터. 나쁘지 않네. 나는 짐을 끌고 역전을 나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독일 날씨 안 좋은 편인데. 네가 운이 좋았나보다.


독일에서 유학하는 친구의 말을 들은 지 3시간 만에 드레스덴에서의 첫 지출로 €5.95짜리 자동 우산을 선택했다. 그래 원래 이렇구나. 덥다며 난리인 한국 친구들의 카톡을 뒤로한 채, 나는 패딩과 코트를 입을 사람들을 뚫고 숙소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인상이 무척 좋았다. 서글서글한 억양으로 내게 어떻게 오게 됐고 얼마나 머물지를 물었다. 으레 하는 질문이었겠지만, 낯선 땅에 떨어진 여행객에게 그 말들은 하나하나 위로가 된다. 마치 따뜻한 수프를 대접받은 것처럼, 빗속에 젖은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방은 3층이었다.

헉헉대면서 짐을 옮기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마주했다. 낡은 라디에이터 위로 네모나게 자연을 뚫은 모습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필름을 소모할지, 벌써 머릿속에 그려졌다.


6인실 숙소는 무척 넓었다. 이 정도면 천국이지. 짐을 풀 최적의 베드를 고르기 위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하나 둘 셋. 세로로 기다란 두 개의 창문 아래로 그런데, 침대는 세 개 밖에 없었다. 


설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벽처럼 정체를 순긴, 간이 문 하나가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열자 거기 천국이 펼쳐졌다.





3인실 같은 6인실이라니. 나는 곧장 침대로 골인했다. 아무도 없이 이렇게, 계속 혼자 있고 싶었다. 


내 바람과 달리 하룻밤을 같이 보낼 친근한 룸메이트들이 뒤이어 들어왔다. 나는 중년의 중국인 여성과, 브라질에서 태어나 지금은 박사 학위를 위해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로라와 테이블에 앉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며 여독을 풀었다.






오늘은 뭐 할까. 



별다른 계획 없으니까 그냥 걸었다. 걸어 걸어 시내까지 나왔다.





"드레스덴 진짜 좋다."


도시는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건물을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2차 대전의 총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아팠지만, 도시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는 명확했다. 구글 지도가 오페라 하우스, 아트 갤러리라고 말한 건물들을 무시하고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갔다. 해외여행 중에는 배만 부르면 다야, 라는 신조를 갖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수고한 뱃살에게 기름진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한스 임 글뤽




인터넷에서 보았던 맛집, 한스 임 글뤽(Hans Im Gluck-burger grill). 알고보니 프랜차이즈였다.


나는 일단 점심 세트를 시켰다. 이곳은 마치 맥도널드의 점심메뉴처럼, €12.80면 버거에 감자튀김 + 식후 뜨거운 음료까지 한꺼번에 즐길 수 있었다. 바비큐 소스 베이스의 "Wild Western" 버거와 맥주를 주문했다. 먼저 나온 필스너 드래프트 맥주의 맛이란. 기가 막혔다.


왁자지껄 일행과의 수다로 시끄러운 식당에서, 홀로 여유를 만끽한 후에야 €15를 꺼냈다. 내 테이블을 맡은 직원에게 돈을 건네며 근처에 추천해줄 만한 카페를 물었다. 독일에서는 5%면 된다던데. 질문 하나쯤은 던질 수 있는 팁 아닐까, 그런 소심한 합리화를 하며.





그녀가 먼저 물었다.


"여기는 공부하러 온 거야?"

"아니. 여행 왔어. 공부는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했었어."

"신기하다. 나는 텍사스 출신이야."


어쩐지 서비스가 어마어마했다. 놀란 표정을 지은 그녀는 이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카페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를 추천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가게를 나왔다. "미국"이라는 아주 작은 공통분모로 국적이 다른 둘이 반갑게 인사했지만, 바로 이별했다. 다시는 못 만날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정도 친밀도로 헤어졌다.




크로이츠 교회




버거 집을 나와 크로이츠 교회 앞에 섰다. 성당은 절 다음으로 좋아한다. 높은 천장과 순백한 공간. 돈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는 이곳에서도 나는 초를 켰다. 내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켜있길 바라며.


근데 소원을 빌다가 울 뻔한 이유는 뭘까.





가톨릭 궁전 교회




다리가 아파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은 5시. 대부분의 장소가 6시에 문을 닫았고, 하나라도 더 보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결국 숙소 돌아가는 길에 있는 가톨릭 궁전 교회를 마지막으로 들렸다. 벽에 붙은 전단지를 읽어보니,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오르간 연주회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 머무는 5일 중에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5시 56분. 성당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놓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bruche) 다리. 나는 몇 번이나 이 다리를 오갈까. 빗물 어린 날씨에 외투의 품을 움켜쥐는데 종소리가 울렸다. 나를 포함한 모든 길거리의 사람들이 뒤돌아봤다. 드레스덴에 뿌리를 내린 성당들이 6시를 알렸다. 동서남북 어디서든 일제히, 댕댕.


자꾸만 뒤돌아봤다. 여전히 공사 중인 다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보행을 막아둔 붉은색 바리케이드. 자전거가 빗물을 가르고 아이들이 꺄르륵 집으로 사라질 때까지, 종소리는 끝을 모르고 계속 울었다.



그 시간 동안 종일, 나는 검은 사제들의 ost를 들었다. 숙소에 옷을 집어던지고 바로 소설을 썼다.






그렇게 쓰인 소설이 <유럽 단편집>에 실렸던 두 번째 소설 취향」입니다. 아래에 소설이 쓰인 과정을 써둔 글의 링크 함께 걸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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